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독스 논리학 - 제논의 역설부터 뉴컴의 패러독스까지, 세계의 석학들이 탐닉한 논리학의 난제들
제러미 스탠그룸 지음, 문은실 옮김 / 보누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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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에게 올바른 추론 능력이 얼마나 부재한지 그 증거를 제시해주는 책.
논리적 사고의 한계와 함께 논리의 매력을 동시에 느끼다.

 
논리학이라고 하면, "모든 사람은 죽는다. 나는 사람이다. 고로 나는 죽는다"와 같은 삼단논법을 떠올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사회과학 분야로 전공을 바꾼 뒤, '실험설계'를 하며 '논리학'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사회현상을 압축된 이론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논리적인 사고' 체계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사회현상에 따른 잠정적 가설을 설정하고, 그 잠정적 가설을 지지하거나 거부하기 위해 실험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부딪힌 가장 큰 난관은 바로 그 '논리적인 사고 체계'였다. '추론'을 통해 가설을 검증하는 작업은 고도의 '논리'를 요구한다. 실험을 진행하며 추론을 통해 이론을 일반화하다 보면 곳곳에서 통제하지 못한 구멍이 발견되고, 그럴 때마다 깊은 좌절을 경험하는 중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인간이 정말 '이성의 동물'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위해 이런 저런 책들을 기웃거리고 있을 때, 마침 이 책이 눈에 띄었다. <패러독스 논리학>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의 석학들이 탐닉한 논리학의 난제들이라고 해서 다소 '긴장'이 되기도 했는데, 막상 책을 열어보니 '두뇌 트레이닝'을 위한 한 놀이처럼 재밌는 퀴즈들로 구성되어 있다. 제논의 역설부터 뉴컴의 패러독스까지 논리학의 대표적인 난제들이 '의외로' 쉽고 재밌게 다가오는 이유는, "일반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새롭게 재구성하여 해설한 책"이라는 설명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퀴즈'의 방식으로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정답'을 맞춰보려 열심히 사고하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논리학의 패러독스'에 푹 젖어들게 되는 것이다.

<패러독스 논리학>의 핵심은 퀴즈의 정답에 있지 않고, 그러한 정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있다. 약 183페이지 분량의 책에서 '해법'이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분량(115-183)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답이 도출되는 '추론'과 '논리'의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논리적이라고 착각하는) 판단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사고의 함정이 어떻게 우리를 위험하고 있는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패러독스 논리학>은 마치 '인간에게는 올바른 추론 능력이 부재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책처럼 느껴진다. 세계의 석학들이 탐닉했던 '논리학의 난제'를 확인하고 싶은 독자들, 논리적 사고를 위한 두뇌 트레이닝의 필요를 느끼는 독자들, 취미로 수준 있는 퀴즈를 즐기고 싶은 독자들 모두가 만족할 만한 책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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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좌파 : 세 번째 이야기
김규항 지음 / 리더스하우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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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대, 꿈꾸고 있는가?
"우리는 '개선된 세상'이라는 몽상을 버리고 '다른 세상'을 꿈꾸기 시작해야 한다"(217).

 
쇠사슬말고도 잃어버릴 것이 생긴 것일까. 지배계급에 속한 사람이 아니면서도 좌파 지식인의 글을 읽으며, 함께 걸어갈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생기니 말이다. (신앙적으로는 견해가 다른 것도 있지만)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조용히' 살고 싶은 이 게으름은 또 무엇인지. 뜨거운 마음으로 읽었으나 여전히 구경꾼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나의 허영을 들킬까봐 이 글을 쓰기도 민망할 지경이다.

김규항, 그는 어떤 사회적 이슈가 발생했을 때, 그는 무엇이라 말할까,가 궁금한 한 사람이다.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요란한 세상에 넌더리가 나지만, 그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게 된다. 허나 그것마저도 이 사람 앞에 서면 허영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그는 삶으로 말한다. 언제나 한치도 위장도 허용하지 않고, 제 자신마저 속을 수 있는 위선의 정체를 철저히 경계하는 그의 시선은 사회의 이면을 꿰뚫어보는 힘이 있다. 그는 이야기는 사회의 이야기이고, 시대의 이야기이지만, 다시 우리의 이야기가 되고, 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 때문에 그의 이야기는 가슴 한 켠을 시원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모두를 불편하게 한다. 처음엔 사회를 향한 그의 통렬함에 열광했지만, 곧 그 칼끝에서 '나'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 문제는 곧 나의 문제인 것이다.

