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라이프 2 - '심야식당' 이이지마 나미의 일상 속 스페셜 요리 Life 라이프 2
이이지마 나미 / 시드페이퍼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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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인생, LIFE!

 
음식이 인생의 즐거움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알려면, 굶어보면 된다. 7일 정도 금식을 해본 적이 있는데, 정말이지 하루 종일 웃을 일도 없고, 웃을 힘도 없었다. 시간은 또 왜 그리 더디가 가는지, 음식을 먹지 않으니 하루가 천 년처럼 지루했다.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큰 축복인지. 오래 전, 위암으로 어머니를 잃은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아직까지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음식을 먹지 못한다. 어머니와의 추억은 물론, 아무것도 드실 수 없었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목이 매인다고. 어머니를 간호했던 친구는 어머니가 굶어서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없는 고통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그때를 생각하면 친구는 지금도 오래도록 눈물을 그치지 못한다.

SEEDPAPER에서 시리즈로 발간하고 있는 <LIFE>는 그 제목처럼, 삶이 있고, 삶의 즐거움이 가득한 요리책이다. <LIFE> 시리즈에서 다루고 있는 요리는 어떻게 보면 '매일 먹어 특별할 것 없는 메뉴'뿐이다(13).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할지 모르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친근한 낫토에서부터, 군만두, 김밥, 계란찜, 계란말이, 볶음밥, 탕수육, 감자 샐러드, 치킨 등 '지극히' 일상적인 요리를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고 '주제'에 통일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간단한 밑반찬이라든지, 뚝딱 만드는 간식이라든지, 요리에 통일성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요리책이 특별해보이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삶과 사랑 때문이다.

<LIFE>는 요리 이름만 들어도 저절로 빙그레 미소가 지어진다. 휴일에 온 가족이 모여 만드는 요리는 <전원 집합! 군만두>이다. 형과 동생이 경쟁하듯 먹는 모습이 상상되는 요리는 <소년 크로켓>, 살짝 지갑 사정이 걱정되는 독신 남성이 월급 하루 전날 만들어 먹는 요리는 <오늘만 견디면 월급날! 고기채소볶음>, 감기에 걸려 무리하게 출근한 날 집에 돌아가자마자 만들어 먹고 싶은 요리는 <감기 얼른 나으세요, 계란찜>, 여고생이 남자 친구를 위해 만들어 학교에 가져가는 요리는 <청춘의 계란말이>, 이 외에도 <사내 대장부의 볶음밥 곱빼기>, <아빠, 고생 많으셨어요! 탕수육>, <엄마가 외출하신 날 아침, 감자 샐러드> 등 재밌고 유쾌한 요리가 한 가득이다. 상상만으로도 따뜻한 행복이 마음 가득 차오른다.

가족과 연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LIFE>를 보고 있으면,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에 젖는다. 무엇에 감염된 것처럼, 배가 고파지고, 나도 모르게 삶을 사랑하게 된다. <LIFE>의 요리는 모두가 쉽게 사먹을 수 있는 것이지만, 어쩐지 직접 만들어보고 싶은 욕구가 마구 솟아오른다. 어떤 요리는 '그 사람'을 위해, 어떤 요리는 '가족'과 함께, 또 어떤 요리는 '나만을 위해서!' 없는 솜씨지만 만들어보고 싶은 용기(!)가 생기는 것은 친절하면서도 간단해보이는 '레시피'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LIFE>를 통해 요리는 '사랑 고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 음식을 만든 사람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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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람다 2010-11-29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스러운 서평 잘 읽었습니다.
 
낭만과 인상주의 : 경계를 넘어 빛을 발하다 - 19C 그림 여행 마로니에북스 아트 오딧세이 4
가브리엘레 크레팔디 지음, 하지은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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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와 함께 떠나는 매혹적인 19C 그림 여행! 

