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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인 서울 Agit in Seoul - 컬처.아트.트렌드.피플이 만드는 거리 컬렉션, 개정판 ㅣ in Seoul 시리즈
민은실 외 지음, 백경호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데 있다."
('아지트 인 서울' 포토그래퍼 / 백경호)

서울 여행을 테마로 한 책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서울 여행에 관한 책을 볼 때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단조로운 것인지 깜짝 깜짝 놀라곤 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며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의 세월을 겹겹이 쌓아가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안 가본 곳이 얼마나 많고 모르는 곳이 얼마나 많은지. 내 좁은 생활 반경이 깨달아질 때마다, '정말이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하는 물음이 불쑥 튀어나온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한다"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다. 하긴 요즘 세상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하는 그 익숙한 거리조차도 하루가 멀다 하고 모습을 바꾸는 통에 영 정신이 없으니, 매일 변신하는 서울은 어쩌면 영원히 내게 낯선 세상일지도 모르겠다.
<아지트 인 서울>이라는 제목을 보며 나는 '고향'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나 보다. 서울이 고향이라 고향이 없다,고 생각하는 내 마른 감성에 비밀스러운 '아지트' 하나 점찍어두고 싶었다. 그런데 이 세련되고 예쁜 책은 그것보다 더 공격적이다. 감성이 통하는 공간을 찾아내어 그것을 소비하고 즐기는 차원을 넘어, 나만의 감성 공간을 직접 연출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아지트 인 서울>이라는 프로젝트를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나는 '자기 주장'이라고 하고 싶다.

"즐길 거리가 비슷한 사람들이 골목골목 모여 그곳을 하나의 문화 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아지트 인 서울>은 독특하다. 제주도에는 올레길이 있고, 지리산에는 둘레길이 있고, 서울에도 성곽길이 있다. 길이 있었고, 길을 따라 길을 낸 길들이다. 그런데 <아지트 인 서울>에는 '14개 코드'로 이루어진 문화의 길이 있다. 길이 있고, 문화가 형성되었고, 문화를 따라 길을 내었다. 정동 정동길, 창담동 압구정로, 서래마을 서래로/몽마르뜨길, 경복궁 옆 효자로, 이태원1동 이태원2길, 신사동 가로수길, 홍대앞 다복길/미래길/송정래길, 이태원2동 회나무길, 상첨동 화개길/삼청동길, 신사동 멋샘길, 서교동 솔내길/상수동 독막길, 대학로 동숭길, 북촌 계동길/창덕궁길, 한남동 꼼데가르송길이 그것이다.

<아지트 인 서울>은 "일정한 거리마다 문화적인 코드를 찾아내었다." <아지트 인 서울>이 소개하고 있는 14개의 거리는 서울의 것이기도 하면서, <아지트 인 서울>의 프로젝트에 의해 새롭게 탄생한 길이기도 하다. <아지트 인 서울>이 하나의 테마로 길을 엮어내고, 그곳에 의미를 부여하고, 새롭게 생명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아지트 인 서울> 안에서 "길은 더 이상 길이 아니고 도시의 문화가 된다."
<아지트 인 서울>을 들고 14개 코드로 묶인 문화의 길을 탐방해보는 것도 색다른 서울 여행이 될 것 같다. 예술의 거리, 뷰티 놀이터, 꽃향기 가득한 언덕길, 옛 향취가 그대로 남은 동네, 다국적인 맛의 향연을 즐길 수 있는 길, 발랄한 아이디어가 스며드는 쇼룸, 젊음의 열기와 예술가의 끼가 만난 자유로운 공간, 셰프들의 접대 명가, 예술과 소통하는 길, 커피향 가득한 길, 혼자놀기 족을 위한 문화지구, 거리의 예술, 살아 있는 과거의 그윽함, 부티크와 프리미엄, 그리고 예술이 만나는 곳 등 다양한 즐거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가보지 않은 곳이 더 많지만, <아지트 인 서울>은 가본 곳까지 낯설게 만들어버리는 힘이 있다.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그곳의 즐거움에 새롭게 눈뜨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호기심 가득했던 어릴 적 세상은 낯설다는 한 가지만으로도 매력이 가득했는데, 나이를 먹고 아는 것(?)이 많아지니 호기심보다는 주눅이 더 많이 생기나 보다. 솔직히 어떤 길들은 가보기도 전에 위화감이 느껴진다. 명품숍이 즐비한 거리에 가려면 명품 몇 개 휘감이 줘야 할 듯한 위화감말이다. 어쩐지 어떤 거리들은 '우리의 서울 거리'가 아니라, '그들만의 서울 거리' 같은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빈과 부의 거리감이라기보다 오히려 문화적인 거리감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나도 서울에 꽤 오래 살았는데, 왜 이리 나의 삶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지, 정말 작정하고 서울 거리에 나서봐야겠다. 그만큼 아직 내가 알고 즐겨야 할 즐거움이 많이 숨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아지트 인 서울>이 내게는 한마디로 '자기 주장'이었다, 라고 한 것은 거리마다 강력한 자기 표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를 반성했다. 이 멋진 거리 속에 나만의 아지트가 아직 없다는 것은에서 내가 나를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하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떤 길은 추억이 있어 좋았고, 때로 어떤 길은 새로운 세계에서 좋았고, 어떤 길은 꿈의 공간 같아 좋았다. 그리고 서울의 거리가 두드러진 개성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반가웠다. 그 개성에서 서울의 새로운 생기와 활력을 읽었다. 무엇보다 고급스럽고 감각적인 예쁜 책 덕분에 눈이 호강했다. 여행 가이드북으로 보기에는 산만한 구석도 없지 않지만, 전문 잡지 같은 느낌이 들만큼 톡톡 튀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