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비전 매핑 - 사도행전의 지평을 여는 여행
이동원 지음 / 두란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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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하나님 나라를 꿈꾸다!

 

 

사도행전의 이야기만큼 제 가슴을 뛰게 하는 메시지도 없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꿈, 그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어떻게 이루어져나가는지 읽을 때마다 거세게 팔닥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루어내고야 마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고, 복음 하나 들고 열방을 향해 뛰쳐 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그들의 목숨 건 도전이 역사를 타고 흘러오면서 이 땅에, 저에게까지 와서 닿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전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의 그 많은 역사서에 비해 신약성경의 역사서는 사복음서를 제외하고 이 사도행전 하나뿐이라는 사실과, 그 역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동원 목사님은 이 책의 마지막 장 제목을 '너의 믿음을 사도행전 29장에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은 28장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마지막 구절을 가리켜 학자들은 '오픈 엔딩'(open ending)이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행전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287). 첫 제자들의 바통을 이제 우리가 이어받았고, 사도행전 29장을 기록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으며, 적어도 2012년은 우리가 맡아야 할 역사임이 충격처럼 깨달아져 옵니다. 이동원 목사님이 "우리의 사도행전 29장을 위해 우리의 주인 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 삶을 후회 없이 헌신하고 순종"하자고 하실 때, 한 세대를 책임지셨고, 우리에게 귀중한 신앙 유산을 남겨주신 이동원 목사님이 지구촌 담임목자의 여행을 마무리하며 그 바통을 다음 세대인 우리에게 넘기며 남겨주신 고별사인 듯하여 울컥 눈물도 났습니다.

 

<하나님 나라 비전 매핑>은 사도행전 강해서지만, 한 목회자가 평생 꾸어온 꿈이며, 붙들려온 꿈이기도 합니다. 그 목자와 함께 하나님 나라에 헌신한 사람들의 기록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비전 매핑>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십자가 사건 이후 꿈을 잃어버린 제자들의 꿈이 다시 부활하게 된 현장에서 시작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놀랍게도 하나님 나라의 꿈"(11)을 말씀하셨고, "세계 복음화의 비전 맵(map)을 보여" 주셨습니다(13).

 

<하나님 나라 비전 매핑>을 읽으며 하나님 나라의 꿈을 다시 꾸고 있습니다. 보이는 영광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마음이 다시 회복됨을 느낍니다. 지쳐 있었던 마음에 다시 활력이 생기고, 상처난 가슴에 새 살이 돋아나며, 신음하고 있던 영혼에 생기가 불어옴을 느낍니다. 그동안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달린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한 내 열심에만 집중했던 잘못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나라 비전 매핑>에 내게 들려준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바로 '순종'이라는 한 단어입니다. 이동원 목사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 주님의 핵심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 바로 복음 전도입니다. (...) 여기서 '증인'이란 단어는 순교적 증인이라는 의미입니다. 곧 목숨 걸고 우리가 만나고 보고 듣고 경험한 그리스도를 증거하라는 것입니다"(15). 아무리 열정이 뜨겁고, 각오가 대단해도 '순종'이라는 한 단어를 놓치면 소용이 없구나 하는 것을 무섭게 깨닫습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를 가능케 했던 성령의 권능 역시 순종하는 자리,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 나타났음이 이제야 확실하게 보입니다. "누가 성령 충만을 받습니까? 순종하는 제자들입니다. 주께서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하면 머물고, 모이라고 하면 모였습니다. 주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26). 그동안 숱하게 읽어왔던 사도행전 5장 32절의 말씀이 전혀 새롭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 5:32). 순종, 그것이 바로 가장 정확한 이정표라는 사실을 새롭게 마음에 새기려 합니다.

