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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 재습격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무라카미 하루키'스럽지 않은',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스러운'!
느낌은 강한데 여운은 없다. 아니다. 반대인가. 느낌은 없는데 여운이 남는 것인가. 아무튼 어딘지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과 닮은 느낌이라고 생각되어지면서도,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을 생각하지 않고 읽었다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로 치부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의미를 읽어내려 한다면 무궁무진한 이야기 밭일 수도 있겠고, 굳이 의미찾기를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다소 환상적인 요소, 리얼리티를 간단하게 무시하는 황당함과 극한의 리얼리티가 만들어내는 오묘함이 그 두 가지 가능성의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듯하다.
6편의 단편 중 가장 납득하기 어려우면서도 가능 많은 의미가 읽혀지는 이야기는 <빵가게 재습격>이다. 한밤중에 깨어난 부부는 참을 수 없는 공복감에 시달린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공복감이었다(10). 그것은 쉽게 채워질 것이 아닌 특수한 굶주림처럼 느껴졌다(12). '나'(남편)는 예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과 그때 단짝 친구와 빵가게를 습격했던 때를 회상하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아내에게 들려주자, 아내는 빵가게를 재습격하러 가자고 제안한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31)
부부가 빵가게 대신 불 켜진 맥도날드를 습격했을 때, 점원은 이렇게 물었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 내 질문도 이것이다. 도대체 작가는 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일까? 부부는 문을 연 빵가게가 없어서라고 대답하고, 빵 외에는 아무것도 훔칠 생각이 없다고 대답한다. 오로지 '빵'에 집착하는 부부.
참을 수 없는 공복감과 빵, 친구와 빵가게를 습격했던 기억, 바그너의 <서곡집>을 끝까지 묵묵히 다 줄어준다면 가게 안의 빵을 맘대로 가져가도 좋다고 했던 가게의 주인, 그 후의 저주, 자신의 공복과 결혼생활을 연결지어 생각하는 아내, 파트너가 되 빵가게(맥도널드)를 재습격하는 부부, 한밤중의 소동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곳(맥도널드) 데이블에 곤히 잠들어 있는 커플.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읽어내고, 무엇을 눈치채야 하는가?
한밤중 맥도널드 테이블에 깊이 잠든 커플을 보며 '나'는 "대체 그 무엇이 두 사람의 깊은 잠을 깨울 수 있을지 궁금했다"(32). 주인공 부부가 한밤중에 잠이 깬 것은 '공복' 때문이었다. 부부가 느끼는 허기는 살아 있음의 한 증거이고, 쉽게 채워질 것같지 않은 공복감은 살아 있는 욕망의 늪을 연상시킨다. 저주에라도 걸린 것처럼, 문 열린 빵가게를 찾아 새벽 두시 반의 도쿄 시내를 헤매는 허기진 부부의 괴상하지만 무심한 광기(?)는 우리 삶의 한 단면을 절개해 보여주는 듯하다. 욕망에 이끌리는 삶이 만들어내는 광기말이다. "날이 새면서 저 영원으로 이어질 것만 같던 우리의 깊은 허기도 소멸되어가고 있었다"(32). 결국, 하나의 질문만 덩그러니 남는다. "그렇지만 이럴 필요까지 있었을까?"(33) 마지막 눈을 감을 때, 우리도 이런 질문을 하게 되지는 않을까.
사족을 달자면, 공복과 결혼 생활의 상관 관계에서 '빵가게 재습격'을 제안하고, 주도하고, 회의하는 남편과 달리 이럴 필요가 있었다고 확신하는 쪽은 여자, 즉 '아내'이다. 몰아부치는 아내! 태초의 에덴동산에서처럼 여전히 욕망에 더 취약한 쪽은 여자라는 뜻일까? 결혼을 하면 욕심이 사나와지고, 돈을 더 많이 벌어오라고 남편을 내모는 아내의 모습을 압축한 것일까? 작가의 의중이 궁금하다.
