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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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을 것 중의 가장 큰 것이 어찌 굴욕이겠느냐."(327)

 

병자호란, 야만의 나라라 업신 여기던 사람들 앞에 우리나라 임금이 고개를 조아려 땅에 머리를 아홉 번 찧으며 항복했던 대 굴욕의 역사이다.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가장 큰 것이 굴욕은 아니겠지만, 그 치욕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날의 굴욕과 부끄러운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역사적 치욕만이 아니다. 나라의 치욕만이 아니다. 나라의 치욕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던 한 인생이 있다. 한 나라의 세자였으나 왕위를 물려받지 못했고, 전쟁 포로로, 정치적인 인질로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세자에게 우리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소현, 그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졌다.

 

그러나 내가 <소현>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굴욕의 역사를 기억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인질로 끌려가 적국에서 8년의 세월을 보내고 돌아온 소현은 귀국 후, 두달만에 사망했다. 병으로 죽었다고 배웠으나, 그의 죽음을 두고 ’암살’을 언급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그를 학대했다는 아버지 인조가 있다. 사도 세자와 함께 비운의 세자로 조선의 역사에 남겨진, 그 소현 세자의 삶과 정치적인 정황이 궁금했던 것이다. 또 하나, <소현>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그가 천주교인이었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기 때문이다. 적국에 인질로 있을 때 천주교를 접했고, 귀국할 때 조선에 천주교를 들여왔다는 소현 세자가 궁금했다.

 

 

"그러나 그것이 불안이 아니고 노여움도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슬픔이었다. 아비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나 아비에게 버려졌고,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났으나 나라에게 버려진 목숨이었다."(323)

 

김인숙 작가의 <소현>은 소현 세자의 환국을 전후로 한 약 2년 간의 이야기이다. 그의 전 생애를 다룬 전기가 아니라, 마지막 2년의 삶에 포커스를 맞추고 정밀하게 재구성했다. 그런데 책을 마주한 첫 느낌은, 역사 소설이 아니라 한 편의 감상문을 읽는 듯한 기분이었다. 소현에 대한 관심보다 작가의 수려한 문체가 더 인상적이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구석구석 묘사하듯, 한 문장 한 문장이 매우 느린 템포로 진행하며 섬세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차갑거나, 비장하거나, 참혹하거나, 긴박하거나, 날이 서거나, 모질거나, 그렇게 밀도 높은 그림이 거친 듯, 격렬한 듯, 수려하게 펼쳐진다.

 

<소현>이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것은 당시의 정세와 소현이 처한 자리라고 생각된다. 중원으로 뻗어나가는 적국과 조국 사이에 끼여 소현은 양쪽 모두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자신을 볼모로 잡고 있는 적국에 충심을 보이는 것만이 살 길이었지만, 그럴수록 조국의 의심도 높아갔다. 그를 슬프게 했던 것은 적국이 아니었다. 그를 믿어주지 않고 그를 품어주지 않는 아비와 조국이었다. 아비인 인조에게 아들 소현은 적국과 내통할지도 모르는 위험 인물이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권력 투쟁의 상대일 뿐이었다. 소현은 결국 아비에게, 나라에게 버려졌다. 왕위란, 권력이란, 정쟁이란, 그렇게 비정한 것이었다.

 

 

"청이 중원을 장악한 것이 태조가 창을 쥔 이래로 고작 50년의 세월이었다. 그중의 8년을 내가 그들과 함께 있었구나. 허니 내가 무엇을 알지 못한다 할 것이냐. 이기고 지는 것의 환멸을 알았다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조선의 세자, 임금의 아들이다. 내가 아는 것 중에 가장 밝히 아는 것이 그것이 아니겠느냐. 내가 내 뼈를 갈고, 적의 똥을 핥는 한이 있더라도, 저들이 보여준 모든 것을 아무것도 잊지 않으리라."(327)

 

삭히고, 견디고, 삭히고, 견디었던 소현은 중원으로 뻗어나가는 적국을 보며 자신의 조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았다. 정복자의 세상, 정복자의 세월을 보며 부국하고 강병하리라 꿈을 꾸었다(316). 그리고 그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생은 볼모의 신분에서 풀려나고, 영구 환국 후, 두 달 만에 깊은 통한을 남긴 채 저버리고 말았다.