 

<하나님 나라 비전 매핑>에서도 지적하듯이 "오늘날 우리나라는 전도가 후퇴하는 시절을 살고 있습니다." 은과 금은 없었지만 예수의 이름이 있었던 초대 교회를 보며, 은과 금은 가지고 있지만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잃어버린 교회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심각하게 점검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위대한 교회는 은과 금이 남아도는 교회가 아니라, 전도와 선교를 위해 모든 은과 금을 속히 처분하고 스스로 가난해지는 교회입니다. 다만 예수의 이름이 가득한 교회, 이것이 우리 한국 교회의 미래가 되어야 합니다"(53) 외치는 메시지가 아프게 와닿았습니다.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사도행전을 다시 읽을 때이며,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백성 모두 더 늦기 전에 이 메시지 앞에 기도의 무릎으로, 회개하는 심령으로 나아와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 나라 비전 매핑>은 우리 모두가 전도와 사랑에 빚진 자이며,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자명을 가진 자임을 다시 깨닫게 해줍니다. 이동원 목사님은 이 책을 "열다섯 차례 이상 이스라엘과 터기, 그리스의 성지 순례"을 하며 발로 쓴 책이라고 고백합니다. 책을 읽기 전에는 함께 성지순례를 떠나는 심정으로, 첫 제자들이 밟았던 복음의 루트를 생생하게 지도 위를 걷듯 생생하게 따라 갈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비전 매핑>은 성지순례의 '현장'적인 느낌보다, '설교'적인 느낌이 더 강하게 와닿습니다. 날 것의 정보를 전달하지 않고 메시지 안에 정보가 녹아 있어 그렇다 생각합니다.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지만, 그때 그 현장에 초점을 맞춘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 나의 삶을 자리에 초점을 맞춰 선포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현재 진행형으로 다가옵니다. 언제나 그렇듯 심령을 울리는 이동원 목사님을 통해 사도행전을 다시 읽을 수 있어서 좋았고, 그 메시지가 제 안에 강력한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이 지도를 결코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이 지도를 따라가겠다고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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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곶의 찻집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샘터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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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두근두근, 여기 있어."

 

 

시인은 "그 섬에 가고 싶다"고 노래했다.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섬. <무지개 곶의 찻집>을 읽은 내 마음은 이 찻집에 가고 싶다고 노래한다. 아주 먼 곳이여도 이런 찻집 하나 있어주면 좋겠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고, 꿈과 꿈을 이어주는 찻집.

 

설마 이런 곳에 찻집이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 곳에 찻집이 하나 있다. 곶에 있어 이름도 곶이다. "멀리 벼랑 아래에서 바다 냄새를 품은 바닷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곶에 운치 있는 작은 목조 건물로 지어진 카페에는 맛있는 커피와 음악이 있고, 한 여인이 있다. 커피콩을 갈며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마법의 주문을 외우는 여인. 이 소설의 특징은 이야기의 중심 역할을 하는 이 카페의 여주인공이 우아한 초로의 여인이라는 것이며, 한 편, 한 편 계절이 바뀔 때마다 몇 년씩 훌쩍 훌쩍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아하게 늙어가는 '할머니'가 카페의 주인이면서, 이야기의 구심점이다.

 

이곳 '곶' 카페를 중심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 다시 봄, 여름의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에 어울리는 음악이 배경으로 하나씩 따라붙는다. 이 곱고 착한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배경이 되는 음악을 찾아들어보기를 원한다. 마음에 울리는 감동을 배가 시켜줄테니 말이다.

 

총 여섯 편의 단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첫 번째, 봄의 이야기 '어메이징 그레이스'였다. 어느 밤, 빗소리에 잠을 깬 한 남자에게 소리 없이 다가오는 상실의 고통. 그는 막 아내의 장례식을 치르고 아내가 떠난 그 자리에서 딸 아이와 함께 잠을 자는 중이었다. 아내와 똑 닮은 딸과 함께 아내가 없는 하루를 맞이하며 아내의 습관, 아내의 미소, 아내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남자의 고통이 얼마나 생생하게 전달되는지, 사악사악 심장을 갉아먹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날 아침, 무지개가 떴다. 아내(엄마)가 없는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고민하던 아빠와 딸은 무지개를 잡으러 무작정 집을 나선다. 그리고 가서 닿은 곳이 곶 카페이고, 그들은 그곳에서 '행복의 두근두근'을 발견한다.

