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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사는 법
박완서.한말숙.김양식 외 지음, 숙란문인회 엮음 / 연암서가 / 2011년 5월
평점 :
세상을 양분하는 가장 일반적인 범주 중에 하나가 '남자'와 '여자'이다. 그런데 때때로 이러한 구분은 '차별'이 된다. 같은 문학, 같은 예술 활동인데도 여류 문학, 여류 작가, 여류 시인, 여류 화가라고 구분 짓는 것을 불편해하는 시각도 있다. '여류 문인들'의 글이라고 하면 확실히 차별적이기는 하다. 남성과 구분 짓는 차별이 아니라, 여성 특유의 감성에 있어서 경쟁력이라고 부를 만한 차별이 있다는 말이다.
<행복하게 사는 법>은 숙명여고 출신의 여류 문인들이 모여 구성된 '숙란문인회'가 펴낸 여성 문인의 문집이다. 박완서 선생님을 비롯한 21명의 쟁쟁한 여성 문인들을 '숙명'이란 안에서 만나니, 숙명여고 동문들이라면 학교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으로 가슴이 뻐근해질 법도 하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책 제목 <행복하게 사는 법>은 박완서 선생님의 글에서 따온 듯한데, 각기 다른 장르에서 활동하는 문인들의 글이지만 22명의 작가가 두, 세 편씩 내놓은 글을 하나로 묶어내는 데 이보다 적합한 제목은 없을 듯하다.
작품을 통해 만나는 작가와 그들의 삶을 통해 만나는 작가는 다르다. 여류 문인들의 소소한 삶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행복하게 사는 법>은 작품보다 여류 문인으로 살아가는 '한 사람'에게 한발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들어준다. 각기 다른 맛과 향을 가졌지만 정갈한 '한 상'처럼, 대선배의 글과 후배의 글이 다른 맛과 향을 뽐내면서도 여성 특유의 감성 안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새벽부터 부지런 떠는 일 없이 마냥 자리에 누워 게으름을 피우게 됩니다. 누워서 두서없이 하는 생각은 앞으로의 계획이나 소망이 아니라 주로 지난날의 추억이고, 그 중에도 현재의 나에서 가까운 지난날이 아니라 아주 먼 어린 날의 추억입니다"(박완서의 "행복하게 사는 법" 中에서)
박완서 선생님의 고백처럼 대선배님들은 가까운 이야기보다 오래 전 기억을 더듬어 정감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어머니 세대들, 불쑥 튀어나온 전쟁이 헝클어놓은 삶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고, 그 어려운 시기에 어머니의 아버지가, 어머니의 어머니가 어떤 사랑으로 '딸'을 보듬어 주셨는지도 들을 수 있다.
"늦게 난 딸애에다가 나라는 일본의 식민지여서 집안일이며 나라 일도 앞이 보이지 않은 때", "인생사의 기복도 명암도 아랑곳없이 넓고 넓은 백사장에서 먹고는 자고, 먹고는 뛰어 놀기만 하는 개"에 빗대어, "평생 걱정 없이 먹고 놀기만 하는 '뱃놈의 개 팔자'처럼 되라"고, 예쁜 막내 딸을 볼 때마다 "뱃놈의 개올시다", '뱃놈의 개올시다"라고 따라 하라고 하셨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것이 딸을 위한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였음을 지천명이 훨씬 넘고 나서 비로서 겨우 깨달은 딸의 고백이 뭉클하다(12-14, 한말숙, "아버지의 기도" 中에서).
"밤 열두시에 태어났는데 여아를 순산했다는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두 분은 그때부터 밤새 머리를 맞대로 옥편을 찾아가며 지으신 이름이" 박완서이다. 그러고 보니 동시대 분들에 비해 '박완서'라는 이름은 유난히 품위가 있어 보인다. "새 생명을 좋은 이름으로 축복해 주려고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을 두 남자, 점잖고 엄하기로 집안에서뿐 아니라 마을에서도 알아주는 상투 튼 할아버지와 젊은 아버지를 떠올리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존중받고 사랑받았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38, 박완서의 "행복하게 사는 법" 中에서)라는 박완서 선생님. '간난이', '섭섭이', 아무렇게나 지어진 이름으로 살았던, 그리하여 정성드려 지어주신 이름 하나에서도 부모님의 크신 사랑을 느끼는 세대, 그 세대가 바로 우리 어머니들의 세대이다.
