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미 이타카
김지훈 지음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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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는 세 개로 나눠진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어떻게 먹을 것인가? 왜 먹을 것인가?"(232)


나는 오늘도 백해무익하다는 설탕을 넣어 커피를 마셨고, 먹지 않는 것이 좋다는 가공 식품으로 식사를 했다.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왜 이런 음식들을 먹는 것일까? 맛있으니까?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보다 접근이 쉬위니까? 웰빙 식품보다 값이 싸니까? 아마도 이 모든 것이 버무려져 '습관'이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길들여진 입맛대로 먹는 것이고, 먹어왔던 대로 사는 것이고, 남들 먹는 대로 사는 것이다.

몇몇 '양심적인'(그렇게 믿고 싶다!) 전문가들이 먹어서는 안 될 첨가물을 넣어 만들어진 가공 식품의 정체를 폭로하고 있다. 각계의 전문가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진단한다. 일각에서는 비만을 유발하는 음식을 만들거나 파는 기업에 비만세 또는 건강세를 물려야 한다는 주장도 대두되고 있다. 이런 음식을 아예 생산하지 못하도록 만들면 좋은데, 그것은 또 '자유경제시장' 원리에 위배된다고 한다. 자유경제시장 원리, 다시 말해 경제 논리와 시장 원리, 이 두 가지 메커니즘이 비만을 유발하고, 몸에 해로운 음식을 생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자유경제시장 원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비만이 개인의 선택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소비자가 먹지 않으면, 아무도 찾지 않으면 그런 음식은 당연히 지구상에서 살아진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저소득층의 비만율이 고소득층에 비해 높게 나타나는 통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웰빙 열풍은 '몸에 좋은 먹거리'의 값을 확 올려놓았고, 가공 식품으로 비만해진 '기업'은 다시 웰빙 산업으로 더욱 비대해지고 있다.

<더미>는 비만에 담긴 불편한, 그리고 무서운 진실을 파헤쳤다. 무엇보다 사람의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이 사회에 퍼져나가게 되는 자유경제시장의 메커니즘을 파악할 수 있다. 존 홉킨스 대학교의 한국인 유학생인 '나'는 바이러스 전문가인 프루지너 교수와 함께 바이러스의 비만 유발 메커니즘을 연구해왔다. 그러나 먹고살겠다고 교수가 되는 일에 매달렸던 자신에게 실증을 느끼고 학교를 떠난다. 조용하고 느슨하게, 자유롭게 살겠다는 일념으로. 배낭하나 달랑 짊어지고 학교는 떠난 '내'가 선택한 전략은 '살찌는 방법'을 파는 것이었다(44). 살 빼는 시장보다 살찌우는 시장의 규모가 훨씬 크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가축들을 살찌울 수 있는 식품첨가물을 특허출원하였고, 그것으로 지나이 그룹과 거래를 했다. 지나이 그룹의 변호사인 제드는 '향료'로 특허출원을 하라고 귀뜸해주었고, '나'는 그것의 이름을 '레인보 아미노'라고 지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가축 사료 첨가제인 '레인보 아미노'가 감자칩과 같은 음식물에 첨가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레인보 아미노'를 섭취한 가축을 먹는 것은 해롭지 않았으나, 그것을 직접 섭취하게 되면 비만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레인보 아미노 때문에 뚱뚱해진 사람은 운동으로도 살을 뺄 수 없고, 굶어 죽어도 뚱뚱하다는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맛가루'라 불리는 레인보 아미노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거리에는 점차 뚱뚱한 사람들이 늘어났다. 레인보는 뛰어난 맛으로 사람들을 유혹한 후 비만이라는 질병의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덫이었다(286).