 

'행복의 두근두근'은 엄마가 읽어주던 그림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아기 토끼는 가슴 설레는 일이 있을 때마다 엄마 토끼에게 "엄마, 행복의 두근두근"이라고 말하며 자기 가슴을 가리킨다. 그러면 엄마 토기는 그 기다란 귀를 아기 토끼 가슴에 대고 "정말이네 미밋치의 두근두근이 그대로 전달되어 엄마도 같이 행복해졌어"라고 대답하는 것이다(24).

 

<무지개 곶 찻집>은 평범한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행복의 두근두근"을 이야기한다. 아내와 똑 닮은 딸 아이를 보며 상실의 고통이 아니라, 놀라운 은혜를 발견한다(봄, 어메이징 그레이스). 스스로 생각해도 초라한 청춘이지만, 함께 꿈꿀 수 있는 사랑이 있어 삶은 눈이 부시다(여름, 걸즈 온 더 비치). 인생의 벼랑에서 추락하여 밑바닥까지 떨어진 완벽한 암흑 인생이지만 누군가 손을 내밀어주면, 기도할 힘을 얻는다(가을, 더 프레이어). 사랑은 엇갈리기도 하고, 때로 원치 않는 이별도 찾아오지만, 우리 삶은 눈물이 있어 더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겨울, 러브 미 텐더). 겹겹이 쌓아온 과거의 시간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현재의 자기 자신을 충분히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증거이니, 함께 추억을 만들어갈 사람들을 어제보다 오늘 더 열심히 사랑하자(봄, 땡큐 포 더 뮤직). 마지막 편은, 곳의 카페 주인인 '에스코'의 사랑 이야기이다(여름, 곶의 바람과 파도 소리). 오늘도 몸은 나이를 먹고 계속 지쳐가겠지만, 곶은 삶은 오늘도 계속 된다. 남편이 남겨준 기적 같은 사랑이 있고, 그녀 곁을 지켜주는 충실한 고타로(개)가 있고,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녀는 오늘도 열심히 주문을 외운다.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산다는 건, 기도하는 거예요"(146).

 

아무리 애쓰고 노력을 해도 우리는 삶을 통제할 수 없다. 아무리 계획을 잘 세우고 대비를 해도 불행은 어느 때고 우리를 덮쳐올 수 있고, 아무리 저항을 해도 삶의 소용돌이는 원치 않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기도 한다. <무지개 곶의 찻집>은 모든 이에게 들려주는 위로의 음악같다. 때로는 장엄하게,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쓸쓸하게, 때로는 감미롭게, 때로는 따뜻하게 연주되는 인생의 음악이면서, 세상 모든 사랑을 응원하는 잔잔한 선율같은 책이다. 햇살 좋은 날,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곳에서 조용히 귀기울여 들어보면 좋겠다. 사랑은, 희망은, 그리고 행복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과, 행복의 두근두근은 가지지 못해 안달하는 사치품이 아니라, 돈으로 살 수 없는 영혼의 필수품(믿음, 소망, 사랑) 속에 있다는 사실을 기분 좋게 깨닫게 되리라. 착한 사람들 속에 따뜻한 감동이 있는, 무지개 곶에 우리 함께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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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 1 버지니아 울프 전집 17
버지니아 울프 지음, 진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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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를 통해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을 알았다. 나중에야 그녀가 영국 소설가라는 것을 알았고, 정신병을 앓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불운한 여성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삶과 마지막 모습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그녀의 작품이라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음울한 구석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런데 <출항>을 받아들고 알았다.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오래 전이지만 그녀의 작품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서 그녀의 음울함을 느꼈던 것일까. 아마도 단편적인 인용이나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읽었나 보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그래도 꽤 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모더니즘과 페미니즘의 선구자적인 작가로 알려진 탓일 게다. 아무튼 그녀만큼 작품보다 작가 자신이 더 주목받는 경우도 많지 않을 듯하다.

 

"10여 년간 열두 번을 고쳐 쓰며 34세에 내놓은 울프의 첫 장편소설"이라는 <출항>, 이 책을 읽으며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이 그녀에 '관한' 이야기만큼 널리 읽히지 않는 이유를 알 듯하다. 한마디로 어렵다! 읽다가 몇 번을 덮어버렸을 만큼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찾아보니 버지니아 울프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소설에 도입한 작가라고 하는데, 이런 저런 문학적 문제의식 없이 그저 소설 읽기를 즐기는 나와 같은 독자에게는 난해함 그 자체이다.

