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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 영한대역 (영문판 + 한글판 + MP3 CD)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우리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다시 일깨워주고, 반달곰의 비명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를 찾아주는 책입니다.
천박한 문명은 폭력이다. 며칠 전, 경기도 고양시의 아파트 밀집지역 부근의 한 사슴 농장에서 멸종위기인 반달가슴곰이 보신용으로 사육되고 있다는 보도를 보았다. 곰의 쓸개즙을 사러왔다고 하니 농장주인은 반달곰이 갇혀 있는 좁은 철장 안으로 마취주사기가 담긴 긴 대롱을 밀어넣었고, 마취총을 맞은 반달곰은 비명을 질렀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반달곰이 쓰러지자, 농장 주인은 초음파 검사기로 쓸개의 위치를 찾았다. 그리고 주사바늘을 꽂아 그대로 살아있는 반달곰의 쓸개즙을 채취했다. 우리가 이처럼 잔혹할 수 있는 것은 '반달곰의 비명'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리라. '문명'이라는 옷을 입은 인간은 자신도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아예 잊은 듯하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인디언의 삶의 방식과 지혜를 통해,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천박한 문화가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그들의 생활을 '야만'이라 부르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과연 누가 더 야만적인가'라는 물음을 우리 앞에 던져 놓는다.
이 책의 주인공은 '작은 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다섯 살난 꼬마이다. 아빠가 세상을 뜨신 지 1년 만에 엄마까지 돌아가시는 바람에 졸지에 고아가 된 '작은 나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따라가 함께 살게 된다. 할아버지는 체로키족(인디언)의 피가 반 섞인 혼혈이고, 할어머니는 순수 체로키족이시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산(山) 사람인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살며 인디언의 지혜와 삶의 방식을 배우며 성장해가는 '작은 나무'의 이야기이다. 이 글이 지나치게 길어지더라도, 나는 '작은 나무'에게서 배운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나누고 싶다.
사람들은 '인디언식'으로 생각하는 그들을 '너무 순진하다'고 말한다(383).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뜻일 게다. 그러나 '작은 나무' 가족이 모르는 것은 백인의 문명이었지, 삶의 방식이 아니었다. 산이 깨어나는 시간, '작은 나무'는 할아버지와 함께 매 한마리가 메추라기를 잡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울지는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작은 나무'에게 할아버지는 '자연의 이치'를 가르쳐주신다. "슬퍼하지 마라, 작은 나무야. 이게 자연의 이치라는 거다. 매는 자연의 이치대로 사는 거야. 그게 이치란 거야. 누구나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가져야 한다. 사슴을 잡을 때도 제일 좋은 놈을 잡으려 하면 안 돼. 작고 느린 놈을 골라야 남은 사슴들이 더 강해지고, 그렇게 해야 우리도 두고두고 사슴고리를 먹을 수 있는 거야. 흑표범인 파코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지. 너도 꼭 알아두어야 하고"(35-37). '작은 나무'는 이렇게 자연의 이치를 깨달으며, 삶의 방식을 배워나간다. 그렇지만 언제나 자기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쌓아두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아마 그 사람들은 야생 칠면조 열두 마리를 보았을 때, 왜 열두 마리 모두 죽이면 안 되는지 절대 그 이유를 모를 것이다"(75).
'작은 나무'의 할아버지는 말의 뜻보다는 소리, 즉 말투를 더 마음에 새겨들으셨다. 어느 날, 할아버지와 '작은 나무'가 개척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여자 두 사람과 남자 두 사람이 탄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그들 앞에 섰다. 그 차는 문짝 속으로 똑바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유리창을 가지고 있었고, 손가락에 반지를 몇 개씩 낀 그 부인은 멋진 옷을 입고 귀에는 커다란 귀걸이를 달고 있었다. 그들은 길을 물었다. 할아버지는 들고 있던 커피통을 바닥에 내려놓고 책들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그 위에다 내려놓았다. '작은 나무'도 그렇게 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말을 걸어왔을 때, 나름의 예의를 표하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새겨들으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할아버지가 누누이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다"(107). 그러나 할아버지의 이러한 예의는 갈 길 바쁜 사람들의 화나 돋구었다.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모자를 벗어 손에 든 인디언 할아버지는 야만적인 세상을 배우지 못해 세상의 야만이 된 것이다.
자연의 하나로 살아가는 인디언들에게 백인의 문명은 배울 수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는 그 무엇이었다. 순진했던 그들은 이유조차 알 수 없는 문명의 폭력에 휘둘렸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우리가 문명의 이름으로 인디언들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보여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작은 나무'에게 지난 일들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하셨다. "지난 일을 모르면 앞일도 잘 해낼 수 없다. 자기 종족이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면 어디로 가야 될지도 모르는 법"이라고 하시면서(129).