 
나에게 미술 작품은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가장 처음 이름을 외운 예술가는 아마도 초등학교 시험에 단골로 등장했던 조각가 로뎅이 아니었나 싶고, 다음으로 이름을 외운 예술가는 당시 화가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피카소였을 것이다. 피카소의 그림은 어린아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난해한 것이었지만, 그래서 더 특별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땐, 진짜 같은 그림, 즉 실재를 모사한 듯한 그림이 최고의 작품으로 보였다. 그러나 미술을 알게 되면서 실재 그대로의 모사가 아니라, 작품에 담긴 과장이나, 색감, 빛과 어둠, 곡선, 비율 등의 표현에 작품 고유의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게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고, 정교한 기법은 하나의 과학이었으며, 예술가의 상상력은 하나의 수수께끼가 되었다. 인체의 비율이라든지 각도라든지 원근법이라든지 알면 알수록 그림에 도입된 과학적 기법이 놀라웠고, 붓질 하나 하나에 숨겨진 '의미'는 수수께끼 놀이처럼 호기심을 자극했다.

처음 그림에 흥미를 가졌을 때는, 감상보다도 누구의 어떤 작품인지를 알아맞추는 일이 가장 재미있었다. '아는 척'을 하며 우쭐대는 유치한 허영심 때문이었지만,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을 자주 찾았던 우리들(친구들)에게 그것은 일종의 유희였다. 아직도 그림을 감상하는 일에 있어서는 '초보'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요즘 느끼는 또다른 재미는 그림에 대한 다른 사람의 감상을 '읽는 일'이다. '그림 읽어주는 여자'의 그것처럼, 그림을 '읽어내는' 전문가들의 해설이 신기하면서도 재밌다. 마로니에북스에서 발간한 <경계를 넘어 빛을 발하다 - 낭만과 인상주의>는 바로 그런 즐거움이 가득한 책이다.

<경계를 넘어 빛을 발하다 - 낭만과 인상주의>는 서양 미술의 격변기라고 일컬어지는 19세기의 흐름을 보여주면서도 미술 사조 중 미술 사상 가장 혁신적인 형태의 회화라 평가되는 낭만주의와 인상주의에 초점을 맞추었다. 책은 <주요 용어>, <예술 중심지>, <대표적 예술가>라는 세 개의 카테고리로 구성되어 있다.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나자렛파, 순수주의, 비더마이어, 이리엔탈리즘, 라파엘 전파, 사실주의, 마키아이올리,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점묘주의, 상징주의, 미술공예운동, 나비파, 스카필리아투라, 분할주의, 분리주의를 설명하는 <주요 용어>는 사조 설명과 함께 대표 작가의 작품 설명을 곁들이여 그 특징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다른 책들과 차별적인 것은 <예술 중심지>에 대한 설명인데, 문화 예술의 중심 도시 뿐만 아니라, '마음의 장소'라 하여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특별한 장소'가 등장하는 것이 이채롭다. '알프스 산맥'은 같은 대상이라도 화가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얼마나 다양하게 포착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며, 19세기 세계의 해상무역을 지배한 유럽열강이 그려낸 '바다와 대양'은 해전이나 탐험가들의 영웅적 행위를 기념하는 역사적 주제, 신비하고 매혹적인 장소로서의 바다, '선박-초상'과 해군을 전문적으로 그린 그림 등 세 종류로 나누어지는 것이 흥미롭다(152). 이밖에 기차와 기차역, 아카데미와 박물관까지 '말' 없는 예술이지만, '거짓'이 없는 그림은 당시 사회와 소통하는 훌륭한 매개임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대표적 예술가> 파트는 에피소드 형식의 간략한 설명이 화가와 작품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 그 '특징'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특별히 화가들이 집중했던 그림, 다시 말해 어떠한 주제를, 어떠한 방식으로 표현해냈는지를 알게 되어 좋았다.