 

아비인 인조 임금의 태도는 그가 ’제거’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임금의 눈물에 대한 기록도 없고, 장례를 성대히 치러야 한다는 대신들의 주청을 냉정히 물리치고, 세자를 살리지 못한 의관들을 벌하라는 주청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세자를 모셨던 시강원은 신속히 폐지되고, 세자가 세상을 떴으니 속히 원손을 봉하시라는 주청에 대해서만큼은 서두를 것이 없다는 하교가 내려졌다(331). 이뿐이 아니다. 세자가 세상을 뜨고 한 해 후에는 세자빈 강빈이 임금을 저주했다는 혐의를 입어 사약을 받았고, 세자의 세 아들은 모두 유배형에 처해졌고, 원손이었던 석철은 동생 석견과 함께 굶어 죽었다고 한다(332).

 

 

"세상을 탓하거라,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잘못 태어난 시대를 탓하거라,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자리에 설 것이니 너의 억울함을 그때에 위로받거라,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세자가 단지 한마디를 할 수 있을 뿐이었다. (...) 잘 가거라......"(323)

 

이 고독했던 한 사람의 인물을 읽으며, 나도 단지 "잘 가거라" 한마디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오늘 우리의 눈물이 소현에게 위로가 된다면 내 기꺼이 울어주리라. 그러나 잊지 않겠다, 기억하겠다는 약속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저 힘 없는 한 사람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나의 삶의 자리가 스스로 초라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 보면, 야만국에 머리를 조아리며 패배를 인정하고 아들까지 제거해야 했던 불안한 권력자나, 짓밟히며 살아도 호소할 데가 아무데도 없었던 약소국의 백성이나, 중원을 재패했으나 결국 사라진 이름이 되어버린 청의 역사나, 8년의 모진 세월을 견디고도 자신의 조국에서 그렇게 허망한 최후를 맞이한 소현에게나, 결국 모두에게 삶(역사)은 비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소현이 겪었던 세월의 비정함은, 강대국 앞에 끊임없이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불안한 권력이지만, 그것이라도 서로 쥐어보겠다고 속이고 감추고 물고 찢고 찢기며 다투는 오늘 여기, 우리의 삶에서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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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이네 살구나무 - 교과서에 나오는 동시조와 현대 동시조 모음집
김용희 엮음, 장민정 그림 / 리잼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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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의 가락과 동심이 만나다!


<분이네 살구나무>는 교과서에 나오는 동시조와 현대 동시조를 모아 엮은 ’동시조집’입니다. 동시조란, 시조의 형식에 동심의 내용이 담겨진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시조라고 하면 옛날 옛날 수염을 길게 기르고 한문 공부를 아주 많이 한 양반 할아버지들이나 읊조리던 어렵고 따분한 그 무엇이 연상됩니다. 그런데 그 시조의 형식에 동심을 담았다고 하니 처음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였습니다. 보통 초장 3, 4, 3, 4 / 중장 3, 4, 3, 4, / 종장 3, 5, 4, 3이라고 하는 정형화된 가락 안에 자유로운 동심의 세계를 담는다는 것이 어려워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우리나라 전통의 가락과 동심이 만나면 어떤 맛이 날까 궁금했습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분이네 살구나무"(정완영 작)라는 동시조는 이렇습니다.

동네서
젤 작은 집
분이네 오막살이

동네서
젤 큰 나무
분이네 살구나무

밤 사이
활짝 펴 올라
대궐보다 덩그렇다.