사회 문제를 취재하여 책을 쓰는 스피넬은 '레인보 아미노'의 정체를 폭로한다. 그러나 지나이 그룹과 제드로 대표되는 기업은 레인보 아미노가 비만을 일으키게 되더라도 그것은 레인보 아미노의 잘못이 아니라 사람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고, '내'가 아는 사람들은 레인보 아미노가 사람들에게 맛의 기쁨을 주었다는 점을 강조했고, 그 맛에 중독된 사람들은 뚱뚱한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일 뿐 저항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는 쪽보다 자신이 바뀌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184). 노예처럼! 비만에 적응하고, 비만에 함몰되는 인생을 바라보며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 '나'는 또다른 카포시 그룹과 손잡고 비만 치료제 개발에 매달리게 되지만, 결국 맛에 대한 끝없는 집착과 욕망은 사람고기를 탐하는 '뉴타입' 인류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레인보 아미노의 정체를 폭로한 스피넬은 "보석 중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진실이다"(132)라는 삶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석처럼 빛나는 진실이 아니라, '맛'을 선택했고, 욕망을 선택한다. 재밌는 것은 자신들이 가공한 음식을 먹고 뚱뚱해진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한 비만 치료제를, 기업이 누구보다 간절히 바란다는 사실이다. 비만을 유발하는 음식을 생산하고, 비만 치료제까지 개발이 된다면 무궁한 '시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중국시장에 진출하여 크게 성공한 '한식 음식점'을 취재한 방송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성공한 CEO는 '웰빙'과 '고급화' 전략이 주요했다고 스스로 진단했고, 그 음식점을 찾은 한 중국인은 "이러한 고급 식당을 이용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한다"고 대답했다. '맛난 음식'이 성공의 척도가 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닐 것이다. 그 옛날 임금님의 수라상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더미>는 '레인보 푸드'가 계급의 상징이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레인보 푸드'를 먹기 위해서 가열하게 일하는, 작가의 표현 그대로 '입맛대로 돌아가는 세상'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맛의 노예가 되어가는 사람들! 과장이지만 사실 전혀 과장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도 먹고 살기에 바쁜 인생이라 자조하지 않는가.

<더미> 덕분에 나는 얼떨결에, 약간의 다이어트를 했다. '레인보 아미노'가 들어간 음식을 탐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가공 식품을 즐기는 나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에도 가공 식품을 완전히 끊지 못했다는 것이다. 시장과 경제 논리에 굴복하게 만드는 나의 탐욕을 저주하고 싶다. 우리는 개인의 탐욕과 사회의 탐욕 모두에 저항해야만 한다. 저항을 포기한다면, 노예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애굽을 탈출한 히브리 백성이 먹을 것이 없어 불평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평을 인정하시고(!) '만나'를 내려주신다. '만나'를 질리도록 먹게 되자 백성들은 '맛난' 고기가 먹고 싶다고 불평을 한다. 그들은 차라리 '맛난 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노예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다. 이번에도 하나님은 그들의 불평을 들으시고, 메추라기 떼를 보내어 고기를 먹여주셨다. 그러나 탐욕스럽게 고기를 탐하는 백성에게 진노하신 하나님은 "고기가 아직 잇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그 백성에게 큰 재앙을 내리셨다. 그 재앙이 내린 장소의 이름은 '탐욕의 무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더미>는 우리 스스로 파내려가는 '탐욕의 무덤', 그 끝을 보여준다.
 
아내를 웃기기 위해 토막글을 쓰다가 소설의 세계로 입문하였다는 작가는 <더미>에서도 자신의 유머 감각을 십분 발휘한다. 그 유머가 지나쳐서 어떤 대목은 다소 말장난스러운 감이 없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재밌게 읽힌다. <더미>의 섬짓한 주제와 유머 코드가 묘한 대비를 이루며, 극적 재미를 더한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면지와 도비라 사이에 만화 같은 일러스트 몇 장면을 삽입했다. 일러스트는 책의 주요한 줄거리를 압축한 것인데, 책을 읽어가며 제자리를 찾은 일러스트를 확인하는 일도 독특하고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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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비밀 - 어느 위대한 과학자가 남긴 연금술에 관한 위험한 두뇌게임
큐르트 에우스트 지음, 손화수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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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이 이기려고 결심했다면, 그들은 승리를 차지하는 동시에 질 것이다.
그녀가 질 것을 예상했다면, 그녀는 패배를 맛보는 즉시 이길 것이다"(533).
 

