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예술 찾기 - 예술 도시를 말하다 Newyork
조이한 지음 / 현암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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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과 뉴욕의 예술을 다시 보다!

"누군가의 글을 통해 그림을 다시 보기도 한다"(139).

 
"당신이 나를 채워줘." 영화 <제리 맥과이어>에 나오는 (톰 크루즈가 했던) 사랑 고백이다. 미국인이 아직도 가장 사랑하는 명대사라고 한다. <뉴욕에서 예술 찾기>를 읽고 난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나를 채워주는 책"이라고 하고 싶다. <뉴욕에서 예술 찾기>는 독일 유학으로 미술사와 젠더학을 공부하고 일반인들을 위한 미술사를 강의하는 이가 "모퉁이만 돌면 미술관, 걷기만 해도 갤러리"라는 뉴욕을 여행하며 "뉴욕 미술"에 대해 쓴 에세이다. 여행과 뉴욕, 그리고 미술 작품에 관심이 있는 독자의 흥미를 끌만한 책인데, 일단 읽기 시작하면 이런 분야에 관심이 없던 독자들까지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흡입력이 있다. 큰 기대 없이 읽었는데, 대어를 낚은 느낌이라고 할까.

뉴욕 여행 경험 3차례, 체제 기간 총 6개월이 '다'라고 고백하는 저자는, <예술 도시를 말하다> 시리즈 두 번째로 뉴욕에 대해 쓰는 것이 조금은 막막하다고 말한다. 가본 적이 없어도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뉴욕은 "너무나 많이 노출되어 새로운 눈으로 보기 힘든 도시"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이 책의 초점은 '관광'이 아니라 '미술', 그것도 '뉴욕의 현대미술'에 맞추어져 있다. 저자가 직접 말하는 이 책의 기획은 이렇다. "<뉴욕에서 예술 찾기>는 서양 미술사를 통째로 쓸 수 있을 만한 자료와 작품들이 모여 있고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미술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곳, 젊은 예술가들이 성공을 위해 모여들며 그들이 세계 미술계의 트렌드를 움직일 수 있도록 방송과 비평계, 문화계의 주요 인사들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는 뉴욕을 여행하며 '이곳의 예술은 어떠한가?'를 둘러본 후의 기록이다"(18).

<뉴욕에서 예술 찾기>는 뉴욕의 주요한 미술관을 중심으로 그 미술관에서 만난 작품과 작가 이야기를 주(主)로 한다. 그리고 사이사이에 뉴욕과 뉴욕 여행에 관한 짧막한 스케치를 덧붙인다. 그런데 나는 무슨 이야기가 그토록 재미있었을까.

