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기술 - 심리학이 알려주는 소통의 지도
대니얼 J. 시겔 지음, 오혜경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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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뇌를 써서 마음을 만들어간다"(393).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지만, 우리 마음은 상처를 입으면 마음의 문부터 닫아건다. 빗장을 채워 소통의 길을 봉쇄한다. 상처 따위 다시 받지 않겠다는 결의가 마음을 한껏 움츠리는 것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안전한 선택일지는 모르나, 행복의 길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음을 여는 기술>의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도록 만들어진 상태로 태어난다"(37). 아이가 생존하려면 엄마(양육자)와 연결되어야 하듯이, "생기를 느끼고 웰빙을 누리려면 지속적으로 다른 사람과 연결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혼자서는 절대 행복할 수 없게 생겨먹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혼자 잘 살아보겠다고 큰소리 치며 아무리 고집 부려도 소용없다. 쓰리더라도 소통하지 않는 마음으로는 '온전한'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인간을 이해하고 탐구하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가 인간을 하나의 물질로 보는 견해라면,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정신(마음)을 빼놓고는 인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견해이다. <마음을 여는 기술>은 (쉽게 말해) 그 둘의 통합한 심리학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통제할 수 없는 분노 발작으로 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등학교 학생에게 그런 분노 발작이 유발되는 뇌의 기능을 설명하고, 그러한 의식(마음의 작동)을 의식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통합적인 이해를 통해 분노 발작이라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다스리는 방식이다.

<마음을 여는 기술>은 '마음, 뇌, 관계'라는 요소가 우리의 웰빙을 결정한는 삼각형이라고 설명한다. "마음이 잘 작동할 때, 즉 뇌가 통합된 전체로 기능할 때 인간관계는 발전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속속들이 연결해주는 신호를 주고받으면서 다른 사람과 연결되는데, <마음을 여는 기술>은 그러한 신호 주고받기에 관여하는 뇌의 기능을 이해하고, 그것의 통합이 이루어지는 마음을 성찰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연결되도록 만들어진 상태로 태어나는 인간은 서로의 '관계' 속에서 하루에 열두 번도 더 감정의 소용돌이를 경험하는데, <마음을 여는 기술>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출발한다(12). 이것은 성숙한 반응을 통한 성숙한 관계를 지향하는 우리의 과제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단순히 생각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각을 지각하는 능력을 개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러한 생각이 그저 마음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활동일 뿐임을 깨닫고 그것에 점령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마음의 반사작용에 그냥 반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풍요로움을 수용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생각에 휩쓸려가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지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서 그것이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 진정으로 이해하고 더 깊은 공감의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마음을 여는 기술>은 건강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세 가지 마음의 지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뇌는 자신을 통찰하게 해주는 '나의 지도'와 다른 사람을 통찰할 수 있게 해주는 '당신의 지도'를 만든다. 또한 우리가 맺는 관계의 표상인 '우리의 지도'도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지도들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지각할 수 없다"(33). 중앙 전전두피질의 아홉 가지 기능(웰빙에 꼭 필요한 요소) - 신체를 조절하고, 다른 사람과 조율하고, 감정의 균형을 잡고, 유연하게 반응하고, 두려움을 진정시키고, 공감, 통찰, 도덕의식, 직관을 만들어내는 기술 - 을 범주로 한 '성찰'(개방성, 관찰, 객관성)을 훈련하여 (세 가지) 마음의 지도를 읽어내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며, 저자가 제시하는 치료 방법이기도 하다. 

