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을 훔치다
몽우 조셉킴(Joseph Kim) 지음 / 미다스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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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화가 몽우 글(文)과 붓(筆)으로 이중섭을 훔치다!

 
함석헌 선생님의 '이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제목을 빌어 이렇게 묻고 싶어집니다.
"일생에 걸쳐 마음에 품고 존경할 만한 사람을 가졌습니까?"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이 한 사람을 생각하면 힘이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났습니까?"
"훔치고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좋기만 한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작가 김영진, '꿈친구'라는 뜻에서 몽우(夢友)라고 불리는 이 화가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저자는 "이중섭만 보면 미친다"고 고백합니다. "이중섭의 그림만 보면 심장이 뛴다"고 합니다. "기분이 매우 좋아져서 울컥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끝내는 가슴이 뜨거워진다"고 합니다. 이중섭의 소 그림을 처음 보고, 그 타는 듯한 붉은색에 빠져, 뇌리에 박힌 타는 듯한 붉은색을 찾아 곤로에 불을 켜고, 책상에 불을 지르고, 종이를 태우고, 장판에 불을 지르기도 하였답니다. 저자 몽우의 삶은 천재화가 이중섭의 삶만큼이나 외롭고 고단하기만 합니다.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할 정도로 몸이 쇠약했고, 백혈병과 간질 증세, 정신 이상의 증세"가 점점 심해지고,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는 롤러코스터 같은 그의 인생에서 화가 이중섭은 그의 모든 것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에게 이중섭은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요, 가야 할 길을 안내해주는 표지판이요, 모든 것을 불사르고라도 하나가 되고 싶은 열망 그 자체입니다.

<이중섭을 훔치다>는 이중섭에 미친 저자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우리 겨레의 자랑스러운 천재화가 이중섭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몹시 희미한 기억이지만, 어릴 적 이중섭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소를 그리는 화가였고, 특이하게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던 '기인'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중섭은 단기간 안에 국민화가가 된 최초의 화가라고 합니다. 저자는 그 이유가 그의 작품보다 이중섭의 사연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슈 때문이었다고 진단합니다.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고, 밥을 굶고, '담배갑(은박지)'에 그림을 그리고, 단명을 한 '광기'어린 그의 사연에만 관심을 가졌던 독자들에게, 저자는 <이중섭을 훔치다>를 통해 이중섭을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줍니다.

이중섭, 그는 알면 알수록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중섭을 '더 알고' 싶고, 그의 모든 것을 '훔쳐내고 싶은' 저자의 애정이 이중섭을 바라보는 시각을 더 넓게 해주고, 그 깊이를 더 해주고 있습니다. <이중섭을 훔치다>를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작품에 한글로 '중섭'이라는 서명을 남긴 뜻, 또 어떤 작품에는 왜 '둥섭'이라는 서명을 남겼는지, 그 이유를 처음 알았습니다. '은지화'와 '군동화', '엽서화' 속에 담긴 사랑. 그것은 뜨거운 조국애와 가족애였습니다.  민화와 분청사기에 보이는 조각기법과 미술양식을 반영한 작품, 거친 붓터치에서 보이는 고구려 벽화와 서예에 대한 깊은 조예, 소 그림에 나타난 과학성은 그가 얼마나 대단한 '거장'인지를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이중섭, 그는 알면 알수록 가슴에 품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가 소를 그린 이유, 봉황이 아니라 닭을 그린 이유가 나를 울립니다. 밀린 방세를 내지 못할 때는 미안한 마음에 손님들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거나 동네 아이들을 목욕시키기도 할 만큼 순수하고, 순박했던 사람. 일하지 않고 밥 먹는 것이 죄스러워 종종 음식을 거절할 만큼 성실했던 사람. 북에서 외면받고 남에서 오해받고 상업적으로 이용당했던 불운한 사람. 아무리 고단한 삶이어도 그리움과 희망을 그림으로 그려냈던 하늘이 내린 화가. <이중섭을 훔치다>를 통해 이중섭을 만나는 시간들이 가슴 절이면서도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화가는 왜 꼭 죽은 뒤에 유명해지는 것일까요? 현실의 벽에 갇힌 천재화가는 삶과 사투를 벌이다 외롭고 쓸쓸하게 숨을 거두었는데, 그의 작품은 이제 부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알면 알수록 이중섭, 그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알면 알수록 이중섭, 그의 작품을 더욱 바로 알아야겠다, 더욱 사랑해야겠다는 반성이 찾아듭니다. 이중섭, 그는 우리의 자부심입니다! <이중섭을 훔치다>는 제게 가슴에 품고 싶은 사람 하나를 찾아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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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면 꼭 가봐야 할 100곳 - 언젠가 한 번쯤 그곳으로
스테파니 엘리존도 그리스트 지음, 오세원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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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여자로서 당당하게 인정받고 존중받을 수 있는, 그래서 그곳에 가면 새로운 힘과 열정에 사로잡히게 되는 그런 장소들에 대한 기록이다"(6). 