먼저, "미국이 현대미술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전쟁 덕분이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26-27). 유럽이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는 동안, 전쟁 물자를 만들며 경제력이 상승한 미국은 승전국의 이점을 다 누렸다. 유럽의 아방가르드 예술인들, 특히 유대계 예술인들이 전쟁을 피해 미국 땅으로 망명을 했고, 뉴욕 미술관에 있는 작품들 가운데 상당수가 전쟁 틈에 건너왔다. "나치는 이들 작품을 불태워 없애버리기 전에 대부분을 경매나 화상을 통해 헐값에 처분했는데 이를 계기로 뉴욕의 수집가, 화상 등이 그 작품들을 '수렁'에서 건질 수 있었고 그 덕분에 화려한 컬렉션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28). 세계사의 큰 흐름을 바꿔놓는 '전쟁'이 미술사의 큰 흐름까지 바꿔버렸음을 알 수 있다. "내가 뉴욕에 도착한 것은 꿈이 아닐까요? 그리고 뉴욕 그 자체가 놀라운 꿈이 아닐까요? 하지만 이 꿈을 창조한 것은 내가 아닙니다. (...) 여러분은 내가 이 꿈을 보고 경회할 기회를 주었으니까요"(31). 미국의 부호와 미술 관계자들의 도움으로 "목숨뿐만 아니라 예술까지 건진" 마르크 샤갈의 연설문 중 일부이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뉴욕이 이토록 화려한 예술의 중심에 설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인류 문화의 한 켠도 텅 비어버렸을 것"이라고 하지만,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있는 한반도 옆에서 전쟁의 부가 이익을 챙겼던 일본을 보는 것처럼 솔직히 미국이 억세게 운이 좋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미술을 전공하는 학도는 아니지만, 미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는 작품 뒤에 숨은 화가들의 이야기이다. 아마도 가장 극적인 요소는, "사람들은 예술가가 불행할수록 열광하고 그 열광의 열매는 작가가 아닌 엉뚱한 사람이 차지한다"(76)는 안타까운 공식 안에 있다. <뉴욕에서 예술 찾기>에도 화가들의 다채로운 삶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추상 화면으로 단숨에 미국 최고의 화가로 급부상했으나 44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불행한 천재 신화'를 남긴 '폴록'과, "흰색 꽃잎 속에 숨은 꽃술을 관능적으로 그린" 조지아 오키프의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젠더학을 공부한 저자의 이력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데) '너무나' 아름다웠고 '지나치게' 성적으로 보이는 조지아 오키프의 꽃 그림이, "비웃음당하는 '예쁜 것'을 버리는 대신 '예쁘다'는 말을 열등한 것으로 취급하는 남자들의 사고를 뒤집으려는 시도"(68)라는 해석이 그녀의 그림을 다시 보게 해주었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가장 창조적이며 가장 앞서가는 예술 분야로 꼽히는 미술계도 '전통'을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에는 무게중심을 살짝 바꾸거나 선을 잠깐 비트는 것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이 걸리기도 한다. (...) 고정관념과 인습에서 벗어나는 것을 우리는 간단히 '창조력'이라 말하지만 그 창조력을 발휘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72). <뉴욕에서 예술 찾기>는 "이념의 도구로 전락하는 예술을 거부하고 그 자체로 순수하게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하고자 한 추상화의 등장과, 팝아트의 등장을 비교하며 '도전과 저항'이라는 역사의 반복 공식을 보여준다. "현대에 팝아트에 이르러 저속한 대충매체의 이미지가 화폭에 등장했을 때",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은 젊은 작가들의 이러한 도전이 기가 막혔고 과거에 자신에게 향했던 비난을 그들에게 쏟아냈다"고 한다(107-108).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음으로써 전혀 위험하지 않게 된 추상미술 처음 등장했을 때, 그들도 똑같은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저자가 짚어주는 것처럼, "저항 없이 도입된 혁신"은 그 가치가 제대로 인식되기 쉽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과 충돌을 일으키면서 가치 논쟁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좀더 치밀해지고 세련되어질 수 있으며 그 만큼 인류의 문화는 풍요로워"(108)지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이 너무 흔해 빠져서 더 이상 아무것도 새롭지 않게 된 오늘날, 지켜야 할 예술적 가치가 없어져 버린 요즘의 풍토가 더 공허하게" 느껴진다는 저자의 말에 괜히 내 가슴도 뻥 뚫린다.

예술은 배고픈 직업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역설적이게도 예술의 꽃은 경제력, 즉 자본주의의 한 가운데서 피어나나 보다. 세계 경제의 중심이라 일컬어지는 뉴욕에서 현대미술이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술의 역사는 이제 돈과 함께 쓰여진다"(287)는 저자의 말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소장은 커녕, '그들만'의 문화 유산을 구경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남루(?)한 삶을 살고 있지만,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진, 선, 미'의 가치, 그 아름다움을 살짝 엿본 것만으로도 이렇게 충만한 채워짐을 경험하고 있으니 나도 참 어지간히 소박하다.