 

할 수 없이 책의 뒤에 붙은 '작품 해설'을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작품 해설'이 없었다면 <출항>은 나에게 단지 어렵기만 한 소설로 남았을 듯하다. 혹시 나처럼 읽다가 포기하고 싶어지는 독자가 있다면, '작품 해설'을 먼저 읽어보라고 권한다. 작품에 담긴 상징과 의미가 깨달아질 때 비로소 작품의 가치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한 예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지만 행상무역과 선주인 아버지 덕분에 비교적 편안하게 살아온 여주인공 레이첼은 아버지의 배를 타고 휴가를 떠난다. 스무 네 살의 레이첼은 그곳에서 외삼촌과 외숙모, 그리고 전직 국회의원 부부와 만나게 되는데, 어는 태풍이 치는 날 밤 레이첼은 첫 키스를 경험하고 악몽에 시달린다. 이것은 이렇게 해석된다. "자신이 인생 절정기에 있다고 느끼는 아버지뻘인 사십 대의 리처드와 레이첼의 키스는 일종의 성적 강간을 의미한다. 울프는 이들의 키스 장면을 태풍에 크게 흔들리는 레이첼의 선실로 설정함으로써 이 성적 폭력이 레이첼의 정신에 가져올 태풍의 효과를 상징적으로 암시한다"(371).

 

예전에 '다세포 소녀'라는 영화를 보고 몹시 불쾌했던 적이 있다. 감독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저질 영화를 만들었을까, 의문이었다. 그런데 대중문화 관련 과목을 수강하며 나의 무지를 뉘우쳤고 그 영화에게 미안했던 기억이 있다. 'B급 영화'을 몰랐던 나는 그 영화의 의도와 감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출항>이 나에게는 그처럼 낯설고 난해하다. 아마도 이 책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으려면 작가에 대해, 그 시절의 사회상에 대해 알아야 하고, 약간의 문학적 지식도 필요할 듯하다.

 

백지 같은 삶에서 세상으로 '출항'하며, 여행과 여행을 통해 만난 사람들 속에서, 또다시 자신의 내면을 여행하는 여주인공 레이첼, 레이첼 이야기의 가장 의미심장한 부분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고 결혼까지 약속했지만 결국 여행지에서 얻은 열병으로 죽게 된다는 설정이 아닌가 싶다. <출항>이라는 제목과 이율배반적이게도 버지니아 울프는 왜 레이첼을 죽게 할 수밖에 없었을까. 소설은 픽션이고, 그래서 소설과 작가는 별개라고 하지만, <출항>은 버지니아 울프를 모르고서는 읽혀지지 않는 소설이다. 작품 해설에 의지하고 않고 직접 그 대답을 찾기 위해서는 이 책을 다시 읽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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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환의 심판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6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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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은 거짓말의 경연장이다"(11).

 

첫 문장부터 빨려 들어가는 책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지금까지 내 머릿 속에 각인된 첫 문장은 이렇게 단 두 권뿐이었다. 그리고 이 책, <탐환의 심판>이 그 세 번째 책이 되었다.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첫 문장부터 강렬하다. 그리고 빠른 호흡으로 이어지는 단순한 문장들이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재판장은 거짓말의 경연장"이라는 이 대단한 아이러니를, 아이러니인지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이야기에 빨려 들어간다면, 작가의 페이스에 제대로 말려든 것이다. '법'과 '재판'이라는 대단한 제도를 만들어낸 인간은 스스로 그 대단한 제도를 타락시키고 있고, 이제는 누구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을 만큼 당연한 것이 되었다는 사실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채 우리도 그 재판장에 앉아 있는 꼴이다. 언제부터 재판장은 거짓말의 경연장이 되었는가 말이다.