<마음을 여는 기술>은 '뇌의 기능'을 출발선으로 삼은 임상이라는 점에서 흥미롭고 독특한 심리학이다. 추천사를 쓴 대니얼 골먼이 말한 것처럼, <마음을 여는 기술>은 "뇌가 사회적 장기임을 상기시켜준다." (이해한 대로 비유를 하자면,) 실연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실연 당했을 때 나타나는 뇌의 기능과 신체적 반응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겪는 감정(고통)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거리가 생긴다. 자신과 다른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개방적으로 관찰하고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성찰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여는 기술> 1부는 "기본적인 개념들을 설명하고, 뇌과학의 개요를 소개하며, 마음과 성신 건강에 대한 실용적인 정의를 제공하는" 이론적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2부는 환자들의 사례를 통해 마인드사이트 기술을 개발하는 단계와 건강한 마음을 만들 수 있는 실질적인 기술을 가르쳐주고 있다. 전문적인 지식을 다루지만 지루하지 않고 대중적으로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무엇보다 심리적인 측면을 '뇌'가 작동하는 방식을 통해 설명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책을 읽으며 내 자신 안에 일어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좀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한 듯한 느낌이 든다. 이 책의 표현대로 하자면 "마음의 확장"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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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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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 팻, 비만과 집착의 문화인류학
돈 쿨릭.앤 메넬리 엮음, 김명희 옮김 / 소동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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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팻(fat)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선진국뿐 아니라 개발도상국에서도 사람들은 점점 더 뚱뚱해져서, 사모아는 도시 인구의 75퍼센트가 비만이다. 비만은 이제 '전염병'과 같은 수준에 도달했다"(12). 이러한 보고를 접한 일부 사람들은 자신은 비만으로부터 안전하며,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 반대로, 비만한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한숨 짓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시 이제 비만은 세계적인 트렌드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은 위안을 얻는 사람도 있을까?) 또 한편으로는 한창 박차를 가하고 있는 다이어트 강도를 더 높여야겠다고 결의를 다질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날씬한 몸에 그토록 집착하면서도 실제로는 더 뚱뚱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257).

<비만과 집착의 문화인류학, Fat(팻)>은 13명의 인류학자와 비만인권운동가 1명이 다양한 측면에서 '팻'(지방, 살, 비만)을 탐험하고 분석한 글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마디로 "뚱뚱함은 문화가 만들어낸 구성물"이라는 주장이다. "인류학은, 한 사람의 욕망은 매우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문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가르친다"(200). 인류학의 이러한 가르침은 '뚱뚱한 사람을 죄인 취급하는 사회'에 일침을 가한다. (하나가 옳다 주장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팻에 깃든 다중적 의미와 문화적 아이러니를 고찰함으로, 뚱뚱함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단순한 시각을 교정하여 팻을 비판적으로 읽고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비만과 집착의 문화인류학, Fat(팻)>이 가르쳐주는 핵심적인 사실 하나는, 알고보면 "날마다 우리에게 퍼부어지는 문화적 경구는 모순적"이라는 사실이다. 요요 현상 덕분에 더욱 '비대해지고' 있는 건강-뷰티-헬스 산업은 우리에게 무조건 살을 빼야한다고 주장하지만, 팻(지방, 이상적인 몸매 등)은 사회(문화)에 따라 다르게 평가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팻(지방)은 성장이나 풍요로움을 뜻하기도 하며, 권력과 부의 상징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기름진 음식과 뚱뚱한 몸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부의 상징인 반면, 현대 북아메리카와 유럽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상징이다"(9). 또 "기름진 음식에 둘러싸여 있는 미국인들에게 지방이 가득한 음식은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인 동시에 괴로운 악몽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이 배고픔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피스타코 이야기가 떠도는 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빈곤에 시달리거나 매일 그러한 빈곤을 목도한다 그래서 살집이 붙어 있다는 것은 생명과 건강의 표시다"(83).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인류학의 이러한 가르침에 불구하고 우리를 둘러싼 그 '비민과 집착'의 문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 아닐까. 여성의 뚱뚱한 몸매를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니제르 종족의 미적 기준을 연구한 한 인류학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그렇지만 옷과 머리 모양을 바꾸는 것과는 달리 외국의 이런 미적 기준에 맞추기 위해 살을 찌우는 것은 나 자신을 배신하고 내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몸매도 이곳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풍만한 몸매처럼 내가 살아온 문화 속에서 형성된 것일 뿐이지만, 내 자아상에 너무 깊숙이 박혀 있어서 바꿀 수가 없었다"(30). 다시 말해, 이상적인 체형이란 광범위한 문화적 가치에 기반을 둔 관습과 신념이 몸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비만을 죄악시하고 깡마른 몸매를 이상화하는 문화에 자신의 '몸'으로 직접 저항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이다. (모두가 살을 빼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는데 아무리 이상적인 몸래에 대한 관념이 상대적인 것이라 해도 누가 보기에도 날씬한 '현재' 나의 몸을 포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생각해야 봐야 할 점은, 니제르 여성보다 더 많은 자유와 기회를 가진 서양 여성들이 왜 그렇게 미적 이상 앞에서 무력해지고 위협을 느끼는가 하는 물음이다. 그것은 문화 평론가 로라 키프니스의 말에서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 "문화 평론가 로라 키프니스는 비만을 가난한 사람들의 질병이라고 보는 대신, 사회적 지위가 하강할 것을 예견해 주는 표시라고 말한다. 뚱뚱한 사람은 취직할 확률이 적고, 취직한다고 해도 승진할 기회가 많지 않다"(114). 팻(지방, 살)을 죄악시 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상적인 몸매'는 (무시할 수 없는 권력으로 작동하는 하나의) 상징적 자본으로 기능하고 있다.