<B급 좌파> '세 번째 이야기'라는 이 책은 2005년(8월)에서부터 2010년(3월)까지의 그의 글을 한 자리에 모은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는 그 시간들 동안의 '일기와 단상'을 추가로 수록했다. 한 권으로 집필한 책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내용이 상당히 반복된다. 그런데 나는 그 반복이 좋았다. 그가 '한결같이', '일관되게' 사회를 향해 외치는 소리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정리 되었기 때문이다. 5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잘 읽힌다.

<B급 좌파>를 읽으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는데, 가장 주요했던 것은 자본주의에 물든, 자본주의가 체화된 사회 안에서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분명한 '적'이 누구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중 가장 위험해 보이는 세력은 '개혁'의 정체였다. 그는 "개혁이란 사회문화적 표피를 변화시키지만 경제 질서와 계급 관계라는 본질은 끝없이 후퇴시킨다"(28)고 말한다. 그것은 그의 글을 읽기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였다. "보수 정당 간의 존재하지도 않는 차이를 부각하고 사소하기 짝이 없는 에피소드들을 끝없이 만들어냄으로써 대중으로 하여금 마치 그런 문제들이 세상의 실체이거나 정치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대중으로 하여금 정작 자신들의 문제인 오늘의 참혹을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여기게 만드는 쇼의 의미를 말이다"(28).

그는 우리의 현실을 이렇게 분석한다. "극우파는 우파 노릇을 하고 개혁 우파는 좌파 노릇을 하니 정작 좌파들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은 투명인간이 되거나 기껏해야 '진보 개혁 세력'이라는 해괴한 신조어로 개혁 우파의 부록 취급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그사이 개혁 우파는 한국 사회를 오롯이 신자유주의의 아가리에 집어넣었고, 인민은 '좌파 정권'이 가져다준 고단하고 존경 없는 삶과 캄캄한 미래에 진저리 치며 이명박과 박근혜에게 몰려갔다"(107).

군사 파시즘과 같이 드러난 '악'보다 왜 '개혁' 세력이 더 문제가 되는가? 내가 찾아낸 그의 대답은 이렇다. "자본화가 무서운 것은 내 스스로가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군사 파시즘은 폭력과 억압으로 우리를 다스리지만, 자본화는 우리한테 욕망을 심어 주어서 우리가 그 욕망을 좇게 만들고 우리의 정신과 가치관과 영혼을 송두리째 변질시킴으로써 지배하는 것이죠. 가치관이 변하는 것입니다"(193).

그렇다면, 우리가 싸워야 할 진짜 '적'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리는 '조중동'이니 '수고반동'이니 하는 대체된 적과의 싸움이, "모든 게 이명박 때문", "이명박만 없으면"이라는 허깨비 신학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변화를 위한 노력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진짜 적과의 대면을 피하는 방면이기도 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진짜 적과 대면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가 자본주의의 극단화한 형태로서 신자유주의에 기인하며, 결국 자본주의 자체에 닿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216-217).

"우리는 '개선된 세상'이라는 몽상을 버리고 '다른 세상'을 꿈꾸기 시작해야 한다"(217)고 말하는 그는, 그 첫 단계로 지극히 전통적인 좌파론, 즉 '계급의식'의 문제를 이렇게 논한다. 국익이란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세상을 계급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 국익이란 실은 지배계급의 이익의 거짓 표현일 뿐이라는 것. "계급의식이 결핍된 상태에서, 지금 한국처럼 대다수 인민들이 '계급의 이익'이 아니라 '국익'에 열중하는 상태에서 사회 진보는 불가능하다. 한국 사회의 진보는 무엇보다 인민들의 계급의식이 얼마나 늘어나는가에 달려있다"(381).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이렇게 날 것으로 담아내는 이유는, 나의 의견을 섞으면 나의 어설픈 철학과 안일한 삶의 태도를 들킬 것 같아 두렵기 때문이다. '의견'만 있고 '반성'이 없다면, 그래서 읽은 것이 개선된 삶으로 연결된 것이 없다면, 시끄러운 세상에 소음 하나만 더 보태는 꼴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패를 인정하듯 사그라졌던 마르크스가 재조명 되는 움직임 속에서, 줄곧 좌파의 삶을 지향해 온 <B급 좌파>가 우리의 눈길을 끄는 이유가 그것이다. 시대가 자본과 인간의 욕망 앞에 무릎을 꿇을 때조차도, '다른 세상'에 대한 이상을 포기하지 않은 그가 귀한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 정말 문제가 많다고 한마디 하려면, 먼저 '고래가 그랬어' 1부 정도는 후원을 하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은 많다. '옳음'을 말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은 적다. '옳은 길'을 배웠지만, 지금 스스로가 부끄러운 이유가 그것이다. 자본은 우리의 정신과 가치관과 영혼을 너무도 손쉽게 변질시키는데, 좌파의 이상은 '타락한 인간'을 쉽게 잠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B급 좌파>는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동원되는 숙명"에 처해 있으나, "적어도 그런 숙명에 순응하는 자신을 불편해 할 줄"(227) 안다면,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족하다고 위로를 해줄 것만 같다. <B급 좌파>에서 드러나는 좌파 논객 김규항의 '따뜻한'(?) 면모 때문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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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영문법 잘하고 싶다 나도 영어 잘하고 싶다 3
심재경.민경원.Steve Choe 지음 / 두앤비컨텐츠(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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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가 땅에 튼튼하게 자리를 잘 잡으면 나뭇가지가 흔들리지 않고 잘 자라는 것처럼 기본적인 문법을 잘 익혀두면 빠른 시간 안에 영어실력을 향상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문법을 배우는 이유입니다"(6).


