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산책 - 소크라테스에서 소쉬르까지
창홍 지음, 정유희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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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진정한 미란 무엇인가? 

 
얼마 전, 팝아티스트 또는 행위예술가로 알려진 낸시 랭이 영국 런던에서 열린 엘리자베스 여왕의 생일 퍼레이드에서 '거지 여왕' 퍼포먼스를 벌이다 경찰에 의해 강제 출국 당할 뻔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네티즌들의 평가가 양극으로 갈리고 있다. 예술적 행위로 보아야 한다는 쪽과 국제적인 나라 망신이라는 비판의 소리가 그것이다. 어디까지를 예술의 경계로 보아야 할까. 후대에까지 그 미모의 빼어남이 어떠했는지 전해질 정도로 절세미인이라는 양귀비도 현대의 미의 기준에서 보면 선뜻 미인이라 긍정하기 어렵다. '미'라는 개념만큼 정의내리기 어렵고, 기준이 모호한 것도 없을 듯하다. 

인류는 어떻게 미(美)라는 개념을 갖게 되었을까? 미의 기준은 시대마다 다르다. 그럼에도 절대 미(美)라는 것이 존재할까? 미학은 이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해주고 있을까? <미학 산책>은 미학의 태동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의 세계를 탐구해온 미학의 역사를 시기별로 고찰해보는 책이다. 철학을 전공한 저자 '창홍'은 서양 고전 이성주의 미학의 시조를 소크라테스에게 두고 있다. 서양의 모든 미학 사상이 이 시기를 기원으로 삼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고대 그리스 미학의 위대한 시작이라고 선언한다. 소크라테스의 '미덕'의 정의에서 시작하여, 미학 학과를 정식으로 창립한 알렉산더 바움가르텐을 거쳐, 20세기 초 프랑스 언어학자 소쉬르의 기호이론을 시작으로 형성된 구조주의 미학에 이르기까지 <미학 산책>은 철학의 시작이 곧 미학의 시작이며, 미학은 곧 철학이라는 인상을 심어준다.

소크라테스의 미의 정의를 들어보면, 왜 미학이 철학과 한 가지로 읽히는지 이해가 간다. "소크라테스는 미란 이처럼 상대적인 개념이며 절대불변의 미는 없다고 보았다. 미란 목적에 적합하게 쓰이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그 목적을 제대로 수행했을 때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된다.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악하고 추한 것이 된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목적론적 관점에서 내린 미의 정의이다"(21). 소크라테스의 정의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서양의 전통적 미학이 탐구하는 미의 세계는 초월적 가치로서의 무엇이다. 그래서인지 "미학과 관련된 학과의 체계가 매우 방대하고 구조가 복잡하며 내용이 풍부하면서도 난해하고 심오하기 때문에 배우기가 매우 어렵다"(5)는 저자의 말처럼, <미학 산책>은 쉬우면서도 쉽지 않고, 체계적이면서도 복잡하게 느껴진다.

'미학'을 하나의 학과로 정식 창립한 바움가르텐에 의해 "미학은 이성적 인식의 논리학을 보완하는 감성적 인식의 논리학이라는 이유로 철학의 한 분과로서 자리매김했다"(199). 내겐 너무 어려웠지만, 미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움가르텐의 이론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의 이론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미학의 학명인 영어의 Aesthetics 또는 Esthetics를 직역하면 '감성학'이다(202). 바움가르텐이 사용하는 '감성'이라는 단어는 경험적 감각 혹은 지각이 아니라 경험적 감각을 초월한 것이다. 바움가르텐은 인간의 주관적인 의식 중에서 미의 근원을 찾았다. 미학은 아름다움을 사유하는 학문이며, 미의 예술에 관한 이론이다(204). 미학의 목적은 감성적 인식을 통해 완전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감성 인식의 완전성에 도달하기 위한 세 가지 필수 조건이 있다. 그것은 사유의 조화, 질서의 조화, 기호의 조화이다. 감성적 인식이 완전하려면 풍요성, 위대성, 진실성, 선명성, 확실성, 생명성의 여섯 가지 특성을 가져야 한다. 이후 근대 미학은 이념으로 추구되는 미가 아니라, 감성적 인식에 포착되는 현상으로서의 미를 대상으로 삼았다.