사실 이 책을 다 읽은지가 꽤 되었다. 그런데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시작할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난 느낌을 한마디로 말하라고 하면, "재밌다"고 할 것이다. 비슷한 종류의 다른 책과 무엇이 차별되느냐고 묻는다면, "치말한 묘사에 담긴 문학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대답은 못 된다. ’숫자 6’과 같은 책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다(208-209).

’천재’와 ’너드’(439)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수학 교수 ’에빈’이 지닌, <다빈치코드>의 ’로버트 랭던’을 넘어서는 그 깊은 매력을 무엇이라 묘사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로버트 랭던과는 느낌이 전혀 다른 이 우울한 천재의 수학적 재능은 정교한 과학을 바탕으로 하는 두뇌게임에서 독자를 제외시켜 버린다(비대칭 소수, 쌍둥이 소수, 무한 소수 등 숫자의 성격을 알고 있는 독자는 예외). 이 책은 숫자가 트릭이 되기도 하고 실마리가 되기도 하면서, 숫자 때문에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에빈이 풀어주지 않으면 숫자에 담긴 실마리와 철학적 의미를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한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220과 284라는 숫자. 친구 사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두 숫자. 같은 운명을 지닌 이 두 숫자. 아이를 함께 가진 사랑하는 두 사람 같은 이 두 숫자. 즉, 284라는 숫자의 인수를 구해 함께 늘어놓으면 220이 되며, 220의 모든 인수를 구해 모두 더하면 284가 되는 이 운명적인 상관관계에 있는 숫자...... 여기에는 논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공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그렇게 될 뿐"(406). (이 설명 속에는 중요하면서도, 놀랄만한 반전이 숨어 있다.)

독자의 조급한 궁금증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작가는 한 동작 한 동작 정성스럽게, 뿌연 창문을 닦아내듯이, 시종일관 팽팽한 긴강 속에서 서서히 이야기의 윤곽을 드러낸다. <뉴턴의 비밀> 안에는 세 차원의 시간대가 존재한다. 먼저는 17세기의 뉴턴, 뉴턴의 비밀을 추적했던 마이의 행적, 마이의 행적을 뒤쫓는 에빈의 시간이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한다. 베일에 쌓인 과학자, 그 과학자를 추적하는 역사학자, 그 역사학자를 추적하는 과학자가 꼬리를 물고 있는 셈이다.

이야기는 마이브릿 포센의 느닷없는 자살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녀의 유서가 그녀의 전 남편이었던 에빈에게 전달된다. 유서에 담겨 있는 한 단어가 그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수’(어떤 수에서 다른 수를 뺄 때, 그 빼려는 수)라는 단어이다. 에빈과 헤어져 핀 에릭과 재혼 후, 스티그와 리네라는 예쁜 아이들까지 낳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살았던 마이, 에빈은 그녀는 절대 자살 따위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마이가 갑자기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에빈은 유서를 통해 마이가 자신에게 무엇인가 암시를 남겼음을 감지하고, 그녀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뉴턴’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뉴턴의 비밀>은 전형적이다. 역사적 인물의 숨겨진 비밀, 그 속에 숨은 음모, 이어지는 범죄, 수상한 검은 그림자, 비밀 단체의 존재, 고문서, 수수께끼 같은 단서, 천재적 주인공 등. 그럼에도, 이 책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단순한 재미를 넘어서는 철학적 세계관이 이야기의 무게 중심을 잡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뉴턴의 비밀에 접근했던 마이는 작가적 상상력을 가진 역사학자이다. 과거와 현재를 잇고, 천재와 천재를 연결하는 매개이기도 한 마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이것은 <뉴턴의 비밀>이 왜 세 가지 차원의 시간 축으로 구성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녀는 시대별로 각기 다른 모습의 사회도,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마치 바퀴와 같은 형태로 돌고 도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세상의 모든 일 또한 끝없이 돌고 도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시간이라는 것이 무상함과 덧없음, 그리고 한정된 인간의 경험에 묶여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시간 속에는 과거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과거를 보는 시각은 항상 변화해왔다. 그리고 인간은 그 시간이라는 바퀴의 고무 가장자리가 비뚤어지거나, 바퀴에 구멍이 날 때마다 땜질을 해왔었다. 마치 역사학자들이 최대한 확실하고 분명한 과거의 진실을 찾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의무라고 여겨왔던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일이면, 새로운 발견으로 지난 시간 역사학자들이 고집해왔던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65).