정확하게 3, 4, 3, 4 / 3, 4, 3, 4 / 3, 5, 4, 4입니다! 시조의 운율에 맞춰 읽으면 경쾌한 리듬이 기분까지 맑게 해줍니다. 그동안 시조의 가락이 이렇게 경쾌한 운율인 것을 몰랐습니다. 

이 책에 실린 64편의 동시조는 우리나라 최초의 동시조 동인회인 <쪽배>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인들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 책이 아니였다면 ’동시조’라는 문학 장르가 있는지도 모르고 살뻔 했습니다. 이 책의 뒷장에 실린 "동시조 이야기"에 보면, "시조는 이 지구상에서 우리나라에만 존재한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시조의 운율은 우리나라 고유의 가락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니 시조의 가락에 대한 자긍심이 생겨납니다. 한글의 우수성처럼, 시조의 가락을 더 아끼고 발전시켜 그 우수성을 세계에 알려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생깁니다.

"동시조는 시적 이미지와 비유 등 표현 기교를 중시해왔습니다. 시조란 그 정형의 틀 안에서 시인의 시적 상상력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다양한 표현 기법과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까닭입니다."

동시와 동시조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바로 ’정형화된 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형화된 틀과 자유로운 동심의 시계의 만남은 어쩌면 서로 모순되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경계가 없는 상상력과 자유로움의 세계를 우리 고유의 가락에 담아내는 작업이야 말로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한글의 멋과 가락의 맛을 알아야 탄생할 수 있는 문학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분이네 살구나무>를 읽으니 오랫만에 제 마음도 동심에 흠뻑 젖어듭니다. 책을 읽고 있으니 세상살이에 오염되고 더러워진 마음이 깨끗하게 청소되는 기분입니다. 운율에 맞춰 동시조를 읽으니 그 동시조의 내용이 저절로 암기가 되는 체험도 했습니다. 운율에 맞춰 동시조를 지어야 하고, 운율에 맞춰 동시조를 읽다 보면, 머리가 아주 좋아질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듭니다.

게임에 길들여지고, 시각적인 놀이에 익숙한 어린이들이 동시조를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깁니다. 동시조의 세계는 무궁한 상상력의 세계이고, 아름다운 것과 순수한 것을 느끼게 해주는 미학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욕설’을 많이 사용하는 언어생활에 길들여지고 있다고 합니다. 인터넷에 달리는 악플을 다는 초등학교 어린이도 많다고 합니다. 이것은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지 못한 잘못이라는 반성이 듭니다.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어린이들의 순수한 동심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느껴집니다. 그런 점에서 동시조라는 아름다운 문학작품 활동을 해주시는 <쪽배> 동회원 회원님들과 <분이네 살구나무>라는 책을 펴내주신 김용희 선생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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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사는 너 1
오드리 니페네거 지음, 나중길 옮김 / 살림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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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끝나버리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는 죽음보다 더 분명한 다른 이유를 그려준다. 
죽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랑과 죽어서라도 벗어나고 싶은 사랑의 빛과 그림자!



한 공간 안에 삶과 죽음, 사랑과 증오가 공존하며 그 경계가 허물어진다. 런던의 관광 명소이기도 한 하이게이트 공원 묘지와 그 바로 옆에 자리한 아파트가 이야기의 주무대이다. 이야기는 로버트의 연인인 엘스페스가 세상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엘스페스는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있는 가족묘지에 묻힌다. 엘스페스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미국에 있는 쌍둥이 조카들에게 남긴다. 단, 부모와 떨어져 런던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1년을 살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 그러나 쌍둥이의 부모인 에디와 잭은 그 아파트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 

쌍둥이 자매인 줄리아와 발렌티나는 부모님의 곁을 떠나 엘스페스 이모가 살았던 아파트로 오게 된다. 아파트의 윗층에는 신경 강박증 환자인 마트가 살고 있고, 아랫층에는 이모의 연인이었던 로버트가 살고 있다. 로버트는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의 역사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며 관광객을 안내하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강박증 때문에 아파트 밖으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마크, 그런 남편을 버리고 떠난 마크의 아내 마레이케, 죽은 연인 엘스페스를 잊지 못하는 로버트, 그리고 이모의 아파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쌍둥이 줄리아와 발렌티나가 서로 이웃으로 얽히면서 이야기는 갈수록 묘한 긴장감을 더해간다.

