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 고전 - 내 인생을 바꾸는 모멘텀 3분 고전 1
박재희 지음 / 작은씨앗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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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잔소리, 고전에서 길어올린 지혜

 
교육을 이야기할 때, 당장 먹을 고기를 주지 말고 고기잡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가르쳐야 한다고도 합니다. 지혜의 왕으로 이름을 남긴 솔로몬도 그의 잠언에서 세상의 금, 은보다 지혜를 얻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그보다 먼저 우리가 얻고 가르쳐야 할 지혜란 무엇일까요?

<3분 고전>을 읽으며 이런 것이 지혜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경쟁력과 실용성을 우선으로 하는 교육 철학이라면 가르치기를 주저할 '고전'이지만, 그 속에 삶의 지혜가 담겨 있음이 이제야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저도 이제 나이를 먹었나봅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학교 성적이나 공부 때문에 매를 드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성적이 계속 떨어질 때도 "네 인생은 네 것이니 네가 책임져야 한다"고만 하실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남매가 크게 다툴 때는 여지 없이 매를 드셨고, 우리는 잘못을 누우칠 때까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때 큰 아들이었던 오빠에게 자주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동생들을 덕(德)으로 다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위정이덕'(爲政以德)의 교훈, 즉 '법보다 위대한 것이 덕이다'라는 바로 그 가르침입니다(104-105). 어릴 땐, 아버지가 안 계시면 늘 오빠가 아버지 대신이라 이르셨고, 오빠는 아버지 대신 동생들을 덕으로 대해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 그때는 그저 '잔소리'로만 들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며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아버지의 그 잔소리가 새록새록 귓가를 울렸습니다. 힘으로 상대를 꺾는 것이 결코 능사가 아니라는 것, 그렇게 얻은 승리는 상대방에게 굴욕감만 안겨줄 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보다, 상대가 스스로 나를 따르도록 만드는 것이 진짜 강자라는 것을, 그것이 지혜임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3분 고전>은 KBS 제1라디오에서 방송되었던 <라디오 시사고전> 중에 120여 개의 좋은 글을 선정하여 책으로 펴낸 것입니다. 그것을 '역발상의 미학', '마음경영', '변화와 혁신', '역경이 경쟁력이다', '전략으로 승부한다'는 카테고리 안에 나누어 담았습니다. 고전의 지혜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현자들의 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넣어주는 지식이 아니라, 깨달음을 주는 가르침입니다. 가지는 것만이 행복이 아니라 나눔 속에 더 큰 행복이 있고, 만들어가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 지켜보는 인내 속에 더 큰 사랑이 있음을 알려 줍니다. 제압하는 것만이 강자가 아니라 용납하고 포용하는 자가 강자이며, 나아지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할 줄도 알아야 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120편의 글 중에 가장 마음에 남는 교훈은 '태상유지'(太上有之)입니다(50-51). 노자는 <도덕경>에서 리더를 4가지 등급으로 나누어 이야기합니다. "최고의 지도자는 있다는 존재만 느끼게 한다. 그 다음은 친절하여 칭찬받는 지도자다. 그 다음은 그 앞에 서면 두렵게 만드는 지도자다. 그 다음은 뒤돌아서서 욕하는 지도자다"(51). 다시 말해, 아랫사람에게 칭송받고 환호받는 리더는 최상의 리더가 아니라고 합니다. 칭찬은 언제든지 비난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리더는 부하들이 지도자가 '있다'는 정도만 느끼는 상태를 말합니다. 리더가 있지만 그의 무게를 못 느끼는 상태, 참 어려운 경지입니다. 그러나 곱씹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3분 고전>은 옛 가르침을 그대로 옮겨 놓지 않았습니다. 읽으면서 그 기발함에 폭소를 터뜨린 곳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조문도석사가의)는 가르침입니다(94-95). 지은이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아침에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이 구절에 의문이 하나 남습니다. '그럼 낮엔 뭐할까요?' 아침에 그토록 원하던 지위를 얻고, 부를 얻고, 명예를 얻었다면 여러분들은 낮에 뭐하시겠습니까?" 재밌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지은이는 이것을 "성공보다 아름다운 것은 나누는 것입니다"라고 풀고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었으면 남은 시간엔 나누라는 것입니다. 즉, 지은이는 깨달음도 아름답지만 그 깨달음이 남에게 전파되었을 때 더욱 의미 있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덧붙입니다.


