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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비프케 로렌츠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Del> 키가 필요할 때!
그때 그 일만 내 인생에서 지워버린다면, 내 삶은 지금과 많이 달라져 있을까. 또 누가 아는가. '그때 그 일만 없다면' 내가 대한민국의 힐러리가 되어 있을지. 오늘날 내 인생을 요모양 요꼴로 결정지은 결정적인 사건 하나를 찾아 지워버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가차 없이 삭제해버리고 싶은 순간이 하나 있다. 내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그때 그 사건. 바로 아빠의 계약서. 땅에 투자하라는 조언을 거절하고 어떤 사업에 투자했다가 전 재산을 말아먹게 만든 그 계약서를 찾아 당장 찢어버릴 텐데 말이다.
여기 그런 매혹적인 제안을 받은 여주인공이 있다. 부모님은 "샤를로타"라는 공주 같은 이름을 주었건만 "찰리"라는 이름에 더 걸맞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29살의 이 처자는 부모님 몰래 대학을 때려치우고 '드링크스&모어'라는 술집에서 서빙 일을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부모님이 진실을 알까 겁이 나고, 옆집 사는 절친 줄리가 자신을 외면하는 현실이 조금 서글프지만, '헤픈 여자'라는 문구가 박힌 티셔츠를 즐기고 음악을 즐기는 그녀는 나름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다. 만족할 수는 없었지만 딱히 불만일 것도 없는 이 생활에 돌맹이를 던진 것은 10년에 날아온 동창회 초대장이었다. 첫사랑에 대한 설레임을 안고 한껏 멋을 내고 찾아간 동창회에서 그녀는 그야말로 제대로 '폭탄'이 되어버렸다. 망신보다 더 심한 말이 무엇일까. 잘나가는 친구들 앞에 끔찍한 모습으로 까발려진 그녀의 오늘(인생). 제대로 상처받았다. 그리고 드디어 새로운 삶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 그녀의 마음을 가득채웠을 때, 찾아온 은밀한 제안. 인생에서 삭제해버리고 싶은 순간을 지워준단다.
"누구나 지워버리고 싶은 일들이 꽤 있죠. 언젠가 실패했던 일들 말이죠. 민망하고 창피했던 모든 일이오. 일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을 전혀 일어나지 않은 일로 만들 수 있다면? 만약 그런 모든 일을 우리의 인생에서 영원히 지워버릴 수 있다면? 마치 전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죠"(124).
찰리는 곧바로 "지금 당장 삭제해버리고 싶은 가장 민망하고 부끄럽고 창피한 사건 베스트 10"을 만들었다(126-127).
(찰리의 것을 참고로 자신의 것도 한 번 만들어보면 어떨가 하는 의미에서 모두 적어본다.)
1. 가장 먼저는 지난 번 동창회
2. 완전히 취해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넘어졌는데, 출동한 경찰한데 반항한 일
3. 어떤 남자의 머리를 맥주병으로 내리친 일.
4. 여러 가지 다른 일 때문에 시험 시간에 나타나지 않은 일(그 결과 대학을 중퇴했다).
5. 유부남과 바람 피운 일
6. 운전면허 시험 도중 속도 측정 장치를 들이받고 도망간 일
7. 첫사랑 모리츠와 나의 첫 관계
8. 약 150차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해서 필름이 끊겼던 일
9. 두 남자와 동시에 섹스를 한 일
10. 적어도 한 번씩은 시도해본 모든 약물.
그리고 끝내 모른척 하고 싶었지만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끔찍한 사건 하나 더!
11. 가장 친한 친구 줄리의 남자 친구와 잔 일.
바람대로 이 끔찍했던 사건들은 찰리 인생에서 삭제되었다. 그리고 이후로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다르게 흘러간다. 첫사랑과 결혼하고, 해변가에 있는 예쁜 저택에서 살고, 번듯한 직장이 있고, 성공한 친구들에 둘러싸인, 그때 그 동창회에 나타난 잘나가는 친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뉴라이프'가 그녀 앞에 펼쳐진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그녀가 원하던 삶이 아니었다는 것! 끔찍했던 사건들을 모두 삭제해버리고 그토록 원하던 '성공한' 삶의 전형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러나 그녀가 문득 깨닫게 된 한 가지 사실은, "나도 이제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324).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
"이제 한 가지 사실은 분명히 깨달았다. 아주 작고 사소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에피소드라도 그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358-359).
결론적으로 말하지만 이 책은 상당히 치유적인 소설이다. '과거를 지우는 작업'과 연결되어 결말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좀 맥이 풀려버렸지만, 충분히 치유적인 소설임을 인정한다. 아무리 끔찍한 기억도, 삭제해버리고 싶은 내 인생의 오점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우리는 가끔 지금의 나와 완전히 다른 내가 되는 상상을 하지만, 내 인생의 끔찍한 사건을 삭제해버린다고 해서, 내가 정말 원하는 어떤 모양의 새 삶을 산다고 해서, 무조건 행복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를 얼마간 끌어안을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길러준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어제도, 내일도 아니고, 바로 오늘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다시 생각해본다. 지금과 다른 내가 되고 싶다면 바로 '지금' 행동해야 한다는 것. 과거는 과거에서 지우는 것이 아니다.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가 오늘까지 살아남아 지긋지긋하게 나를 괴롭히고 있다면, 지금 그것을 지워버리면 된다. 오늘, 바로 지금 내가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말이다!
"내 생각에 행복은 늘 오늘에 달린 거 같아. 어제나 내일이 아니라 오직 오늘이 가장 중요해"(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