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기 때문에, 이 정도 인용은 용서가 되리라 믿고, 좀더 인용을 해본다면,

"작가들과 역사학자들 간에는 공통점도 없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과거의 개념을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재의 세계를 바탕으로 이해한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현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65).

사실 <뉴턴의 비밀>이라는 책의 제목에 비해, 아이작 뉴턴에 대한 이야기는 다소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천재 과학자로 알려진 뉴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다각도의 접근이라기보다는, 숨겨진 사생활에 대한 ’폭로’에 가깝다. 그것도 터뜨리는 식으로 말이다. 뉴턴의 숨겨진 이면보다는 몰랐던 뉴턴에 대해 더 알게 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것조차도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작가적 상상력이 가미된 것이니 어느 정도의 왜곡을 감수해야만 한다. 다른 것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숨겨두고, 뉴턴에 대해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 하나만 발설한다면, 에빈이 묘사한 그의 성격에 대해 말하고 싶다.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다른 비밀 회원들과 나누는 일. 영원히...... 에벤이 알고 있는 뉴턴은 결코 그러한 의무감을 좋아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차라리 자신의 연구 결과를 몇 년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숨기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단지 타인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371). 어쩌면 모든 사건의 발단은 이러한 그의 성격에 기초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천재에 대한 가학적인 증오라든지, 폭력에 대한 심리 묘사라든지, 숫에 담긴 철학적인 개념이라든지, 인간이 지닌 ’약점’의 취약성이라든지, 주목하여 관찰하고 깊이 성철해볼만한 주제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수많은 테마 중에 다음의 한 문장이 마음에 남는다. 

"사람들 사이의 어떤 만남은 훗날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정도로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393).

역사의 수레바퀴는 아주 사소한 만남을 통해 돌아간다. 그 사소한 만남이 천재 과학자의 운명을 결정했고, 그것이 결국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과 사고의 원인이 되었다. 지금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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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최악의 날에 꼭 해야 할 10가지 - 3000년 전 인생 최악의 날을 맞이한 남자, 다윗에게 배우다
브라이언 잔드 지음, 이지혜 옮김 / 대성닷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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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최악의 날에 무엇을 할 것인가?

<하나님은 한 번도 나를 저버리지 않으셨지만 분명 나는 십년감수한 적이 몇 번 있다>. 이것은 <드림이 비밀>이라는 책을 쓰신 스탠 목사님의 또다른 책 제목이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이지만, 제목을 읽으며 마음으로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세상은 기독교인들의 저급한 '기복 신앙'을 비난하지만, 그것은 제대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는 껍데기 신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소리이다. 우리의 믿음은 때때로 시험(테스트)을 통과해야 하고, 용광로와 같은 고난을 거치면서 단련되어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고난을 없애주겠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난이 유익이라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고난을 약속한다!

무엇이든 다 들어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내게 고난을 허락하실 때의 그 쓰라린 실망감을 아는가? 고난 없는 인생은 없다. 그러나 세상은 고난과만 싸우면 되지만, 믿는 자들은 고난과 함께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의심과도 싸워야 한다. 믿음이 가장 크게 위협받는 시기이면서 동시에 믿음이 가장 필요한 시기, 그때가 바로 '고난'의 때이다. 모든 것을 집어 삼켜버리고 마는 고난 앞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을 때, 고난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는 오직 '믿음'이라는 것! <인생 최악의 날에 꼭 해야 할 10가지>는 고난에 처한 크리스천이 바로 그 '믿음'의 무기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가이드북이다.