할아버지, 할어머니가 기억하는 '과거'는 잔혹한 것이었다. 정부군이 인디언들을 강제이주 시킨 이야기는 이렇다. 무장한 병사들은 종잇조각 하나를 들고와서, 체로키인들의 골짜기와 집과 산을 포기하고, 백인들은 눈곱만치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땅으로 이주하라 명령했다. 그들은 해가 지는 곳으로 가야 했다. 결국 전체의 3분의 1이 넘는 체로키들이 행진 중에 숨을 거두었다. 죽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자 병사들은 3일에 한 번씩만 매장할 시간을 주겠노라 했다. 아직 아기인 죽은 여동생을 안고 조그만 남자아이는 밤이 되면 죽은 동생 옆에서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면 그 아이는 다시 여동생을 안고 걸었다. 남편은 죽은 아내를, 아들은 죽은 부모를, 어미는 죽은 자식을 안은 채 하염없이 걸었다(133-135). 사람들은 이 행렬을 눈물의 여로라 불렀다. 사람들은 그 말이 낭만적으로 들리기 때문에, 또 그 행렬을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의 슬픔을 표현해주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죽음의 행진은 절대 낭만적일 수가 없다. "과연 누가 어미의 팔에 안긴 채 뻣뻣하게 죽어 있는 아기, 어미가 걸어가는 동안 감기지 않은 눈으로 흔들거리는 하늘을 노려보고 있는 아기를 소재로 시를 지을 수 있겠는가? 과연 누가 밤이 되면 아내의 주검을 내려놓고 온밤 내내 그 옆에 누워 있다가 아침이 되면 일어나 그 주검을 옮겨가야 하는 남편과, 장남에게 막내의 시신을 안고 가라고 말해야 하는 아버지, 그리고 쳐다보지도...... 말하지도...... 울지도...... 고향 산을 떠올리지도 않는 이들을 소재로 노래할 수 있겠는가?"(135) 반달곰의 비명처럼, 소리 없는 인디언의 비명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 하다.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살아있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영혼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눈에 비친 문명의 사람들은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었다. '작은 꼬마'의 할머니는 어디서나 쉽게 죽은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하셨다. "여자는 봐도 더러운 것만 찾아내는 사람,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쁜 것만 찾아내는 사람, 나무를 봐도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고 목재와 돈덩어리로만 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이었다.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그런 사람들은 걸어다니는 죽은 사람들이었다"(191).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우리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다시 일깨워주고, 반달곰의 비명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를 찾아주는 책이다. 체로키인들에게 가을은 죽어가는 것들을 위해 정리할 기회를 주는, 자연이 부여한 축복의 시간이다(527). 이 책은 그런 가을 같은 책이다. 우리도 더 늦기 전에, 이 책을 통해 인생의 가을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생명은 따뜻하고 부드럽지만, 죽음은 딱딱하고 차갑다. 매서운 겨울 칼바람이 우리의 영혼을 완전히 삼켜버리기 전에, 영혼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가을 햇볕 같은 이 책을 읽자. 딱딱하고 차갑게 죽어버린 우리의 문명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어보자. 할아버지, 할머니와 산에서 2년을 함께 보낸 '작은 나무'는 남겨진 시간이 얼마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남은 시간 동안 충실히 살았다.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작은 나무'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따라오셨다. 그들은 모든 시간을 '함께'했다. "우리는 가을이면 가장 새빨간 단풍잎을 찾아냈고, 또 봄이면 가장 푸른 제비꽃을 가리키며 서로에게 알려주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 느낌을 함께 맛보고 서로 나누었던 것이다"(653). 아직 늦지 않았다면, 이제라도, 나도 이렇게 살아가고 싶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지혜서이다. 진짜 지혜가 이곳에 있다. 그 지혜 안에는 꾀를 내는 여우와 함께하는 그들만의 놀이가 있고, 필요한 것만큼만 쓰고 누리며 남겨두고, 살려두는 넉넉함이 있고, 약한 사람을 위해 힘든 일을 떠맡으려는 배려가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사랑이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해주는 존중이 있다. 그 빛나는 지혜는 우리의 영혼을 따뜻하게 해주고,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준다.
아름다운 글을 읽으며 행복했고, 이해받지 못한 그들의 지혜가 슬펐고, 그들의 삶을 짓밟았던 천박한 문명이 부끄러웠고, 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 자락으로 이어지는 인생의 이치를 깨달으며, 벅찬 가슴으로 한참을 울었다. 책을 손에 들고 한참을 울었다. 마음을 나누고픈 사람에게 나는 한동안 이 책을 선물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