<뉴욕에서 예술 찾기>는 뉴욕에 대한 불편한 마음까지 그대로 드러낸다. 뉴욕 여행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뉴욕의 속살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쥐와 이가 드글거리는 화려한 도시의 이면, 악취가 심하고 환풍이 잘 되지 않는 지하철, 빚으로 생활하는 뉴요커, 불편한 화장실, 생각보다 맛 없는 음식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뉴욕 여행을 계획하며 여행을 위한 '정보'가 아니라 '채워지는 여행'을 꿈꾸는 독자라면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여행기로 읽어도 좋지만, 현대미술사라는 큰 흐름 하나를 따라가며 그림을 공부하는 재미도 솔솔한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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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여자집 2011-11-28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봤습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리라 - 하용조 목사의 이사야 강해, 이사야 40~66장
하용조 지음 / 두란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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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하용조 목사님의 설교를 이제 생생한 육성으로는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픕니다. 그 부드러운 미소와 따뜻한 음성 속에 누구보다 뜨거운 하나님의 불을 품고 계셨고, 듣는 사람의 마음에 불을 지피셨던 메시지를 기억합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리라>는 설교집에서 하용조 목사님은, 우리가 전도할 때 무관심하게 전하지 말고 "마음에 닿도록"(사 40:2)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에 닿도록"이라는 말은 '가슴에 닿도록', '눈물이 나도록', '부드럽고 편하게' 전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15). 이 말씀을 들으면서 하용조 목사님의 설교를 생각했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의 설교야말로 가슴에 콕콕 박히는 설교였습니다. 마음에 닿았고, 영혼을 울렸고, 그러면서 부드럽게 편안했습니다.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로 한국 교회의 부흥기를 이끌어 오셨고, 큐티 운동으로 말씀을 생활화하는 신앙생활의 초석을 놓았고, 각종 교육과 세미나, 출판 사업을 통해 한국 교회의 질을 높이고, 세계 선교의 선봉에 서 계셨던 하용조 목사님의 영향으로 한국 교회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은 완수하시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신 하용조 목사님을 기억하며, 그분이 남겨주신 신앙의 유산을 책으로 만나니 어깨가 더 무거워지는 느낌입니다. (나에게 자격이 있을까 하는 자괴감과 의구심도 있지만,) 이제는 그 바통을 이어받아 우리가 달려가야 할 차례라고 생각합니다. 



 

"구약 속에 있는 신약"

 
하용조 목사님은 '마태복음 강해 설교'만 5년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리라>는 총 66장으로 이루어진 이사야 가운데 40장부터 66장까지의 강해 설교입니다. 이사야서 40장부터 66장까지 총 54편의 설교를 하셨는데, 그 분량이 500페이지에 달합니다. 하용조 목사님은 "작은 성경" 또는 "구약 속에 있는 신약"이라 불리는 '이사야'서가 신기하게도 신약성경의 구조와 똑같이 이루어져 있음을 일깨워주십니다. 구약 39권, 신약 27권 이렇게 총 66권으로 이루어진 성경처럼, 이사야서는 심판 메시지라 불리는 전반부가 1-39장까지이며, 구원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후반부가 40장부터 66장까지 27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은 구약 속에 있는 신약, 즉 이사야서를 통해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도록 해주십니다. 메시아의 축복을 선포하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며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시며, 우리에게 남아 있는 사명을 일깨워주십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리라>는 5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지만, 부드럽게 편안하게 읽힙니다. 복음의 불이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동안 어느 새 페이지가 빠른 속도로 넘어가고 있음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리라>를 읽으며, 하용조 목사님이 그토록 선교에 집중하셨던 이유를 다시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은 이사야를 통해 선포되는 구원 메시지가 사도행전과 통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계셨습니다. 이사야 마지막 장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불러서 두 가지를 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사 66:19). 그것은 징조와 선교의 사명입니다(483). "하나님께서 징조를 세워 열방으로 파송해서 하나님의 명성을 들은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여러 나라에 영광을 알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하용조 목사님의 목회는 바로 이 말씀에 대한 응답이요, 이 예언에 대한 성취였던 것입니다. 

