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살롱 공화국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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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와 향락, 패거리의 요새, 밀실접대 65년의 기록

"칸막이 현상의 이익을 쟁취하고자 하는 게 접대고, 그런 접대의 무대가 룸살롱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한국은 명실상부한 '접대 공화국'이다. '접대 경제'의 규모가 너무 커져 '접대 규제'는 민생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 갈수록 포장술이 세련되어져 '인맥'이니 '인적 네트워크'니 하는 고상한 합법적 매커니즘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룸살롱은 한국 사회의 또 다른 얼굴인 셈이다"(270-271).

 
강준만 교수님이 '지하경제 밀실권력의 리얼 분석'이라는 <룸살롱 공화국>을 내놓았다. 이 시대 최고의 논객으로 인정받는 강준만 교수님의 책이라 기대치가 높았다. 그러나 '리얼'은 있는데 '분석'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할까. '맺음말' 정도가 교수님의 의견을 담은 분석이고, 나머지 8장은 말그대로 "밀실접대 65년의 기록"이다. 강준만 교수님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듣기 원했는데, 아쉽게도 '신문'을 읽어주셨다. 그러나 부패와 향락, 패거리의 요새가 되고 있는 '룸살롱'에 스포트 라이트를 들이댔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찾아지는 책이다. 이 책을 계기로 '관행'으로 무마되어 버리고 마는 '밀실접대'에 대한 비판적 관심이 환기되고, 정화를 위한 사회적 담론이 형성되기를 기대해본다.

<룸살롱 공화국>은 류승완 감독의 영화 '부당거래'와 짝을 이루는 책이다. 밀실거래 65년의 기록을 읽어나가자니 '부당거래'가 이루어지는 <룸살롱(요정) 공화국>의 질긴 역사에 이젠 분노가 아니라 한숨이 쉬어진다.

<룸살롱 공화국>에는 접대하는 남자, 접대로 소비되는 여자, 접대받는 남자가 있다. 롬살롱의 성황은 "중요한 고객이나 사업상 파트너, 계약 당사자 등을 접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접대부가 나오는 고급 룸살롱을 찾아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남성중심 접대문화"(119-120)가 그 축을 이룬다. 이렇게 탄생한 한국의 밤문화는 부패와 향략, 부당거래의 온상이 되고 있다. "실력보다 인맥이 중시되며, 술과 여자가 동원되는 향응이 있어야만 비즈니스가 되는 한국적 밤문화 말이다. 물론 이는 법, 제도 이전에 관행과 문화의 문제지만, 그래서 그만큼 더욱 강고하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남성적인 접대문화, 밤문화가 여전히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한, 성적 서비스의 수단으로 착취되고 꺾이는 '나약하고 힘없는' 제2, 제3의 장자연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양성희, <중앙일보>, 197).

그러나 <룸살롱 공화국>의 보다 큰 문제는 '퇴폐적인 향략의 문화'가 아니라, "검은 발톱으로 대한민국을 찍어 누르고 있는 무소불위 포식자"(199)들이 그곳에서 패거리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룸살롱은 술과 더불어 다른 것이, '놀이'가 추가된다는 데에 그 매력이 있다. (...) 술집의 존립 관건은 바로 인기 있는 아가씨를 확보하는 것이다. '놀이'의 핵심이 무엇이건 본론은 그것을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는 밀실대화와 그에 따른 '유사 친분'이다. 룸살롱의 물리적 본질은 '칸막이'가 아닌가. 칸막이는 패거리 만들기의 필수 요소이며, 패거리주의는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핵이다. 그걸 이해하면 지역갈등에서부터 유흥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수께끼가 풀린다"(264).

<룸살롱 공화국>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가 가장 풍부한 '맺음말'에 보면, 한국 특유의 음주문화와 조직의 공동체와, 평가 시스템의 취약성이 '룸살롱'이라는 한국 사회의 악의 축을 양산해낸다고 분석한다. "조세 투명성이 낮으니, 지하경제만 번창한다. 대표적인 게 룸살롱이다. 그리고 공권력이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으니, 다들 권력층에 줄을 대려고만 한다. 이들이 끈끈하게 어울리는 곳은, 역시 룸살롱 같은 유흥업소다. 마음에서 우러난 교제가 아닌, 억지 친분을 쌓으려면 술과 접대부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끼지 폭탄주를 주고받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법과 질서는 기득권층에게만 유리해진다"(김정운, 263).