처음 미술관을 찾았을 때는 그림을 어떻게 감상해야 할지 몰라 많이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림 앞에 오래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들은 그림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림을 아무리 보아도 미처 알 수 었었던 것들을 설명해내는 전문가들이 그렇게 존경스러울 수가 없었다. 요즘처럼 세상살이가 팍팍할 때는 할 일 없이 그림이나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이 게으른 인생처럼 생각될 때도 있다. '놀이'도 효율과 유익을 계산하는 시대이다 보니 한가한 시간이 오히려 초조함을 자극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그림을 할 일 없이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조용히 평온이 깃드는 것을 느낀다. <경계를 넘어 빛을 발하다>는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가 무엇인지 맛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책에 담긴 '글씨'를 읽지 않아도, 그림이 전하는 이야기는 그 그림의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전달된다.

감수성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혹적인 그림 여행, 이 호사를 한 권의 책으로 누릴 수 있다! 이런 사치는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여유이자, 안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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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법칙 민음사 모던 클래식 35
러셀 뱅크스 지음, 안명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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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시대의 자화상이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의 자화상

 
민음사의 모던 클래식은 스스로를 이렇게 정의내린다. "과거의 유산이 아닌 살아 있는 고전, 이들 현재진행형의 고전을 '모던 클래식'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그 역할과 가치를 이렇게 요약한다. "이 젊은 고전들은 시대의 보고이자 미래의 유산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호밀밭의 파수꾼>에 견주어지는 <거리의 법칙>은 '이 시대' 안에 살고 있는 '10대의 불안'을 정밀하게 그려냈다는 데 가장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거리의 법칙>은 이 시대의 자화상이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머나먼 별에서 어쩌다 우연히 이곳에 오게 된 아이들로, 어른들에 비해 너무 약하게 만들어졌으며 말도 할 줄 모르고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데다가 돈 한 푼 없이 이곳에 왔기 때문에 모든 걸 어른들에게 의지하면서 어른들 틈에서 살아야만 하는 존재들 같았다. (...) 그리고 이제 그들에게 남은 건 그들을 아이들이라고 부르면서 마치 그들이 영혼을 가진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닌 자기들의 소유물인 양 행동하는 어른들과 함께 지구에서 살아가야 하는 삶뿐이었다"(473).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를 하고 어느 날 밤, 빚쟁들이 몰려들자 우리 가족은 피신을 해야 했다. 그때 작은 트럭을 타고 이동을 했는데, 아버지는 짐을 싣는 곳에 이불을 깔고 우리 삼남매를 나란히 눕게 했다. 그리고 다시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어주셨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이불을 눈밑까지 내리고, 달리는 트럭 위에 누워 바라보았던 그날 밤의 별빛이 아직도 눈에 선한다. 막 열 살이 되던 해였고, 그때 세상이 처음으로 무서웠다. 어쩌면 그날부터 어른이 될 준비를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어른들의 세계가 나의 세계로 침투했고, 나만의 세상을 흔들어댔다. 돌이켜 보니, 참으로 혼란하고 숨가뿐 시대 속에서 성장했다. 그렇게 어른이 된 나는 <거리의 법칙>을 읽으며, 나에게 세상은 어떤 곳이었는지 다시 생각해보았다. '나'를 중심으로 바라보던 세상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는 나를 바라볼 수 있는 보다 큰 그림이 그려진다.

여기 거리로 나선 한 소년이 있다. 열네 살 소년 채피가 '집'을 떠나 '거리'로 나서게 된 것은 마리화나를 사기 위해 엄마의 '동전'을 몰래 훔치다 들켰기 때문이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는 "매우 영리하지만 다른 사람의 삶에는 무감각한" 그들, 우리, 현대인들 때문이다. 이제 열네 살이 된 소년은 다른 사람에게 인식되는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부모님은 나의 불량한 태도와 마약 그리고 역겨운 외모 때문에 영원히 나를 깔보며 수치스러운 존재로 여겼다. 최소한 엄마는 그랬다. 그리고 경찰들에게 나는 범죄자였고 가치 있는 한 인간이 아니라 그들을 성가시게 하는 존재였고, 주민들을 상대로 소규모 마약 장사를 하는 또 한 명의 약에 취한 낙오자요 부랑아였다"(66).