 
평소 '여자라서', '여자이기 때문에' 뭐 이런 식의 구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학교 다닐 때도 '총'학생회가 있는데 '여'학생회가 따로 있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고(없애자는 의견에 한 표 던지기도 했다), '여류'라는 표현도 미묘하게 섞여드는 차별적인 느낌이 있어 탐탁치 않다. 그런데 <여라자면 꼭 가봐야 할 곳 100곳>이라는 제목에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여자라면' 꼭 가봐야 할 100곳이 어디일까? 궁금하지 아니한가!

여행 관련해서 어제 굉장히 불쾌한 뉴스를 접했다. 로마에서 나홀로 여행자를 상대로 민박집 주인이 수년간 성추행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물론, 여기서 '나홀로 여행자'는 여성이다. 피해 여성은 또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자신의 경험을 공개했는데, 똑같은 수법으로 당했다는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용기 있는 제보로 '수년간' 계속 되어왔을지도 모를 성추행을 이제라도 막을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이고, 다른 여행자들에게 '알려' 주의를 당부하는 그 여성의 마음이 고맙다.

<여자라면 꼭 가봐야 할 100곳>이 바로 이런 마음으로 만들어진 책이라고 생각한다. 여행칼럼니스트로서 10년 간의 기록을 책으로 만들어낸 저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그런데 내가 있는 곳이 어디든, 그곳이 맨해튼의 도심이든 몽고의 초원이든 그 순간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여성들이었다"(5). 그러니까 이 책에서 소개되는 '100곳'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여성'들과 공유하고 싶은 여행의 기록이며, 뜨거운 열정이다.

<여자라면 꼭 가봐야 할 100곳>은 '그 여행지'를 특별히 '여성'에게 추천하는 '이유'를 밝힌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현지에 대한 여행 정보보다 그곳을 여행하는 '의미'를 담아내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다. 폭발하는 삶의 에너지를 느끼고 발산할 수 있는 곳, 란제리 쇼핑 등 황홀한 사치를 만끽할 수 있는 곳, 지친 몸과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곳, 파도타기, 계곡타기 등에 도전하며 짜릿한 모험을 즐길 수 있는 곳,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가봐야 할 곳 등 총 9가지 테마로 100곳을 추천해주고 있다. 9가지 카테고리 중 <여자라면>이라는 주제와 잘 부합되면서 동시에 새로운 느낌으로 와닿았던 곳은 위대한 여성의 삶의 유산을 탐색해볼 수 있는 "6. 역사를 빛낸 당신, 그대 이름은 여자입니다"였다.