88서울올림픽은 '룸살롱올림픽'이기도 했다(63)는 보고는 충격이었다. 철없던 시절 '올림픽 개최국'이라는 자부심으로 활활 타올랐던 나의 애국심이 부끄럽다. 올림픽 개최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그렇게 미개할 수 있었나. 대한민국을 지탱하고 있는 경제와 권력의 뿌리가 룸살롱의 양분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썩은 뿌리일 것이다. 달콤한 열매 하나를 위해 그 뿌리가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기를 빌어야 하는 것일까, 열매뿐만 아니라 나무까지 잃더라도 뿌리를 도려내야 하는 것일까. 해외토픽에 보도되는 '나무인간'처럼 우리는 이미 썩은 나무와 한 몸을 이루어 썩어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당연한 것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도록, <룸살롱 공화국>이 대한민국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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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와 존 이야기 - 상처받은 영혼과 어리바리한 영혼이 만났을 때
로버트 윌리엄스 지음, 김현중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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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고통은 무엇으로 치유되는가?

 
나는 위로하는 일에 서툴다. 누군가를 위로하려고 하면 그저 눈물만 난다. 이런 걸 천성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장례식장에도 잘 가지 못한다. 평소 잘 울지 않는 성격 때문에 '악바리'라는 소리도 곧잘 듣는 나지만, 장례식장에만 가면 주체할 수 없는 눈물 때문에 곤욕을 치른다. 혹여 내 눈물이 실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도 그렇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아무리 진심을 담는다 해도 도대체 위로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를 화장한 날 오후에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51)

<루크와 존 이야기>는 루크와 아버지가 '산 꼭대기 집'으로 이사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들의 예전 삶은 예전에 살았던 곳에서 끝났고, 여기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사실 그들의 예전 삶은 루크의 엄마가 돌아가시는 순간 끝났다. 루크의 엄마가 타고 있던 빨간 색 차가 커다란 화물트럭과 충돌하는 순간, 루크의 엄마는 "순식간에" 돌아가셨다. "데리러 올게"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말이다.

루크는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 날, 뭘 해야 할지 몰라 항상 하던 대로 학교에 갔다. 엄마를 화장한 날 오후에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데리러 올게"라고 했던 엄마가 오지 않아 "차가 꽉 막힌 길을 걸어와서 집에 홀로 앉아 있는 아빠를 본 뒤로" 루크는 "항상 벼랑 끝에 매달려 떨어지기 직전인 것 같은 기분 속에" 산다(26).

"한 사람이 떠나고 나면 그 사람의 빈자리가 모든 것을 달라지게 만들고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결코 알지 못했던 것은, 죽음은 곧 사라짐이라는 것이다. 갑자기 모든 것이 멈추고 일상에도 영혼에도 커다란 빈 공간만 남는다. 이보다 더 완벽한 순간이동 마술은 없을 것이다"(105).

갑자기 사라져버린 가족의 빈자리. 그 상실의 고통은 무엇으로 치유될 수 있을까. 나와 가까운 후배는 아침에 엄마에게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를 남기고 출근을 했는데, 퇴근 시간 즈음에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완벽한 순간이동 마술"로 엄마는 사라지고, "빈자리"만 남은 것이다. 사연을 알지 못하고 "엄마는?"이라고 물었다가, 후배보다 더 당황하는 나를 후배가 다독여주어야 했다. 후배에게는 당황하는 내가 더 불편했을 텐데, 나는 계속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엄마가 돌아심으로 예전의 삶이 끝난 루크와 아버지는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듀어데일'이라는 작은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산 꼭대기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불쑥' 그 녀석이 나타났다!

'존'은 엄청나게 이상한 아이였다. 기괴한 옷차림으로 나타나 '제멋대로' 위로를 해 루크를 화나게 하고, 매일 아침 찾아와 쉴새 없이 떠들어대기 시작한다.

"하지만 집을 드나드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으면 생활에 좀 더 리듬이 생기고, 더욱 다양한 관계가 생기고, 예전에는 없던 활기도 생긴다"(75).