 

 

 

 

 

 

 

 

작가 마이클 코넬리의 명성이 대단한데, 나는 이 작가와의 만남이 처음이다. 그러니 전작들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의 명성이 거품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해보인다. <탄환의 심판>을 읽으며 가장 감탄한 부분은 바로 재판정의 '리얼'함이었다. 극적이고, 연극적인 과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벌거벗겨진 재판정의 속살을 구석구석까지 훑어본 느낌이다. 몇 년 전, 실제로 재판이 진행되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있다. 서슬퍼런 검사가 죄상을 밝히고, 스마트해 보이는 변호사가 멋진 변론을 펼칠 것이라는 기대감이 가득했는데, 실제로 본 재판정의 모습은 실망 그 자체였다. 평범한 회사원처럼 보이는 검사는 국어책을 읽듯 미리 적어온 원고를 줄줄 읽어내려갔고, 밤새 한 잔 하시고 술이 덜 깬 상태로 나타난 듯한 변호사도 미리 준비한 원고를 그저 읽어댈 뿐이었다. 극적인 호흡도 없고, 연극적인 과정도 없는, 한마디로 긴장감 제로의 상황. 그때부터 법정 드라마나 영화를 불신하는 버릇이 생겼다. 저건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쇼'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탄환의 심판>은 다시 그 선입견을 뒤집어 놓았다.

 

<탄환의 심판>은 '제리 빈센트'라는 변호사의 죽음으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약물 중독으로 잠시 법조계를 떠나 있었던 미키 할러(변호사)는 살해당한 제리 빈세트를 대신해 법정의 부름을 받는다. 제리 빈세트가 맡고 있던 모든 사건을 그가 떠맡게 된 것이다. 그중에는 거물이 관련된 엄청난 사건도 한 건 포함되어 있었다. 모든 사람이 미키 할러에게 찾아온 행운 축하하며, 미키도 의욕적으로 일을 시작하지만, 그는 곧 깨닫게 된다. 자신은 이미 마련된 각본 속에서 각본대로 움직여줄 장기판의 졸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이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나는 모종의 게임에 걸려든 셈이었지만, 적어도 이제는 그것이 게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건 내게 유리한 점이었다. 이제 이것을 나의 게임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219).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된 영화계의 거물, 정치적인 출세욕을 불태우는 검사, 돈 되는 일이 중요한 변호사,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다. 상대의 주장을 무너뜨릴 증거가 있느냐 하는 것과, 그것으로 배심원들을 움직여 승리를 얻어낸 것, 그것만이 중요하다. 영화계의 거물은 월터 엘리엇. 검사는 그에게 범죄(살해)의 동기와 기회가 모두 있었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러나 미키 할러 변호사는 엘리엇에게 불리한 증거들은 상당히 희박하며, 정황증거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제가 할 일은 연기가 솔솔 나는 건 분명한데 실제로 총이 발사되지는 않았다는 걸 배심원들에게 이해시킬 방법을 찾아내는 겁니다. 제가 그 방법을 찾아내면, 월터 씨는 무죄로 걸어 나올 수 있습니다"(179).

 

미키 할러는 월터가 무죄일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가 무죄라고 믿는 것은 아니다. "죄가 없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때로는 무고한 사람들이 유죄판결을 받기도 하니까요. 모든 사람이 속으로는 그 사람이 무고하다는 걸 알고 있어도 말입니다"(180). 변호사에게 필요한 것은 그가 무죄라는 확신이 아니라, 검사가 내놓을 주장에 대응할 증인을 확보하는 것과, 반대심문 계획, 알리바이, 월터 대신 내세울 용의자, 검사 쪽 주장 대신 내세울 사건 해석, 다시 말해 변호 계획이다.

 

 

"나는 '마법의 총알'이라는 표현을 알고 있었다. 당신을 감옥에 꺼내서 집으로 돌아가게 해 줄 카드라는 뜻이었다. 모든 증거들을 도미노처럼 무너뜨리거나, 아니면 모든 배심원들의 마음에 합리적인 의심을 확고하고 영속적으로 심어 줄 증거나 증인을 뒷주머니에 숨기고 있다는 뜻"(184).

