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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 홀 1 - 2009년 맨부커상 수상작
힐러리 맨틀 지음, 하윤숙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적 위업, 보여지는 명분, 알려진 사실, 드러나는 행동 뒤에 숨은 검은 속내를 폭노하다!
우리나라에 콩쥐팥쥐가 있다면 서양에는 신데렐라가 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동서양에 서로 닮은 꼴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새삼 흥미롭게 느껴진다. <울프 홀>은 16세기 튜더 왕조의 '헨리 8세 스캔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책을 읽을수록,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기도 한 '숙종 스캔들'이 겹쳐진다. 두 '왕정 스캔들'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왕과 왕의 여자들, 왕을 차지하려는 여인들의 암투, 아들(왕세자)을 얻고자 하는 명분, 그들을 둘러싼 치열하고 잔혹한 권력 다툼, 비열한 음모와 적의에 찬 계략과 누군가의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결말까지, 게다가 이 화려한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두 왕 모두 꽤 유능한 왕으로 평가받는다는 것, 왕의 사랑 하나로 왕의 아내가 된 궁녀(시녀), 그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오르지 못할 나무에 오르려 기회를 엿보는 인물까지 닮아도 참 많이 닮았다. 역사는 수직으로 뿐만 아니라, 수평으로도 돌고 돌며 반복되는 것인가 보다.
두 왕정 스캔들 모두 자주 영화와 드라마(미드)로 만들어질 만큼 이야기꾼들의 사랑을 받아오고 있는 것은 '왕정 스캔들'에 걸맞는 화려함과 흥미진진한 스토리 전개가 그야말로 '드라마틱' 하기 때문이리라. '숙종 스캔들'을 하면 단연 '장희빈'을 떠올리는 것처럼, 16세기 튜더 왕조를 배경으로 한 '헨리 8세의 스캔들'에서는 총 여섯 명의 아내 중에 그의 두 번째 아내였던 야망에 찬 '앤 불린'이 단연 주인공감이라 할 수 있다. <울프 홀>은 헨리 8세가 캐서린 왕비와의 결혼을 무효로 하고 앤 블린과 결혼하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숙종 스캔들'과 '헨리 8세 스캔들'의 차이가 있다면, 숙종은 여러 명의 아내를 둘 권리를 가졌으나, 헨리는 오직 한 명의 아내를 두어야 했다는 것이다. 최고권력자에게 종교가 부과한 이러한 제약은 눈엣가시처럼 성가신 것이었지만, 그의 양심을 찔렀고, 동시에 정치 권력의 안전을 위해서도 반드시 '합법적'으로 뛰어넘어야 할 장벽이었다. 남북전쟁을 통해 노예해방이라는 대과업을 이룩한 위인 '링컨'이 왜 남북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는지 그 정치적인 속사정을 알았을 때 배신감을 느꼈던 것처럼, <울프 훌>에서도 역사적 위업의 숨겨진 속셈이 폭로된다. 헨리 8세는 수장령으로 '성공회'라 일컫는 영국 국교회를 설립하며 '종교개혁'을 단행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 이유가 알고보면 단지 자신의 첫 번째 아내와 합법적으로 '이혼'하기 위해서였다는 숨겨진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이자 영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2009년 맨부커상 수상작"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책을 그냥 덮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을 정지해놓고 살펴보듯 장면마다 긴장감이 넘치면서도 섬세하다. 그러나 역사적 배경을 알지 못하면 이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전체적인 스토리 진행이 툭툭 끊어진다. 마치 중요 장면만 따다가 모아놓은 듯한 인상이다. 이야기 진행 과정이 쉽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문장 문장은 멋있는데 전체적으로 지루하게 느껴진다고 할까. 그러나 역사적 배경과 대략적인 스토리를 알고 있는 독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배경 지식을 가지고 읽는다면, <울프 홀>의 함축적인 서술, 섬세한 문체 안에 담긴 문학의 맛과 멋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울프 홀>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헨리 8세' 스캔들에서 그동안 크게 주목을 끌지 못했던 '토머스 크롬웰'이다. 왕에게 중매를 잘못 선 죄로 참수 당하는 비극적인 인물이지만, <울프 홀>에서는 미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정치 권력의 정점에 서기까지 근대 권력의 새로운 장을 연 인물로 재조명되고 있다. 이야기는 아버지의 발길질에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널브러져, 간신히 기어가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정치 권력의 최상층에 오른 직후, 오랫만에 휴식을 갖기 위해 '울프 홀'로 떠날 계획을 세우는 데서 막을 내린다. 아버지에게 맞아 쓰러진 첫 장면에서 그는 배로 밀면서 앞으로 기어갈 때, 이런 생각을 한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앞으로 가. 아버지가 뱀장어라고 욕하든, 버러지라고 욕하든, 뱀이라고 욕하든 신경 쓰지 마.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를 자극하지 마"(20). 기어서라도 조금씩 앞으로 밀고나가며, 자기보다 높은 권력의 비위를 맞추며 그들의 가려운 곳을 대신 긁어줄 실력까지 갖춘 '그'는 그렇게 '푸주한 집 개'에서 왕의 오른팔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울프 홀>은 역사적 위업, 보여지는 명분, 알려진 사실, 드러나는 행동 뒤에 숨은 검은 속내를 폭노하고 있는데, 영국의 역사까지 바꾼 그들의 속셈이 알고 보면 사사롭기 그지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어쩌면 앞으로도), 인생을 이끌어가고, 역사를 이끌어가는 수레바퀴의 동력은 참으로 사사로운 것에 기인하고 있는 듯 하다. 어떠한 거창한 명분을 내세운다 해도 파헤치고, 파헤치고, 또 파헤치고, 계속해서 파헤쳐 들어가다 보면, 결국 남는 것은 이기적인 욕망 한줌인가. 때때로는 우리는 스스로(인간)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