동양 고전의 묘미는 운율이 있어 멋스럽고, 짧아 기억하기 쉽고, 이야기가 있어 던져주는 여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잔소리처럼 정감이 있고, 운치 있는 가르침입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해주지만 공을 다투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흐른다.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물처럼 사는 것이다"라는 가르침입니다(19-20). 작은 생선은 자주 뒤집으면 먹을 게 없다(40-41). 때로는 내버려 두는 것도 사랑이라는 가르침입니다(약팽소선). 이런 멋스러운 가르침과 공생하는 인생의 지혜가 바로 고전이 지닌 가치일 것입니다. 바쁜 현대인의 생활 리듬에 맞추어 <3분 고전>으로 내놓았지만, 두고두고 음미할만한 깊은 맛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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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베이커 자서전 : 성장
러셀 베이커 지음, 송제훈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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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우주가 만들어지기까지, 그리고 거기, 어머니가 계셨다.

 
1981년 가을, 치매로 병상에 계신 어머니를 방문하며 이야기가 끝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어쩌면 이 책은 저자의 '성장기'를 다룬 '자서전'이면서 동시에 그의 성장을 이끌어온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기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머니의 정신이 시간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여행을 시작하면서, 저자는 현실 세계라고 믿고 있는 곳으로 어머니를 잡아 끌어오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어머니와 과거로의 멋진 여행을 같이 하기 위해 애쓴다. 어느 날엔가 행복한 미소를 짓고 계신 어머니에게 기분이 좋으시냐고 묻자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한다. "네. 오늘 기분 최고에요. 아빠가 나 오늘 배 타고 볼티모어에 데려 가신다고 그랬단 말이에요"(19). 얼마 전, 크게 인기를 끌었던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할아버지 이순재'가 '꼬마 이순재' 시절 엄마의 등에 업혔던 기억을 떠올리며, "엄마", "엄마"를 부르면서 눈물 짓던 장면!

저자는 이때의 감상을 이렇게 적는다. "어머니를 따라 희망 없는 과거 여행을 계속하며 나는 내 과거를 그토록 쉽게 내버린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이었는가를 깨달았다. 우리 모두는 과거에서 왔다. 아이들은 자신들을 생겨나게 한 그 과거에 대해 알아야 한다. 아이들은 인생이 아주 오래 전에 사라져 버린 시간으로부터 현재에까지 뻗어 있는, 사람들로 엮어진 동아줄과도 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인생이란 결코 기저귀에서 수의를 입기까지의 한 뼘의 여정으로 한정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22). 그리하여 저자는 '자신을 생겨나게 한' 과거로의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러셀은 자신을 키워준 사람들을 만난다. <성장>은 '러셀 베이커'라는 유명 칼럼리스트의 성장사를 다룬 자서전이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그만이 아닌 것이다.

풀리처상에 빛나는 미래의 칼럼리스트 '러셀 베이커'는 '출세'에 대한 집착이 남달랐던 어머니에게 내몰려 여덟 살 때 언론계에 첫발을 들여놓게 된 기억부터 풀어놓는다. 공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던 1932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삼촌댁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던 소년 러셀은 비지니스에 별로 소질이 없다는 것이 드러날 때까지 신문을 팔았다. 소년 러셀이 열한 살이던 해, 선생님으로부터 A를 받은 여름 방학 과제물 '작문'을 직접 읽어본 어머니가 "너 작가가 되는 게 어떻겠니?"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말이다. 역사적으로 세계 대전이 있었고, '공황'이라는 사회의 소용돌이가 아버지를 잃은 한 소년의 삶까지 잠식해들어온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의 이야기이지만, 그의 이야기가 비극으로 읽히지 않는 것은 유쾌한 문체 속에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 소년의 진솔함 때문이고, 다양하고 복잡한 인생사가 생생한 인간군상 속에 녹아내리기 때문이다. 읽고 있으면, "이것이 인생이구나" 되뇌이게 된다.