<비만과 집착의 문화인류학, Fat(팻)>은 인류학적 연구의 결과물로 탄생한 학술적 논의이지만, 음식(올리브유, 돼지비계, 스팸 등), 뚱보 포르노, 살에 관한 10대 소녀들의 담화, 지방 빼는 약(다이어트 약), 커피 등 일상적이고 친근한 문화적 코드를 매개로 '팻'에 관한 성별, 경제, 사회, 정치적 함의를 재밌고 쉽게 풀어내었다. 13명의 인류학자와 1명의 비만인권운동가가 전하는 '팻'에 관한 논의는 한마디로 '혼돈'이라고 할 만큼 다양하고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 책이 지닌 진정한 가치는 다음의 한 문장으로 대변할 수 있을 듯하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문화를 소비하는 일을 멈추고 문화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때, 우리는 현실을 만들고 변화시킨다"(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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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말고 꽃을 보라 - 정호승의 인생 동화
정호승 지음, 박항률 그림 / 해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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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들려주는 동화, 따뜻한 지혜로 가득합니다.

 
배추애벌레는 매일같이 배춧잎을 갉아먹는 게 일입니다. 배춧잎을 갉아먹고 살도록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배추애벌레의 운명입니다. 그러니 배추애벌레가 배춧잎을 갉아먹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데 은주 할머니는 배추밭에 올 때마다 벌컥벌컥 화를 냅니다. 요놈의 벌레들 때문에 배추농사 망친다고 벌레를 다 죽여버린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배추애벌레를 "해충"이라고 합니다. 사람들한테 해로움을 주는 벌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멋대로 지어낸 말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그렇게 여기리라고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배추애벌레는 자꾸 눈물이 났습니다. 배추애벌레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해충이 아닙니다. 그냥 배추애벌레일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생각은 또 얼마나 간사한지 모릅니다. 한 친구가 눈물을 흘리는 배추애벌레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배추흰나비가 될 때까지 꾹 참고 기다려야 돼. 그때가 되면 사람들이 우리를 또 익충이라고 해." 나비가 되어 농작물들의 꽃가루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주는 일을 한다고 익충이랍니다.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장에서 마음대로 지어낸 말입니다(216-220).