학문으로서의 미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 책 한 권으로는 부족할 듯 싶다. <미학 산책>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미학'의 태동은 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나, 심리학적 미, 사회학적 미와 같이 점차 통합의 학문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미학과의 첫 대면이 내겐 너무 어려웠지만, 단순하게 미(美)를 선(善)과 동일시 하며, 신(神)적인 것에서 미의 근원을 찾는 탐구에 마음이 끌린다. '아름답다'라는 숭고한 느낌을 관념적으로나 현상학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이렇게 복잡할 줄이야. 우리의 마음은 이미 '아름답다'고 느끼고 있는데 말이다. 미학이 발전할수록 미의 세계는 단순해지지 않고 오히려 신비의 영역으로 승화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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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이세벽 지음 / 굿북(GoodBook)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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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생애를 입체적으로 복원하다!

 
'역사적 예수'를 주제로 한 문학작품 중에 엔도 슈사꾸의 <예수의 생애> 이후로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소설이다. <예수>는 신학적 비평을 토대로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생애를 입체적으로 복원해내었다. 복음서만 읽어서는 알 수 없는 신학적 의미를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 또한 여기에 작가적인 상상력이 더하여져서 행간에 숨은 당시의 정황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재구성했다. 소설 <예수>는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가 하나님의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세례 요한'의 탄생 예고를 듣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베드로에게 부활 소식이 전해지기까지 연대기적으로 서술되었다.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예수와의 만남을 주선해 보기로 했다"는 저자는 "예수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 작가들이 소홀히 하기 쉬운 가르침과 비유, 그리고 기적에 대해서도 빠트리지 않고 소설 속에 녹여보려고 하였다"고 밝힌다. 그러니까 이 책은 문학적 창작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원형'에 쉽고 정확하게 다가가기 위해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쓰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예수' 당시의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지리적, 성경적, 신학적 배경에 대한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예수의 생애를 복원하였다는 것이다. 로마와 유대인 사이의 정치적 긴장이라든지,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명의 '헤롯'의 정체라든지, 마리아가 헤브론까지 세례 요한을 임신 중이었던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여정이 지리적으로 얼마나 험난한 것이었는지, 동정녀 마리아의 임신이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 어떤 위험을 지닌 것이었는지 등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적 지식이 이야기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성경 공부를 위한 교재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한 가지만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저자는 니고데모가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부른 호칭 속에 '존경'의 의미가 숨겨져 있음을 당시의 문화적 배경을 토대로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예수가 유대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가말리엘이나 힐렐 혹은 샴마이 문도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산헤드린 의원들로부터 선생이라는 호칭을 받으려면 적어도 이런 문도 출신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예수를 기꺼이 선생이라고 높여 부르며 존경심을 드러낸다"(84-85).

오랫 동안 복음서를 가르쳐온 나도 새롭게 배우게 된 것이 많다. 한 가지만 소개하면 이렇다.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예수께서 첫 기적을 베푸실 때,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명령하신다. 저자는 이때 예수님의 마음이 숨겨진 갈등이 있었음을 이렇게 파헤친다. "유대인 정결예식에 따라 물 두세 통 담을 수 있는 석조(돌항아리)가 여섯 개 놓여 있다. 그러나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고뇌한다. 하필 눈에 띈 게 정결례를 하는 미크베(석조)인가. 매일 공동식사를 하기 전에 그들이 그곳에 몸을 담그고 씻었을 것이다. 성찬예식에 참석하기 전에도 그들은 그곳에서 몸을 씻엇을 것이다. 그런 미크베에 포도주를 담는다는 것은 부정한 일이다. 그것은 한 곳에 두 가지 음식을 섞지 말라는 토라의 교훈에 어긋나기 때문이다"(73). 이것은 유대인의 율법과 문화를 알지 못하고서는 절대 발견해낼 수 없는 부분이다. 예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베푸신 첫 기적에 이런 갈등과 숨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배웠다.

소설 <예수>의 또다른 강점은 저자의 문학적 상상력의 탁월함에 있다.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던 부분을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성경에는 아버지 요셉과 아들 예수에 관한 관심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기록이 빈약하다. 그러나 저자는 그 행간을 이렇게 읽어낸다. "요셉은 예수에게 아버지라는 말을 더없이 좋아하게 해준 자상한 사람이다. 입 안에서 아버지라고 가만히 부르면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지게 만들어준 것도 요셉이다. 그는 요셉 때문에 하나님을 친근하게 아버지라 부르는 습성이 생겼는지 모른다고 생각한다"(56). 예수님은 하나님을 부를 때 "아버지"라는 독특한 호칭을 사용하셨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며, 우리에게도 "하나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신 것은 대단히 혁신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혁신의 시작을 육신의 아버지였던 요셉과의 친근한 관계성 속에서 찾고 있다.