위인들의 '자서전' 읽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게 '러셀 베이커 자서전' <성장>은 색다르고 특별한 자서전으로 다가온다.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자서전과는 달리 대공황을 지나는 어느 가난한 가족들의 역학과 소소한 일상이 잔잔한 여운을 만들어내며, 나와 나의 가족들, 그리고 부모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조용한 관심을 불러으킨다. 역경을 딛고 이루어낸 눈부신 성공담이 아니라, 가족과 친구와 세상이 끊임없이 부딪히며 어떻게 '나만의 우주'를 만들어내는지 보여준다. <성장>의 주인공은 한 사람이 아니라, 그들 모두이고, 러셀 베이커에게 특별했던 어머니라고 하고 싶다.

구호식품을 타서 먹는 형편에도 '집안의 기둥'인 아들이 신사처럼 보이기 위해서라면 값비싼 양복을 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 있는 그의 어머니는 우리의 어머니와 많이 닮았다. 시어머니와 힘겨루를 했던 어머니는 어느새 세월이 흘러 아들의 아내와 힘겨루기를 하는 '시어머니'가 된다. <성장>은 소년이었고, 아들이었던 러셀이 스물여섯의 나이에 결혼을 한 뒤, 이야기는 1981년 가을로 훌쩍 건너 뛴다. 이제 러셀은 '생후 3개월 된 손녀'는 둔 할아버지가 되었다.

러셀은 자유로운 시간 여행을 하며 다시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는 행복한 딸이 된 '여든의 어머니'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하나의 세계가 살다가 사라졌으며, 그 세계가 내 피와 뼈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음에도 난 그것에 대해 이집트의 파라오에 대해서만큼도 아는 게 없었다"(20). 러셀의 오늘은 부모님의 미래였으나 그는 그것을 따분한 과거로만 여겼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의 약동하던 미래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따분한 과거가 되고 마는 것을 줄곧 지켜보며 깨닫는다. 자신이 그토록 따분하게만 여겼던 부모님의 과거는 이제 사라졌지만, 그것이 자신의 피와 뼈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음을 말이다.

그 사람을 알려면 뿌리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내 스스로 창조해냈다고 믿는 순간들도, 바로 그 뿌리의 자양분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뿌리는 그리 자랑스러울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초라한 그것이여서 오히려 감추고 싶을런지도 모른다. 위대한 칼럼리스트 러셀의 보잘 것 없는 '뿌리'처럼 말이다. 그러나 <성장>은 이 세상에 보잘 것 없는 '뿌리'란 없다는 것을 다시 알게 해준다. 누구의 것이건, 어떤 모양이건 절대 하찮아질 수 없는 사랑처럼, 누구의 어떤 뿌리도 하찮은 것이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생명을 얻고, 성장하고, 다시 새로운 세대에게 생명을 이어줄 수 있는 것은 모두 그 뿌리 때문이 아니던가. <성장>을 통해 뿌리의 은혜를 알게 되었으니, 러셀 베이커의 <성장>은 내게도 <성장>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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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바로보기 - 감추어진 유대인 2000년 역사를 찾아서
류모세 / 두란노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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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을 다시 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구약성경을 읽어온 나는 유대인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았던 것 같다. 세계 금융을 쥐락펴락할 정도로 영항력을 행사하고, 노벨상을 휩쓸 정도로 두뇌가 좋은 민족이라는 부러움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이지만 위선적인 신앙으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다는 이유로 한편으로 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고백해야겠다. 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이 곧 '유대인'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10년의 세월 동안 이스라엘에서 사역자로 살면서 '까칠한' 유대인들의 가시에 찔려 아파하고 고민하면서도 그들의 참모습을 이해하려 애썼다"는 저자 류모세는 <유대인 바로보기>를 통해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까지 유대인들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왔을까?"를 추적하며, "그들의 참모습은 과연 어떠할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유대인 바로보기>를 읽으며 들었던 첫 번째 생각은 그들이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웃'이라는 생생한 입체감이었다. 중동지역 분쟁을 지켜보고, "back to Jerusalem"을 외치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면서도 '유대인'을 그저 성경(과거)과 관련된 관념적 민족으로 인식했지, 지금도 계속 역사를 써나가고 있는 지구촌 이웃이라는 사실은 그다지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 들어 팔레스타인의 입장에서 보도되는 중동 지역 분쟁에 관한 책자들이라든지, 잔혹하다 싶을 정도로 과격한 이스라엘 군대의 모습이 뉴스에 많이 보도되면서 '유대인'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과 증오가 새로운 기류를 형성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유대인 바로보기>를 통해 본 유대민족사는 어떤 면에서 '유대인 증오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성도가 아니라 해도 지구촌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중동 전쟁의 뿌리 깊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유대인 바로보기>는 <이슬람 바로보기>와 함께 짝을 이루어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극단적인 부조화와 불협화음 현상의 원인"을 유대인의 독특한 민족적 운명에서 찾아내고 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라는 신앙적 차원으로 귀결된다. "종교적, 정치적 그리고 인종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그 땅의 문제를 명쾌하게 해석해주는 전문가는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중동 문제가 국제 정세 분석가들의 '세속적인' 접근만으로는 풀리지 않으며, 하나님과 유대 민족이 맺은 계약에 대한 '영적인' 이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17). 역사적으로 항상 미움과 질시와 핍박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던 '유대인의 불행'이 결국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또다른 반증임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