지구상에 사는 생명 중에 자연의 이치에 가장 어둡고, 이기적이고, 불평이 많은 것이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배추애벌레를 보며 '해충'이라 부르고 그 애벌레가 배추흰나비가 되면 다시 '익충'이라 부르는 사람들의 이기심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자기를 '해충'이라 부르는 사람들 때문에 슬퍼하는 배추애벌레에게 "아니야, 그건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야"라고 일러주는 지혜자의 목소리가 제 가슴 속에도 큰 울림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오로지 내 입장에서 상대를 함부로 재단하지는 않았던가. 또 자기 입장에서 자기 편의대로 말하는 목소리에 내가 흔들리지는 않았던가.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제는 그런 목소리를 들어도 전처럼 크게 상처받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인생 동화 <울지 말고 꽃을 보라>에는 이러한 지혜가 가득합니다. 제목처럼 우리의 시각을 교정해주는 책입니다. 늘 흘러 넘치는 샘물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샘물은 흘러 넘치지 않으면 썪고 만다는 것, 희생과 기다림(인내)이 있어야 진짜 사랑이라는 것, 흔히 눈물이나 고난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겨울을 견디어야 하는 매화처럼 인생에는 눈물과 고난도 필요하다는 것. 시인은 동화(이야기)의 형식을 빌어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를 들려줍니다. 오래 우려낸 진국처럼 깊은 맛이 납니다. 봄날의 햇살처럼 차가워진 심장을 데워주는 따뜻함으로 가득합니다. 이야기 하나하나가 모두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착한 책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같은 것을 보면서도 사람들의 시각은 얼마나 제각각인지요. 그런데 같은 상황을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에 따라 그 결말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옛말에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했습니다. 같은 상황에서 절망할 수도 있고 희망을 품을 수도 있다면, 이왕이면 희망을 품으며 살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좋고 옳은 일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서 희망이 저절로 품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꾸 읽어서 내 것으로 만들면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에너지원이 되어줄 것입니다.
 

이 서평은 해냄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료로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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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차일드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3-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3
존 하트 지음, 박산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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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이 가족은 아름다운 가족이었다. 그러나 '조니'의 쌍둥이 여동생이 실종된 그날, 그녀의 짧은 생도 함께 실종되었고, 그 가족은 파멸됐다. '엘리사'를 데리러 가야 할 시간을 깜빡한 아버지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다 떠나버렸고, 엄마는 망가져버렸다. 그런데 엘리사의 실종으로 괴로워하는 또 한 사람이 있다. 그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 '헌트.' 그 역시 지난 1년 동안의 불면의 밤들과 고뇌, 12개월에 걸쳐 지속된 실패와 강박적으로 그 사건에만 매달리느라 박살난 가정으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 1년 내내 그는 결코 그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352).

<라스트 차일드>는 "잃어버린 쌍둥이 여동생을 찾아 떠난 열세 살 소년(조니)의 슬픈 여행"을 이야기한다. 이 열세 살 소년은 왜 "소년다움"을 잃어버리고 잔혹한 세상에 홀로 맞서야 했을까. 떠나버린 아버지는 소식도 없고, 약에 취한 엄마는 오히려 조니가 돌봐야 할 형편이며, 엄마와 조니가 자신의 신세를 지게 만든 켄은 엄마를 더욱 망가뜨리며 조니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친척과 이웃은 무관심하고, 동생을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약속한 형사는 계속 실패하는 중이고, 매일 밤 간절히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외면하셨다. "누군가 그에게 왜 여느 아이들과 다른지, 왜 그렇게 얌전히 있는 건지, 그의 눈이 왜 그렇게 모든 빛을 삼켜버리는 것처럼 보이는지 물어보면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안전한 곳은 없다는 걸, 자기 집 뒷마당이든, 놀이터든, 집 앞 현관이든, 혹은 마을 끄트머리를 지나가는 한적한 도로든 안전한 곳은 결코 없다는 걸 일찍 깨우쳤다고. 세상에 안전한 곳이란 없으며, 나를 보호해줄 사람도 없다고"(16).

조니는 쌍둥이 동생 엘리사가 성범죄자(소아성애병자)에게 납치 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콜로라도에서 유괴된 여자아이를 찾았다는 뉴스는 조니의 마음을 더욱 조바심나게 했다. 그 여자아이는 유괴된 지 1년이나 됐는데 집에서 겨우 세 블록 떠얼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결국 실종된 아이는 "항상 가까이 있었다"는 게 밝혀진다. 엘리사가 가족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지하실에 파놓은 흙구덩이 속에 갇혀 있다는 절망적인 확신이, 그리고 그 악몽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이 직접 이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믿음이 조니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고, 냉혹한 사람들, 비열한 거리로 내몰았다.