<내 안에 사는 너> 안에는 수많은 퍼즐 조각이 존재한다. 쌍둥이의 엄마인 에디는 왜 쌍둥이 자매인 엘스페스와 사이가 좋지 않을까(줄리아와 발렌티나는 엄마가 쌍둥이였다는 것도, 자신들에게 엄마의 쌍둥이 이모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엘리페스는 왜 쌍둥이 조카들을 자신의 아파트로 불러들였을까. 엘리페스가 로버트에게 남긴 일기장에 기록된 그녀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죽은 사람의 공동 거주지인 공원 묘지처럼 아파트는 산 사람들의 공동 거주 공간이다. 죽은 엘리페스를 잊지 못하는 로버트는 그녀와 꼭 닮은 그녀의 쌍둥이 조카 발렌티나와 사랑에 빠진다. 발렌티나는 어릴 때부터 한 몸으로 지내온 언니 줄리아로부터 벗어나 개별적인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발렌티나를 놓아줄 수 없는 줄리아는 자신을 떠나려는 발렌티나에게 상처 받을 때마다 윗층에 사는 마크를 찾는다. 마크와 줄리아는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마크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내를 그리워한다. 

쌍둥이 자매의 충돌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구속과 지배적인 집착, 그리고 사랑하지만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이중적이고 모순된 심리를 잘 보여준다. 일방적인 간섭이었지만 줄리아가 사랑으로 돌봐주었던 발렌티나와 마크, 결국 언니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했던 발렌티나와 아내를 되찾고 싶어하는 마크의 선택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음미해본다. 스포일러가 아니라면 결말을 공개하며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은 주제이다(사실 스포일러가 될까봐 조심스러워 하지 못하는 말이 많다). 죽어서도 서로를 잊지 못했던 로버트와 엘리페스, 그러나 로버트의 새로운 사랑 앞에 혼란스러워 했던 두 사람의 선택 역시 음미해보아야 할 주제이다.

<내 안에 사는 너>, 죽은 엘리페스의 유령이 그녀의 아파트에 나타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작가는 그 경계를 허물며 이렇게 질문하는 것 같다. 사랑을 끝나버리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는 죽음보다 더 분명한 다른 이유를 그려준다.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을 확실하게 갈라놓고 말지만, 사랑을 끝내버리지는 못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갈망과 사랑이라는 이름의 지배와 간섭, 그리고 그 사랑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구 사이에서 갈등한다. 쌍둥이 자매처럼, 삶과 죽음, 사랑과 자유가 한 쌍을 이룬다. 그리고 그 중심에 가족이 있다. 죽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랑과 죽어서라도 벗어나고 싶은 사랑, 어느 쪽이든 사랑은 빛과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고 모든 비밀이 풀어졌는데도 마지막 장을 읽을 때까지 이야기의 결말을 전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신비롭고 밀도 있는 내용 구성에 비하면, ’결말’이 다소 황당하고 허무하기도 하다.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면서, 사랑이 품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진지하게 음미해볼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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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순종하는 잘되는 자녀 -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로 키우는 9가지 양육법
밀레스 맥퍼슨 지음, 김창대 옮김 / 브니엘출판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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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로 키우는 9가지 양육법


부모가 자녀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부모가 자녀를 믿어주어야 한다고 말할 때, 무엇을 믿으라는 의미일까? 이 책은 말한다. 올바른 자녀 양육을 원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믿는 것처럼, 부모들도 자녀를 신뢰해야 한다고 말이다. 부모들이 믿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자녀)를 독특하고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사실! 독특하고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우리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고유한 계획과 뜻이 있다는 말이다. 그가 누구이든지 말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부모님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믿고 있느냐고 물으면, 아마 대다수의 부모님들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믿고 있는 것이 확실할까?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왜 자녀 교육에 조바심을 내고, 뜨거운 한숨을 내쉬고,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까?