이밖에도 읽으면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며,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의 이야기이다.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 앞으로 끌고 왔다. 예수님은 땅에 글씨를 쓰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 이때 예수님이 '땅에 쓰신 글씨'가 무엇이었는지 성경에는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학자들마다 이런 저런 추측을 내놓고 있는데, 저자는 여기에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다(172). 궁금한 독자들은 이 책을 읽어보시라.

<예수>는 소설로 구성되었지만, 지극히 복음적이다! 문학적 재창조라는 이름으로 복음을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어 이해를 돕고 그 깊이를 더해주었다. 특히 '사람 예수'에 대한 사실적 묘사는 이야기의 극적 긴장감을 더하여 주고, 성경 증언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한마디로 유익하고 재미있다. '예수'가 살았던 현장으로 독자를 인도하는 <예수>를 통해, 2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시대와 문화와 인종과 지역을 초월하여 놀라운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역사적 예수'를 입체적으로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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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으로 슬라이딩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8
도리 힐레스타드 버틀러 지음, 김선희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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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왜 야구를 하면 안 된다는 거지?"

 
아이오와 주의 시골 마을인 그린데일, 이곳의 후버 중학교로 전학을 온 조엘은 야구를 좋아하는 평범한 열네 살 소녀이다. 전학오기 전, 미니애폴리스의 야구팀에서 ’1루수’로 맹활약한 바 있는 조엘은 후버 중학교에서도 당연히 야구부에 입단하기 위해 테스트를 받으러 갔다. 그러나 코치는 얼굴을 찡그린 채 이렇게 말했다. "여긴 남자팀이다. 게임 하고 싶으면 가서 소프트볼 해라. 여자 운동장에서"(19).

조엘이 야구부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는 ’여자라는’ 단 한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이 학교에서는 남자들만 야구부에 들어갈 수 있고, 여자들은 소프트볼만 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여자는 야구를 하면 안 된다"는 편견의 다름 아니다. 인간 사회에는 많은 편견이 존재한다. 시대마다, 문화마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편견이 존재한다. 그러나 유독 ’여자라서 안 된다’는 편견만큼 시대와 문화와 지역을 초월하여 오랫 동안,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견고하게 작동되고 있는 편견도 없는 듯하다. ’여자라서 안 되는 것’이 야구만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후버 중학교의 문제, 조엘의 문제만도 아닌 것이다.

’남자들만 야구부에 들어갈 수 있고, 여자들은 소프트볼만 할 수 있다’는 후버 중학교의 규정은 성차별이 분명하다. 조엘은 누구도, 한 번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그 당연한(!) 규정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리고 자신이 야구부에 들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들의 편견과 규정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 굳이 야구부에 들어가지 않고도 야구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겠지만, 조엘은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잘못된 규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만큼이나 회의적이고, 불가능해보이고, 소모적으로 느껴지는 지난한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야구부 코치는 물론 교장선생님과 교육감까지 찾아다니며 설득하는 조엘을 보면서, 나를 반성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장남인 아버지와 셋째 딸로 태어나 바로 아래 남동생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며 자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나도 오빠와 차별을 경험하며 자랐다. 늘 억울함을 호소하며 차별에 맞섰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한 것은 고작 마음에 분노를 쌓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조엘처럼 정확하게 어느 부분을 어떻게 수정해야 할지 부모님께 정식으로 요청한 적이 없다. 잘못된 세상이라고 싸잡아 비난하며, 마음에 분노가 쌓일수록 무조건 남자를 이겨야 한다는 경쟁심만 키웠던 것 같다.