"부당하고, 비극적이고,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운 일이 넘쳐나는 게 세상이다"(170). <라스트 차일드>가 보여주는 세상, 열세 살 소년이 마주한 세상은 '우리도 익히 아는 세상'이다. 그 거대한 부조리와 위선과 잔혹함과 비극적인 세상의 정체는 폭로될수록 오히려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라스트 차일드>가 폭로하는 세상을 마주하며 그 세상의 실체가 진실이라며 체념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미 그 비정한 세상에 압사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열세 살 꼬마 주인공은 정신을 더 똑바로 차리고 자신을 더욱 강하게 무장하려 노력한다.

<라스트 차일드>는 "너무나 많은 죽음과 너무나 많은 의문"이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 500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이 대작은, 시종일관 긴박한 템포를 늦추지 않다가 클라이맥스에 찍고 나서도 거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모든 의문이 풀어지며 각각의 사건이 제자리를 찾는다. 엉커버린 사건의 실타래가 모두 풀어지는 순간, 독자를 휘어잡는 감정은 어쩌면 깊은 허무일지도 모른다. 악몽 같은 시간, 지옥 같은 삶의 진짜 비극은, 어쩌면 그 시작(원인)이 너무도 '사소하다'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의 모든 비극의 시작이 열매를 한 입 베어문 한 여인의 지극히 사소한 행동 하나에서 시작된 것처럼 말이다.

<라스트 차일드>의 압권은 긴박한 전개, 문학적 감각을 꼽을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레위 프리맨틀"이라는 인물이 빚어내는 독특한 분위기와 메시지를 꼽고 싶다. "레위 프리맨틀"은 영화 <그린 마일>에 나오는 신비한 죄수 '존 커피'를 연상시킨다. 거구의 몸집에 흑인, 흉악범처럼 생겼지만 사실은 어린 아이와 같은 순진한 눈망울과 다정한 마음을 지녔고, 어리숙해보이지만 세상의 이치를 누구보다 잘 꿰뚫고 있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 (스포일러의 위험성이 있어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레위 프리맨틀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신다"는 성경말씀의 한 모형을 보여준다.

'에드거 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며 미국 스릴러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다는 <라스트 차일드>의 저자 '존 하트', 그에 대한 소문은 거품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아무 생각 없이 읽었던 다음과 같은 한 문장이 사실은 얼마나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는가를 깨닫고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는 표현을 쓰고 싶을 정도로 감탄했다. "그 고리에는 쇼핑몰의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들이 걸려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천국으로 가는 열쇠로 보일 것이다"(103).

 


 

"악은 인간의 마음에 자라난 암과 같아"(365).

 
조니는 레위 프리맨틀에게서 "삶은 순환"이라는 교훈을 얻었다(550). 삶은 순환이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로 들린다. 비극과 환희, 불행과 행복이 순환되는 것이 삶이다. 그 순환되는 삶의 고리에서 "분명 우리 중 하나"는 옳은 씨앗을 심고 있거나, 아니면 악한(잘못된) 씨앗을 심고 있을 것이다. 누구나 비극과 환희, 불행과 행복이 순환되는 삶을 살지만, 종국엔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삶의 법칙이라고 믿는다. 조니의 할아버지가 심은 선한 씨앗의 열매를 조니가 거두게 된 것처럼 말이다. 

<라스트 차일드>를 다 읽고 난 느낌이 그래도 '행복'한 것은 그 결말에서 "시적인 아름다움"을 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잔혹한 이야기지만, 그래서 슬픔을 간직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에는 시적한 아름다움이 있다. 섣부른 추리는 금물이지만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조니가 매일 밤 하나님께 드렸던 세 가지 기도가, 그러나 하나님께 거절 당했다고 믿었던 그 조니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시는지 지켜보라고 일러주고 싶다. 조니의 세 가지 기도는 가족이 집에 오고, 엄마가 약을 끊고, 켄이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는 것이다. 혹시 '오늘' 사소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악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조니의 기도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켄이 우릴 두렵게 만든 것처럼 자신도 두려움 속에서 죽어가길 원해요. 무력하고 두려운 게 어떤 느낌인지 켄도 알길 원해요. 그리고 더 이상 우릴 건드릴 수 없는 곳으로 켄이 가버렸으면 좋겠어요"(247).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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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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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적이고 낯설고 아름답다.
독창적이고 낯설고 어렵다.