<인생 최악의 날에 꼭 해야 할 10가지>는 3000년 전, 인생 최악의 날을 맞이했던 다윗의 삶을 추적한다. 저자는 다윗의 '시글락' 경험을 바탕으로 비극을 승리로 뒤바꾸는 모범 답안을 찾아내었다. 그때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안달하는 사울 왕을 피해 산악 지대를 떠도는 처지에 있었다. 다윗은 시글락에서 걸어서 사흘 걸리는 아벡에 갔다가 돌아오는 중이었다(22-23). 시글락 입구에 들어선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말그대로 재앙이었다. 다윗은 그날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다. 재산을 도둑 맞았고, 삶의 터전은 불타버렸으며, 가족은 납치되었다. '그 인생 최악의 날에 다윗은 무엇을 하였는가?' 이것이 바로 이 책의 탐구 주제이며, 고난에 처한 자에게 들려주는 회복의 메시지이다.

 
"이만큼 울었으면 됐어!"(37) 

인생 최악의 날에 다윗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다윗은 울었다. 두려움과 분노와 고통으로 부들부들 떨며, 울 힘이 없을 지경이 될 때까지 울었다. 하나님은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신다. 때로 우는 것을 불신앙적인 행위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다윗도 최악의 날에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이 우는 것이었다. 우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우는 자리에만 계속해서 머물러 있는 것은 잘못이다. "억압된 감정의 고통이라는 독을 눈물로 해소하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기억할 게 있다. 눈물로 밤을 지새운다 하더라도 당신이 울음을 멈추고 믿어야 할 때가 되면 믿음이 새벽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비극을 승리로 바꾸려면 눈물을 극복해야만 한다"(41).

 
"당신은 뻔뻔한 믿음이라는 아주 특별한 선택을 할 자격이 있다"(159).

다윗의 이야기는 고난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일 뿐임을 보여준다. 그는 고난의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적극적으로 대처했고, 결국 재앙을 굴복시켰다. 그리고 멋진 반전의 결말을 이끌어내었다. 다윗의 삶을 추적한 저자는, 인생 최악의 날에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바로 '뻔뻔한 믿음'이라고 말한다. "믿음이란 견딜 수 없는 비극에서 측량할 수 없는 선하심이 비롯된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뻔뻔하게 믿는 것이다. 믿음이란 우리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모든 것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그 회복을 축하하면서 살게 되리라는 것을 뻔뻔하게 믿는 것이다. 믿음이란 모든 것이 망가진 잿더미 한가운데서 당신이 기쁨으로 다시 춤추게 될 것을 뻔뻔하게 믿는 것이다"(158).


"다 잘될 것이다"(178).

"모든 것이 다 괜찮을 것이다. 다 잘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저자의 이 말을 주문처럼 따라 읽어본다. 교회에서 생활하는 나에게는 하루에도 몇 건씩 긴급한 중보기도를 요청하는 소식이 들려온다. 가슴 저미는 아픈 사연들이 많기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의 결국은 이미 결론이 나 있다. 다윗은 재앙에 압도 당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재앙을 굴복시키는 믿음의 용사가 되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결국 모든 것을 회복했다. 그는 '시글락'을 고난의 장소가 아니라, 영원히 빛날 승리의 장소로 만들었다. 다윗이 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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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브리지스의 견고함 - 그리스도의 의와 성령의 능력에 대하여
제리 브리지스 & 밥 베빙튼 지음, 오현미 옮김 / 두란노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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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놓은 책들을 가지런하게 세워놓으려면 양 끝에서 그것들을 받쳐 주는 북엔드가 있어야 한다.
인생의 책장에 북엔드가 없다면... (prologue 中에서)  

 

"자기 의에 빠져 잘난 체하는 바리새인과 죄의식에 짓눌려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인생이라는 책꽂이에 북엔드가 없다는 것이다"(16).