<여라자면 꼭 가봐야 할 100곳>을 통해 받은 가장 큰 자극을 꼭 가봐야 할 여행지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여행을 통해 삶을 즐기는 '호기로운' 기질이다. (이미 가본 곳이 있다 하더라도) 이곳에 소개된 여행지를 1년에 1곳씩 가도 100년이다. 이 책은 '여자라면' 꼭 가봐야 할 100곳은 어디일까?라는 물음으로 읽을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온몸과 마음으로 삶을 누리고, 맛보고, 느끼고, 만끽하고, 도전하고, 정화하고, 교감하라는 부름이다! '전형적'인 여성들의 수다같은, 그 '전형적'인 틀 안에 갇힌 내용이 조금 아쉽다. 그러나 이 호방한 여행가처럼 좀 더 씩씩하게, 그리고 거칠게(!) 삶(여행)에 도전하고 싶은 욕구가 묻어둔 꿈을 자극하며, 일상에 소모되기만 하는 에너지를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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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와 침묵의 제국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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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가 사형당한 후 조선은 침묵의 제국이 되었다"(7).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역사는 '인물'을 필요로 하고, 어떤 '인물'이 나느냐에 따라 시대의 운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역사의 숨겨진 줄기를 캐내고 있는 역사가 이덕일은 조선 중기, 우리에게는 '윤휴'라는 인물이 있었음을 세상에 알린다. 윤휴는 북벌대의를 가슴에 품었고, 백성들의 민폐 해소를 꿈꾸었고, 신분제 해체를 단행하고자 한 개혁적인 정치가요, 비판적인 유학자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정적들에 의해 조용히 제거되고 말았다. 이후 그의 이름은 역사에서 철저히 금기시되었고, 그렇게 오늘까지 역사에서 잊혀진 비운의 '인물'이다. 윤휴의 운명으로 국운이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비운의 인물로 남은 윤휴의 운명은, 이미 쇠락해가는 조선의 국운을 상징적으로 예견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윤휴는 이런 시대를 개탄했다. 나라보다 당이 중시되는 시대. 군부보다 당수가 중시되는 시대. 국왕보다 스승이 중시되는 시대. 옳고 그름보다 유불리가 중시되는 시대. 윤휴는 이런 시대를 개탄했다"(107).

(내 기억으로는) 중학교 역사책에서 배운 '송시열'은  매우 훌륭한 인물이었다. '송' 씨 성을 가진 친구가 자신은 송시열의 몇 대 손이라며 틈이 날 때마다 자랑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역사가 이덕무의 <윤휴와 침묵의 제국>은 나의 짧은 역사 지식을 기초부터 다시 놓아야 한다는 경종을 울려주었다. 윤휴의 최대 라이벌로 등장하며, 그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인 기득권 세력이 바로 서인노론의 영수 송시열이었기 때문이다.

라이벌로 대립하며 윤휴와 송시열이 평생에 걸친 싸움을 시작하게 된 것은 효종의 죽음을 둘러싸고 예송논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효종 국상 때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 착용 기간 여부를 놓고 논쟁이 발생한 것이다(83). 이것은 단순히 상복은 3년 입는 것은 옳으냐, 1년 입는 것이 옳으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예송논쟁은 이미 이론의 논쟁이 아니라, 정치의 논쟁이며 권력의 논리가 되었기 때문이다(100). 자신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는 기득권 세력에게 산림에 묻혀 학문에만 정진하다 조정에 들어와 실질적인 북벌 정책을 실현하고, 백성을 위한 사회 개혁을 단행하고자 한 '윤휴'는 눈엣가시요, 목에 걸린 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송시열은 양반 사대부의 계급적 특권을 절대시할 수 있는 사상이 담긴 주희를 절대화했지만(71), 윤휴는 그것에 반발하여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학문을 하고자 했다. "윤휴는 특정한 스승이 없었다. 경서를 통해서 직접 공부하니 공자가 스승이고 맹자가 스승인 셈이었다. 주희의 책도 보았지만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계 학자들과는 달리 주희의 눈으로만 경서를 보지는 않았다. 주희의 해석을 절대적으로 따르지도 않았다"(68). 