(여섯 편 모두 기묘하지만) 가장 미스테리한 이야기는 <코끼의 소멸>이다. 어느 날, 마을의 축사에서 늙은 코끼리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리는 '미스테리'한 사건이 발생한다. 어느 날, 증발해버린 코끼리와 사육사의 이야기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데 딱 하나의 대상만 사라져버린 느낌을 떠올리게 한다. 지구는 여전히 돌아가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데, 내게 소중했던 그 하나의 대상'만' 사라져버린 느낌.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모두 깡그리 잊어버리고 마는, 존재의 소멸 그리고 잊혀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와 함께 숨을 쉬고, 내 곂에 있던 생명이 단숨에 사라져버리는 미스테리. 그러나 어떤 의문을 제기하든, 어떤 논리를 내세우든 확실한 것은 한 가지이다. 코끼리와 사육사는 소멸해버렸고, 그들은 두 번 다시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68).
상실과 소멸의 대가라는 인식 때문인지, 존재, 시간, 상실과 소멸이라는 키워드가 머릿속을 떠돈다. 시간에 밀려가는 존재는 때로 어딘지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에 젖어든다. 그러다 문득 깨달아지는 상실.
"나는 보트 바닥에 누워 눈을 감은 채, 밀물이 나를 적당한 곳으로 데려다주기를 기다렸다." <빵가게 재습격>
"나는 그 위에 누워 커튼 틈새로 달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패밀러 어페어>
"그것을 상실한 지 대체 몇 년이 지났을까? (...) 상실한 뭔가에 대해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건, 그것을 상실한 날짜가 아니라 상실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은 날짜뿐이다. (...) 삼 년이다. 삼 년이라는 세월이 나를 이 11월의 비 오는 밤으로 데려다주었다." <쌍둥이와 침몰한 대륙>
"바람이 불든 불지 않든 나는 이런 식으로 살고 있다." <로마제국의 붕괴, 1881년의 인디언 봉기, 히틀러의 폴란드 침입, 그리고 강풍세계>
"하루에 한 번 태엽 감는 새가 찾아와 세상의 태엽을 다 감아놓고 간다. 그리고 나 혼자 그런 세상에서 나이를 먹고, 하얀 소프트볼 같은 죽음을 부풀려가는 것이다."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
"내게 필요한 것은 결국 리얼리티라고 생각했다"(139).
시간 속에 존재하며 결국 소멸해버릴 생명을 (위태하게) 이어가고 있는 내게 필요한 것은 결국 '리얼리티'일까. 작가는 "아무리 선명한 꿈도 결국은 선명하지 못한 현실 속으로 소멸해가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런 꿈을 꾸었다는 것조차 나는 떠올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150)고 말한다. 여기서 선명한 것은 꿈이고, 선명하지 못한 것은 현실이다. 선명한 꿈이 선명하지 못한 현실 속에서 소멸해간다면 우리는 리얼리티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선명한 꿈에서일까, 모든 것이 소멸되는 현실에서일까.
작가는 이 여섯 편의 이야기를 한 권으로 엮어낼 계산을 미리 했던 것일까. 꼽씹을수록 여섯 편의 이야기가 하나의 '시리즈' 같다는 의심이 든다. 마지막 이야기인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 이야기가 그런 의심에 확신을 심어준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내의 부탁(!)으로 사라진 고양이 '와타나베 노보루'를 찾아나선다. 재밌는 것은 다른 작품 속에서도 '와타나베 노보루'가 계속 등장한다는 것이다. 주인공이나 미친 존재감을 자랑하는 조연이 아니라, 행인 1, 행인 2 같은 비중으로 말이다. 주의 깊게 읽지 않으면 '와타나베 노보루'라는 이름이 작품에 계속해서 등장하는지도 알지 못할 만큼.
집에 돌아온 아내는 '와타나베 노보루'를 찾지 못했다는 '나'(남편)에게 "당신이 죽인 거야"라고 말한다(212). "적어도 당신만큼은 그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그 고양이를 괴롭힌 적도 없고, 매일 밥도 제때 챙겨줬어. 내가 밥을 줬다고.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고양이를 죽였다는 건 말도 안 돼"(213)라고 항변하지만, 아내의 생각은 단호하다. "언제나언제나 그래. 스스로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많은 것을 죽였어"(213). 어째서 아내는 남편이 고양이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혹시 이 책을 읽어오면서 여기 저기 등장하는 '와타나베 노보루'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면, 그래서 그 '와타나베 노보루'를 간단하게 무시해버렸다면, 그래서 그 '와타나베 노보루'가 내게 무의미했다면, 나도 '와타나베 노보루'를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죽인 것이 되는걸까.
와타나베 노보루, 너는 어디에 있느냐?(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