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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
멜라니아 마추코 지음, 이현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2월
평점 :

"우린 우리가 온 곳보다는 우리가 가야 할 곳에 더 애정을 느끼지"(330).
우리 인생은 과거에서 이어져 미래로 나아가는 화살표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과거에서 왔지만 우리의 관심은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 즉 미래 쪽으로 시선이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국경을 초월하여 다인종, 다문화 사회를 향해 가고 있는 시점에 자신의 고유한 뿌리를 탐구하는 일이 얼마나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일일까 의구심도 들지만, 이것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인생의 보다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물음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한 소년과 소녀의 인생과 사랑 이야기를 다룬 <비타>는 개인사이면서 가족사이고, 민족사이면서 세계사이기도 하다. 시간적으로는 현재에서 과거를 추적하는 자손 세대의 시점과 그들이 추적하는 과거의 '오늘'이 교차하고, 공간적으로는 뉴욕과 '투포'라는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마을이 교차하면서 씨줄과 날줄로 '마추코 집안'의 내력을 엮어간다.
<비타>의 작가 멜라니아 마추코는 개인의 가족사를 배경으로, 그러니까 실화를 바탕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이주해 간 가난한 이탈리아인들의 이민사"라는 대서사시를 완성해냈다. 할아버지 세대의 삶(뿌리)에 대해 들려줄 증언자들이 이 땅에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그녀는 뿌리에 관한 전설에 대한 절박함, 기억에 대한 갈망을 다음과 같이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역사가 없는 한 집안의 이야기는 전설이다.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며 세세한 내용과 이름과 에피소드가 풍부해지는 전설이다. 주의가 산만하고 무심하던 어린 시절에 전해 들은 전설은 너무 늦게 재발견되었다. 이제 아주 단순하고 꼭 필요하며 늘 따라다니는 영원한 질문, 즉 '너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운명의 마지막 고리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547).
<비타>는 열한 살 디아만테와 아홉 살 비타가 이탈리아를 떠나 1903년 뉴욕 엘리스 섬에 내리면서 시작된다. "책 제목인 '비타'는 이탈리아어로 '삶, 인생'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이름이 암시하듯 이 소설은 비타의 인생, 그리고 비타를 사랑한 소년, 디아만테의 인생 이야기다"(572). 이 같은 역자의 힌트를 염두에 두고 있는다면 이 책이 보여주고자 하는 큰 그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903년을 기점으로 <비타>가 추적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이주해 간 가난한 이탈리아인들의 이민사"는 이 한 문단 안에서 모두 요약이 된다. "19세기 말에 태어난 젊은이들은 미국으로 왔다. 열네 살, 열여섯 살, 열여덟 살(...)에 더 크고 싶고 살아남고 싶고 다시 일어서고 싶었던 젊은이들은 무리를 지어서 사촌들과 형제들과 친구들과 대서양을 횡단해야만(죽어야만) 했다. 더 크고 싶고 살아남고 싶고 다시 일어서고 싶다면 말이다. 그들은 (...) 미국과 맞서야만 했다. 그들은 버려지고 길을 잃고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고향으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극히 일부분만이 실제로 그렇게 했다. 도전적인 수많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행을 계속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진 세상의 경계 너머까지 밀고 나가서 마침내 자신이 떠나왔던 곳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드는 왕국을 찾는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기 위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200). 그 잔혹했던 역사의 한 귀퉁이, 생의 한 자락, 누구도 거부할 수 없었던 비극적 운명의 수레바퀴를 작가는 이처럼 간단하게, 극명하게, 비참하게, 눈부시게, 지독하게, 충만하게 그려내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메뚜기 떼처럼 미국에 날아온 4500명 사이에 끼어 있었던, 열한 살 디아만테의 인생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첫 문장으로 시작된다. "미국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제일 먼저 시킨 일은 바지를 벗는 것이었다"(24). / 지금은 세계적인 패션의 거리로, 세계의 유행을 결정하고, 어떤 것이 유행에 뒤떨어진 것인지 판정하는, 성공한 사람들을 위한 지역이 된 소호(65). 그중에서도 프린스 스트리트는 이 지역에서 가장 유행에 앞선 거리였다. 그 거리의 이름이 낯익은 '나'는 건성으로 이렇게 내뱉는다. "우리 친 할아버지가 프린스 스트리트에 사셨대"(66). / 이렇게 시작되고, 교차되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지금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삶의 공간이었던 뉴욕의 한 모퉁이를 들여다볼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뉴욕타임즈 빌딩이 세워질 때, 그곳에 흘려졌던 이탈리아인들의 눈물과 애환을 다시 기억하게 된다. 누구도 알지 못했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던 그들의, 또 우리의 역사를 말이다.
