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발견하는 여행 -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 있다
케빈 리먼 지음, 오현미 옮김 / 비전과리더십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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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기억이 나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그 사람을 움직이고 있는 게 무엇인지 들여다 볼 수 있는 마스터 키이다. 자기 자신을 알려고 오랜 세월 애써도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보지 않으면 결코 자신을 알 수 없다"(9).

<나를 발견하는 여행>은 어린 시절로 떠나는 여행이다. 저자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보지 않으면 결코 스스로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린 시절로의 여행이 불편하다. 어쩐 일인지 내 머릿속의 카메라는 어린 시절을 기억하려 할 때마다 가장 좋지 않은 기억부터 재생시켜주기 때문이다. 행복했던 기억도 많은데 왜 나는 좋지 않은 기억부터 떠올까. 심리학을 공부하고, 관련 도서를 읽으면서 강박적인 습관이 생겨난 듯 하다. 좋지 않은 기억을 끄집어내어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말이다.

그러나 <나를 발견하는 여행>은 꼭 상처로 남아 있는 기억을 헤집어 내라고 몰아부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감정’과 연결되어 있고, 그 감정은 감동적일 것일 수도 있고, 경이감일 수도 있고, 아무 무서웠던 것일 수도 있고, 극도로 행복했거나 극도로 슬펐던 것일 수도 있다. 저자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신이 지금의 그 기억을 갖고 있는 이유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 주는 스냅 사진인 것이다"(67).

<나를 발견하는 여행>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니, 잊고 있던 몇 가지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신기하게도 그것은 "어린이 된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열쇠가 된다"는 저자의 설명과 연결된다. 한 가지 기억은 초등학교 등교길에 있었던 일이다. 이른 아침 학교 운동장을 걸어가는데 앞에 목발을 짚은 남학생과 그의 가방을 들고 걸어가는 누나가 보였다. 그런데 몇몇 친구들이 목발을 짚은 아이들을 놀렸다. 그 아이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고, 누나는 무시하라며 달래고 있었다. 이상하게 나는 그때 마음 깊은 곳에서 슬픔이 차올랐고 마치 내가 그 누나가 된 듯이 화가 났었다. 지금 생각해도 대신 싸워주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그리고 나는 이와 비슷한 몇 가지 기억을 더 가지고 있다.

이러한 나의 기억은 "출생 순서에 따라 성격이 결정된다"(4장)는 설명하고도 연결된다. 가운데 아이들은 매개하고 협상하며 절충하는 사람으로서의 자기 모습이 담긴 기억을 많이 갖게 된다고 한다(93). 또한 누군가와 비교당했던 기억, 부당하다고 여겨졌던 상황에 대한 기억을 갖게 된다고 하는데, 2남 2녀 중 둘째인 내가 그렇다. 그래서인지 나는 다른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부당한 일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어릴 때부터 누군가를 돕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꿈을 꾸어왔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 꿈을 반영하고 있다.

"가운데 끼인 아이는 “나는 갈등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여 모든 이들이 행복해할 때에야 비로소 존재 가치를 느낀다.”는 라이프스타일을 갖는다"(121).

<나를 발견하는 여행>은 어린 시절의 기억과 출생 순서로 결정되는 성격 등이 현재의 라이프스타일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나를 발견하는 여행>이 어린 시절의 기억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 "(취미나 적성 등의) 관심사", "사람들과 어울려 일할 때 더 편안한가 아니면 혼자 하는 일이 더 편안한가 하는 문제", "감정 처리 방식" 등의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17).

어린 시절의 기억은 이미 지나간 것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다루느냐에 따라 현재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이미 일어난 일이고, 지나간 과거이지만,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나의 선택에 의해 그것이 미치는 영향력을 바꿀 수 있고,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나를 발견하는 여행>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다. 기억에 지배되지 않고, 내가 기억의 주인이 되는 여행이다. 심리학 관련 도서를 읽을 때마다 경험하는 것이지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내가 나를 이해하는 그 순간이 바로 내면적 치유의 시작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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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저를 살렸습니다
최준영 지음 / 자연과인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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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인문학 교육,
노숙인과 인문학이 사회변화의 동인이 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쌀이나 라면 상자가 아니라 ’인문학’을 들고 찾아간 이가 있다. 저자 최준영 교수는 6년 전부터 성프란시스대학과 관악인문대학, 경희대학교 문과대 ’실천인문학센터’ 등을 통해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강의’에 참여하고 있다. 그 6년의 발자취를 엮어낸 것이 바로 이 책, <책이 저를 살렸습니다>이다. 여기 절망에서 희망을 발견한 사람들이 있다. <책이 저를 살렸습니다>는 절망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스스로의 존엄을 발견하고 삶을 성찰할 수 있는 힘, 그것은 바로 인문학의 힘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인문학 교육’, 그것은 바로 절망을 치유하는 사랑이었다.