"익숙함은 경멸을 불러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새 것이 아니면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친숙한 것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을 공부하는 것에도 적용됩니다. 이미 알고 있는 말씀(가르침)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은 늘 '새로운' 가르침을 좇아다니며, 자극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많이 들어서 익숙한 것과 제대로 알고 있는 것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른 것입니다. 제대로 모르면서도 이미 들은 것이라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은 영영 그것을 제대로 배울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경건에 이르는 연습>의 저자 제리 브리지스와 현직 기업가인 밥 베빙튼이 함께 지은 <견고함>은 신앙을 견고하게 지탱해주는 영적 진리에 관한 내용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뿌리가 되고, 토대가 되는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집을 짓기 위해 터를 닦고 기둥을 세우는 것처럼 기초적인 것이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핵심적인 영적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자칫 '익숙한 내용'이라고 하여 그냥 지나치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로 기본이 되는 내용이지만, 신앙생활을 오래한 성도일수록 반드시 읽고 점검해봐야 할 내용입니다. 
 

교회에서 교육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늘 영적인 진리를 어떻게 하면 잘 가르칠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세상의 저항과 거짓 속임수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말씀으로 무장시키는 것이 저의 과제입니다. <견고함>을 읽으며, 가장 마음 깊이 와 닿았던 것은 첫째는 가르침이 탁월한 책이라는 것과, 둘째는 치유를 목적으로 한 책이 아닌데 치유의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견고함>은 영적 진리를 설명하는 '비유'가 참 재밌습니다. 신앙생활을 책꽂이에 꽂힌 책들에 비유하고, 그것을 지탱해주는 두 가지 영적 진리를 '북엔드'에 비유합니다. 잘못 꽂힌 하나의 책 때문에 모든 책들이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것처럼, 북엔드와 같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지탱해주는 두 개의 버팀대가 없다면 우리의 신앙도 이처럼 한순간에 무너져내릴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영적 진리를 설명하며, '복음의 적 1호와 2호와 3호'를 등장시킵니다. 또한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은 '삼인조의 강력한 적수'를 상대해야 한다고도 설명합니다. '교리'라고 하면 딱딱하게 느끼는 성도들이 많은데, 이해하기 쉽고 재밌게 설명하면서도 배우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는 탁월한 비유라고 생각됩니다.
 

<견고함>을 통해 치유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복음의 진리를 명쾌하게 풀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깨달아지는 순간 나를 옭아매고 있던 어둠이 물러가고, 영적으로 회복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의 의와 맞바꾸신 '위대한 교환(great exchange)'과 '칭의의 현재성'에 관한 가르침이 특별한 은혜로 다가왔습니다. 순결한 영적 진리를 선포하는 <견고함>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의 능력이 살아 역사하는 책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책꽂이에 두 개의 북엔드를 놓아 주신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의고, 또 하나는 성령의 능력이다"(16).

<견고함>은 책장에 놓은 책들을 가지런하게 세워놓으려면 양 끝에서 그것들을 받쳐 주는 북엔드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이 비틀거리지 않으려면 두 개의 북엔드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북엔드는 '그리스도의 의'이고, 두 번째 북엔드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저자는 "이 둘 모두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것이지만, 책들을 그 버팀대에 기대어 놓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의'를 대적하는 두 가지 '복음의 적'을 지적합니다. 우리가 쌓아서는 안 될 책, 우리가 쌓아놓은 책들을 도미노처럼 기울어지게 만들어버릴 복음의 적 1호는 '자기 의'이고, 복음의 적 2호는 바로 '죄책감'입니다. '성령의 능력'이라는 북엔드를 대적하는 복음의 적 3호는 '자기 의존적 태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상대해야 할 삼인조의 강력한 적수는 바로 "세상, 마귀, 그리고 우리의 육신"(113)입니다. 
 