암기가 아니라, 이해하는 영문법!

 

공부를 잘하려면 선생님을 잘 만나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또 선생님을 좋아하게 되면, 그 선생님의 과목만큼은 월등한 실력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의 영어 실력은 '선생님'을 잘못 만난 탓이라고 변명하고 싶습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는 불운을 겪은 셈입니다. 우리반 영어수업을 담당하셨던 선생님은 주로 읽기와 단어 암기에 중점을 두시며, 문법은 2학년 때부터 시작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2학년으로 진급한 후, 다시 그 영어 선생님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1학년 때 반이 달랐던 대부분의 아이들이 기초 문법을 이미 배운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반 아이들이 이미 기초 문법을 다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문법 수업을 또 건너뛰어버리셨습니다. 변명이지만 그때부터 영어 공부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습니다. 수업 시간에 생략 되어버린 문법을 독학으로 따라잡으려니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또 혼자 공부하는 문법책은 왜 그리 지루하기만 한지 도무지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한 번 기초를 잘 다지지 못한 영문법은 지금까지(!) 걸림되고 있습니다. 회화 중심 영어 공부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학문(학위)을 위해서는 영문 독해와 영작 실력이 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영문법의 기초가 탄탄하지 않으면 독해와 영작 실력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는 절대 향상 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습니다. 



<나도 영문법 잘하고 싶다>는 만화로 설명되어 있어서 처음엔 '저학년'을 위한 책으로 오해를 했습니다. 이 책은 영문법을 암기가 아니라 읽으며 이해해나갈 수 있도록 구성되고, 서술되었습니다. 스토리가 있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읽기에도 좋고, 만화(이미지)를 통한 설명이 훌륭한 시청각 도구가 되어 빠른 이해는 물론 이미지를 통한 암기에도 도움을 줍니다. 무엇보다 딱딱한 문법책이라는 이미지를 덜어내기 위해 구색을 맞추는 정도의 그림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를 형성하는 재미는 물론, 시각 효과를 극대화한 교재라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나도 영문법 잘하고 싶다>의 또다른 특징은 우리말과의 비교를 통해 영문법을 더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입니다. '비교'를 통해 그것만의 특색과 장단점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듯이, 우리말과 영어의 '차이'를 인지하게 되니 영문법의 특징이 더 선명하게 뇌리에 새겨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 책이 전하는 '영문법을 잘하는' 노하우는 '영어식 사고방식'을 이해하고 익히는 것입니다. 영어의 특정 표현을 배울 때, 영어식 사고방식을 설명하는 선생님들은 많이 봐왔지만, 문법을 설명하며 영어식 사고방식을 가르쳐준 선생님은 처음 만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영문법은 '규칙'을 암기하는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문법 안에 나타나는 영어식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독특하고 재미있습니다. 특별히 어려울 것 같지 않은 문법이지만 자주 헷갈리는 'a'와 'the' 화법, 그리고 우리말 어순과 다른 영어의 어순을 '영어식 사고방식'으로 이해하는 일이 흥미로웠습니다.

 



 <나도 영문법 잘하고 싶다>는 영어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명사'와 '동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사용 빈도수가 높은 것, 그러면서도 헷갈리기 쉬운 부분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에 영문법 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물론, 막연하게 영문법 규칙을 암기하고 있다거나, 원서 독해와 영작 실력을 향상시키고 싶은 분들에게도 유익하리라 생각됩니다. 영어 공부의 첫단추라고 할 수 있는 영문법, 시작은 불운했지만, 그래서 오랜 세월 방황도 했지만, 이제라도 좋은 교재,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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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부르실 때 - 맥스 루케이도가 전하는 희망과 격려 이야기
맥스 루케이도 지음, 정성묵 옮김 / 가치창조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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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부어지는 하늘 위로, 

주님 안에서 평안합니다!