사회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교차한다. 개인이든, 사회이든, 신이든, 누군가를 비난하며 가난을 ’탓’하는 사람들이 있고, 안 된 마음으로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탓하는 사람이든 동정하는 사람이든 직접 그 짐을 나누어지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무관심이나 인색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희망의 손을 내밀어야 할지 그 방법과 내용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책이 저를 살렸습니다>의 저자 최준영 교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오해와 편견이 불식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제공되는 단순 지원과 인색한 관심으로는 절망의 나락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할 수 없다고 단언하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의 핵심을 파고 든 게 바로 인문학이었다고 대답한다. "절망은 결코 물질의 문제가 아니며, 가난은 또한 개인의 운세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며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배태된 구조적 문제라는 걸 인문학 강좌가 비로소 환기시켰기 때문이다"(31).


’당신은 척박한 이 땅에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기 위해 얼마만큼의 힘을 보태왔습니까?’(258)

인문학, 그동안 ’밥’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찬밥 신세로 전락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배부른 사람들의 배부른 취미 정도로 치부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경제적 위기가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왜 위기에 ’인문학’을 말하는가? 그것은 풍요 속의 가난, 쾌락 속의 절망이 공존하는 혼돈의 세상이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배부를 때는 잊어버렸던 질문, 바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다시 묻고 있는 것이다. <책이 저를 살렸습니다>는 가난한 자, 가진 자 모두에게 대답을 해주고 있다. 노숙자와 인문학과의 만남이 가르쳐준 소중한 삶의 교훈은 우리 모두 존엄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고, ’나눔’이라는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기적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은 척박한 이 땅에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기 위해 얼마만큼의 힘을 보태왔습니까?"라는 질문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이것이 인문학의 힘이요, 책의 힘이리라. 나의 인생도 <책이 저를 살렸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삶이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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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 사이 - 최창수 소설집
최창수 지음 / 작가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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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에 금이 있습니다. 
그 금을 지우고 싶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지 말라며 책상 위에 금을 그렸던 기억이 난다. 그 경계선은 우리를 긴장시켰다. 우리는 서로 자신의 영역 안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보초를 섰고, 잘못하여 짝의 책상을 넘어갔다 들키면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우리는 왜 그렇게 금을 그어놓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싶어 했을까.

그런데 이러한 긴장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짝꿍’ 사이에만 존재했다. 좋을 때는 한 없이 가까운 사이였다가, 조금이라도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으면 냉큼 금부터 그었다. 그 금은 단절의 선언이었고, 그렇게 단절을 선언하게 되면 우리는 반 안에서 가장 먼 사이가 되었다. 부부가 서로 등을 맞대고 돌아누우면, 지구를 한 바퀴 돌아야 다시 마주볼 수 있다는 누군가의 묘사처럼 말이다.