많은 성도가 이사야서 말씀을 그토록 사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이사야를 통해 선포되는 절절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 신음하는 우리를 다시 부르시고, 우리의 죄보다 크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하게 덮으시며,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말씀하시며 굳세게 하시고 강하게 붙드시는 하나님, 상상할 수 없는 사명을 맡기시며, 영원한 약속을 주시는 그 사랑의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은 얼마나 크고 크시며, 얼마나 위대하고 위대하신 사랑인지, "손에서 놓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가장 사랑하는" 젖먹이를 부모는 혹시 잊을지라도 결코 우리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 아예 우리를 그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내 백성을 위로하리라>는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우리 가슴에 쏟아 붓는 듯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산다고 하셨습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리라>는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이 음성입니다.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세우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리라>는 이제 떠나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명기 말씀을 들려주었던 모세의 마지막 유언처럼, 꼭 하용조 목사님이 믿는 자들에게 남겨주신 유언으로 읽힙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이며, 우리를 살리는 복음의 진수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사모하게 하며,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함으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줍니다. 의심이 물러가고, 염려와 근심이 떠나가며, 복음으로 다시 무장되는 뜨거운 가슴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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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우리를 깨우시는 음성 - <안식>의 저자 마르바 던의 요일별 묵상집
마르바 던 지음, 유정희 옮김 / 두란노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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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구촌교회 이동원 목사님이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책이 마르바 던의 <안식>이라고 했다. 마르바 던은 "유진 피턴슨, 리처드 포스터와 함게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탁월한 영성신학자"라는 평을 듣는 인물이다. 같은 말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했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많이 달라진다. 대궐같은 집에서 호의호식 사람이 "아픔도 축복"이라고 가르치는 것과 고난의 한 가운데 서있는 사람이 "아픔도 축복"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분명 그 울림의 강도가 다를 것이다. 마르바 던의 영성신학이 어떤 삶의 자리에서 형성된 것인지를 알았을 때, 그것은 한마디로 전율이었다. "하나님, 너무 가혹하시지 않나요?"라고 그녀를 대신해 묻고 싶을 만큼 그녀의 생은 고난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녀의 영성신학은 "불같은 시련의 현장 한 가운데서" 피어난 '진주'라 말하고 싶다.

"어린 시설 홍역을 앓다가 당뇨병과 저혈압을 얻었으며, 한쪽 눈이 실명되었고, 신장이식 수술과 유방암 수술도 받았다. 20년 전에는 가벼운 관절 이상인 한쪽 다리를 의사의 오진으로 절단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 책의 한국 출간과 방한 일정을 한 달여 앞두고 사고로 나머지 한쪽 다리마저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자신의 생을 두고 "아픔도 축복"이라고 고백한다"(앞날개 中에서). 

감당하기 힘든 시련 가운데 신음하는 동기가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과 이렇게 까까운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던 것을 기억한다. <날마다 우리를 깨우시는 음성>을 읽으니, 마르바 던의 인생이야말로 하나님과 가까운 삶이었구나 하는 것을 절로 인정하게 된다.  



 

<날마다 우리를 깨우시는 음성>은 마르바 던이 쓴 10권의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1년 동안 매일 한 페이지씩 읽으며 묵상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요일별로, 주일은 '교회', 월요일은 '관계', 화요일은 '자녀', 수요일은 '시련의 때', 목요일은 '희망', 금요일은 하나님의 '성품', 토요일은 '안식'을 주제로 묵상한다. <날마다 우리를 깨우시는 음성>은 시대를 향한 메시지이며, 교회 공동체를 향한 가르침이며, 성도의 삶을 견코케 하는 교훈이다. 시대를 분별하는 눈이 탁월하며, 그녀의 가르침은 견고한 신학을 토대로 예리한 빛을 발하고 있다.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참으로 냉담하게 만드는 시대의 정체를 간파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충만하신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살며 그리스도가 하신 것처럼 악의 정체를 드러내라고 선포한다. 우리에게 이미 승리자 보장되어 있음을 알리며 믿음의 싸움을 싸우라고 도전한다.

<날마다 우리를 깨우시는 음성>, 참 잘 지은 책 제목이다! 마르바 던의 가르침은 진리를 모르고 혼란 속에 허우적거리는 성도를 깨우는 음성이다. 우리를 둘러싼 시대를 조명하며 성도의 삶에 적용되어야 할 말씀의 원리를 풀어주기 때문에, 말씀이 적용되어져야 할 삶의 자리를 찾을 수 있고, 스스로의 모습을 반성해볼 수 있다. 신학적 토대가 견고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자식'을 자라게 해준다.

"교회가 참으로 그 존재 자체를 즐거워하는 공동체가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처음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이런 질문들이 가슴 속에 남아 생각을 괴롭히고, 기도를 괴롭힌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자녀에게 무엇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은 무엇인가 하는 새로운 고민을 던져준다. 
 



