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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트룸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5 ㅣ 로마사 트릴로지 2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루스트룸(Lustrum)_라틴어. (1) 야수의 동굴 또는 보금자리. (2) 갈봇집. 도락 (3) [문학] 속죄양, 특히 감찰관이 5년마다 행하는 속죄 의식. 5년 주기의 대재계(大齋戒)
<폼페이>, <로스트라이터>로 잘 알려진 작가 로버트 해리스의 필생의 역작인 로마사 3부작은 "광대한 세계관으로 역사 소설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을 받는다. <루스트룸>은 그 중 두 번째 책이다. <임페리움>을 읽고 <루스트룸>을 읽고 난 지금, 나는 이 책에 쏟아지는 찬사가 허언이 아님을 알았다. 과도한 찬사가 불쾌하게 여겨지는 책들도 많은데, 이 책은 어떤 찬사를 보내도 아깝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나 "역사가 스포"라는 사실이 이처럼 안타까운 적이 없었다. 그의 결국을 알고 있기에 <루스트룸>을 펼쳐 들기 전부터,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불세출의 영웅이 계속 영웅으로 남아주기를, 언제까지 빛나는 승자이기를 마음속으로 응원하지만, 결국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숨죽여 지켜봐야 했다. 그의 비극을 예견이라도 하듯, <루스트룸>은 끔찍한 살인사건으로 시작한다. 내장이 모두 파헤쳐진 채 버려진 노예 소년의 시체. 최다 득표의 집정관 당선자로서 원로원의 개회 의식을 주관하는 임무를 맡아야 할 키케로에게 이 사건은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역자는 후기에서 "기사 계급으로 호모 노부스를 거쳐 "국부" 칭호까지 얻었으나, 결국 비극적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모든 것을 잃고 처참한 망명길"에 오르는 키케로의 이야기를 담은 "<루스트룸>이 고전 비극의 전통을 따르기 위해 <햄릿>, 또는 고전 비극의 틀을 오마주한 흔적은 얼마든지 있다"고 해석한다(527-528). 책 다 읽고 역자의 후기를 보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역자의 해석을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루스트룸>의 비극이 좀 더 색다른 맛으로 다가올 것이다.

"카이사르가 옳을지도 모르겠어. 공화국을 때려 부수고 재건해야 한다고 했거든"(271).
키케로는 공화정 말기, 허울뿐인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 끝까지 싸운 인물이다. 공화정을 깨부스려는 카이사르와 대결할 수밖에 없는 운명! 영웅들의 야망이 불타오르는 로마의 한복판에서는 "야심가들의 끊임없는 음모, 결탁, 배신"이 겹겹으로 쌓여 최고 집권자마저 안심할 수 없는 극박한 정세가 계속 된다. 불행하게도 키케로는 수차례의 위기를 넘기며 권력의 핵심에 올랐지만 키케로는 그 권력을 지켜내기 위해 훨씬 더 힘겨운 싸움에 휘말려야만 했다. 로마 중심가에서 옛 공화국과 작별을 고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격변기, "집정관석 오른쪽이 카툴루스, 이사우리쿠스, 호르텐시우스를 위시한 벌족파들이고, 왼쪽이 인민의 명분을 지지하는 민중파로 카이사르와 크라수스가 대표 인물이었다"(67). (로마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혈족) 벌족파와 민중파의 틈바구니에선 키케로, <루스트룸>은 그의 선택에 따라 로마의 역사가, 아니 오늘 우리의 역사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새로운 영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옛 영웅이 사라져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럴지라도 그렇게 찬란하게 빛났던 한 영웅이 쓰러져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것은 씁쓸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임페리움>에서는 키케로가 거머쥔 집정관이라는 자리가 그 이상 더 찬연할 수 없을 정도로 빛이 났으나, <루스트룸>에서는 그 빛이 발하고 만다. 당장 집정관에 대한 묘사마저 이렇게 바뀐다. "집정관. 그건 공직을 사는 만인의 이상이었다. 시대를 구분하는 것도 공식문건과 시금서에 새겨진 주재 집정관의 이름이 아니던가! 하늘 아래 불후와 가장 가까운 존재가 바로 집정관이었다." 이것이 <임페리움>의 분위기였다면, <루스트룸>에서는 이렇게 바뀐다. "마흔셋의 나이에, 군대를 이끌어 대승리를 이룬 적도 없고 위대한 책을 쓴 적도 없다. 집정관에 오르긴 했지만 히브리다를 보더라도 당시에야 개나 소나 다 집정관이 아니던가"(178). 집정관의 임기가 3/4분기에 이를 즈음엔 키케로의 권위는 거의 무에 가까웠는데, 그 누구보다 그가 너무도 가혹하게 느끼는 현실이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한테는 병사들이 있고, 크라수스는 부가 있고, 클로디우스는 길거리 깡패가 있지만, 키케로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언어뿐이었다. "언어로 일어섰으니 언어로 이겨낼 수밖에." 키케로에게는 "증류된 감정을 정확한 단어로 승화하는" 위대한 연설의 힘이 있었다. "물리력과 파렴치함에 있어서라면, 키케로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이나 원로원은 무력을 다투는 곳이 아니다. 이곳의 무기는 웅변이며, 그 누구도 키케로만큼 완벽하게 언어를 제어할 수는 없었다. 20년 동안 회가가 열릴 때마다, 키케로는 거의 매일 기술을 연마해 왔다. 어떤 의미에선 그의 일생이 바로 이 순간을 위한 준비였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224). 키케로는 공화국에 이바지하는 이 원로의 방식 덕분에 카틸리나와의 싸움에서 몇 년 동안 회자될 대승을 거두었다(<임페리움>). "그는 세치 혓바닥만으로 괴물을 로마에서 내몰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위기에 몰아넣는 것도 그 "빌어먹을 소송", "끊이지 않는 소송" 때문이었다.