<견고함>을 통해 다시금 깨달은 사실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복음의 적'의 실체입니다. 그중에서도 '복음의 적 1호 :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대한 경고와 '복음의 적 3호 : 자기 의존(self-reliance)'가 깊이 와닿았습니다. 죄책감은 쉽게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데, '자기 의'와 '자기 의존'은 열심과 헌신을 가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자기 의와 자기 의존은 서로 맞닿아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간혹 '자기 의'(self-righteousness)라는 함정에 빠지는 성도들을 종종 봅니다. '자기 의'라는 함정은 직분자들이나 열심 있는 성도들에게 더 치명적입니다. 왜냐하면, 열심과 공로와 헌신과 믿음과 권위와 청빈과 겸손과 말씀에 관한 지식과 거룩함과 선함 등 우리가 전심으로 구하고 좇아야 할 영적인 가치들이 언제든지 '자기 의'라는 함정으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신앙생활의 위험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견고함>의 저자는 죄책감보다 '자기 의'가 더 치명적이라고 경고합니다. 적절하게 다루기만 한다면 죄의식은 사실상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죄의식은, 우리 몸에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고, 그 근본 원인을 해결할 만한 어떤 조치를 취하라는 경고를 보내주는 '통증'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15). 이에 비해, 죄의식이 없는 사람은 파괴적인 죄악의 길을 가면서도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죄에 대한 무감각,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는 죄의식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견고함>은 한마디로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요, 대답이라고 생각됩니다. <견고함>은 우리 스스로가 아닌, 오직 '은혜' 안에서 우리가 강해질 수 있음을 깨우쳐줍니다. 비틀거리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의 의'와 '성령의 능력'이라는 은혜에 기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견고하게 지탱해주는 두 가지 북엔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버팀대에 '의지'할 때에만 우리의 모든 것이 제대로 유지되고, 안정되고, 안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릅니다. 의지함으로써 견고해지는 원리, 세상은 이러한 영적인 비밀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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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을 건너려거든 물결과 같이 흘러라 - 다시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옛이야기
이강엽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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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오후이거나 가을 어름에 서 있는 모든 이들과 이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고 싶다." (머리말 中에서)


이 책의 표지에는 "다시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옛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세파를 견디며 주변을 돌보느라 나를 잃고 살아온 그대여 / 옛이야기의 강물 위에 배를 띄우고 노닐다 보면 / 새로운 꿈들이 물결 따라 흘러와 그대를 일으켜 세우리"라는 싯구 같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언제인가 40-50대 주부들이 모인 세미나 장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상담학을 전공한 동료가 그날의 강사였는데, 강의가 끝날 무렵 참가자들에게 모두 눈을 감고 자신의 오른쪽 눈을 움직여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 오른쪽 눈이 여기에 있구나" 깊이 느껴보라고 요청했습니다. 강사는 시간을 두고 아주 천천히 코, 왼쪽 어깨, 배꼽 순으로 이동하며 평소에 잊고 지내던 자기 자신을 충분히 느껴보도록 인도했습니다. 그러자 여기 저기서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는 일에 치이다 문.득. 갑자기 '내가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지' 하는 생각에 섬짓해질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내가 '나'를 느끼는 순간 '내가 누구지' 하는 낯선 공포가 찾아들 때가 있습니다.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문.득. 떠오를 때면, 저만치 멀어져버린 청춘을 깨닫고 어느새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내 모습이 서러울 때가 있습니다. <강물을 건너려거든 물결과 같이 흘러라>는 "세파를 견디며 주변을 돌보느라 나를 잃고 살아온 그대"를 초청하는 책입니다. "옛이야기의 강물 위에 배를 띄우고 잠시 노닐자"고 손짓합니다. 그리하면 "새로운 꿈들이 물결 따라 흘러와 그대를 일으켜 세우리"라는 따뜻한 약속을 건넵니다.

<강물을 건너려거든 물결과 같이 흘러라>는 현자의 지혜문학처럼 읽히는 글입니다. 저자는 '옛이야기' 속에서 삶의 지혜, 삶의 해학, 삶의 성숙을 길어올립니다. '별주부전'이나 '선녀와 나뭇꾼' 같이 익히 아는 옛이야기도 있고, 숨은 옛이야기를 발굴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이 가진 특별함은 '옛이야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하고 풀어내는 '해석의 힘'에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도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메시지를 가진 이야기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새로운 관점은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고, 생각의 전환은 같은 인생인데도 그것에서 전혀 다른 가치, 전혀 다른 의미를 찾아내줍니다.