올바른 자녀 양육는 바로 이 두 가지 믿음의 기초 위에 서야 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자녀)를 독특하고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자녀)를 향한 고유한 뜻과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왜 부모가 이런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한가?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통찰력을 제공하기 원한다(10-11). 첫째는, 자녀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의 중요성이고, 둘째는, 당신의 자녀가 인생의 경주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의 자유이고, 셋째는, 당신의 자녀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양육하려는 용기이다. 바로 위에서 말한 두 가지 믿음의 기초 위에 서 있을 때, 우리는 이 세 가지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믿어준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믿는 것이요, 자녀가 따라야 할 하나님의 고유한 뜻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믿음이 자녀 양육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다. 부모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바로 자녀를 신뢰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돕는 데 있다. 

"사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은 마음의 깊은 상처 때무이다. 그러므로 아이들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고통이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가치관을 갖고 있지 못하다"(20).

이 책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로 키우는 9가지 양육법"을 전수해주고 있다. 그 첫째 노하우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도록 양육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바로 ’회심’을 경험하도록 돕는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무엇보다도 슬픈 사실은 많은 아이들이 그들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한다"(21).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없는 아이들은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며 왜곡된 가치관과 잘못된 현실 감각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삶과 전혀 다른 사람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린다. 많은 부모가 이 때문에 좌절하고, 안절부절 못하고, 낙심하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의지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많은 신앙의 부모들이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적인 믿음이 부족한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하나님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자녀를 부모가 먼저 포기하고, 실망하고, 낙오자라 실패자라 낙인 찍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사실 자녀 양육의 성패는 이 첫째 사명에서 판가름난다고 생각한다. 자녀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게 되면, 나머지 8가지 양육법은 거드는 역할, 보조적인 역할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잘되는 자녀>는 실제적 양육의 사례가 풍부하여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다. 또한 성경의 자녀 양육 사례와 성경적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성경적 양육법을 성찰해볼 수 있다. 

민수기에 보면, 가나안 땅을 앞에 둔 신앙 1세대들이 정복 전쟁을 두려워한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 중에 하나는 그 전쟁으로 자녀가 죽게 될까 하는 염려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결국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이 죽게 될까 염려했던 자녀 세대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 가끔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님들과 상담을 하면, 하나님보다 부모인 내가 더 자녀를 사랑하고, 염려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분들이 많다.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들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나보다 더 내 자녀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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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차일드
김현영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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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디스토피아 : 


가장 부정적인 암흑세계의 픽션을 그려냄으로써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문학작품 및 사상을 가리킨다. 디스토피아는 현대사회 속에 있는 위험한 경향을 미래사회로 확대 투영함으로써 현대인이 무의식중에 받아들이고 있는 위험을 명확히 지적하는 점에서 매우 유효한 방법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 두산백과)




현대사회 속에 숨어 있는 위험한 경향을 경고하다!


소설 읽기에서도 세대 차이를 느끼게 만드는 작품이다. 문장이 난해한 것인지, 내가 시대에 뒤쳐진 것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시처럼 읽어야 하는 것인가. 툭, 툭, 내뱉듯 끊어지는 문장이 독자의 엄청난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은유인 듯 아닌 듯 전개되는 이야기를 따라 읽으며 나는 자주 길을 잃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라는 탄식과 함께 말이다. 집필 방식이 문제가 아니라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문제라는 자격지심은, 쉼표(,)로 끊어지며 툭툭 던져지는 이 심상치 않은 방식의 작품 속에 시대를 통찰하는 날카로운 비판이 들어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리라. 분명 심오하다.