'책 속에서 만난 인물 중 사랑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가 있느냐'고 물어오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한다면, 나는 이제 존과 루크와 그의 아버지와 그의 엄마라고 대답하려 한다. 조울증 증세가 있지만 너무나 사랑스러운 루크의 엄마, 그렇게 사랑스러운 아내를 잃고 다시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는 루크의 아버지, 그러한 루크의 아버지와 루크에게 다시 삶의 활력을 되찾아주는 '이상한' 존, 이 모든 과정을 차분하게, 그러나 따뜻함을 잃지 않으며 이겨내려 '노력'하는 루크, 이들 모두와 나도 친구가 되고 싶다.

어쩌면 루크와 루크의 아버지보다 더 상처투성이였지만, 호기심이 가득한 이 천진한 '존'은 루크와 루크의 아버지의 삶에 불쑥 끼어들어 그들을 무장해제시킨다. 존이 주변에 머물게 되자 루크와 아빠는 여러모로 더 노력을 하기 시작한다(69). 보이지 않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가며, 빈자리를 채우는 가족이 되어간다. 상실의 고통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에게는 행복한 기억의 조각들마저 날카로운 유리조각이 된다. 그러나 이제 루크와 아빠는 가끔 엄마 이야기도 한다. 

"엄마는 내게 항상 두려움을 직시하라고 말했다. 엄마는 나쁜 일들이란 나쁘다고 생각하는 만큼만 나쁜 일이라고 말했다"(67).
 

<루크와 존 이야기>는 일기를 써나가듯 제목이 있는 에피소드들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장면에서 장면으로 이어지는데, 버릴 장면이 하나도 없다. 신예작가 답지 않게 모든 장면이 꽉 차 있다는 느낌을 준다. 소리내어 울지 않는 루크 때문에, 삶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담담한 존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루크의 아버지 때문에 더 가슴이 더 아팠지만, 이들의 상처가 아물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마음은 참 따뜻했다. '성장소설'은 성장을 목적으로 하겠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치유를 경험했다. 서로의 마음으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 우리가 오늘도 고통을 견디며 또 하루를 살 수 있는 이유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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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론드 1
조이스 캐럴 오츠 지음, 강성희.송기철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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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음 많고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던 노마 진은 다른 어른들, 특히 남자들이 자신의 어머니인 이 여자를 관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게 좋았다. 그들이 글래디스의 불안한 웃음과 끊임없이 움직이는 손 때문에 달아나지만 않았어도 어머니 당신을 사랑해줄 남자를 찾았을 텐데. 당신과 결혼해줄 남자를 찾았을 텐데. 그러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었을 텐데!"(99)

 
거침 없는 묘사, 불쑥 불쑥 튀어 나오는 내면의 목소리.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호흡을 고르며 생각할 새도 없이. '신들린 듯하다'라는 표현이 이 보다 더 잘 어울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쏟아지는 흐름을 따라가며 가끔 김수현 선생님을 떠올리기도 했다. 김수현 선생님 식의 '리얼'에 감탄해마지 않는 독자로서 이 책의 '리얼'함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책은 '리얼'은 '리얼'인데 전혀 다른 감각의 '리얼'을 보여준다. 강렬한 문장, 잠시도 틈을 주지 않는 흡입력! 그러나 엄청난 집중력을 요한다. 이런 글은 전에 만나본 적이 없으므로.

"죽음은 암갈색으로 사그라지는 빛 속에서 대로를 따라 돌진하며 등장했다"(15). 이후 이어지는 죽음에 대한 묘사들. "결코 틀림없는 죽음이 등장했다. 흔들림 없는 죽음. 다급한 죽음. 맹렬히 페달을 밟는 죽음. +특급 우편, 취급 주의+라고 표시된 소포를 안장 뒤 철제 바구니에 실어 나르는 죽음. (...) 정말이지 잽싼 죽음! 경적이나 울려대는 중년들에게 콧대를 내흔드는 죽음. 엿이나 쳐먹어라 꼰대들! 그리고 당신도 말이야. 비웃는 죽음. 마치 값비싼 신형 차들의 번쩍번쩍한 차체 옆을 날아가듯 지나치는 버스 버니처럼." 이것이 마릴린 먼로의 이야기라는 것을 몰랐다면, 마릴린 먼로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면 프롤로그에서부터 길을 잃을 뻔했다. "죽음은 다시 한 번, 더 세게 벨을 울렸다. 그리고 이번엔 문이 열렸다. 나는 죽음으로부터 그 선물을 건네받았다.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누가 그것을 보냈는지도. 나는 이름과 주소를 보며 웃음을 터뜨리고선 망설임 없이 서명했다"(18). (색깔이 다른 부분은 내면의 목소리이다.)

