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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의 규칙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0년 4월
평점 :
추리 소설 작가에게, 스스로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내미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도전장!
판권을 보니 이 책은 일본에서 1996년에 초판된 작품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데뷔작 <방과후>가 1985년에 발표되었고, 우리나라까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릴 만큼 큰 인기를 끌었던 <용의자 X의 헌신>이 2006년도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바로 딱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추리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10년 정도 작품 활동을 한 전업 작가로서의 고민이 이 작품을 탄생시키지 않았나 짐작해본다. 이 작품을 '전환점'으로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만의 작품 세계를 찾지 않았을까 하는 감(感)이 온다.
추리 소설 작가를 양성하는 학원이 있다면 이 책을 교재로 사용하지 않을까 할 정도로, 히가시노 게이고는 <명탐정의 규칙>에서 추리 소설의 모든 것을 까발린다. 그동안 추리 소설 매니아를 자청하며 많은 작품을 읽어왔지만, 추리를 위한 트릭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추리 소설을 다시 세부적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아니,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할 듯하다. 예를 들면, 밀실 살인의 트릭은 누가 범인인가 보다 어떻게 죽였는가에, 폐쇄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살인은 누가 범인가에, 일명 '알리바이 선언'은 완벽해 보이는 알리바이의 허점이 무엇인가에 추리의 초점을 두고 독자와 두뇌 게임을 벌이는 것이다. 그중 추리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고립'의 패턴을 예로 들면 이렇다. "탐정이 고군분투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입니다. 경찰이 끼어들면 과학 수사나 인해 전술 따위를 동원하기 때문에 지식 게임이 파괴됩니다. 하지만 이번 경우처럼 외부로부터 고립될 경우 순수하게 범인 대 명탐정의 싸움이 됩니다"(79). '고립'이라는 트릭에 숨은 매력은 이 뿐이 아니다. "범인의 입장에서도 장점이 있지요. 무대가 고립되면 경찰이 개입할 수 없고, 등장인물들도 도망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손쉽게 살인을 할 수 있어요. 마음만 먹으면 모두를 살해하고 범인 자신도 자살할 수 있지요. 물론 그런 패턴은 명작에나 해당되는 것이지만요"(79).
<명탐정의 규칙>은 이처럼 추리 소설에 숨어 있는 트릭의 패턴과 설정 이유를 대대적으로 공개한다. 그런데 '트릭의 패턴'을 공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전문가의 매스를 들고 대 해부를 단행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본격 추리 소설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을 대놓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탐정 소설의 조연이라 할 수 있는 경감은 언제나 "생초보 탐정이 끼어들 상황이 아니야"라는 진부한 대사를 어김없이 되풀이 한다든지, 사건의 해결은 결국 명탐정의 몫이라는 설정은 독자들과의 암묵적인 동의 하에 모르는 척 지나가야 하는 고정된 설정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 '어쩔 수 없음'을 비웃으며, 뻔한 패턴을 신물나게 답습하는 작가의 편의주의적 게으름을 꼬집는다. 기존 추리 소설의 안일한 패턴을 야유하고 있지만, 이러한 비판은 자기반성적 성찰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스스로에게 내미는 도전장이기도 할 것이다.
이 작품 속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유독 '밀실 살인'에 대해서는 강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면서, 알리바이 허점 찾기 패턴에 애정을 갖고 있는 것이 드러난다. 완벽해 보이는 알리바이에 숨은 트릭이 무엇인지 곳곳에 힌트를 숨겨 놓고, 독자와 벌이는 두뇌 게임을 즐기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용의자 X의 헌신>도 결국 독자가 쉽게 예상할 수 없었던 알리바이 트릭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히가시노 게이고는 알리바이 트릭이 숨어 있는 추리 소설을 읽는 독자의 심리를 이렇게 분석한다. "추리 따윈 하지 않아. 주인공이 추리해 가는 것을 바라볼 뿐이지. 그래서 지치지 않는 거야. 마지막 단계에서 사건이 해결되는 것을 보면서 이해하고 만족하는 거야"(126).
<명탐정의 규칙>은 진부한 추리 소설의 신물나는 패턴을 야유하면서, 추리 소설 작가로서의 고민을 반영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도전장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독자를 향한 강력한 도전장이기도 하다. 추리 소설에 대한 비판이 날카로울수록 자기 스스로도 그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텐데, 탐정 소설의 규칙과 그 문제점이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남김없이 폭로하고 있으니 말이다. 독자에게 추리 소설의 모든 것을 알려주고 시작하는 공정한 두뇌 게임이라고나 할까. 어찌 생각해보면, 추리 소설 작가로서의 엄청난 자신감이다!!!
<명탐정의 규칙>은 탐정 소설에서 늘 진부한 대사만 날리는 조연 '오가와라 경감'과 '두뇌 명석, 박학다식, 다재다능, 뛰어난 행동력의 명탐정 덴카이치 다이고로'라는 전형적인 명콤비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이들이 소설의 안과 밖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명탐정의 규칙'을 파헤친다. 솔직히 이 책에 대해 "웃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라는 일본 아마존 독자 서평은 좀 오버스러운 감이 있다. 그러나 명탐정의 규칙을 해부하는 설명서적인 책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추리 소설를 완성했다는 점에서, 그 독특한 실험 정신에 별점을 높게 주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