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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베이커 자서전 : 성장
러셀 베이커 지음, 송제훈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10월
평점 :
나만의 우주가 만들어지기까지, 그리고 거기, 어머니가 계셨다.
1981년 가을, 치매로 병상에 계신 어머니를 방문하며 이야기가 끝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어쩌면 이 책은 저자의 '성장기'를 다룬 '자서전'이면서 동시에 그의 성장을 이끌어온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기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머니의 정신이 시간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여행을 시작하면서, 저자는 현실 세계라고 믿고 있는 곳으로 어머니를 잡아 끌어오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어머니와 과거로의 멋진 여행을 같이 하기 위해 애쓴다. 어느 날엔가 행복한 미소를 짓고 계신 어머니에게 기분이 좋으시냐고 묻자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한다. "네. 오늘 기분 최고에요. 아빠가 나 오늘 배 타고 볼티모어에 데려 가신다고 그랬단 말이에요"(19). 얼마 전, 크게 인기를 끌었던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할아버지 이순재'가 '꼬마 이순재' 시절 엄마의 등에 업혔던 기억을 떠올리며, "엄마", "엄마"를 부르면서 눈물 짓던 장면!
저자는 이때의 감상을 이렇게 적는다. "어머니를 따라 희망 없는 과거 여행을 계속하며 나는 내 과거를 그토록 쉽게 내버린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이었는가를 깨달았다. 우리 모두는 과거에서 왔다. 아이들은 자신들을 생겨나게 한 그 과거에 대해 알아야 한다. 아이들은 인생이 아주 오래 전에 사라져 버린 시간으로부터 현재에까지 뻗어 있는, 사람들로 엮어진 동아줄과도 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인생이란 결코 기저귀에서 수의를 입기까지의 한 뼘의 여정으로 한정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22). 그리하여 저자는 '자신을 생겨나게 한' 과거로의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러셀은 자신을 키워준 사람들을 만난다. <성장>은 '러셀 베이커'라는 유명 칼럼리스트의 성장사를 다룬 자서전이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그만이 아닌 것이다.
풀리처상에 빛나는 미래의 칼럼리스트 '러셀 베이커'는 '출세'에 대한 집착이 남달랐던 어머니에게 내몰려 여덟 살 때 언론계에 첫발을 들여놓게 된 기억부터 풀어놓는다. 공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던 1932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삼촌댁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던 소년 러셀은 비지니스에 별로 소질이 없다는 것이 드러날 때까지 신문을 팔았다. 소년 러셀이 열한 살이던 해, 선생님으로부터 A를 받은 여름 방학 과제물 '작문'을 직접 읽어본 어머니가 "너 작가가 되는 게 어떻겠니?"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말이다. 역사적으로 세계 대전이 있었고, '공황'이라는 사회의 소용돌이가 아버지를 잃은 한 소년의 삶까지 잠식해들어온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의 이야기이지만, 그의 이야기가 비극으로 읽히지 않는 것은 유쾌한 문체 속에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 소년의 진솔함 때문이고, 다양하고 복잡한 인생사가 생생한 인간군상 속에 녹아내리기 때문이다. 읽고 있으면, "이것이 인생이구나" 되뇌이게 된다.
위인들의 '자서전' 읽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게 '러셀 베이커 자서전' <성장>은 색다르고 특별한 자서전으로 다가온다.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자서전과는 달리 대공황을 지나는 어느 가난한 가족들의 역학과 소소한 일상이 잔잔한 여운을 만들어내며, 나와 나의 가족들, 그리고 부모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조용한 관심을 불러으킨다. 역경을 딛고 이루어낸 눈부신 성공담이 아니라, 가족과 친구와 세상이 끊임없이 부딪히며 어떻게 '나만의 우주'를 만들어내는지 보여준다. <성장>의 주인공은 한 사람이 아니라, 그들 모두이고, 러셀 베이커에게 특별했던 어머니라고 하고 싶다.
구호식품을 타서 먹는 형편에도 '집안의 기둥'인 아들이 신사처럼 보이기 위해서라면 값비싼 양복을 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 있는 그의 어머니는 우리의 어머니와 많이 닮았다. 시어머니와 힘겨루를 했던 어머니는 어느새 세월이 흘러 아들의 아내와 힘겨루기를 하는 '시어머니'가 된다. <성장>은 소년이었고, 아들이었던 러셀이 스물여섯의 나이에 결혼을 한 뒤, 이야기는 1981년 가을로 훌쩍 건너 뛴다. 이제 러셀은 '생후 3개월 된 손녀'는 둔 할아버지가 되었다.
러셀은 자유로운 시간 여행을 하며 다시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는 행복한 딸이 된 '여든의 어머니'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하나의 세계가 살다가 사라졌으며, 그 세계가 내 피와 뼈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음에도 난 그것에 대해 이집트의 파라오에 대해서만큼도 아는 게 없었다"(20). 러셀의 오늘은 부모님의 미래였으나 그는 그것을 따분한 과거로만 여겼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의 약동하던 미래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따분한 과거가 되고 마는 것을 줄곧 지켜보며 깨닫는다. 자신이 그토록 따분하게만 여겼던 부모님의 과거는 이제 사라졌지만, 그것이 자신의 피와 뼈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음을 말이다.
그 사람을 알려면 뿌리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내 스스로 창조해냈다고 믿는 순간들도, 바로 그 뿌리의 자양분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뿌리는 그리 자랑스러울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초라한 그것이여서 오히려 감추고 싶을런지도 모른다. 위대한 칼럼리스트 러셀의 보잘 것 없는 '뿌리'처럼 말이다. 그러나 <성장>은 이 세상에 보잘 것 없는 '뿌리'란 없다는 것을 다시 알게 해준다. 누구의 것이건, 어떤 모양이건 절대 하찮아질 수 없는 사랑처럼, 누구의 어떤 뿌리도 하찮은 것이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생명을 얻고, 성장하고, 다시 새로운 세대에게 생명을 이어줄 수 있는 것은 모두 그 뿌리 때문이 아니던가. <성장>을 통해 뿌리의 은혜를 알게 되었으니, 러셀 베이커의 <성장>은 내게도 <성장>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