프롤로그만으로도 아마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도대체 이 작가 뭐지?" 예사롭지 않은, 생경한 문장에 당황한 나는 프롤로그를 읽다 말고 대충 읽고 넘겼던 작가 프로필부터 다시 보았다. 조이스 캐럴 오츠. 처음 들어본 이름인데 그녀는 거장이었다. "살아있는 미국의 작가들 중 가장 뛰어난 작가 중 한 명이자, 최고의 여성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왜이리 낯선 이름일까. 나에게만 그런 것일까. 좀 더 알고 싶어 검색을 해보기도 했다.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그 작품들은 가장 권위 있는 상의 후보작으로 거론되고, 2004년 무렵부터는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빠지지 않고 거론되고 있단다. 프롤로그만으로 나를 당황시켰던 <블론드>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아직도 그녀(마릴린 먼로)에게서 더 건져낼 이야깃거리가 남았을까 싶을 만큼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던 것이다.

<블론드>는 마릴린 먼로(노마 진 베이커)라는 희대의 섹시 아이콘의 삶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이다. 그러나 마릴린 먼로의 이야기이지만, 그녀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저자는 작가의 말을 통해 "<블론드>는 '실제의 삶'을 바탕으로 구성해낸 작품이며, 기본적으로 작품 전반에 걸쳐 제유법을 적용했다. 가령, 어린 노마 진은 수많은 수양 가정을 전전하며 살았지만 <블론드>에서는 허구의 한 곳만을 다루고 있다. 그녀의 수많은 여인들과 의학적 위기, 낙태, 자살 시도, 영화들 또한 작가가 선정한 몇몇 상징적인 사건들로만 대치했다"(6)고 밝힌다. 마릴린 먼로의 생애가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지만, <블론드>는 역사물이 아니다.

오히려 <블론드>에서 '마릴린 먼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이다.  

에로틱. 그건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니까.
광기는 고혹적이고 섹시하니까. 여성의 광기는.
그 광기 어린 여성이 충분히 젊고 매력적이기만 하다면.

"수줍음 많고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던 노마 진은 다른 어른들, 특히 남자들이 자신의 어머니인 이 여자를 관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게 좋았다. 그들이 글래디스의 불안한 웃음과 끊임없이 움직이는 손 때문에 달아나지만 않았어도 어머니 당신을 사랑해줄 남자를 찾았을 텐데. 당신과 결혼해줄 남자를 찾았을 텐데. 그러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었을 텐데!"(99)

"그녀는 웃었고, 웃는 건 아주 쉬웠다. 동화 속 수수께끼. 그녀는 그 수수께끼의 답을 알았다. 난 뭐지? 결혼한 여자야. 내가 아닌 건? 처녀. 난 처녀가 아냐"(288).

'최고의 여성 작가'가 살려낸 희대의 섹시 아이콘의 내면의 목소리는, 애처로울 만큼 위태롭다. 여성학자들을 분노하게 할 묘사들. 남성들에게 욕망의 대상으로 '소비되는' 묘사들이 불쾌하고 끔찍할 정도로 '노골적'이다. 에덴 동산의 '하와의 저주'가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불안하고 위태로운 '소녀의 자아'는 어쩌면 아직도 어디선가 구원을 갈망하고 있을 것만 같다. 

총3권으로 이루어진 <블론드>의 1권은 '노마 진 베이커'(마릴린 먼로의 본명)의 아이 시절(1932-1938)과 소녀(1942-1947)을 이야기한다. 아직 1권밖에 읽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은 어떤 결론을 내릴 수가 없지만, 독자들의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릴 것이라는 예상은 쉽게 해볼 수 있다. 다른 독자들의 '호불호'가 궁금해진다. "나의 취향은 아니라"는 쪽에 줄을 서게 되더라도 '일단' 읽어볼 가치는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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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고릴라 - 우리의 일상과 인생을 바꾸는 비밀의 실체
크리스토퍼 차브리스.대니얼 사이먼스 지음, 김명철 옮김 / 김영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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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의 한계를 직시하라!