<러브 차일드>는 "미안하다, 사랑한다. 거짓말과 함께 죽은 채로 세상에 토해진" 사생아, 세상이 붙여준 이름은 ’의표폐기물’인, 인간이지만 인간이라 할 수 없는 ’러브 차일드’가 본 것들의 기록이다. 시대는 분명 미래이고, 주인공의 구체적인 이름은 ’수’와 ’진’이다. 긴 세월을 지나 재활용 심사에서 탈락된 ’폐기물’이 되어 다시 만났다. 이야기는 그들이 태어나는 순간으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현재의 폐기장으로 돌아온다(6, 5, 4, 3, 2, 1, 7). 독자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수와 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복원해간다. 친구였던 그들, 수는 거죽만 남은 늙은이가 되었는데 왜 진은 아직 한쪽 팔을 잃은 아이의 모습인지, 그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말이다. 

<러브 차일드>를 읽으며 이해하기 가장 어려웠던 지점은, 이 책의 화자인 러브 차일드의 ’인생"(?)과 실제 세상과의 경계를 어떻게 구분지어야 하는가였다. 진짜 인간 사회라고 느껴지는 부분과 ’쓰레기’로 존재하는 ’러브 차일드’의 간격을 어떻게 메워야 하는가. 다시 말해, 수와 진이 거쳐온 긴 세월의 시간들을 읽으며, 3차원의 공간에 대입시켜 해석해내기에는 상상력의 한계를 느낀다.

"딸이 어미를 수거했다. 딸이 아비를 심사했다. 아들이 어미를 분류했다. 아들이 아비를 적재했다. 
그리하여 자식이, 부모를, 폐기했다.
어미의 뱃속에서 이미 난도질되었던 우리는, 그것을, 보았다"(129).


’인간 쓰레기’로 처리되는 그들이 본 것의 기록은, 끔찍한 세상이다. ’인간 쓰레기’로 버려지는 그들이 본 세상은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들의 비참함 그것일 따름이었다. <러브 차일드>가 보여주는 미래는 읽어나가기 불쾌할 정도로 끔찍한 현실이 투영되어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발전된 기술에 의해 사생아가 세상에 뱉어지듯, 오직 경제성과 늙은이다움만이 존재하는, 생산성과 효율성이라는 기준으로 인간을 폐기물로 구분하는, 인간성이 거세된 인간의 사회가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거세시켰는가.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러브 차일드>는 이 사회를 규정하고, 이 사회를 작동시키고 있는 여러 가지 제도에 숨어 있는 비인간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듯 하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따르고 있는 ’사회적 제도’ 안에 얼마나 끔찍한 미래가 숨어 있는지 극단적이고 파격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과 함께 특별히 <러브 차일드>가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사회 제도는 '노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60세 정년'의 사회적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새롭게, 그리고 끔찍하게 조명해볼 수 있다. 쓰레기가 아니라 폐기물로 처리되는 그 잔인한 의미를. <러브 차일드>는 초고령사회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는 우리 사회, 사회적 안전 장치를 위해 지배층이 고안해내는 법적인 제도, 좀 더 잘 살기 위한 오늘 우리의 분투가, 맞이할, 내일의 실상을 통해 오늘 여기에서 자행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다.


<러브 차일드>를 읽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인데, "
가공의 이상향, 즉 현실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묘사하는 유토피아와는 반대로, 가장 부정적인 암흑세계의 픽션을 그려냄으로써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문학작품을 ’디스토피아’라고 한단다. ’디스토피아’는 현대 사회 속에 있는 위험한 경향을 미래사회로 확대 투영함으로써 현대인이 무의식중에 받아들이고 있는 위험을 명확히 지적하는 방식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러브 차일드>가 바로 그러하며, 이것이 <러브 차일드>에 담긴 뜻을 읽어낼 수 있는 열쇠이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러브 차일드>를 다시 한번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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