어린이(청소년)는 어른의 돌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회는 자라나는 세대를 잘 양육해야 할 책임이 있음 또한 잘 알고 있다. 일차적으로 어린이가 돌봄을 받고 양육을 받는 곳은 가족 안에서이다. 우리는 '가정'이야 말로 가장 안전한 보금자리이며, '가족'이야 말로 가장 순결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곳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의 모습은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는 판타지에 가깝다. 가정은 오히려 원초적인 공격성을 가장 빈번하게 배출하는 곳이도 하다.

채피의 불행의 시작은 양아버지가 집으로 들어오고부터이니, 그보다 먼저 부모의 이혼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채피는 양아버지로부터 심각한 성적 학대를 당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끔찍한 비밀이었으며, 그의 인생의 부서진 부분이었다. 다른 사람과 있을 때 그는 '독립적인 인간'일 수 있었지만, "양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여전히 어둠 속에 홀로 누워 있는 어린 채피"(253)였다.

"누구든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과거와 관계를 끊어 버리면, 그 순간 모든 길들이 절망적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더 가까운 길도 더 먼 길도 없고, 모두 다 똑같이...... 절망적이다"(153).

학대와 무관심과 무시 속에 내버려졌던 10대 소년 채피는 엉망진창이 된 집과 가족을 버리고 거리로 나선 순간 친구인 러스와 함께 '범죄의 사다리를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는 어린 범죄자'(164)가 된다. 거리에서도 그들을 향한 학대는 계속 되었기에, 그들은 스스로 범죄자로 사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찌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학대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결코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그들과 같은 인간으로 존종하지 않았고, 한낱 어린아이로만 여겼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막을 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학대당한다"(165).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이 없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거리 속에 머문다.

<거리의 법칙>이라는 제목에 착안하여, '공간'이라는 틀 안에서 이야기를 재구성해보자.
엄마와 양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이동주택,
친구 러스와 폭주족들과 같이 살았던 오세이블의 비디오 덴 위층,
아이맨과 프로기와 함께 지냈던 버려진 스쿨 버스,
자메이카로 건너가 친아버지를 만나게 된 스타포트 저택,
아이맨과 함께 지내며 자신과 인생에 대해 배운 개미 농장과 아캄퐁의 밭!

채피는 이 중 아이맨과 프로기(로즈)와 함께 지냈던 스쿨 버스 안에서 처음으로 행복을 느낀다. "이제야 진짜 집을 찾은 것 같았다. 진짜 가족을 만난 것 같았다. 이 퀴퀴한 들판의 낡고 찌그러진 스쿨버스에서"(210). 채피가 행복을 느끼고, 자신과 인생에 대해 배움을 얻은 것은 '가정'이라고 할 수 있는 '주택'에서가 아니라, 스쿨 버스나 농장과 같은 '거리'에서였다. 그는 피를 나눈 가족이나 허울 뿐인 우정으로 묶인 친구에게서가 아니라, 불속에서 자신을 구하려다 죽은 악당 '브루스'와 불법체류자였던 자메이카인(아이맨)과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프로기 또는 로즈)에게서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자산임을 깨닫는다. "내가 사랑하겠다고 선택한 사람들은 세상에 오직 이 세 사람뿐이었는데, 모두 내 곁을 떠나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날 아침 모베이에서 마지막으로 러스를 본 날, 나는 귀여운 로즈 자매와 아이맨과 브루스가 내게 큰 재산을 남겨 주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분명히 깨달았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나는 그 재산을 야금야금 꺼내 쓰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470).

<거리의 법칙>이 보여주는 이 시대의 자화상은 어떤 모습인가? 나는 채피가 '스타포트 저택'을 묘사하는 구절에서 이 시대의 모습을 보았다. "몇 달, 몇 년, 아니 내가 알기로는 노예시대 이후 수백 년 동안 이 저택은 마치 쾌락의 섬처럼 평범한 삶의 어둠 속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나를 자극하고 흥분시켜 끊임없이 발기하게 만들며, 지금까지 나는 그런 욕망을 줄곧 끙끙대며 혼자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447).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채피에서 '본'으로 이름을 바꾸고, 거리에서 세상을 배우며, '진정으로 자신을 보는 법'을 깨달아가는 10대 소년에게 그것은 "자신을 들여다보고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대신 자신으로부터 세상을 내다보고 앞을 바라보게"(472) 되는 과정인 듯하다.