"일상의 착각을 이해하게 되면 직관의 한계를 알고 삶의 방식을 재정비하게 되며,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 궁극적으로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고 있는 장막을 걷어내고, 어쩌면 처음으로 진실과 대면하게 될 것이다"(9).


바로 옆에서 동료가 집단 구타를 당했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경찰이 있다. 사람들은 "그럴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는 2004년 이그노벨상을 수상했던 크리스와 댄의 '투명 고릴라' 실험을 바탕으로 한다. 크리스와 댄은 흰 셔츠를 입은 팀과 검은 셔츠를 입은 팀이 농구공을 패스하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실험 참가자들에게 검은 셔츠 팀의 패스는 무시하고 흰 셔츠 팀의 패스 횟수만 말없이 세어달라고 부탁했다(20). 그러나 이 실험의 실제 관심은 동영상 중간에 고릴라 의상을 입은 여학생이 약 9초에 걸쳐 무대 중앙으로 걸어와 선수들 가운데에 멈춰 서서 카메라를 향해 가슴을 치고 걸어나가는 모습을 봤는가 하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약 50퍼센트의 학생들이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 

"고릴라가 바로 카메라 앞까지 걸어와 그들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가슴을 친 다음 멀어져 가는 것을 사람들이 왜 못 보는 걸까? 고릴리가 보이지 않도록 한 것이 무엇일까?" 이것이 바로 이 실험의 주제이다.

사람들이 고릴라를 보지 못하는 것은 시력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이러한 인식이 오류는 기대하지 못한 사물에 대한 주의력 부족의 결과이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특정 부분의 모습이나 움직임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사물이 나타나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향(21)이 있음을 밝혀낸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특정 부분을 아주 선명하게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당장 관심을 쏟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세상은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23).

"이 책은 우리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일상에서 우리가 흔히 일으키는 6개의 착각을 다룬다. 주의력 착각, 기억력 착각, 자신감 착각, 지식 착각, 원인 착각, 잠재력 착각이 그것이다"(7).

6개의 착각 중 자신감 착각 부분에 보면, "실력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실제보다 자신을 더 낫다고 생각하기 쉽다"(133)고 한다. 실력이 낮을수록 과도한 자신감 착각에 빠져사는 증거가 제시된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착각에 빠져 사는지를 깨우쳐준다. 또한 우리의 (사소한) '착각'이 얼마나 큰 위험을 불러올 수 있는지 보여준다. 우리의 착각은 바로 앞에 차가 있는데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충돌하는 교통사고를 일으키기도 한다. 우리의 착각은 잘못된 신념을 불러 일으키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 수도 있다. 앞에서 말한 경찰(옆에서 집단 구타당하는 알아채지 못한)은 실형을 살았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는 언론, 기업, 광고계, 정치인들이 우리의 '착각'을 어떻게 역이용하는 지도 밝힌다. 정신 바짝 차리고 우리를 '착각'하게 만드는 검은 음모를 경계하자!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며 우리는 '신'이 아닌, '이성의 빛'을 신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이성의 빛'이 발전시킨 학문에 의해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라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방법적 회의로 모든 인식을 뒤엎고 "나는 의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한 점에 도달한 데카르트처럼, 이 책은 우리가 가진 직관의 한계를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일상적 '신념'을 회의하게 만들어준다. 우리가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 깨닫고, '과도한 자신감'에서 벗어나자. 우리는 조금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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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다 열일곱
한창욱 지음 / 예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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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이루지 못할 상황은 없다(249).

 
오랜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고 또렷하게 남아 있는 기억이 하나 있다. 중학생 시절 참고서를 사기 위해 서점엘 들렀는데, 딱 봐도 노동을 하시는 분이겠구나 생각되는 아저씨 한 분이 서점 안으로 들어오셨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위해 참고서를 사주고 싶다고 하셨다. 그 녀석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아버지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영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어떤 책을 사주어야 도움이 되는지 서점 주인에게 물으셨다. 그분에게는 꽤 목돈이었을 값을 지불하고 몇 권의 참고서를 받아든 아저씨는 "이걸 사주면 우리 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할까"라고 혼자 물으시며 문을 열고 나가셨다. 나는 진심으로 그분의 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주기를 빌었다. 그런데 어린 마음에도 어쩌면 아저씨의 소원은 이루어지기 힘들지 모른다는 생각이 내게 있었던 것 같다.

