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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환의 심판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6 ㅣ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재판은 거짓말의 경연장이다"(11).
첫 문장부터 빨려 들어가는 책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지금까지 내 머릿 속에 각인된 첫 문장은 이렇게 단 두 권뿐이었다. 그리고 이 책, <탐환의 심판>이 그 세 번째 책이 되었다.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첫 문장부터 강렬하다. 그리고 빠른 호흡으로 이어지는 단순한 문장들이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재판장은 거짓말의 경연장"이라는 이 대단한 아이러니를, 아이러니인지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이야기에 빨려 들어간다면, 작가의 페이스에 제대로 말려든 것이다. '법'과 '재판'이라는 대단한 제도를 만들어낸 인간은 스스로 그 대단한 제도를 타락시키고 있고, 이제는 누구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을 만큼 당연한 것이 되었다는 사실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채 우리도 그 재판장에 앉아 있는 꼴이다. 언제부터 재판장은 거짓말의 경연장이 되었는가 말이다.

작가 마이클 코넬리의 명성이 대단한데, 나는 이 작가와의 만남이 처음이다. 그러니 전작들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의 명성이 거품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해보인다. <탄환의 심판>을 읽으며 가장 감탄한 부분은 바로 재판정의 '리얼'함이었다. 극적이고, 연극적인 과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벌거벗겨진 재판정의 속살을 구석구석까지 훑어본 느낌이다. 몇 년 전, 실제로 재판이 진행되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있다. 서슬퍼런 검사가 죄상을 밝히고, 스마트해 보이는 변호사가 멋진 변론을 펼칠 것이라는 기대감이 가득했는데, 실제로 본 재판정의 모습은 실망 그 자체였다. 평범한 회사원처럼 보이는 검사는 국어책을 읽듯 미리 적어온 원고를 줄줄 읽어내려갔고, 밤새 한 잔 하시고 술이 덜 깬 상태로 나타난 듯한 변호사도 미리 준비한 원고를 그저 읽어댈 뿐이었다. 극적인 호흡도 없고, 연극적인 과정도 없는, 한마디로 긴장감 제로의 상황. 그때부터 법정 드라마나 영화를 불신하는 버릇이 생겼다. 저건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쇼'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탄환의 심판>은 다시 그 선입견을 뒤집어 놓았다.
<탄환의 심판>은 '제리 빈센트'라는 변호사의 죽음으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약물 중독으로 잠시 법조계를 떠나 있었던 미키 할러(변호사)는 살해당한 제리 빈세트를 대신해 법정의 부름을 받는다. 제리 빈세트가 맡고 있던 모든 사건을 그가 떠맡게 된 것이다. 그중에는 거물이 관련된 엄청난 사건도 한 건 포함되어 있었다. 모든 사람이 미키 할러에게 찾아온 행운 축하하며, 미키도 의욕적으로 일을 시작하지만, 그는 곧 깨닫게 된다. 자신은 이미 마련된 각본 속에서 각본대로 움직여줄 장기판의 졸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이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나는 모종의 게임에 걸려든 셈이었지만, 적어도 이제는 그것이 게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건 내게 유리한 점이었다. 이제 이것을 나의 게임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219).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된 영화계의 거물, 정치적인 출세욕을 불태우는 검사, 돈 되는 일이 중요한 변호사,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다. 상대의 주장을 무너뜨릴 증거가 있느냐 하는 것과, 그것으로 배심원들을 움직여 승리를 얻어낸 것, 그것만이 중요하다. 영화계의 거물은 월터 엘리엇. 검사는 그에게 범죄(살해)의 동기와 기회가 모두 있었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러나 미키 할러 변호사는 엘리엇에게 불리한 증거들은 상당히 희박하며, 정황증거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제가 할 일은 연기가 솔솔 나는 건 분명한데 실제로 총이 발사되지는 않았다는 걸 배심원들에게 이해시킬 방법을 찾아내는 겁니다. 제가 그 방법을 찾아내면, 월터 씨는 무죄로 걸어 나올 수 있습니다"(179).
미키 할러는 월터가 무죄일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가 무죄라고 믿는 것은 아니다. "죄가 없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때로는 무고한 사람들이 유죄판결을 받기도 하니까요. 모든 사람이 속으로는 그 사람이 무고하다는 걸 알고 있어도 말입니다"(180). 변호사에게 필요한 것은 그가 무죄라는 확신이 아니라, 검사가 내놓을 주장에 대응할 증인을 확보하는 것과, 반대심문 계획, 알리바이, 월터 대신 내세울 용의자, 검사 쪽 주장 대신 내세울 사건 해석, 다시 말해 변호 계획이다.
"나는 '마법의 총알'이라는 표현을 알고 있었다. 당신을 감옥에 꺼내서 집으로 돌아가게 해 줄 카드라는 뜻이었다. 모든 증거들을 도미노처럼 무너뜨리거나, 아니면 모든 배심원들의 마음에 합리적인 의심을 확고하고 영속적으로 심어 줄 증거나 증인을 뒷주머니에 숨기고 있다는 뜻"(184).
부인과 그의 내연남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월터는 정말 무죄일까? 그의 변호사 제리 빈센트는 왜 죽임을 당한 걸까? 월터는 왜 재판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할까봐 그렇게 안달을 할까? 보슈 형사가 포착한 '뇌물'의 흔적은 월터의 사건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을까? 이 매력적인 변호사 미키 할러가 찾아낸 '마법의 총알'은 무엇인가? 어찌 보면 얽혀 있는 거미줄이 일직선으로 풀려나가는 과정이 기대보다 싱겁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러 의문의 거미줄을 가지고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우리는 (적어도 미국) 법정의 '현실'과 재판의 실제, 그리고 제도적 허점을 참으로 '리얼하게' 엿볼 수 있다. 극적인 요소보다 바로 그 '리얼'함이 나에게는 더 극적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법과 붙어다니는 개념의 짝은 '정의'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법이 아니라, 누군가의 '양심'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경찰의, 변호사의, 증인의, 피해자의, 판사의, 배심원의 양심 말이다. 누군가는 "당신의 윤리와 규칙으로는 탄환을 막을 수 없어, 할러"(306)라고 단언했지만, 이제까지는 무고한 사람보다 죄 지은 사람의 변호가 전문이었던 미키 힐러의 양심이 아프게 깨어나는 순간 우리는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의 제목은 <탄환의 심판>이다. 이 책에 '총알 평결'이라는 말이 나온다. "옛날에 내가 순찰차를 타던 시절에, 거리의 인간들이 자기들끼리 정의를 실현하려고 사람을 죽이는 사건을 뭐라고 불렀는지 아시요?"(540) 이것이 바로 "총알 평결"이라는 것이다.
세상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가진 자의 것이 되어간다. 법정은 '거짓말의 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무 이의 없이 받아들이며 당연하게 여기는 지경이 되었다. 죄를 짓고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 죄를 짓지 않고도 무서워 하는 사람들, 도대체 이런 현실을 부끄러워 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무자비한 폭력을 막고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세워진 법조계가 스스로의 논리로 스스로를 계속 타락시켜간다면, 그들이 원래 막으려 했던 무자비한 폭력이 역으로 그들을 심판하게 되리라는 것, 그것이 바로 총알 평결에 숨겨진, 그리고 <탄환의 심판>에 숨은 뜻이 아닐까.
"제가 만나 본 사람들 중에 정말로 무고한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사법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까 봐, 죄인은 잘 찾아내도 무고한 사람은 잘 찾아내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어요"(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