 

부인과 그의 내연남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월터는 정말 무죄일까? 그의 변호사 제리 빈센트는 왜 죽임을 당한 걸까? 월터는 왜 재판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할까봐 그렇게 안달을 할까? 보슈 형사가 포착한 '뇌물'의 흔적은 월터의 사건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을까? 이 매력적인 변호사 미키 할러가 찾아낸 '마법의 총알'은 무엇인가? 어찌 보면 얽혀 있는 거미줄이 일직선으로 풀려나가는 과정이 기대보다 싱겁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러 의문의 거미줄을 가지고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우리는 (적어도 미국) 법정의 '현실'과 재판의 실제, 그리고 제도적 허점을 참으로 '리얼하게' 엿볼 수 있다. 극적인 요소보다 바로 그 '리얼'함이 나에게는 더 극적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법과 붙어다니는 개념의 짝은 '정의'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법이 아니라, 누군가의 '양심'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경찰의, 변호사의, 증인의, 피해자의, 판사의, 배심원의 양심 말이다. 누군가는 "당신의 윤리와 규칙으로는 탄환을 막을 수 없어, 할러"(306)라고 단언했지만, 이제까지는 무고한 사람보다 죄 지은 사람의 변호가 전문이었던 미키 힐러의 양심이 아프게 깨어나는 순간 우리는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의 제목은 <탄환의 심판>이다. 이 책에 '총알 평결'이라는 말이 나온다. "옛날에 내가 순찰차를 타던 시절에, 거리의 인간들이 자기들끼리 정의를 실현하려고 사람을 죽이는 사건을 뭐라고 불렀는지 아시요?"(540) 이것이 바로 "총알 평결"이라는 것이다.


세상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가진 자의 것이 되어간다. 법정은 '거짓말의 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무 이의 없이 받아들이며 당연하게 여기는 지경이 되었다. 죄를 짓고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 죄를 짓지 않고도 무서워 하는 사람들, 도대체 이런 현실을 부끄러워 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무자비한 폭력을 막고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세워진 법조계가 스스로의 논리로 스스로를 계속 타락시켜간다면, 그들이 원래 막으려 했던 무자비한 폭력이 역으로 그들을 심판하게 되리라는 것, 그것이 바로 총알 평결에 숨겨진, 그리고 <탄환의 심판>에 숨은 뜻이 아닐까.

 

"제가 만나 본 사람들 중에 정말로 무고한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사법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까 봐, 죄인은 잘 찾아내도 무고한 사람은 잘 찾아내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어요"(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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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리즘 철학 - 간결하고 매혹적인 철학에의 탐구
조중걸 지음 / 한권의책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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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적인, 너무도 형이상학적인"

 

영국 철학자이며 정치가인 버크의 아포리즘이다. 프랑스 혁명을 반대한 그는 "프랑스 혁명이 성립시킨 인권선언에 대해 이와 같이 개탄"했는데, 다른 말로 말로 하면 "공허한, 너무도 공허한"이라고 한다(165). "온건한 상식에 입각하는 경험론적 입장에서의 프랑스 혁명과 인권선언은 기존의 앙샹레짐만큼이나 허황되고 공허한 형이상학적 이상주의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지금까지 서양철학사는 합리론(형이상학)과 경험론의 싸움터로 보인다. 이 두 철학사조는 영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에도 각각 영향을 미쳤다. "시민사회로 이르는 정치혁명에 있어서 영국과 프랑스는 상이한 경로를 밟는다"(163). 영국에서는 왕과 부르주아가 결탁하여 귀족계급과 상층교권계급을 효과적으로 억누를 수 있었지만, 프랑스는 "어리석게도 왕이 궁극적으로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귀족과 결탁했고 이것이 피를 부르는 혁명을 불러왔다"(164). 영국이 비교적 순조롭게 구체제에서 신체제로 이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경험론적 전통"을 가졌기 때문이고, 버크가 프랑스 혁명이 성립시킨 인권선언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너무도 형이상학적인"이라고 개탄했던 것은 "형이상학적 기질을 가진 프랑스인들이 앙샹레짐을 뒷받침하던 합리론적 철학을 다른 종류의 합리론적 철학으로 바꾸었다는 데 있었다"(165)는 것을 이 책은 꼬집어준다. 역사를 보는 새로운 방식에 눈이 떠지는 기분이다.