<홈으로 슬라이딩>을 읽으며, 나는 조엘을 통해 ’세상을 바꿔나가는 방식’에 대해 깊이 고민해볼 수 있었다. 야구는 팀플레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혼자서는 즐길 수 없는 게임이다. 야구 선수 출신답게 조엘은 자신의 꿈을 이루고, 원하는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팀플레이를 한다. 조엘은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동지를 찾는다.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조언을 구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중에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과 갈등을 겪기도 하고, 반대에 부딪치기도 한다. 그러나 열네 살 조엘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할 때도, 룰을 지키며 야구 경기를 하듯 주어진 룰을 이용하여 상대를 설득한다. 그리고 그 설득의 과정에서 ’이해’를 배운다.

꿈을 이루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달려나가는 조엘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과 대응방식을 배울 수 있다.

’여자라서’ 안 된다는 믿음에 왜 아무도 의문을 갖지 않는가.
잘못된 규정인데 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가.
꿈을 이루기 위해 걸림돌이 되는 장애물을 어떻게 이겨나갈 것인가.
내가 옳다고 믿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홈으로 슬라이딩>은 수상 이력이 보여주듯 참으로 ’착한 책’이다. 뿐만 아니라,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 ’잘못된’ 세상을 바꿔나가는 방식에 대해, 성찰해볼 수 있는 깊이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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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가게를 시작, 했습니다 - 여성 오너 15인의 창업 이야기
다카와 미유 지음, 김희정 옮김 / 에디터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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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자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무엇 때문에 가게를 하고 싶은가'라는 것을 확실히 해서, 잊지 않는 것, 그것만 있으면 일단은 OK란다"(37).

 
경제 위기가 고용 불안을 야기하면서 우리 사회에도 한창 창업의 바람이 불었고, 지금도 그 열기는 계속되고 있다. 창업 열풍으로 최근 몇 년 사이에 가장 많이 생긴 가게가 '치킨 가게'라고 한다. <20대에 가게를 시작, 했습니다>는 20대에 자신의 꿈과 적성을 찾아낸 일본의 여성 오너 15명의 창업 노하우를 엿보는 책이다. 20대에 자신의 가게를 시작한 젊은이들답게, 여기 등장하는 여성 오너들은 돈벌이보다 자신의 적성이나 일의 즐거움을 먼저 생각하고 있다. 창업을 위한 철저한 준비와 분석보다는 '나만의 가게'를 향한 열정이 오롯이 모아져 '특별한' 가게를 탄생시켰다. 돈이 좀 된다고 하는 가게에 우르르 몰렸다가 아니다 싶으면 금방 접어버리는 창업과는 차별적이다.

20대, 어떻게 생각하면 가장 초조한 시기이기도 하면서 또 가장 느긋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실패조차도 값진 배움으로 승화할 수 있는 '젊음'이, 경험 부족이라는 위험 부담을 상쇄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20대에 가게를 시작, 했습니다>에 등장하는 15명의 여성 오너들에게 가장 부러운 점이 바로 그러한 '여유'이다. 이들이 말하는 창업 노하우의 핵심은 "성공보다는 즐거운 일을 찾자"라고 본다. 창업의 가장 큰 매력은 '나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고, 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데에 있지 않나 싶다. 지나치게 수익만 생각하다 보면, 지루한 직장생활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꿈의 공간'이 아닐까. <20대에 가게를 시작, 했습니다>에 소개되는 가게들은 모두 규모는 작지만 '특별한 멋'을 가지고 있다. 작은 가게이지만 자신만의 색깔로 승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아이디어가 필요하고, 그런 아이디어는 바로 꿈을 향한 열정, 일을 즐기는 마음에서 나온다. 일에 대한 즐거움이 바로 아이디어의 원천인 것이다. 
 
<20대에 가게를 시작, 했습니다>에서 배울 수 있는 또다른 창업 노하우는 "행동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잔소리처럼 들리는 뻔한 말이지만, 망설이다 세월 다 간다. 망설임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20대에 가게를 시작, 했습니다>에 등장하는 여성 오너들은 모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열정으로 적성이 아닌 직장을 미련 없이 그만둘 수 있었고, 망설임을 극복해냈고, 위기를 견딜 수 있었다. 결국 (세대를 막론하고 창업을 꿈꾸는) 우리는 다시 한 번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성공보다는 즐거운 일을 찾자.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 

