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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 할머니 ㅣ 꽃보다 아름다운 우리
오채 지음, 김유대 그림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내게 '할머니'라는 이름은 아픔이다. 잠귀가 가장 밝다는 이유로 나는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한 방을 쓰며 자랐다. 천식을 앓으셨던 할머니는 늘 기침을 끼고 사셨는데, 어떤 때는 호흡 곤란을 겪을 정도로 심하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안방으로 달려가 아빠와 엄마를 깨우는 책임을 맡았다. 할머니와 한 방을 쓰는 나는 가족들이 모르는 할머니의 눈물을 알고 있었다. 큰 글씨로 가사만 적혀 있는 찬송가를 읊조리며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셨던 할머니는 벽을 향해 돌아앉으셔서 눈물을 훔치는 날이 많았다. 나는 그 눈물이 먼저 이 세상을 떠난 고모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먼저 간 자식을 마음에 묻고 남은 생을 멍든 가슴으로 살아오신 나의 할머니.
할머니의 세월은 온통 서러움이었다. 이런 저런 옛 이야기를 들려주시다 보면 할머니의 이야기의 끝은 꼭, 딸이라는 이유로 공부를 못한 것이 한이 되고, 가부장적인 할아버지의 기에 눌려 숨죽여 살아온 세월이 원망스럽고, 전쟁과 난리를 겪으며 가난과 싸우며 보낸 청춘에 대한 미련으로 끝을 맺었다. 시대를 잘 만난 우리가 부럽다며 말이다. 옛일을 꼽씹는 일은 할머니의 유일한 소일꺼리였는데, 사춘기를 지나고부터는 할머니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바쁜 일상 탓도 있지만, 이야기를 듣는 나의 마음도 지쳐버렸기 때문이다. 솔직히 많이 귀찮았다. 돌이켜보면, 그 일이 할머니께 가장 죄송스럽고 미안하다.
효자 아들에 효자 며느리의 봉양을 받았지만, 아흔을 넘기고부터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무료한 시간 속에서 할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셨다. 아흔을 넘기고부터는 작은아버지 댁과 고모 댁도 잘 찾지 않았다. 천식 때문에 기침을 하고 가래침을 뺕으면 손주들이 싫어하는 기색 때문이었다. 오랫만에 집에 오신 할머니께서 내 손을 잡고 "너 같은 손녀 없다, 너 같은 손녀 없다" 하시며 눈물을 글썽이시는 바람에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습관이 되어 할머니 냄새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가래침도 더럽다는 생각을 못해봤는데, 그것이 그렇게 고마우셨던 모양이다.
<오메 할머니>를 읽으며 생각한다. 할머니가 얼마나 지독한 외로움 속에 계셨을지, 그것을, 이제야 말이다. <오메 할머니>는 '오메'라는 말을 자주 쓰셔서 '오메 할머니'로 불리는 할머니가 서울에 있는 아들네 집에서 잠깐 같이 살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이다. 특이하게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는 아들네 집에서 키우는 늙은 강아지 '봉지'이다. 봉지는 주인 아들도, 주인 며느리도, 손주 은지까지 모두 자기 일로 바쁠 때에도 오메 할머니와 딱 붙어다니며 할머니의 모든 일상에 함께한다. 봉지는 오메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은지에게 공책을 선물로 받고 일기를 쓰며 기뻐하시는 할머니의 모습, 할머니의 서울 친구인 온몸에 예쁜 반지와 목걸이를 걸고 다니는 '반지댁 할머니'와 박스를 주워 어린 손자를 키우며 어렵게 살아가는 '빡스댁 할머니'와 언니 동생하며 그들의 어려움까지 척척 해결해주는 할머니의 오지랖, 은지를 위해 쌈지 돈을 헐어 특별한 생일 빠띠를 열어주는 할머니의 활약상 등을 유쾌하게 보여준다.
<오메 할머니>는 유쾌한 이야기 속에 진한 감동을 남긴다. '어릴 때, 어매가 만들어준 닷짜꾸리'를 기억하는 할머니의 추억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생일을 보내며 십만 원이나 하는 진주 목걸이를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할머니의 웃음이, 자기들 어려운 것만 아는 자식들의 원망을 말 없이 듣고 있는 할머니의 침묵이, 엄마 편을 들며 자신을 멀리하는 손주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외로움이, 아파도 늙어서 그러려니 하며 혼자 삭히는 할머니의 아픔이, 나를 울린다.
봉지는 처음에 오메 할머니가 어서 고향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랄 만큼 할머니를 싫어했지만, 함께 늙어가는 처지에서(!)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오메 할머니'와 깊은 정이 든다. "니가 먼저 갈랑가, 내가 먼저 갈랑가 모리겄다. 요새 자꾸 숨이 가쁜 것이 쪼까 거시기허다잉. 너라도 건강히리. 오래오래." 하신던 할머니가, 어느 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봉지의 귀에 대고 "더...... 놀다, 온나. 싸묵......, 싸묵......" 할 때에, 할머니를 보내고 봉지가 '끄응, 낑...... 미안해. 병원에 안 가려고 발버둥 친 거......'라고 말하며 마지막 인사를 할 때에, 그때까지 내 눈에서 또로로 굴러 떨어지던 눈물이 그치질 않아, 책을 잠시 덮어두어야 했다. 가족들과의 이별보다 둘도 없는 친구 사이처럼 서로의 마음을 잘 이해했던 오메 할머니와 봉지와의 이별이 몹시도 아팠다.
이 책은 아이들을 위한 책이다. <오메 할머니> 이야기를 읽으며, 아이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내가 처음 헤아리기 시작한 부모님만큼 나도 나이를 먹고, 내 아버지 어머니가 할아버지 할머니만큼 나이를 먹어가니,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늙어가는 인생, 그 쓸쓸함에 대해서 말이다. 이 쓸쓸함은 누구도 빗겨갈 수 없다는 것도. 내 할아버지 할머니 인생도, 내 아버지 어머니 인생도, 나의 것만큼이나 절실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십대이든, 이십대든, 나이 서른이든, 마흔이든, 오십이든, 육십이든, 칠십이든, 팔십이든, 아흔이든 그 절실함은 똑같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