인생이라는 것은 경계가 없는 듯하다. 정확하게 선을 그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어린아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어른이라 할 수 없고, 어느 부분이 과거이고 어느 부분이 현재라고 구분 지을 수 없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며, 아무리 추악하고 끔찍한 과거라 해도 '나'에게서 분리해낼 수 없고 단절시킬 수 없다. '본'으로 이름을 바꾼 채피가 진정한 라스타파리안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백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했듯이, 진정으로 자신을 보는 법을 깨닫기 위해서는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을 먼저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타고난 자기 자신, 주어진 세계 안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본'처럼 "자신으로부터 세상을 내다보고 앞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 안에서 퍼져 나오는 밝고 새로운 빛을 이용해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내게 달린' 것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독립적인 인간으로, 그리고 책임 있는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본, 네게 달렸어. 이 대답이 바로 내가 원하는 전부이다"(476).

<거리의 법칙>은 '모던 클래식'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작품이다. 현재와 소통하는 감각이 문학적인 낭만과 잘 조화를 이룬다. 꽤 두꺼운 책이지만 지루하지 않게 읽었다. 더불어, 전에는 그 가치와 재미를 크게 느끼지 못했던 <호밀밭의 파수꾼>이 비로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은 '시대'(의 불안)에 대한 공감의 부족 때문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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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로맨틱 명소 101
사라 우즈 지음, 조진경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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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당신이 잠든 사이에(While You Were Sleeping)>의 주인공 '루시'(산드라 블록)는 초라한 아파트에서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며 시카고 철도국에서 토큰을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다. 가난하고 외롭고 무료한 삶이지만, 그녀는 매일 꿈을 꾼다. 지금은 비록 한 번도 사용해보지 못한 여권이지만, 언젠가 이 여권을 각국의 스탬프로 가득 채우리라는. 그녀가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 플로렌스이다(플로렌스는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영어식으로 발음한 것이라고 한다).

 

 
이 영화의 앤딩에서 루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달콤한 신혼여행을 떠나면서 이런 독백을 남긴다.

"아버지 말씀이 백 번 옳았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게 절대 아니다. 하지만 잭은 내 여권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신혼여행으로 플로렌스에 날 데려간 것이다. 이런 걸 두고 세상을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본 뒤로, 이 앤딩 장면은 내가 꿈꿀 수 있는 가장 로맨틱한 여행의 모델이 되었다.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데, 연인과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한다면 어디인들 아름답지 않다고, 어느 곳인들 로맨틱하지 않겠는가 마는, 루시처럼 꿈에 그리던 곳을 연인과 함께 여행하게 된다면, 정말이지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리라. 그야말로 꿈의 여행이다.    

 

 
fantastic!
 

<유럽의 로맨틱 명소 101>은 그야말로 판타스틱한 꿈의 여행책이다. 요즘 다양한 '테마'를 가진 여행 서적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지만, 이보다 더 달달한 여행책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여행책이 유행을 하면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은 해외 여행의 경험을 책으로 담아내다 보니 작가의 경계가 희미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유럽을 여행한 우리나라 사람의 책이 아니라, 20년 동안 지구 곳곳을 종횡무진 누비며 60여 개국을 여행했다는 여행 작가 '사라 우즈'의 것이다. '모험가'라고도 불리는 '사라 우즈'는 2005년에 '영국 여행작가조합상'과 '올해의 여행안내서 작가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에는 '여행 작가 부분 KWJ 기념상'을 받았다고 하니 신뢰할 만한 전문가의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이탈리아의 플로렌스 / 아르노 강)