세월이 쌓이면서 얻어지는 지혜를 우리는 '연륜'이라고 한다. 연륜의 샘에서 길어올려진 성찰과 지혜는 깊은 장맛처럼 그윽하고, 섬세하고, 깊다. <행복하게 사는 법>은 여인들의 감성과 단상을 통해 책의 제목처럼 "행복하게 사는 법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져준다. 그 질긴 의문과 고민 속으로 잠겨들게 만든다.
"자연과 마주보는 일에는 안경이 필요 없지...... 먼 산. 지평선. 수평선. 은하수. 낮달. 밤하늘의 별과 달. 깊은 숲. (...) '현대인은 거의 평생을 20m 이내만 보며 살아간다'고 어느 안과의사가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매달려 살아가는 것들이 TV, PC, 계산기, 전자오락, 노래방 기계, 만화책 등이 아닌가. 아득한 곳, 먼데를 바라보는 기능이 없어져 버렸는가. (...) 현대인들도 영원을 입에 담기는 하면서도 영원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허덕거리다가 갑자기 죽는다"(79, 정연희의 "새와 꽃의 살림살이" 中에서).
"그러나 꽃은 저 혼자 피고 저 혼자 시든다. 그냥 저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누구의 열광과 찬사와 갈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저의 때를 따라 제 삶을 살 뿐이다. 새는 저의 지저귐이 듣는 이의 마음을 뒤흔든다는 것을 모른다. 꽃은 저의 자태가 아름답다는 것을 알 리가 없다. 누구에게 들려줄 일이 없는 새소리는 그래서 영원과 이어지고, 누구의 눈에 띄기를 바라는 일이 없는 꽃은 그래서 황홀하다"(83, 정연희의 "새와 꽃의 살림살이" 中에서).
여고시절, 우리는 편지를 참 많이도 썼었다. 지금처럼 문자나 이메일이 없을 때이기도 했지만, 마음에 무엇인가 차오를 때마다, 텅 빈 가슴에 부는 찬 바람이 아릴 때마다, 끝도 없는 바닥으로 끊임없이 추락하는 기분이 들 때마다, 무리 속에 있어도 사막에 홀로 버려진 외로움을 떨쳐버리고 싶을 때마다, 편지를 쓰고 또 썼었다. 혼자 쓰는 일기보다 누군가 이 글을 읽어줄 친구가 있다는 것 자체로도 이미 위로를 받았었는지 모르겠다. <행복하게 사는 법>은 그때 그 시절의 그런 편지 같다. 엄마에게서 온 편지 같고,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같고, 친구가 보내준 편지 같고,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같다. 소위 '성공한', '잘 나가는', '많이 배운', '잘난' 여성들이라 할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삶의 열기가 있고, 따스한 마음으로 공감하게 되는 사랑과 그리움이 있고, 가슴에 쩍 금이가게 하는 삶의 성찰이 있고, 곁을 지켜주고 싶은 외로움이 있고, 두 주먹 불끈 쥐고 열렬하게 응원하고 싶은 도전도 있다. '여류 문인'이라는 구분이 (성적인 측면의) 차별도 될 수 있겠지만, '여류'만이 품어낼 수 있는 빛깔과 향기와 감성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차별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행복하게 사는 법>은 무엇일까? 여고시절에도 우리를 괴롭혔던 과제인데, 아직까지 정답을 찾지 못한 기분이다. 그러나 방향키로 삼을 만한 열쇠를 하나 이 책에서 발견했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이 있다면 그건 아무도 그의 쓸모를 발견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