 
역사책을 읽어 보면, 역사는 생각보다 단순하다는 생각이 든다. 백성을 돌보고 나를 굳세게 하고자 하는 인물이 나오면 백성의 삶은 안정되고 나라의 힘이 자란다. 반대로, 권력을 휘어잡고 권세를 누려보자 하는 인물이 나오면 백성의 삶은 피폐해지고 나라의 힘은 약해진다. 전자의 인물이 힘을 얻으면 국운이 흥할 것이지만, 후자의 인물이 힘을 얻으면 국운이 쇠하는 아주 단순한 이치, 그것이 역사에서 순환되고 있다. 윤휴가 개탄했다는 시대상에서 오늘 우리의 시대가 읽힌다. "윤휴는 이런 시대를 개탄했다. 나라보다 당이 중시되는 시대. 군부보다 당수가 중시되는 시대. 국왕보다 스승이 중시되는 시대. 옳고 그름보다 유불리가 중시되는 시대. 윤휴는 이런 시대를 개탄했다"(107). 대선과 총선을 눈앞에 두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운이 걱정스러운 이유가 그것이다. 그러나 역사계의 기득권에 대항하여 '윤휴'와 같은 숨겨진 역사적 진실과 교훈을 찾는 일에 10년의 세월을 헌신하는 역사가 이덕무와 같은 인물이 있으니 희망을 아주 버리지는 않으려 한다.

역사는 오래된 미래라고 한다. 역사는 현실을 반추하고 미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리라. <윤휴와 침묵의 제국>은 역사가 말하지 않는 역사를 다시 말하게 하고, 잘못 말해진 역사를 바로 잡는 작업의 일환이다. 이것이 책에 대한 흥미를 넘어 역사가 이덕무를 계속 응원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윤휴와 침묵의 제국>만 놓고 보자면 같은 말이 잔소리처럼 계속 반복되는 듯한 느낌 하나가 아쉬울 뿐, 잃어버린 '윤휴'를 다시 찾아주고, 그를 제거할 수밖에 없었던 '송시열'이라는 정체세력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하나 얻은 것만으로도 값진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역사를 보는 바른 시각이야말로 오늘 우리의 삶을 이끄는 튼튼한 방향키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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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 에릭슨 타다의 희망 노트
조니 에릭슨 타다 지음, 유정희 옮김 / 두란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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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딸이도다!

 
인생에 고난이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제 짐을 지고 신다. 그러나 '사지마비'라는 고난 앞에 서게 된다면, 많은 사람이 오히려 지금의 고난에 감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많은 문제가 그 앞에서는 작아지고, 가볍게 느껴지리라. 만일 내가 사지마비가 되어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몸이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진다. 그런데 여기 45년을 사지마비의 몸으로 살아온 사람이 있다. 어느 여름날의 다이빙 사고로 그녀가 사랑했던 인생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꿈을 꾸고, 왕성하게 활동하며, 웃는다. 휠체어서 보내는 인생에 감사하며, 기뻐한다. 그녀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살아계신 하나님 때문이다! 사지마비의 몸으로 살면서도 '행복한' 조니 에릭슨타다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실로 기이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이번에 발간된 조니 에릭슨타다의 <희망 노트>는 조금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내가 지금 다루고 있는 것은 아쉬운 실망감이나 이따금씩 찾아오는 좌절감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몰려오는 공격, 곧 파도처럼 밀려오고 또 밀려오는 나의 아래 쪽 등과 골반부의 통증이다. 이제는 치유를 생각할 때, 꼭을 꺾거나 말을 타거나 풀밭을 뛰어다닐 수 있는 능력보다는 이 극심한 고통에서 해방되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간구한다. 비록 내가 계속 마비된 상태로 있더라도 이 만성 통증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더 없이 행복하고 즐거운 일상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구하는 것은 그것뿐이다"(45-46).