로마의 반란 세력을 재판정에 세움으로 로마를 대화재로부터 구하고, 시민을 대학살에서, 이탈리아를 전쟁에서 구한 영웅이 된 키케로는 그가 얻을 수 있는 최고 영예의 정점을 찍는다. "승전 장군이 아닌 사람에게 시민 감사제가 제안된 건 공화국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263). 그러나 이제 노인이 되어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루스트룸>의 화자 '티로'는 말한다. "정치에 영원한 승리는 없다. 오직 가차 없는 사건들만 있을 뿐이다"라고. 공화국의 수호자! 공화국 역사상 그 누구도 당시의 키케로만큼 찬미를 받은 이는 없었다. 원로원은 그에게 파테르 파트리아이, 즉 "조국의 아버지" 칭호를 수여했다(294). 그러나 그의 영예도 잠시, 키케로는 그의 말 한마디에 카이사르가 황천행이 될 수도 있었던 바로 그 순간에 망설임으로써, 결국 엄청난 파국으로 치닫고 만다.
한 우스꽝스러운 일화에서 빚어진 작은 소동이 결국 키케로에게 엄청난 파국을 몰고 오는데, 그에게 최고의 영예의 안겨주었던 사건은 그를 옭아매는 치명적인 덫이 되고, 그가 수많은 명연설을 남기고 수천의 로마 시민들을 대상으로 열변을 토하고, 기나긴 법정 쌍무을 통해 출세의 발판을 마련한 로마의 한복판에서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의 비극은 "삼두 괴물"로 알려지게 될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일당의 결탁 때문이기도 하고, 공화국을 수호하려는 그의 신념과 공화국을 때려 부수고 재건하려는 카이사르와 대결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 때문이기도 하고, 카이사르의 은밀한 제안을 거부하면서까지 공직을 살아오면서 지켜왔던 자신만의 신념 때문이기도 하고, 승리에 도취된 자만심이 스스로 최악의 함정을 팠기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기도 하다. "하지만 불행히도 일생의 야심을 이룬 사람들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명예와 허형, 신념과 미망, 영광과 자멸 사이의 분별이 종잇장보다도 더 얇았다"(352).

"우리는 과거 시대를 단순히 우리를 위한 준비 과정으로 여긴다... 하지만 우리가 그 시대의 잔광(殘光)에 불과하다면?"_ J. G. 패럴
결국 옳은 선택이었을까? 카이사르의 은밀한 제안을 거절하고 굴욕적인 권력을 누리기보다 카이사르와 정반대 방향으로 발을 내딛는 키케로. 웅변만으로 최고의 권력자들과 겨루어 빛나는 승리를 거머쥔 그였지만, 겨우 한 줄의 법안만으로 그의 모든 것이 끝장나 버린다. "로마 시민을 재판 없이 살인한 자에게 불과 물을 제공하면 그 또한 사형으로 다스릴 것이다"(488). (사실 그를 아연실색하게 만들고 모든 것을 끝장내버린 이 한 줄의 의미를 파악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이 법안이 그토록 무서운 것이었던가. 이 한 줄의 법안이 벽에 나붙은 이후, 사건은 그야말로 급박하게 휘몰아친다.)
얻는 것은 쉽지만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고 했던가. 선데이 타임스는 "권력의 매력과 그 위험에 대해 이렇게 훌륭하게 해부한 책이 일찍이 있었던가"라는 평을 내놓았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가장 민주적이지만 그래서 더욱 민주적일 수 없었던 로마의 이면. 로마사에 통달한 작가의 손끝을 통해 로마 역사를 배우고, 정치를 배우고, 권력의 독을 맛보며, 이 비극의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불현듯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