가장 흥미롭고 주목해볼만 했던 사실은 "십자군 운동, 르네상스, 종교개혁, 신대륙 발견, 대영 제국의 탄생, 초강대국 미국의 부상, 홀로코스트 등 수많은 사건들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대규모 이동'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었다(18). <유대인 바로보기>는 유대인들이 굴직한 세계사에 개입되어 있는 모습을 포착해주는데, 예를 들면 이렇다. "학자들은 유럽 문화에 고대 그리스 지식을 "재도입" 했다는 의미에서 '르네상스'라고 부르지만, 르네상스가 유대인들이 살았고 다시 활기를 찾은 지역에서 활성화되었다는 사실은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다. 르네상스는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3세기 동안 그리스, 아랍, 히브리 고전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에 매달려 있던 지역에서 발흥했는데, 이것이 단지 또 다른 역사의 우연일까?"(104)

<유대인 바로보기>는 유대인 역사를 전문적으로 추적한 연구서적이라기보다, 구약성경 이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건국하기까기 굵직한 역사적 이슈를 중심으로 쉽게 풀어쓴 유대인 역사서이다. 유대인 역사에 대한 관심은 있으나 적절한 책을 찾지 못했던 평신도들을 위한 도서로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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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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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왜 우리에게 도덕이 화두일 수밖에 없는가?

 
현재 미국인 4명 중 1명이 정부 식량을 보조 받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ABC뉴스 인터넷판). 2009년 미국인의 15% 가량인 5천만 명이 금전 부족 등으로 필요한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지 못하는 '식량 불안'(food insecurity) 상황에 처했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또 자녀가 있는 가구 10곳 중 1곳의 아이들이 경제 사정 때문에 끼니를 거른 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구촌의 최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나라, '아메리칸 드림'을 꾸게 해주었던 꿈의 나라 미국에서 4명 중 1명이 연방 정부 식량보조 프로그램에 등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지구촌에서 최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지만, 국민의 1/4이 식량 불안 상황에 처해 있는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제러미 리프킨은 그의 책 <공감의 시대>에서 미국의 경쟁적이고 이기적인 문화 대신 유럽의 포용적이고 배려적인 문화를 주목하며, 미국에 비해 유럽의 유소년기 빈곤 비율이 현저하게 낮다고 전했다. 경쟁적이고 이기적인 적자생존 방식의 경제 패러다임은 부의 집중을 가져왔고, 그로 인해 소수 계층은 아프리카 난민을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의 음식을 소비하는 동안, 한쪽 그늘에서는 스스로 끼니를 해결할 수 없는 신규 빈곤층이 날마다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의 <왜 도덕인가?>는 도덕적 관점에서 미국의 (정치) 상황을 진단하고 있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 2004년 11월 공화당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재선 성공하면서 '도덕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일어났다. "출구 여론조사에 따르면 많은 유권자들이 다른 어떤 현안보다도 '도덕적 가치'에 기준을 두고 투표권을 행사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테러리즘이나 이라크 전쟁, 경제 등과 같은 주요 현안을 제치고 도덕적 가치가 표심을 좌우한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마이클 샌델은 "경제중심의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도덕성에 목말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핵심가치는 결국 도덕일까? 절대이념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당위적'인 이념이라 할 수 있는 '도덕'을 중심에 두고 <왜 도덕인가?>를 묻는다는 것 자체가 어쩐지 시대를 역행하는 역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 상황을 진단하고 있는 <왜 도덕인가?>는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결국은 도덕적 현안들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환기시킨다.

