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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존슨의 예수 평전
폴 존슨 지음, 이종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하나님이면서 인간인 분이 이 지상에 나타났다는 독특한 사건은 그리스도교 본질이다.
이 특이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21)
예수를 예배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 발 딛고 살았던 그의 '인간적인 모습'도 신성시 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를 종교가 만들어낸 허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가 역사적 실제라는 사실조차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예수를 한 사람의 성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신성을 제거하고 그의 가르침을 윤리적 차원에서 생각하고 싶어 한다. 편견의 눈으로 "예수를 읽는 것"이다. <폴 존슨의 예수 평전>을 읽으면서 '신선하다'는 느낌이 압도적이었던 것은 내게도 그런 편견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오랜 신앙생활 동안 예수를 '교리적'으로 읽는 습관이 어느 새 자리하고 있었나 보다.
어릴 때 위인전 읽기를 끝으로 '평전' 읽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그런 내게 예수의 평전이라는 책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저자 폴 존슨이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역사가요, 저널리스트이며, 저술가라는 것에 믿음이 갔는데, 무엇보다 역사학을 전공한 저술가라는 사실이 더욱 좋았다. <폴 존슨의 예수 평전>의 역시 세계적인 명성가의 저력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믿을 만한 자료와 증거를 근거로 한 설득력 있는 해석이 역사에 실존했던 예수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되살리고 있다. 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를 주면서도, 전문적인 학술서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마치 예수님이 심오한 진리를 "누구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이해주신 것처럼, 높은 수준의 이야기를 알기 쉽게 풀이해주는 탁월한 교사같다.
다만, 하나님이면서도 인간이고, 신비적이면서도 실제인 예수를 한 권의 책으로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 누군가 성경 읽기를 거대한 건물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에 비유하신 분이 있다. 성경을 읽어내는 접근 방법이 다양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 가지 관점으로만 예수를 다 이해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신학적 지식이 없는 독자들에게) 이 책에 실린 몇 가지 해석들도 학술적인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고 싶다. 그럼에도, <폴 존슨의 예수 평전>은 "이렇게도 예수를 읽을 수 있구나" 하는 신선함이 우리의 굳은 생각(교리적 도그마)을 환기시켜 주고, 신뢰할 만한 자료를 근거로 2000년 전 유대 땅에 발 딛고 살았던 예수를 생생하게, 그리고 아주 매력적인 인물로 되살려 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일독을 꼭 권하고 싶다.
<폴 존슨의 예수 평전>은 4복음서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는 먼저 예수의 행적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 4복음서의 기록이 얼마나 신뢰할 만한 자료인지 밝힌다. 그러면서 "예수의 생애를 집필할 때 부딪히게 되는 문제는 자료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너무 많다는 것이며, 텍스트에 나와 있는 말씀과 에피소드의 온전한 의미에 도달하기가 엄청 까다롭다는 것"을 이해시킨다.
"역사상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이처럼 다양한 문제들에서
이처럼 강력한 영향을 끼친 다른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다"(201).
<폴 존슨의 예수 평전>은 내게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왔다. '예수'처럼 짧은 전기를 남긴 위인도 없는데, 그 짧은 전기가 인류 역사에 어떠한 빛을 던져 주었고,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생각할수록 벅차 오르는 감동이 있다. <폴 존슨의 예수 평전>은 예수가 탄생한 세계는 가혹하고, 잔인하고, 폭력적이고, 불안정한 세계였다는 시대적 배경을 시작으로 그의 생애를 주제별로 탐구해 나가며, 입체적으로 요약한다.
그의 책을 읽으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예수가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성공한 목수"의 아들이었다는 주장이다. 요셉이 목수로서 성공을 거두었고, 그의 가족은 비교적 풍요롭게 살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사실, 사정이 허락하는 한 모든 똑똑한 유대인 아이들은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며 예수는 안락한 가정 출신이었다"(47). 저자는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은 예수의 생애를 "예수의 잃어버린 18년"이라고 표현하며, 그 잃어버린 18년을 상당히 설득력 있게 재구성한다. 저자의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가난한 목수의 아들' 예수의 이미지와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도 일부분 수정되어야 할 듯하다.