부모의 인생이 곧 자녀의 인생이 되는 것이 세상이다. 세상은 언제나 그랬다. 그나마 지난 세기 동안 우리나라의 교육은 가난을 모면하고 신분상승을 꾀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가 되어왔지만, 더 이상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은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해진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멋지다 열일곱>에서 나는 희망을 읽었다.

<멋지다 열일곱>은 아주 영리한 책이다. 소설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제일 먼저 했다. 청소년의 꿈을 응원하는 '자기계발서'를 소설의 서사와 함께 엮어냈다. 그 '목적성'이 이 소설을 차별되게 하지만, 문학적인 측면에서는 결점이 될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목적성이 두드러진다.

<멋지다 열일곱>은 뜨거운 책이다. 집을 '지옥'이라 부르고, 마을 뒷산 정상에 자리한 정자를 '천국'이라 부르는 "천국의 아이들"(139), 어디에서도 살가운 돌봄을 받지 못하는 그 달동네 아이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가진 책이다.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에나 주제로 삼았었을 법한 'old'한 느낌도 있다.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초등학교 앞에서 튀김집을 하시는 어머니,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을 중퇴한 누나, 한때 잘나가는 농구선수였으나 부상으로 꿈이 있는 미래를 잃어버린 '재하'가 있다. 청각장애인이었던 아버지가 마을버스에 치어 숨지고, 어머니마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뒤, 열네 살의 나이에 두 동생(그중 한 명은 선천성 청각장애아이다)을 돌보아야 하는 소년 가장이 된 '창수'는 재하 친구이다.

일용직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부당하게 임금을 갈취당하는 모습을 보고 '변호사'를 꿈꾸었던 창수는 당장 먹고살길을 찾아야 하는 현실에 희망을 거세 당한 채 '배달민족'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멋진 바이크(두카티 999R) 하나 장만하는 것이 유일한 꿈인 재하는 그럭저럭 하루를 산다. 그러던 어느 날, 재하 앞에 '다연'이가 나타난다.

<멋지다 열일곱>은 차가운 책이다. '열일곱'을 뜨겁게 응원하지만, 꿈은 현실에 발을 딛고 서야 한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직시한다. '예정된 불행'을 향해 내달리고 있는 재하와 창수 앞에 '다연'이를 보내 '드림레이스'를 시작하게 만든다. 어느 날, 재하를 찾아온 다연이는 '드림레이스'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드림레이스'는 다연이를 비롯한 독서반원 친구들이 꿈을 성취하기 위해 만든 모임이었다. 다연이는 3퍼센트 이내에 드는 성공을 쟁취하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일곱 가지' 항목이 미션으로 주어지는 '드림레이스'에 재하를 초청한다. 재하는 '드림레이스'의 정식 회원이 되기 위해 일곱 개의 미션을 차례로 수행해나간다. 이 과정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꿈을 만나고,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길로 안내된다.


"선택받는 삶을 살지 말고 선택하는 삶을 살아라!"(60)

<멋지다 열일곱>에서 내가 찾은 성공한 인생에 대한 정의이다. "진정한 자유인이란 떠돌아다니는 여행자가 아니라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래. 내가 오늘 무슨 일을 할지, 누구와 함께 무엇을 먹을지, 영화를 볼지 연극을 볼지, 어디서 잠을 잘지 등등을 스스로 선택하며 사는 사람이 진짜 자유인이라는 거야!"(60)

무조건 공부하라는 백마디보다 이 책 한 권을 통해 열일곱의 가슴을 흔들어보면 어떨까. 대학에 지나치게 안달하지 말고 보다 긴 안목으로 인생 지도를 그려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면 어떨까. 꿈을 잃어버린 어른들 때문에 '열일곱' 청춘까지 꿈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꿈을 이루지 못할 상황 따위는 없다는 믿음을 심어주고 싶다. 열일곱이기에, 열일곱인 자체로 반짝반짝 빛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아직까지 나 자신은 비록 '열일곱'에게 모델이 되고 등불이 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지만, 그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이런 책이 있어서 행복하다. 뜨거운 가슴으로, 그러나 보다 냉정하고 영리하게 '열일곱'에게 다가가는 이 책을 나는 응원한다. 멋지다! 열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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