<유럽의 로맨틱 명소 101>은 유럽 여행의 대가가 연인들에게 추천하는 여행지이다. 꼭 '연인과 함께'가 아니더라도 그 자체로 명소라할 수 있는 여행지이지만, 여인과 함께할 때 감동과 행복이 100배가 될 수 있도록 '유럽의 명소를 연인과 함께 즐기는 비법'을 전수해주고 있다. 예를 들면, '루시'가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플로렌스'를 저자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플로렌스(피렌체)에서는 어디서든 창문만 활짝 열면 로맨틱한 풍경을 볼 수 있다. 기복이 진 푸른 언덕을 배경으로 여러 가지 색이 조화를 이룬 테라코타 타일과 시계탑, 갈색의 첨탑들을 바라보노라면 이처럼 경외감을 일으키는 전경을 자랑하는 도시가 세계에 몇 군데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48).

저자는 연인과 함께 플로렌스를 여행한다면, 시뇨리아 광장으로 가서 거품 가득한 카푸치노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우피치 갤러리에서 르네상스 시대 작품들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고, 호화로운 빌라 산 미켈레 호텔에 가서 아주 멋들어진 경치를 즐기며 점심식사를 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다시 도심으로 가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을 감상하고, 아르노 강의 양편을 잇는 옛날 다리인 베키오 다리를 천천히 건너보라고. 오후가 되면 산 미니아토 알몬테 교회로 가서 천상에 온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베네딕트회 수사들의 그레고리 성가를 들어보고, 돌계단을 따라 플로렌스의 구시가지인 산 프레디아노로 내려가 다르딜리오네 거리에 있는 아늑한 카바올로 네로에서 아페리티프를 음미해 보자. 그리고 파올로 브루니에 다다르면 아르노 강을 따라가는 레나이올로 여행을 하라고 한다. 달빛이 비칠 때 느릿하게 나아가는 보트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아 플로렌스를 바라보라고.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배에서 내려 매력적인 카페 콘체르토에서 이국적인 화분과 골동품들 사이로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자리를 잡고 앉아서 부드러운 선율의 재즈에 맞춰 상쾌한 레몬 소스를 곁들인 크레페를 맛보아야 한다. 

 



(스페인의 라나자로테 섬 / 연인과 함께하는 요가)

 

(아일랜드의 딩글 / 조랑말을 타고 아름다운 딩글 반도 탐험)

<유럽의 로맨틱 명소 101>은 신혼여행지로 가기 좋은 한폭의 그림 같은 목가적인 은신처는 물론이고, 연인에게 선사하기 위한 샴페인과 하트 모양의 패스트리 그리고 동백꽃다발을 주문할 수 있는 이벤트 장소, 수(水) 치료, 초콜릿을 몸에 바르는 테라피, 원기를 회복시키 주는 남녀 공용 사우나와 같이 건강까지 챙길 수 있는 휴양 장소, 숨 막힐 정도로 멋있고 열광적인 교향곡과 감동적인 협주곡이 울려 퍼지는 도시, 정열적인 살사, 매혹적인 전통 음악과 춤을 즐길 수 있는 문화 명소, 식도락의 중심지, 아름다운 건축물을 감상할 수 있는 역사적인 명소, 편안한 현대식 휴양 장소까지 다양한 명소를 소개한다.

유럽은 그 이름만으로도 로맨틱한 그림이 그려지는 곳인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로맨틱'한 여행을 경험할 수 있는 명소를 뽑았으니 "fantastic"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터져나온다. 그런데 문제는, 전반적으로 저자가 추천하는 '로맨틱 여행'이 다소 사치스럽다는 것이다.

"전설적인 오리엔트 특급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는 기차 여행은 아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흥미롭고 사치스러운 여행일 것이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기차였던 오리엔트 특급열차는 로맨스와 신비로움, 그리고 사치의 대명사였다"(46).