 

그.러.나. 내가 "형이상학적인, 너무도 형이상학적인"이라는 아포리즘의 탄생 배경을 이렇게 길게 쓴 이유는 따로 있다. 유명한 철학 아포리즘을 중심으로 서양철학사의 맥을 짚어가는 <아포리즘 철학>을 읽고 나니 철학사가 흘러내려온 물줄기를 지도를 펼쳐놓고 보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문제는 (맞는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내게 철학은 여전히 "형이상학적인, 너무도 형이상학적인" 차원의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 우리 삶에 가까이 있는데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사는 클래식 음악처럼, 철학적 논의는 여전히 내가 끼어들 자리가 없는 '고차원'에 존재하여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그.러.나. 다시 철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바로 이것이 <아포리즘 철학>을 통해 얻은 하나의 소득이다. 여전히 손이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있지만, 딛고 올라설 벽돌 한 장을 얻었다고나 할까.

 

<아포리즘 철학>을 통해 새롭게 눈 뜬 사실이 있다면, 바로 경험론의 위력이다. 솔직히, 이제까지 경험론을 다소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그런데 경험론은 내가 생각하는 그 이상이었다. "존 로크, 조지 버클리, 데이비트 흄으로 이어지는 영국의 경험론적 철학은 그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된다. 경험론적 인식론에 의해 근대는 붕괴되며 따라서 인간 이성이 지니고 있다고 믿어졌던 전능성 역시도 붕괴된다. 데카르트 이래의 지적 자신감은 커다란 타격을 입는다"(126). 또한 "버클리는 우리가 경험론을 믿는 순간 우리 지식의 보편성은 사라지며 따라서 사회적 질서도 사라진다고 말한다"(134). 앞서 영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에서도 보았듯이 합리론과 경험론은 사회정치적 시스템에도 상반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합리론은 언제나 어떤 종류의 위계적 질서를 요청하고, 경험론은 언제나 극단적인 형태의 민주주의를 요청한다. 이것은 앞으로 오게될 사회정치적 시스템에서도 계속 되풀이된다"(128). 경험론은 윤리와 종교에도 그 영향력이 대단하다. "윤리학에서 실재론은 자유의지론으로 이끌리고, 경험론은 결정론으로 이끌리듯이 신학적 경험론에서 비롯된 개신교의 이념은 예정설을 불러들인다." 또 "윤리적 결정론하에서 인간의 행위는 순간을 사는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 이때 인간은 실존을 자각하게 되고 부조리를 느끼게 된다. 이것이 현존을 본질보다 우선적인 것으로 만들고 지금 이 순간의 열정과 분투만이 유효한 윤리적 기준을 충족시킨다"(117).

 

철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독자가 있다면 개론서 다음으로 <아포리즘 철학>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철학적 기초 지식을 가지고 읽는다면, 아포리즘을 중심으로 공부하는 이러한 방식이 분명 높은 수준의 철학에 도달할 수 있는 사다리가 되어줄 것이라 생각된다. 간명한 문장에 합축된 진리를 담은 아포리즘, 생각할수록 매력적이다. "고대 말에 인간이 죽었다면 근대 말에는 신이 죽었다"(139). 이것은 철학 아포리즘 만큼이나 인상적인 글귀이다. 나는 이것을 저자 조중걸 선생님의 아포리즘으로 기억하려 한다.

 

철학적 논의가 저기 하늘 위에서 이루어지는 수준 높은 지식인 것은 분명한데, 철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중요한 한 가지는 흄의 말처럼 "우리가 겸허해야 한다"(146)는 사실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모두 자기의 제한된 경험의 테두리 내에서 지식을 형성하고 그것을 근거로 판단한다. (...) 흄은 상식에 입각하기를 권하고 자신의 습관을 잘 살피기를 권한다. 신념은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독단만큼이나 회의도 무섭고 회의만큼이나 독단도 무섭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노선을 따르든, 지식이라는 것이 머리에 담기면 담길수록 더욱 겸허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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