 

 
짧은 메시지가 깊은 여운을 남기지만, 매일 읽으며 묵상하지 않고 쭉 읽어나가니 (부분 발췌라는 것을 알고 읽어서 그런지)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메시지가 뚝뚝 끊기는 느낌이 든다. 그녀의 가르침에 더 깊이 다가가고 싶은 바람이 생긴다. 마르바 던은 이 책의 서문에서 "이 발췌문들을 읽고 그 내용이 수록된 책 전체를 일곡 싶은 마음이 생기기를 기도"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녀의 기도가 응답되고 있다고 알려주고 싶다.

소란하고 요란한 세상, 세상의 소문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 새 마음은 헛된 것과 더러운 욕심들로 가득 차고, 세상의 속삭임을 따라가다 길을 잃기도 한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믿음의 삶을 살아야지 결심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다. <날마다 우리를 깨우시는 음성>을 읽다 보니 지혜가 거리에서 소리쳐 우리는 부른다는 잠언의 말씀이 떠올랐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 가까이에서 이렇게 우리를 깨우고 있다. 그런데 넘치고 넘쳐서 은혜가 너무 흔해지는 바람에 오히려 '힘써' 진리를 알고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일에 게을러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날마다 우리를 깨우시는 음성>을 통해 내 자신을 향한 관심을 하나님께 돌리고,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분이 우리에게 어떤 은사를 주셨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지탱해주는지에 주의를 집중하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그 축복들을 생각할 때 우리의 사랑은 되살아나고, 자라나고, 유지된다"(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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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인 서울 Agit in Seoul - 컬처.아트.트렌드.피플이 만드는 거리 컬렉션, 개정판 in Seoul 시리즈
민은실 외 지음, 백경호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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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데 있다."
('아지트 인 서울' 포토그래퍼 / 백경호) 

  



 

서울 여행을 테마로 한 책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서울 여행에 관한 책을 볼 때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단조로운 것인지 깜짝 깜짝 놀라곤 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며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의 세월을 겹겹이 쌓아가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안 가본 곳이 얼마나 많고 모르는 곳이 얼마나 많은지. 내 좁은 생활 반경이 깨달아질 때마다, '정말이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하는 물음이 불쑥 튀어나온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한다"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다. 하긴 요즘 세상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하는 그 익숙한 거리조차도 하루가 멀다 하고 모습을 바꾸는 통에 영 정신이 없으니, 매일 변신하는 서울은 어쩌면 영원히 내게 낯선 세상일지도 모르겠다. 

<아지트 인 서울>이라는 제목을 보며 나는 '고향'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나 보다. 서울이 고향이라 고향이 없다,고 생각하는 내 마른 감성에 비밀스러운 '아지트' 하나 점찍어두고 싶었다. 그런데 이 세련되고 예쁜 책은 그것보다 더 공격적이다. 감성이 통하는 공간을 찾아내어 그것을 소비하고 즐기는 차원을 넘어, 나만의 감성 공간을 직접 연출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아지트 인 서울>이라는 프로젝트를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나는 '자기 주장'이라고 하고 싶다. 


 

 

 
"즐길 거리가 비슷한 사람들이 골목골목 모여 그곳을 하나의 문화 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아지트 인 서울>은 독특하다. 제주도에는 올레길이 있고, 지리산에는 둘레길이 있고, 서울에도 성곽길이 있다. 길이 있었고, 길을 따라 길을 낸 길들이다. 그런데 <아지트 인 서울>에는 '14개 코드'로 이루어진 문화의 길이 있다. 길이 있고, 문화가 형성되었고, 문화를 따라 길을 내었다. 정동 정동길, 창담동 압구정로, 서래마을 서래로/몽마르뜨길, 경복궁 옆 효자로, 이태원1동 이태원2길, 신사동 가로수길, 홍대앞 다복길/미래길/송정래길, 이태원2동 회나무길, 상첨동 화개길/삼청동길, 신사동 멋샘길, 서교동 솔내길/상수동 독막길, 대학로 동숭길, 북촌 계동길/창덕궁길, 한남동 꼼데가르송길이 그것이다.  






 
<아지트 인 서울>은 "일정한 거리마다 문화적인 코드를 찾아내었다." <아지트 인 서울>이 소개하고 있는 14개의 거리는 서울의 것이기도 하면서, <아지트 인 서울>의 프로젝트에 의해 새롭게 탄생한 길이기도 하다. <아지트 인 서울>이 하나의 테마로 길을 엮어내고, 그곳에 의미를 부여하고, 새롭게 생명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아지트 인 서울> 안에서 "길은 더 이상  길이 아니고 도시의 문화가 된다."