 
'행복 전도사'로 불려지던 분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왜 그분은 스스로의 삶에서 절대 긍정을 완성할 수 없었을까. 누구는 배신감이 느껴진다고 하고, 누구는 그래서 더욱 안쓰럽다고 한다. 나는 인간의 한계를 생각해보는 중이다. 내 안에서 길어낼 수 있는 것의 한계말이다. "마법사는 당신 안을 뒤져 자신을 찾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 안을 뒤져 그분을 발견하라고 말씀하신다"(167). 결국, 나는 마음먹은 대로, 꿈꾸는 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전능한 인간에 대한 신화를 버리고, 다시 그분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는다.

'행복 전도사'의 남편은 '동반 떠남'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죽음을 택했다. 사람들은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을 떠나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나눠지려 한 한 남자의 사랑이 부럽다고 말하기도 한다. 안타깝고 슬픈 이별이지만, 그런 사랑 나도 받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끝까지 품어주고, 실수도 감싸주고, 어떤 모습이어도 안아주는 그런 사랑말이다. 한 순간의 불꽃이 아니라, 영원을 밝힐 수 있는 절대 사랑말이다. "하나님을 십자가에 붙들어둔 건 못이 아니라 사랑이었다"(64). 결국, 나는 어울리는 짝을 만나려면 그에 걸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거짓 사랑을 버리고, 다시 그분 품에 나를 맡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정보였다면 하나님은 교육자를 보내주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기술이었다면 하나님은 과학자를 보내주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었다면 하나님은 경제학자를 보내주셨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용서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구세주를 보내주셨다"(71).

나는 사랑하는 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예쁘게 단정하고,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절대 사랑'으로 내게 다가오신 하나님은 내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요즘 대한민국에서는 기독교인들을 '개독교'라 욕하는 사람들이 많다. 독선적이고, 위선적이고, 탐욕적이라 싫다는 비난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할 때도 있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내 삶이 사회적으로 그리 존경받을 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내 안에 여전히 부끄러운 허물이 또아리를 틀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기독교인'이라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용서받은 사랑, 그 사랑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허물을 덮는 그 사랑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의 최대 강점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적으로 느끼게 해준다는 데 있다.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삶에 아주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깨닫게 해준다. 어떤 연인의 사랑 고백보다 더 절실하고 진실하며 뜨거운, 나를 향한 하나님의 프러포즈를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부르실 때>에는 그동안의 저작물과 내용이 더러 겹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다시 들어도, 이보다 더 하나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감탄이 여전히 터져나올 만큼 탁월하다. 특별히 이 책은 우리의 인생을 조율하시고, 과거를 새롭게 하시며, 미래를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전한다. 고단한 오늘의 삶,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의 기억,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불안 가운데 하늘 위로가 조용히 내려 앉는다. 모든 글자 하나 하나가, 모든 이야기 하나 하나가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이다. 그 안에서 안식하며, 나는 오늘도 평안을 누린다. "하나님이 아신다.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 하나님이 내 이름을 부르신다"는 그 사실 하나면 된다. 정말이다. 그러면 된다. 그것이 전부이다.

책 제목 때문인지 책을 읽는 내내 입술에서 흥얼거려지는 찬양이 있었다. 그 찬양을 하나님께 글로 올려드려본다.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주셨죠.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내가 어딜 가든지 날 떠나지 않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아빠)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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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을 부르는 수학 공식 - 소설로 읽는 20세기 수학 이야기 에듀 픽션 시리즈 7
테프크로스 미카엘리데스 지음, 전행선 옮김 / 살림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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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읽는 20세기 수학 이야기

 
허무하다! 수학 교사였던 스테파노스가 오늘 새벽 그의 집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그의 절친이었던 미카엘 이게리노스에게 전해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수학 교사인 스테파노스는 왜 죽었는가? 그의 죽음이 미카엘 이게리노스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많은 물음을 남겨둔 채, 이야기는 과거로 돌아간다. 스테파노스와 이게리노스의 인연이 시작되는 시점으로. 그런데 이 이야기는 좀처럼 클라이막스에 도달하지 않는다. 도대체 언제 본론이 시작되나 싶은데, 이야기는 마지막 몇 장을 남겨두고 클라이막스에 이르고(심지어 그것이 클라이막스인지도 몰랐다), 마지막 한 통의 편지로 모든 것이 마무리 되고 만다.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듯, 내내 조바심을 치다 순간 맥이 빠져 버렸다. 그러니 '20세기 유럽을 사로잡은 지성인들과 예술인들이 총출동한 지성적인 스릴러'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수학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은 조짐이라도 보이면 일단 우거지상을 하고 불편한 표정으로 쳐다보는"(99) 독자라면, 이 책이 그다지 흥미롭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해주고 싶다. 지겨울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렵게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공식을 암기하고 기출 문제를 풀어대느라 '수학'에 대한 안 좋은 편견을 갖게 되었지만, 이제라도 '수학'이라는 학문의 과학성의 매력을 새롭게 느껴보고 싶은 독자라면 도전해볼 만하다.