"이익도 물론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일에 대한 열정이다. 정말로 좋아하면 그 열정이 손님들에게도 전해지며, 도중에 싫증나서 포기하는 일도 없게 된다"(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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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동양학 강의 1 - 인사편
조용헌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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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격조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동양학 강의>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졌으나, 누구든 들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채집하여 여운이 긴 해석 하나 덧 붙였다. 산들산들 느린 바람 부는 강호에, 작은 배 하나 물결따라 흔들리게 띄워놓고,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으면, 세월도 잊히고 시름도 잊힐 것만 같다. 그러나 이런 '강의'를 조심해야 한다. 만만이 봤다가는 정작 답안을 하나도 작성하지 못할 수도 있는 과목이 바로 이런 과목이다. '쉽고', '재미 있음'이 바로 이야기가 가진 강점이면서 동시에 이야기의 함정이다. 이야기 속에 함축된 이치를 스스로 캐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스승이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은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삶에 스스로 적용해야 할 둔중한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1권 <인사편>에서 '의식주'라는 카테고리 안에 편입된 '부잣집 낮은 굴뚝'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자(150-151).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굴뚝이 높아야 연기가 잘 빠진다. 굴뚝이 낮으면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아 연기가 잘 빠지지 않아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는 우리나라 양반 집안들의 고택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의외의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굴뚝이 낮게 설치된 집이 많았다는 것이다. 1,000석 이상을 하던 부잣집 굴뚝이 채 1미터도 안 되더라는 것이다. 연기가 밖으로 새지 않고 집 마당 안에서 흘어지면, 집안 식구들은 이 연기를 들이마셔야 하니까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뚝 연기가 밖으로 잘 나가지 않도록 단속한 이유는 무엇인가.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배고픈 시절에 부잣집 굴뚝 연기는 위화감 조성의 원인이었고, 위화감을 주지 않으려고 굴뚝을 맞게 만들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추석 명절 무렵에는 추수한 나락을 곧장 창고로 옮기지 않고, 일부러 대문 바깥에 일주일 정도 야적해놓았다고 한다. 그 일주일은 배고픈 주변 사람들이 밤에 몰래 나락을 가져가도 눈감아주는 기간이었다. 저자는 이 이야기 끝에 이런 해석을 덧붙인다. "이는 조선의 양반 부자들이 자신들의 가격(家格)을 높이는 동시에, 유사시 안전을 유지하는 전통적인 방법이었던 것이다." 강의는 이렇게 끝이 난다.

<조용헌의 동양학 강의>를 읽으며 내 머릿속에 맴돌았던 하나의 주제는 '격조 있는 삶', 바로 그것이었다. 평생을 노름 행각으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은 난봉꾼으로 이름을 날린 학봉 종가의 13대 종손인 김용환. 이러한 파락호가 사실은 만주에 독립자금을 댄 독립투사였음이 사후에 밝혀졌다(12-13). 우리나라에서 도토리 죽으로 가장 유명한 집안이 바로 영덕군 영해에서 살았던 재령 이씨 집안이라고 한다. 영남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던 부잣집이었던 이 집에서는 흉년이 들면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도토리 죽을 끓여 나눠주었는데, 도토리를 만지다가 고부간에 손톱에서 피가 날 정도로 죽을 끓였다고 한다(106-107). 격조 있는 삶이란, 바로 이러한 삶이 아니겠는가. 이 대목에서 아파트 열쇠 하나 들고 삶의 '품격'을 이야기하는 낯뜨거운 광고 하나가 떠올랐다.

<조영헌의 동양학 강의>는 강호에서 채집한 이야기들이다. '동양학'이라는 키워드가 다소 과장되게 느껴질 만큼 '구수한' 이야기들을 입심 좋게 풀어놓았다. <조선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조용헌 살롱'이라는 칼럼을 모태로 하고 있어, 글 한 꼭지 분량이 딱 그만큼이다. 2권 <천문편>에 '유불선'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시 한 편이 소개되고 있다(170-171). 부설거사가 남겼다는 '팔죽시'(八竹詩)라는 제목의 시이다. "이런대로 저런대로 되어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이런대로 살고,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저런대로 보고,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시장 물건 사고파는 것은 세월대로, 세상만사 내 맘대로 되지 않아도,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보내네." <조용헌의 동양학 강의>가 바로 그런 책이 아닌가 생각된다. 읽는 사람 마음에 따라 시시한 책이 될 수도 있고, 격조 있는 가르침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 그렇다. 스승은 들려줄 뿐이다. 가르치는 스승보다 듣는 제자가 더 지혜로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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