민주사회에서 왜 도덕적 가치가 중요한가? <왜 도덕인가?>는 자유민주의의와 자본주의가 만났을 때, 인간 사회에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복권 사업, 스포츠의 상업성, 공공기관의 상업화, 환경오염의 책임, 공정한 법 집행 문제, 시장논리, 존엄사, 배아 복제, 낙태와 동생애, 독점자본 등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현안들은 미국 사회 안에서 도덕적 가치가 처한 곤경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도덕적 가치가 왜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개인의 권리와 선택의 자유는 도덕적, 정치적 삶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규범이지만, 과연 그것들이 민주사회를 위한 적절하고도 충분한 기반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좋은 삶에 관한 올바른 정의 없이 공공생활에서 일어나는 난해한 도덕적 의문들을 논리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논의의 핵심에 자리잡은 의문들이다.

C. S. 루이스 이래 최고의 변증가로 인정받는 래비 재커라이어스 목사는 그의 책 <위대한 장인>에서 에덴 동산에 있었던 선악과를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담(인간)을 지으신 후, 아담(인간)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아담(인간) 앞으로 이끌어오셨다. 그리고 아담이 부르는 이름이 곧 그 생물의 이름이 되었다. 하나님은 피조세계를 재정의할 수 있는 권리를 아담(인간)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나 오직 한 가지 아담(인간)에게 재정의를 금지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 '선악과'라는 것이다. 도덕의 사전적 의미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양심, 사회적 여론, 관습 따위에 비추어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 준칙이나 규범의 총체"이다. 인간이 마음대로 재정의할 수 없는 한 가지, 그것은 바로 '도덕적 가치'라는 것에서 새삼 희망을 느낀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된 사회에서는 집중된 부가 최대 권력이 된다. 돈 있는 사람들은 공정해야 할 법도 인간 사회의 모든 제도도 자신들에게 유익하게끔 재정의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심지어, 선과 악의 기준도, 도덕적 가치마저도 자신들 편의에 맞게 재정의하려 든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각 분야가 도덕에 기반해야겠지만, 도덕적 가치에 기반을 둔 정치가 가장 시급한 현안이 아닐까 싶다. 물론 미국이나 우리나 정반대의 정치현실이 우리를 더욱 암울하게 만들고 있지만, 도덕적 가치를 기반한 정치가 토대가 되어준다면 인간 사회를 적절하게 조율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을 시작으로 '도덕'이라는 이슈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사회 곳곳에서 불일듯 일어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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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마지막 장미
온다 리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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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변화를 주면서 되풀이 되는 하나의 주제, 살인 사건의 변주곡!
이 살인 사건은 진실인가, 환상인가.

 
한국에서도 두터온 독자층을 형성하는 '온다 리쿠'의 명성이 자자하지만, 이 작품에 대한 호불호는 극명하게 갈리는 듯 하다. 결말 때문에 시청자들의 원성이 자자했던 '파리의 연상'이 연상된다. 두 연인의 결말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던 시청자들은 모든 것이 여주인공의 소설 속 설정이었다는 결말에 황당해했다. 무엇인가 색다른 결말을 시도하고 싶었던 작가들의 파격적인 설정이었지만, 오히려 시청자들에게 허탈감만 안겨주었을 뿐이다. <여름의 마지막 장미>도 '온다 리쿠 최고의 판타스틱 미스터리'라고 하지만, '미스터리'의 발단이 되는 살인 사건이 누군가의 생각 속에서 이루어진 가상 현실이라고 한다면?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는 일이 혼재하는 문학적인 기법이 신선한 묘미를 준다고 해도,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미스터리에 몰입하기에는 다소 흥미가 떨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이 책이 어땠는지 묻는다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고 대답하겠지만, 일면 허탈할 수도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여름의 마지막 장미>는 주제 선율을 유지하며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변주곡'을 연상시킨다. "주제, 제1변주, 제2변주, 제3변주, 제4변주, 제5변주, 제6변주", 이것이 이 책의 목차이다. 각각의 변주마다 화자가 바뀌고, 한 변주가 끝날 때마다 조금씩 상황이 달라지며 다른 살인 사건(또는 자살)이 일어난다. <여름의 마지막 장미>가 품고 있는 '미스터리'는 그 사건 자체에 초점이 있다기보다,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의 숨겨진 사연이 더욱 궁금증을 자아낸다. 차라리 인물들의 숨겨진 사연을 배경으로 하여 독자들과 어떤 살인 사건이 진실이고, 어떤 살인 사건이 환상인가 하는 것을 알아맞추는 게임을 벌였다면 훨씬 더 흥미롭지 않았을까.