어쩌면, 사치스러워서 더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여행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낭만적이고, 평화롭고, 여유롭고, 사치스러운 <유럽의 로맨틱 명소 101>은 여러 모로 내게는 '꿈의 여행'이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저자가 추천하는 101곳 중에 단 한 곳만이라도 저자가 일러준 대로 연인과 함께 여행을 해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한 편으로는 내 평생에 이런 날이 올까 싶지만, 그래도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믿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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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식 Go!
정허덕재 지음 / 문화구창작동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흡입력 없는 캐릭터가 아쉽다!

 
청년 실업이라는 암울하고 무거운 사회문제를 유쾌발랄한 캐릭터에 담았다. 그런데 그것을 풀어가는 해법은 판타지에 가깝다. '청년 백수 고황식의 신명나는 희망 찾기'라고 하지만 지나치게 가벼울 뿐만 아니라, 현실감이 없는 해피앤딩이다. 과연 우리나라 100만 청년 실업자 가운데 몇 명이나 <고! 황식>에게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거나,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의문이다. 

<고! 황식 Go!>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류의 소설은 주인공 캐릭터가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청년 실업자를 대표하는 '고황식'은 교통비를 아끼려 27살의 나이에 교복을 입고 버스에 오르는, 엉뚱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뻔뻔한 놈'이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이다. 아쉽게도 그 엉뚱발랄한 주인공에게서 매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미워할 수 없지만, 사랑할 수도 없는 캐릭터라고나 할까. 그의 '순수함'에 높은 점수를 준다고 해도,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동정심' 정도이다. 그가 현실 세계로 튀어나온다면 딱 '찌질이' 정도의 대접을 받지 않을까. 가볍고 유치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재미 없지도 않다. 문제는 흡입력이 없는 캐릭터! 이것이 이 소설의 한계라 생각된다. 

<고! 황식 Go!>라는 제목을 봤을 때, 내가 기대한 것은 <슬램덩크>의 '강백호' 정도 되는 캐릭터였다. 쥐뿔도 없지만 '가진 것'으로 기죽지 않는 당당함, 불러주는 곳은 없지만 세상엔 내가 필요하다고 믿는 뻔뻔함, 스펙은 좀 딸려도 가슴에 품은 꿈 하나로 세상과 맞짱 뜰 수 있는 무모함, 줄 수 있는 것이 마음밖에 없지만 순도 100%의 사랑을 장담할 수 있는 순박함, 어제 실패하고 오늘 또 실패했을지라도 자신을 믿으며 다시 도전하는 질긴 근성을 가진, 비록 현재의 삶은 비루하나 '내일'이 있기에 노래할 수 있는 그런 빛나는 청춘이기를 바랬다. (이것이 더 식상한가?)

우리의 <고! 황식>은 잘못하면 '패배의식'으로 가득찬 찌질이로 보일 위험이 있다. (스토리가 은근히 '미스테리'한 요소를 띠고 있기 때문에, 잘못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조심스럽지만, 최대한 보안을 유지하며 요약을 하자면) 그에게는 비록 눈치를 좀 주기는 하지만, 빈둥거려도 배불리 먹여주는 '재희'가 있으니 일단 놀고 먹을 수 있는 특혜가 있다. 가족의 생계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난폭한 세상에 내몰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속편한 놈이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짝사랑하는 '난희'와 그가 첫눈에 반해버린 '설아'가 있으니 축복받은 놈이고, 툴툴거리지만 언제든 빌붙을 친구 '용석'이가 있으니 운도 좋은 놈이다. 그런데도 그의 좌충우돌은 뻔뻔함의 극치를 달리는 청춘의 재기발랄이 아니라, 패배의식에 찌든 무기력함으로 비춰진다. 물론, 그가 간직하고 있는 아픈 사연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누구나 가슴에 상처 하나쯤은 있는거라던 명대사처럼, 그런 사연 하나쯤 지니지 않고 사는 인생이 어디 있는가.

<고! 황식 Go!>, 시간이 완전 남아돌아서 사는 것이 정말 무료한 사람들에게 권한다! 그렇지 않다면, 세월을 아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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