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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동양학 강의 1 - 인사편
조용헌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격조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동양학 강의>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졌으나, 누구든 들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채집하여 여운이 긴 해석 하나 덧 붙였다. 산들산들 느린 바람 부는 강호에, 작은 배 하나 물결따라 흔들리게 띄워놓고,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으면, 세월도 잊히고 시름도 잊힐 것만 같다. 그러나 이런 '강의'를 조심해야 한다. 만만이 봤다가는 정작 답안을 하나도 작성하지 못할 수도 있는 과목이 바로 이런 과목이다. '쉽고', '재미 있음'이 바로 이야기가 가진 강점이면서 동시에 이야기의 함정이다. 이야기 속에 함축된 이치를 스스로 캐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스승이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은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삶에 스스로 적용해야 할 둔중한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1권 <인사편>에서 '의식주'라는 카테고리 안에 편입된 '부잣집 낮은 굴뚝'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자(150-151).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굴뚝이 높아야 연기가 잘 빠진다. 굴뚝이 낮으면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아 연기가 잘 빠지지 않아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는 우리나라 양반 집안들의 고택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의외의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굴뚝이 낮게 설치된 집이 많았다는 것이다. 1,000석 이상을 하던 부잣집 굴뚝이 채 1미터도 안 되더라는 것이다. 연기가 밖으로 새지 않고 집 마당 안에서 흘어지면, 집안 식구들은 이 연기를 들이마셔야 하니까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뚝 연기가 밖으로 잘 나가지 않도록 단속한 이유는 무엇인가.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배고픈 시절에 부잣집 굴뚝 연기는 위화감 조성의 원인이었고, 위화감을 주지 않으려고 굴뚝을 맞게 만들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추석 명절 무렵에는 추수한 나락을 곧장 창고로 옮기지 않고, 일부러 대문 바깥에 일주일 정도 야적해놓았다고 한다. 그 일주일은 배고픈 주변 사람들이 밤에 몰래 나락을 가져가도 눈감아주는 기간이었다. 저자는 이 이야기 끝에 이런 해석을 덧붙인다. "이는 조선의 양반 부자들이 자신들의 가격(家格)을 높이는 동시에, 유사시 안전을 유지하는 전통적인 방법이었던 것이다." 강의는 이렇게 끝이 난다.
<조용헌의 동양학 강의>를 읽으며 내 머릿속에 맴돌았던 하나의 주제는 '격조 있는 삶', 바로 그것이었다. 평생을 노름 행각으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은 난봉꾼으로 이름을 날린 학봉 종가의 13대 종손인 김용환. 이러한 파락호가 사실은 만주에 독립자금을 댄 독립투사였음이 사후에 밝혀졌다(12-13). 우리나라에서 도토리 죽으로 가장 유명한 집안이 바로 영덕군 영해에서 살았던 재령 이씨 집안이라고 한다. 영남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던 부잣집이었던 이 집에서는 흉년이 들면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도토리 죽을 끓여 나눠주었는데, 도토리를 만지다가 고부간에 손톱에서 피가 날 정도로 죽을 끓였다고 한다(106-107). 격조 있는 삶이란, 바로 이러한 삶이 아니겠는가. 이 대목에서 아파트 열쇠 하나 들고 삶의 '품격'을 이야기하는 낯뜨거운 광고 하나가 떠올랐다.
<조영헌의 동양학 강의>는 강호에서 채집한 이야기들이다. '동양학'이라는 키워드가 다소 과장되게 느껴질 만큼 '구수한' 이야기들을 입심 좋게 풀어놓았다. <조선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조용헌 살롱'이라는 칼럼을 모태로 하고 있어, 글 한 꼭지 분량이 딱 그만큼이다. 2권 <천문편>에 '유불선'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시 한 편이 소개되고 있다(170-171). 부설거사가 남겼다는 '팔죽시'(八竹詩)라는 제목의 시이다. "이런대로 저런대로 되어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이런대로 살고,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저런대로 보고,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시장 물건 사고파는 것은 세월대로, 세상만사 내 맘대로 되지 않아도,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보내네." <조용헌의 동양학 강의>가 바로 그런 책이 아닌가 생각된다. 읽는 사람 마음에 따라 시시한 책이 될 수도 있고, 격조 있는 가르침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 그렇다. 스승은 들려줄 뿐이다. 가르치는 스승보다 듣는 제자가 더 지혜로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