 
특히 두 가지 면에서 굉장히 독창적이고 낯선 작품이다. 첫 번째는 이것이 과연 소설인가 하는 점이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가 허구인지 경계를 구분할 수가 없다. 게다기 신문 보도 자료 같은 사진의 수록은 소설의 형식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소설에 도전하는 느낌을 준다. 두 번째는 여행기를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하는 점이다. <토성의 고리>는 영국의 동남부 지방을 여행하는 한 여행자(마치 구도의 길을 찾아떠난 순례자와 같은 분위기)가 들려주는 내면의 목소리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여행자를 따라다니며 새롭게 만나게 되는 것은 영국의 동남부가 아니라, 인류의 문명과 그 잔해이다. 공간감각을 자주 잊어버리게 된다. 시간과 시간이 교차하는 가운데 공간에 대한 지각도 몽롱해지는 기분이라고 할까. 여행자를 따라 영국의 한 지역에 서있는 눈앞으로 인류의 문명사가 흘러간다.

여행기의 형식을 빌어 사실과 허구를 직조한 소설 같지 않은 소설을 통해 작가가 하고자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한 시대 전체가 끝나는 건 한순간의 일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43).

<토성의 고리>를 읽는 내내 긴 장례행렬을 따라 걸으며, 한 때 화려하게 피어났으나 이제는 잔해만 남은 현장을 목격하며 쓸쓸함을 추모하는 경건한 조사같은 느낌을 받았다. <토성의 고리>를 읽고 난 후의 느낌을 한 문장으로 말하라고 한다면, "인류문명의 추모기도와 그 경건한 감동"이라고 요약하고 싶다. 폐허로 변해버린 숲과 저택, 멸종된 청어, 버려진 공장, 몰락한 도시, 화려한 전성기를 지나 이제는 서서히 파고드는 쇠락의 흔적, 화자가 걷는 길에 만난 풍경은 화려했던 과거에 정비례하는 비애감에 젖게 만든다. "그전에 그는 창문을 장식하는 튤립나무, 스톡, 애스터들, 먼 동인도에서 차와 설탕, 조미료, 쌀 등을 가득 담고 항구에 도착하는 궤짝, 둥근 꾸러미, 나무통들을 보면서 질투심을 느꼈지만, 이제부터는 가끔씩 자신은 왜 세상을 돌아다니면서도 거의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는지 스스로 물어보게 될 때마다 거대한 저택과 호화로운 배를 가졌지만 결국 비좁은 무덤에 묻힌 그 암스테르담 상인을, (...) 그 상인을 떠올렸다"(60).

그러나 과거는 미래를 보는 거울이라고 했던가. 남겨진 폐허는 우리가 걸어갈 그 (인생의)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미리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폐허에 가까이 갈수록 망자들의 신비로운 섬에 와 있다는 생각은 점점 사라졌고, 그 대신 미래의 어떤 대재앙으로 파멸한 우리 자신의 문명의 잔해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278).

얼마나 해박해야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이자, 독서의 문제는 내용이 너무 어렵다는 것! <토성의 고리>는 (적어도 내게는) 한 번 읽고 그 진의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은 <토성의 고리>를 읽기 전과 읽은 후로 나뉜다는 한 작가의 증언이 아니었다면,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눈으로는 글자를 읽고 있는데, 생각은 자주 길을 잃었다. 상상력 부족인지, 집중력 부족인지, 이야기의 흐름을 자주 놓쳤기 때문이다. 세계가 주목하고, 지성들이 극찬한 "대단한" 작품의 수준 높은 지루함에 도전해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권한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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