<살인을 부르는 수학공식>이라는 제목은 이 책이 '살인사건을 둘러싼 스릴러'일 것이라는 힌트를 제공한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알집으로 압축 파일을 풀 듯, 마지막 한 통의 편지에서 모든 압축이 풀어지며 끝나 버리고 만다. '스릴러'의 묘미를 느낄 새가 없는 것이다. 그보다는 스테파노스라는 수학 교사가 '살해당한 동기'를 이해하는 것이 이 스토리의 관건이다. 살인 사건이 벌어졌을 때, 형사가 찾아내지 못했던 가장 중요한 단서는 '살해 동기'였다. ('해제'에도 밝히듯이) 이 모든 것은 한 수학자가 '왜' 살해당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동기를 이해하기 위한 '긴' 여정인 것이다.

파리에서 열린 국제 수학자 대회에서 기조연설을 맡은 힐베르트 교수는 "23개의 난제를 던지면서 수학계를 이끌어갈 학자들과 수학도들을 자극했다." 바로 그 자리에 살해된 스테파노스와 미카엘이 있었다. 스테파노스는 '힐베르트의 문제'라고 일컬어지는 난제 중에 특별히 두 번째 문제에 대단한 자극과 도전을 받는다. 그것은 "산술체계 공리의 완전하고 무모순적인 특성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그는 이 문제의 해법이 공리계의 폭넓은 평가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19세기 수학자들은 수학을 더 확실하고 완전한 체계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고 완전한 공리적 체계에 대한 연구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힐베르트는 "연구할 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수학 문제에는 반드시 해답이 있다는 사실"이라고 주장했다(44). 그러나 한 편에서는 "풀지 못한 난제들이 과학의 살아 있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더 이상 풀어야 할 문제가 없다는 것은 독립적인 발전 가능성의 결여나 멸종을 보여 주는 전조"(42)라고 여긴다.

수학의 영역에서 풀 수 없는 문제란 없다면서 답을 찾으라고 도전하는 힐베르트, 공리계에 모순이 없음을 증명하겠다는 스테파노스, 그리고 불가능한 해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오만이라고 주장하는 미카엘! 과연 누구의 '믿음'이 옳은 것으로 판명날까. 그것이 곧 수학의 미래였고, 수학 그 자체였다. 

이 책은 '진실(진리)'에 대한 하나의 '믿음'이 어떤 집착과 광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적절한 비유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가수 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한 집단의 집요한 싸움이 오버랩 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이 집단을 종교단체에 비유하기도 한다. 무엇에 대한 '굳센 믿음'을 가졌을 때, 그 믿음을 가진 자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 믿음이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 아닐까. 믿음이 강할수록 반대 사실에 대한 거부감도 커지기 때문에 만일 그것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진실을 은폐하고 자신의 믿음을 지키려는 편집증 같은 망상으로까지 발전되기도 하는 것이다(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타진요'나 '상진세' 카페 사람들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살인을 부르는 수학공식>은 피타고라스학파 내에서 피타고라스의 철학 체계를 그 뿌리부터 뒤흔들 수 있는 새로운 사실(논리)이 발견되었을 때, "과학의 종말이 왔다고 허둥대며 두려움에 어쩔 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이 어떤 일을 자행했는지 폭로하고 있다. 그러나 발견된 사실을 은폐하려는 시도 자체가 벌써 그들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이 책이 전하는 중요한 교훈은 이것이다. "그것이 어떻든 간에 나는 한동안 공부했던 역사를 통해 과학적 진실은 절대 숨길 수 없으며 어떠한 속임수에 의해서도 중단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배워야만 했습니다"(288). 우리가 절대 왜곡하고 은폐할 수 없는 진실이 과학적 진실만이 아니기를 바란다. 역사적 진실까지 어떤 거짓과 속임수도 언젠가는 결국 폭로되고 만다는, 진실(진리)은 결국 승리한다는 '믿음'만은 깨어지지 않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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