<강물을 건너려거든 물결과 같이 흘러라>를 읽으며 내 안에 가득 차오르는 깨달음은 '안달하며 살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조급함을 버리면, 안달할 때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입니다.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보면, 실패한다는 것은 그만큼 경험이 축적되는 일이고, 살아온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안목도 높아지는 일입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비참하게 죽을 수도 있지만 살아서 영웅이 될 수도 있습니다(26). 저도 이제 꽤 살긴 살았나 봅니다. 어릴 때는 머리로 암기했던 '새옹지마'의 교훈이 이제는 가슴으로 끄덕여지니 말입니다.
 

"행운은 오래된 것들을 따라 자연스레 흘러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나의 오래된 것들, 오래되어 함께한 것들, 함께해서 나와 떨어질 수 없는 것들은 나의 역사가 되고 신화가 된다"(42-43).

지혜는 얻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가치'에 눈을 뜨게 된다는 뜻인가 봅니다. <허망한 꼴, 우스운 꼴>이라는 이야기에 보면(69-72), 지혜로운 메추리가 등장합니다. 옛날, 여우가 길을 가다가 메추리를 만났습니다. 메추리는 자신을 살려준다면 배가 터지게 먹게 해주겠다고 여우에게 약속을 합니다. 그때 마침 광주리에 들밥을 이고 가는 촌 아낙을 만납니다. 메추리는 그 아낙 앞에서 폴짝 뛰었습니다. 아낙은 메추리를 잡으려고 들밥을 내려놓고 이리저리 뛰어 다녔습니다. 헛고생을 한 아낙이 다시 광주리가 있는 자리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여우가 들밥을 배불리 먹고 난 뒤였습니다. 이것이 '허망한 꼴'입니다. 이번엔 메추리가 '우스운 꼴'을 보여주겠다고 했습니다. 길가에 옹기장수 형제가 옹기 짐을 나란히 지고 걷고 있었습니다. 메추리는 앞서 걷던 형의 옹기 짐 위로 뛰어올랐고, 동생은 그것을 보고 작대기를 들어 메추리를 내리쳤습니다. 순간 메추리는 날아가고 옹기만 박살라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이든 일단 제 것이 되면 그것의 가치를 잘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눈앞의 메추리 때문에 들밥을 내던지고, 옹기를 깨버린 것처럼, 우리는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좇느라 정작 내게 있는 것의 소중함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언제나 그것의 소중함은 잃은 뒤에야 깨닫게 된다는 것에 인생의 슬픔이 있고, 비극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잠시 돌아보았습니다. 내가 좇아가려고 하는 것말고, 이미 내 손에 들려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전에게는 감사하지 못했던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이 되는 걸 보니, 이제 제법 '참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가 봅니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여유'를 갖게 된다는 뜻인가 봅니다. <강물을 건너려거든 물결과 같이 흘러라>를 읽다 보니, 불안한 상황에서도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급함이 덜어지고, 난처한 상황에서도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내공이 생기는 듯 합니다. 특별히 옛이야기에 담긴 혜안과 묘수가 나를 웃게 합니다. 시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아내에게 "아버지를 내다 팔자"고 속여서 "값을 높게 받으려면 무엇보다 몸이 좋아야 하니 좋은 음식으로 매 끼니 잘 차려 드리고 맘 편히 해드리자"는 어느 남편의 꾀처럼(123-127), 혜안과 묘수는 여유로운 마음에서 빚어지나 봅니다.

<도사 위에 사냥꾼> 이야기에서(53-58) 저자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던지고 새롭게 거듭나는 것에 있어 너무 늦었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고 합니다. 이제 나는 쇠하는 일만 남았나 싶어 우울한 때를 보내고 있었는데, 이 책이 내게 위로가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돌이켜 생각하니, 누가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해도 나는 거절할 것 같습니다. 이제 앞으로 걸어야 할 날을 더 많이 생각하겠습니다. 물결과 같이 흘러, 이제껏 건너온 강물을 마저 다 건너려고 합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말입니다. <강물을 건너려거든 물결과 같이 흘러라>를 읽으며, 차분하게 생각을 다지고, 인생을 다지고, 걸어온 길과 아직 걸어가야 할 길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낸 시간에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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