20세기 초, 가난한 노동자로 살아야 했던 이민자들의 애환은 이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 듯 하다. 시간과 건강과 감정과 존엄과 영혼을 도둑 맞은 삶이었다고. "로코는 누군가의 것을 훔쳐야만 부자가 될 수 있는 거라고 설명했다. 꼭 돈을 훔칠 필요는 없었다. 부자들은 많은 것을 훔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시간, 건강, 젊음, 감정, 존엄, 영혼을 훔칠 수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재산이 전부 도둑질한 것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노동은 도둑들이 삶을 열기 위해 사용하는, 자물쇠를 여는 도구다"(84).
최소한의 존엄마저 지킬 수 없는 잔혹하고 비참한 삶,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다시 살게 하는 것, 견디게 하는 것,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
시간과 공간뿐 아니라, 여러 사람의 사랑도 교차되는 <비타>의 다양한 인생 이야기가, 소년과 소녀의 가혹한 세상살이와 뒤섞인 그들의 꿈과 사랑과 좌절과 운명과 도전이 내게 던져준 질문이다. <비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하나 있다. 도망 중인 디아만테와 비타가 춤을 추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디아만테, 누구 죽였지, 그래서 달아난 거지?"
비타가 이렇게 말을 시작하자 디아만테가 그 말을 가로막았다.
"쉿, 우리 영어로 말하자."
"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미국인인 척하자, 비타."
디아만테가 모자 귀퉁이를 만지작거리면서 소곤거렸다.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이. 오늘 밤은 즐기자. 아이 필 소 해피."
그가 말을 시작했다.
비타는 알아듣지 못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네가 가르쳐 줬잖아, 기억 안 나? 난 행복해."
"나도 행복해."
"해피."
디아만테가 계속 말했다.
"디아만테, 뭐라고 하든, 해피"(254-255).
두 사람은 함께 춤을 추며 잠시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난다. "다른 사람의 발길질도, 튀김 냄새도, 그렇게 여러 달을 신었는데도 아직도 죽은 사람의 냄새가 알게 모르게 흘러나오는 체사레의 신발도, 그들에게 들켜서 잡혀 배를 찔릴 것이라는 두려움도 사라져버렸다"(254). 매일의 삶이 전투처럼 치열할지라도, 죽는 것보다 못하다 여겨지는 비루한 삶일지라도, 최소한의 존엄마저 지킬 수 없는 잔혹하고 비참한 삶,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다시 살게 하는 것, 견디게 하는 것,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함께할 수 있는 누군가,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 내일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해피'라는 그 파랑새말이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우리는 이 '해피'라는 파랑새를 좇으며 살고, 좌절하고, 다시 살아갈 것이다.
씨줄, 날줄이 촘촘하게 엮어진 <비타>는 참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거대한 우주의, 지구의 한 귀퉁이, 무한한 시간의 한 지점에 존재했던, 존재하고 있는 우리들을 통해 지금도 도도한 생의 물결이 흐른다. 몇 년을 살다 죽었건, 어떠한 삶을 살았건, 무엇을 누렸고 무엇을 박탈당했건, 세대와 세대로 이어지며 흐르는 인생은 그 자체로 빛나는 환희라는, 믿음과 감사가 차오른다. 이 땅에 살았고, 살고 있고, 또 살게 될 모든 인생에게 경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