2년 전, 만성 통증이라는 불청객이 조니 에릭슨타다의 삶에 찾아왔다고 한다. 그 통증은 매순간 그녀를 괴롭히고 조롱하며 평안과 능력을 빼앗아갔다고 고백한다(212). 사지마비의 몸에 찾아온 극심한 고통! 그것은 그녀가 사지마비의 몸으로 '행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앗아가며 그녀를 공격하고 있다. 그녀는 사지마비로 살아오는 동안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서 할 수 있었던 많은 일들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니는 이 예상치 못했던 고통 앞에서 "육체적 치료"에 관한 오래된 질문들을 모두 다시 되묻고 있다. 굉장히 긴급하고 절박하게 말이다. "나는 사지마비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끊임없이 몰아치는 고통에는 어떻게 '익숙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212).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하나님은 나를 치유하시는 것이 아니라 잡아 주시는 쪽을 택하셨다. 고통이 심할수록 하나님은 더 꼭 안아주신다. 그것이 앞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진리 가운데 하나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고 계신다는 것이다"(42). 조니는 지금 고통과 전면전을 치르는 중이다. 그 고통은 '사지마비'의 고통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이 되고 있다. 그녀는 지금 유방암과도 싸우는 중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참 모진 분이라는 한탄이 나올만도 한데, 그녀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다시 묻고, 다시 성찰하고, 하나님에게서 다시 답을 얻는다! 조니 에릭슨타아의 <희망 노트>는 바로 그 결과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43년 전의 사고가 결코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다고 말하며 나를 설득하려 했다. 나의 마비는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고 만성 통증도 꼭 있어야 할 필요가 없었으며 많은 눈물과 고뇌와 싸움과 잠 못 드는 밤들은 불필요한 것들이며 나의 에너지와 삶을 낭비할 뿐이라고 말이다"(264). 불청객처럼 불쑥 불쑥 나타나는 통증보다, 이런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보다, 어쩌면 그녀를 더 괴롭히는 사람들은 바로 '믿음의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하기 원하시며,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셨다. 그러므로 조니는 지금 이런 고통을 당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조니는 치료받아야 마땅하며, 지금 치료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조니의 숨겨진 죄 때문이거나 믿음이 부족해서라는 논리(?)를 가진 사람들. 그들의 '신앙'이 바로 조니를 괴롭히는 더 큰 고통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시련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극적인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곧 홍수가 멈추거나 암이 낫지 않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68). 조니 에릭슨타다의 <희망 노트>를 읽으며, 순례자의 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때로 믿는 자의 삶, 그 순례의 여정은 우리의 이성으로 납득할 수 없는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사지마비의 고통 속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으로 인해 다시 웃으며 행복을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 후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고백으로 이야기가 끝을 맺는 것이 맞지 않는가.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은 또다른 고통을, 그것도 사지마비보다 더 큰 고통을 그녀에게 허락하셔야 했을까. 그런데 그 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러한 고통 속에서 조니는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 사랑을 찬양하며, 고통에 감사하며, 다시 희망을 노래한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고통을 없애 달라고, 그 고통이 끝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그것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고통을 찬양의 제물로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렇게 되면 휠체어에 앉아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때마다 더 깊이, 더 높이, 더 풍성하게, 더 넓게, 훨씬 더 온전히 하나님을 알게 된다"(42).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넘쳐나는 악을 보며 하나님은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세상이 이렇게 돌아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내가 아는 동생은 백혈병으로 언니를 잃고, 그 언니를 간호하다 지친 엄마까지 잃게 되자, 하나님을 떠났다. '그런' 하나님을 신앙할 수 없다고 했다. 가족을 괴롭히는 아버지 때문에 오래 기도했던 내 친구는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을 떠났다. 자신이 아는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라고 했다. 3년간 병원에서 이모부를 간병해야 했던 이모는 자신의 기도가 부족해 이모부가 낫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 괴로워했다. 어떤 사람들은 고난이 가득한 인생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증거라 생각하고, 흔히 말해 '믿음이 적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기도 하고, 또 '믿음이 큰 사람'은 고난(병)이 곧 믿음 부족의 증거처럼 생각되어 괴로워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왜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도 힘든 삶의 아이러니 속으로 우리를 내모시는 것일까?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우리가 가져야 할 성숙한 믿음의 태도는 무엇일까? 