<아지트 인 서울>을 들고 14개 코드로 묶인 문화의 길을 탐방해보는 것도 색다른 서울 여행이 될 것 같다. 예술의 거리, 뷰티 놀이터, 꽃향기 가득한 언덕길, 옛 향취가 그대로 남은 동네, 다국적인 맛의 향연을 즐길 수 있는 길, 발랄한 아이디어가 스며드는 쇼룸, 젊음의 열기와 예술가의 끼가 만난 자유로운 공간, 셰프들의 접대 명가, 예술과 소통하는 길, 커피향 가득한 길, 혼자놀기 족을 위한 문화지구, 거리의 예술, 살아 있는 과거의 그윽함, 부티크와 프리미엄, 그리고 예술이 만나는 곳 등 다양한 즐거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가보지 않은 곳이 더 많지만,  <아지트 인 서울>은 가본 곳까지 낯설게 만들어버리는 힘이 있다.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그곳의 즐거움에 새롭게 눈뜨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호기심 가득했던 어릴 적 세상은 낯설다는 한 가지만으로도 매력이 가득했는데, 나이를 먹고 아는 것(?)이 많아지니 호기심보다는 주눅이 더 많이 생기나 보다. 솔직히 어떤 길들은 가보기도 전에 위화감이 느껴진다. 명품숍이 즐비한 거리에 가려면 명품 몇 개 휘감이 줘야 할 듯한 위화감말이다. 어쩐지 어떤 거리들은 '우리의 서울 거리'가 아니라, '그들만의 서울 거리' 같은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빈과 부의 거리감이라기보다 오히려 문화적인 거리감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나도 서울에 꽤 오래 살았는데, 왜 이리 나의 삶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지, 정말 작정하고 서울 거리에 나서봐야겠다. 그만큼 아직 내가 알고 즐겨야 할 즐거움이 많이 숨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아지트 인 서울>이 내게는 한마디로 '자기 주장'이었다, 라고 한 것은 거리마다 강력한 자기 표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를 반성했다. 이 멋진 거리 속에 나만의 아지트가 아직 없다는 것은에서 내가 나를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하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떤 길은 추억이 있어 좋았고, 때로 어떤 길은 새로운 세계에서 좋았고, 어떤 길은 꿈의 공간 같아 좋았다. 그리고 서울의 거리가 두드러진 개성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반가웠다. 그 개성에서 서울의 새로운 생기와 활력을 읽었다. 무엇보다 고급스럽고 감각적인 예쁜 책 덕분에 눈이 호강했다. 여행 가이드북으로 보기에는 산만한 구석도 없지 않지만, 전문 잡지 같은 느낌이 들만큼 톡톡 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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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정의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10
글로리아 웰런 지음, 범경화 옮김 / 내인생의책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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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동네 모든 집의 전기가 일시에 나가 버렸다.
누군가 억지로 문을 따고 집 안으로 몰려들어 왔고,
다짜고짜 오빠 머리에 두건을 씌우고는 수갑을 채워 끌고 가버렸다.
든 것을 뒤엎어 버렸고,
오빠 방은 통째로 비워졌다.
그리고 나서 다들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11-13).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최악의 인권 침해 사건이자 정치적 탄압을 그들은 '추악한 전쟁'(Guerra Sucia)이라 불렀다. 군부 정권은 좌익 게릴라 소탕이라는 명분 아래 무제한의 국가 폭력을 동원하여 무고한 시민들을 불법체포, 납치, 고문, 사살하였다. 정권에 비협조적이다 싶은 사람들을 불순분자로 지목하여 불법적인 체포를 자행한 것은 물론 그 가족들도 납치, 살해햇다. 영유아를 탈취하여 강제 입양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추악한 혹은 더러운'이라는 형용사가 붙게 되었고, 그 탄압의 규모나 성격이 '전쟁' 못지않았다. 추악한 전쟁이 전개되는 동안 아르헨티나에서는 그 누구도 추악한 전쟁에 대해서 언급할 수 없는 공포의 상황이 지속되었고, 구변 사람들은 끊임없이 강제 실종되었다.

