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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독스
엘모어 레너드 지음, 최필원 옮김 / 그책 / 2010년 8월
평점 :
누구를 믿을 것인가?
글쎄. 내 취향은 아니다. 굳이 개인적인 취향을 밝히는 것은, 나의 취향은 아니지만 작가인 '엘모어 레너드'에게 따라붙는 수식어가 굉장하기 때문이다. "미국 범죄 소설의 대부이자 펄프 픽션의 제왕", "범죄 소설 분야의 대가", "가장 쿨하면서 가장 정열적인 작가", "하드보일드의 대가"라는 평을 들으며, 그의 작품 상당수가 영화와 TV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만큼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작가인 동시에, 1984년 미국추리작가협회의 에드거 상을 받았으며, 1992년에는 그랜드 마스터(거장)의 칭호까지 얻었다고 하니 이 작품에 대한 나의 평가는 순전히 개인의 취향인 셈이다.
"그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우린 교도소 뜰을 산책하며 서로의 뒤를 봐주는 사이였단 말입니다."
그녀는 여전히 이해를 못하는 듯했다. 아마 영영 이해가 안 될 것이다(328).
은행 강도인 '잭 폴리'는 교도소에서 만난 땅딸막한 쿠바인(쿤도 레이)의 도움으로 삼십 년형에서 삼십 개월로 감형을 받는다. 그가 삼십 년형에서 벗어나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쿤도가 자신의 돈 3만 달러를 들여 유능한 변호사를 소개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잭 폴리는 어째서 쿤도가 자신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교도소 안에서는 짝을 이루어 다니는 것이 관례였는데, 쿤도와 폴리는 서로의 뒤를 봐주는(로드 독) 절친한 사이었고, 쿤도는 폴리에게 "교도소 안이든 밖이든 끝까지 서로를 지켜줘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74).
폴리가 쿤도의 도움으로 먼저 출소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방향을 알 수 없는 쪽으로 흘러간다. 쿤도는 폴리에게 자신의 대저택에 머물며 자신의 여자를 지켜봐 달라고 부탁하고, 폴리는 쿤도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지닌 채 그의 저택으로 향하고, 쿤도의 정부인 돈 나바로는 폴리와 위험한 관계로 빠져들며 은밀한 제안을 해온다. 여기에 폴리가 또 다시 은행 강도를 저지를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그의 뒤를 좇는 FBI 루 애덤스, 루 애덤스의 지시로 폴리를 감시하게 된 티코, 쿤도 레이 밑에서 일하며 쿤도의 전 재산을 관리하는 리틀 지미가 가세하면서 '배반의 음모'가 서서히 정체를 드러낸다.
<로드 독스>는 '항상 곁을 지켜주는 좋은 친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73). 그러나 배반의 장미를 연상시키는 이 책의 노란 표지처럼, <로드 독스>는 배반의 음모로 가득차 있다. 이 책은 한마디로 이렇게 묻고 있는 듯 하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
이름만 대면 모두가 알만한 조직 폭력배의 두목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는 실내에 들어가 자리에 앉을 때 항상 벽을 뒤로 하고 앉는다고 했다. 뒤를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언제 어디서 누가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세상이다. 고인이 된 한 유명 배우는 믿었던 매니저의 배신으로 큰 아픔을 겪었다고 하고, 파이터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추성훈 선수는 의형제나 다름없는 선배에게 자신의 자금 관리를 맡겼다가 몽땅 사기를 당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도 들린다. 낯 모르는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도 충격이 클텐데 믿었던 사람에게 당하는 배신은 그 충격과 아픔이 오죽할까. 우리 모두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이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로드 독스>는 바로 이러한 믿음과 배신 사이의 긴박한 긴장을 밀도 있게 보여준다.
<로드 독스>에서 보여주는 믿음은 폴리가 다시 은행을 털 것이라는 FBI 루 애덤스의 믿음이 유일하다. 'FB'I라는 그의 직업에서부터 '루 애덤스'라는 존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유머러스하게 비웃는 작가의 의도적이고 지능적이고 상징적인 장치가 아닐까(루 애덤스는 자신으로 인해 폴리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만, 난 그의 의견에 반대하는 바이다. 334). 참 슬픈 믿음이고, 참 슬픈 현실이다.
"당신이 왜 그를 그렇게 챙기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당신은 그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요. 내가 얘기했었죠? 쿤도 보기를 당신이 털 은행 보듯 하라고."
"우리는 교도소에서 삼 년간 친구로 지냈습니다. 그는 내가 자신의 뒤를 봐주고 있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난 유령 전문가인 척하면서 싸돌아다니기만 했죠"(327-328).
모두를 믿었지만 모두를 의심했던 쿤도, 그는 배반이라는 쓴 잔을 늘 두려워했다. 거액을 들여 폴리의 감형을 도울 만큼 '항상 곁을 지켜주는 친구'가 절실했다. 그러나 아무도 믿을 수 없었던 쿤도는 결국 쓸쓸하고 외로운 최후를 맞게 된다. 또 한 사람, 성적 매력을 이용해 거침 없이 남자들을 유혹하며 모두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던 돈 나바로는 모두를 속이려다 자신이 쳐놓은 배반의 덫에 자신이 걸려들고 만다. 심지어 그녀는 '독심술을 구사할 줄 아는 여자'였는데도 말이다.
"폭력적인 테마나 사건을 무감정의 냉혹한 자세로 또는 도덕적 판단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비개인적인 시점을 묘사하는 것", "불필요한 소식을 일체 빼버리고, 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 올리는" 하드보일드의 수법이 이 책에서도 엿보인다. 그런데 그 냉혹한 서사 한편으로 낭만적인 싹이 하나 피어오른다. 돈 나바로와 대조적인 두 여인의 존재가 그것을 상징하고 있다고 본다.
거액의 자산가인 쿤도를 중심으로 얽혀든 남자들 사이를 오가는 '음녀' 돈 나바로가 거짓과 불신의 화신이었다면, 다른 두 여인은 희망과 사랑의 씨앗을 잉태한 '성녀'라 할 수 있겠다. 폴리는 돈 나바로의 계획대로 '카르마노스 부인'에게 사기를 차기 위해 접근했지만, 곧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만다. 결국 그 정직함이 폴리를 구한다. 또 한 여인, 이야기 초반 폴리의 형량이 줄어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던 '캐런 시스코'의 존재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녀는 폴리를 믿어주었다. 쿤도의 장례식장에서 "주변을 찬찬히 훑으며 염색한 머리에 짙은 색 선글라스를 쓴 여자를 찾아보기 시작"(334)하는 폴리의 시선이 의미심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