"전부. 그거 그녀들의 게임이야. 셋만 참가하는, 그녀들 사이에서만 성립하는 게임. 내내 그랬어, 그 세 사람. 그런 이야기를 진짜로 받아들이면 안 돼. 그 얘기들 가운데 과연 뭐가 진짜일지"(46).
외진 곳에 홀로 서있는 고풍스러운 호텔. '사와타리 그룹'의 세 자매는 매년 늦가을이면 그곳으로 손님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연다. 그런데 그녀들에게는 지어낸 이야기를 하는 습관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그 같은 게임을 계속한 듯하다. 한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다른 자매가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녀들은 그런 게임을 벌일 때마다 비참하고 괴기스러운 경향의 결말을 즐겼지만, 관객이 되어 세 자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손님들은 경악한다. 그녀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이런 게임을 즐기게 되었을까.


"진실은 허구 속에. 진실은 거짓말 속에. 진실은 농담 속에. 지금 그녀는 진실을 허구 속에 담아 이야기하려 하고 있다"(261).
세 자매가 즐기는 이 기묘한 유희 속에는 사실과 거짓이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다. "거짓을 사실처럼 잘 꾸며 내려면 사실을 어느 정도 적절하게 섞는 것이 핵심이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보다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색깔을 입히는 쪽이 얘기하기가 쉽다. 상대를 믿게 하려면, 자잘한 사실을 쌓아 올려 목적지인 거짓으로 유도해야 한다"(48). 세 자매가 공개적으로 이런 게임을 벌이는 목적은 무엇일까. 어디까지가 지어낸 거짓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모를 기묘한 이야기가 호텔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그곳에 가득차 있는 '악의'를 느끼기 시작한다. 거짓과 진실, 과거와 현재, 기억과 실제가 함께 녹아들며, 초대되어 온 손님들의 얽히고 섥힌 관계가 점차 그 속살을 드러낸다. "거짓말은 무언가를 은폐하기 위해 하는 경우가 많다. 그녀들은 과연 무엇을 은폐하려는 것일까"(48).

 
이 책에는 중간 중간 영화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의 원작자인 알랭 로브그리예의 글이 인용되어 있다. 로브그리예는 "머릿속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를 종이 위에 재현하는 형식"으로 시나리오를 기술했다고 하는데, '뒤틀린 망상의 세계'라는 이미지가 두 작품을 하나로 겹쳐지게 만든다. <여름의 마지막 장미>에서 연주되는 여섯 개의 변주는 하나의 사건(주제)이 여섯 사람의 머릿속에서 어떻게 상영되고 있는지 재현해준다. 이것은 현실과 생각(상상)과 기억이 한데 버무려지면서 끊임없이 하나의 영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우리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온다 리쿠의 <여름의 마지막 장미>는 사건의 기승전결이나 미스터리의 트릭을 파헤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변주곡이 끝날 때마다 독자의 머리속에 남겨지는 '인상'(이미지)을 선율로 하여 여섯 개의 변주가 머릿속에서 하나의 곡조로 어우러지도록 감상해보는 것이 이 책을 즐기는 방식이 아닐까 한다.

지금도 우리의 머릿속에는 현실의 사건과 생각(상생)과 기억이 한데 버무려진 영상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다. 그것은 현실인가, 환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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