 
조니 에릭슨타다의 <희망 노트>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이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때문에 하나님께 실망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기 권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치유하심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다면 이 책이 대답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로마 백부장은 예수님이 힘 없는 어린 양의 모습으로 초라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바로 그 모습을 보고, 바로 그 현장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다. 조니는 사지마비의 몸으로 휠체어에서 45년을 살고 있고, 그러면서도 극심한 고통에 신음하며, 이제는 유방암이라는 암덩어리와 싸우고 있다. 나는 하나님이 너무하신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 또다른 은혜를 발견하며, 이전 보다 더욱 굳건한 소망을 품고 있었다. 나느 그녀를 보며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진실로 하나님의 딸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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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사진첩을 열다
맥스 루케이도 지음, 마영례 옮김 / 가치창조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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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아주 놀라운 일들을 하신다"(21).

 
고등학교 때, 친구에게서 일기장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다. 그 예쁜 일기장에는 지난 1년 간 우리가 함께 만들었던 추억, 내가 몰랐던 친구의 고민, 친구가 꿈꾸는 미래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 일기장은 내가 사랑하는 친구에 대해 더 깊이 알게 해주었고, 나와 나눈 우정이 친구의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려주었다. 우리는 그때 우리의 특별한 우정을 기념하며 앨범을 함께 만들어 나눠 가졌었다. 함께 찍은 사진이 많았기 때문에 내 추억은 그대로 친구의 것이었고, 친구의 추억은 그대로 내 것이기도 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연애편지라고 말한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 고백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대가로 어떤 희생까지 치러야 하셨는지 보여준다. 그 사랑의 결정체가 바로 '예수님'이며, 그 사랑의 하이라이트는 '십자가'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생애는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우리를 향한 사랑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복음을 현대적 언어로 바꾸는 데 탁월한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이 이번엔 '예수의 사진첩'이라는 독특한 콘셉트를 구상해내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의 <예수의 사진첩을 열다>는 친구와 내가 함께 만들었던 사진첩을 떠오르게 한다. 그것은 첫사랑의 기억처럼 설레이는 순간을 담은 사진첩이기도 하다. <예수의 사진첩을 열다>에는 친구가 내게 주었던 일기장처럼, '복음서'에는 이 땅에서 예수님이 사람들과 함께 보낸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희생, 하나님의 꿈(비전)을 기록한 '복음서'의 중요 순간을 포착하여 '예수의 사진첩'을 만들어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낸 3년 반의 활동을 사진첩으로 꾸민다면, 어떤 장면들이 포착될까? '예수의 사진첩'을 열어보니,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서부터 다시 만날 천국의 소망까지 총 44가지 장면이 포착되었다. <예수의 사진첩을 열다>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었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아주 놀라운 일들을 하신다"(21). 그리고 이렇게 속삭인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아주 이상한,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일들을 행하고 계신다고. 기대되지 않는가?

<예수의 사진첩을 열다>는 특별히 이제 막 신앙의 첫걸음을 뗀 새싹 신앙인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복음서를 처음 공부하는 성도들이 읽어도 좋을 듯하다. '복음서'의 큰 줄기를 형성하는 주요 사건들을 간추려 구성했기 때문에 복음서 전체의 줄기를 (한 눈에)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그 사건 안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 고백을 현대적 언어로 잘 설명해주고 있다. 마치 스펙트럼을 통과한 빛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예수의 사진첩을 열다>을 통과하여 우리 마음에 찬란한 무지개를 선물한다. 하나님을 향한 첫사랑을 다시 회복하고 싶다면 '예수의 사진첩'을 열어보자. 추억에 잠기듯,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다시 한 번 푹 잠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의 책을 많이 읽은 독자에게는 조금 싱겁고, 반대로 복음서를 전혀 모르는 독자에게는 그 의미가 깊이 있게 잘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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