평온한 저녁, 가족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오빠 '에두와르도'가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다. 동생 '실비아'는 불법 체포된 오빠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힌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는 체되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일컬어 '실종자들'이라고 불렀다. 실비아는 오빠 에두와르도가 '실종자'가 되기 전까지는, "어떤 사악한 것도 우리에게 닿을 수 없다는 믿음을 가친 채" 세상을 바라보았다(14). 무고한 사람들이 끌려가고, 이유 없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항의해봤자 소용이 없다고, 그냥 우리 인생이나 잘 살면 되는 거라고 믿으며 말이다. 오빠 에두와르도는 이런 실비아를 이렇게 비난했었다. "실비아, 바로 네 코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그렇게 눈 딱감고 모른 체할 수가 있어? 어쩜 그렇게 아무 생각 없는 사람처럼 지낼 수가 있느냔 말이다. 넌 지금 이 나라가 어떤 시국인지 관심도 없지?"(22) 그런데 이제 실비아도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랑하는 오빠가 끌려갔기 때문이다. 전국 각지는 죽음이 넘쳐나는 전쟁터로 전락했고, 사랑하는 오빠가 지금 어디에서 어떤 험악한 일을 당하고 있는지 모른 채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통이었다. 


<그녀의 정의>는 동생 실비아와 오빠 에두와르도가 서로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서로의 편지가 서로에게 전달될 수 없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독자를 향한 '독백'이 된다. "체제에 순응하는 것만이 행복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미덕이라고 믿었던" 실비아는 오빠를 지키기 위해 행동에 나서고, 국가 폭력에 저항하며 행동에 나섰던 오빠 에두와르도는 불법 감금과 고문에 시달리면서도 정의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다. 오빠를 구출하기 위해 실비아가 계획한 일은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여 권력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그녀의 오빠를 잡아간 사람의 아들을 유혹하여, 자신의 오빠를 풀어주게 할 속셈이다. 그녀의 위태로운 계획은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제목만 보면 당연히 실비아가 주인공이여야 하지만 실비아의 무모함보다는, 그 역시 무모했지만 점점 단단해지는 오빠 에두와르도의 변화에 더 공감이 된다. "난 좀 더 신중했어야 했어. 내 이상과 허영심이 엉뚱하게 얽혀버렸지. 나라가 잘못 돌아간다고 느꼈을 때 나는 뭔가 바꾸는 데에 동참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꼈어. 하지만 용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조용히 몰래 다가가야 한다는 사실은 몰랐던 거야. 용이 삼치는 사람들의 목숨만 생각했어. 또 내 행동이 너나 부모님에게 어떤 해가 될지도 고려하지 못했고, 난 아무런 생각 없이 무턱대고 전장으로 돌진하는 병사나 다름없었어"(151).

아르헨티나, 나에게는 월드컵 시즌 때나 한 번쯤 관심을 가질까 말까 한 먼 이웃 나라이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 그 나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 오래 전 일도 아닌데, 이제야 이 불편한 역사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다. 그들도 비틀린 체제 속에서 신음했었구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구촌에서 자행되었구나, 그리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자행되고 있겠지 하는 생각들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 생각 사이로, 내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안도감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실비아의 정의는 그런 사악한 일이 그녀 인생에 직접 닥치기 '전'과 '후'로 나뉜다. 역사는, '너'에게 일어나는 불법을 계속 외면한다면 언젠가 그 불법이 자라 '나'(가족)를 삼켜버릴 것이라는 경보음을 계속 울리는데도, 언제나 우리는 한 발 물러서 있기를 원하니까. 그래서일까. 가족을 구하기 위해 희생하고자 하는 실비아보다, 무모하지만 행동하는 '에두와르도'의 진심이 더 나를 울린다.

소설로서 <그녀의 정의>가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사건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는 클라이맥스에서부터 갑자기 '동화'가 되어버린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그 '동화적 해피앤딩'이 불편한 역사의 사실성과 현실감을 떨어뜨린다고나 할까. 불행한 결말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극적인 요소가 '너무' 극적이라 당황스럽다. 소설적 재미보다는 우리가 알아야 할 역사적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만족감을 주는 책이다.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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