<폴 존슨의 예수 평전>을 읽으며, 가장 궁금했던 장면은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부르는 장면이었다. 4복음서가 다르게 증거하고 있는 이 부분에서 저자는 어떤 결론을 얻었을지가 궁금했다. 저자의 해석은 내가 받아들이고 있는 주장과 다르지 않았다. 간단히 기술되고 있지만, 저자는 2번의 부르심이 있다고 본다. 첫 번째 부르심에서 4명의 제자들(시몬, 안드레아, 세베대오의 두 아들)이 파트타임 사역자로 일했다면, 두 번째 부르심은 종일 사역자로 부르신 것으로 해석된다. "안드레아가 세례자의 제자였다는 사실"은, "이 네 명의 어부들이 이미 종교적 부흥 사업에 관심이 많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을 짬짬이 따라다니는 사람이었뿐이다." "예수는 그 네 명에게 하루 종일 따라 다니라고 명했고 그들은 복종했다"(69). 이 외에도 저자는 4복음서에 각각 다르게 기술된 증언의 차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본질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 역사 전문가인 그의 결론이다.
<폴 존슨의 예수 평전>이 보여주는 예수는, "사회 각계각층의 남녀노소와 자연스럽게 어울렸으며, 기도할 때를 제외하고는 혼자 있는 것을 피했다. 사람들과 어울려 연회를 갖는 것을 좋아했고 늘 새로운 친구와 동무를 찾아"다니는 인물이다. 예수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사람들을 독특한 개인으로 사랑했다는 것"이며,열등한 존재, 일종의 재산으로 취급한 여성을 "남성과 동일한 지위에 올려놓으려 애쓴 세계 역사상 최초의 교사"였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치유 기적이 많은 어린아이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173).
동시에 예수는 "유대의 종교적 체제를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꾸어놓은 혁명가"였으며, 하나님을 "저 먼 산 위에 있는 보이지 않는 신성이 아니라, 단란한 가정의 아버지"로 처음 소개한 인물이다. "예수 가르침의 본질은 하나 됨의 추구"였는데, 그의 가르침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 다시 말해 "구약성경이나 근동의 다른 지혜 문서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을 수 없는 가르침"이었다. "인류 전체를 사랑한다는 사상은 그리스인이든 야만인이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생각하지 못한 사상이었다." 특히 요한복음에 기록된 '진리'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아주 심오한 철학적 명제이지만, 동시에 시적인 주장이기 때문에 교육받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도 직감적으로 이해하는 명제이다"(126).
"그가 말한 것은 언제나 진리인데,
이승의 시간 속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원 속에서도 그러하다.
그것은 서기 1세기 전반기에
로마제국의 조그마한 변방 속주에서 사람들 앞에 제시되었으나,
그 진리는 역사와 지리를 바꾸어놓으며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177).
자기(자아)에 대한 사랑을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으로 바꾸어놓으려는 예수의 새로운 생활 방식은 오늘날 우리의 세계에서도 하나의 거대한 혁명이며 역설이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예수 운동은 실패한 역사'라고 결론짓는 사람들이 있다. 그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라 사는 제자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G. K. 체스터튼의 말을 빌어 폴 존슨도 말하듯이, "예수가 남겨놓은 그리스도교는 시도해본 결과 실패로 끝난 종교"가 아니라, "너무 어렵다고 판정되어 시도조차 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진리)은 어떤 규칙으로 따를 수 있는 생활 지침이 아니라, "내면의 강력한 충동을 필요로 한다." 마음이 변화를 받지 않으면 결코 따를 수 없는 생활 방식인 것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그리고 우리 죄의 짐을 지고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신 예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춰 서게 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는가?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 벗어주며,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면 십 리를 동행하고, 내 것을 달라 하면 손해볼 줄 알면서도 거저 주는 삶. 다시 한 번 내 안에도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강력한 충동이 일기를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