<그와 그 사이>는 최창수라는 젊은 작가(1981년생)의 총 10편의 단편을 모은 소설집이다. <그와 그 사이>라는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그의 소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를 말하는 듯 하다.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경계선들,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는 금, 우리는 그것을 ’소외’라고 부른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이름이 없다. 사내, ’황’, ’정’, ’한’, 706호, 707호, 그 아니면 그녀이다. 이름이 있어도 불리는 일이 거의 없다. 흔한 일상, 그러나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지극히 극단적이다. 불안과 거짓, 자해와 폭력, 살인과 자살. 사실주의의 덤덤한 스케치처럼, 비극적인 광경이 덤덤하게 그려진다. 작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선을 찾아내어 더욱 선명하게 덧칠을 한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이웃이라는 관계로 엮여 사는 것이 인생이지만, 그 엮임 자체가 또다른 소외와 불안을 양산하는 데에 공존의 비극이 있고, 인생의 비극이 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지워지고, 잊혀지고, 폐기되어간다. 친구들과 모여 웃고 떠들면서도 마음이 못견디게 시려올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수많은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나 홀로 뚝 떨어져 있는 기분이 들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와 그 사이>에는 탈출구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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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눕 - 상대를 꿰뚫어보는 힘
샘 고슬링 지음, 김선아 옮김, 황상민 감수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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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눕(snoop) : 직감을 넘어 과학적으로 상대를 읽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그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 우리를 당황하게 할 때가 많다. 또 이와는 반대로 "내 속을 뒤집어 보여주고 싶다"는 말도 흔하게 한다. 속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지만 생각만큼 표현되지 않을 때, 우리는 답답함을 느낀다.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 다 보여줄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 오해와 속임수와 소통의 단절을 불러온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사람을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스눕>은 단서를 통해서 그 사람을 꿰뚫어보는, 일종의 추리 법칙을 가르쳐주는 책이다. 다시 말해, 스눕은 단순한 통밥이 아니라, 직관을 넘어 단서를 바탕으로 유추하는 (심리학적) 추론 능력이다. 저자는 '스눕'(snoop)을 "직감을 넘어 과학적으로 상대를 읽다"라고 정의한다. 책을 읽다 보면,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은 곧 주의력과 논리력으로 통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심리학 교수인 저자 샘 고슬링은 인간이 어떻게 숨겨진 자신의 내면을 외부로 투영 또는 감추려 하는지에 관해 10년 동안 연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소지품이나 침실과 사무실과 같이 그 사람이 생활하는 장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에 대해 얼마나 많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는지를 검증해냈다. 한마디로 스눕은 사소한 물건들 속에서 '의미 있는 단서'를 찾아내어, 그것을 해석하는 과정이요, 작업이다. 마치 명탐정의 추리에 감탄하듯, 의미 있는 단서를 찾아내어 그것을 해석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배우다 보면 절로 감탄사가 튀어 나올 것이다. 명탐정 셜록 홈즈도 다름 아닌 스누퍼였던 것이다. <스눕>은 상대를 꿰뚫어보는 노하우를 아낌없이 공개한다. 우리도 이제 스누퍼로 거듭나 보자! 

 

<스눕>이 집중하는 것은 사소하고 일상적인 단서이다. 그 사람이 생활하는 장소나 소지품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성격이나 심리상태를 파악해낼 수가 있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외부로 투영하기도 하고, 반대로 감추려 하기도 한다. <스눕>은 우리의 소지품이나 생활공간, 그리고 사소한 버릇 등에 그러한 심리가 반영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읽고 해석해내는 능력이 바로 '스눕'이다. 일상적인 단서들을 잘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이 개방적인지, 성실한지, 외형적인지 내향적인지, 동조적인지, 신경성이 높은 사람인지, 고지식한지 융통성이 있는지 알아낼 수 있다. 

 

"우리는 방을 검토해나가면서 방주인들의 심리학적 족적을 인지하고 성격이 표현된 각기 다른 방식들을 어렴풋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크게 3가지 분류, 즉 '자기정체성 주장', '감정 조절', '행동양식'의 흔적이 주로 사람들이 주변 환경을 다루는 매커니즘인 듯했다"(32). 

 

가구 배치나 수집품, 책장, 사진이나 포스터 등에 자기정체성을 주장하는 상징, 감정을 조절하고자 하는 장치, 행동양식을 반증하는 흔적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아확인, 감정 조절 장치, 행동양식의 잔여물이라는 3가지 매커니즘이 개인적인 공간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 3가지 매커니즘에 따라 개인적인 공간에 스스로 대한 단서들을 남긴다는 것이다. 스누퍼는 이러한 소지품이나 생활공간을 보며 질문을 던져보면 된다. 그의 공간이나 소지품에 분명 증거가 있다. 예를 들면, 책장을 볼 때는 책을 정리하는 방식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종류의 책을 가지고 있는지 묻는 것이다. 일반적인 정리방식대로라면 상대는 책임감 있고 안정된 사람일 것이지만, 도서관에서나 사용하는 분류법을 적용시켰다면 상대는 신경증 환자일지 모른다. 또한 하나의 분야에 관련된 책 100권 보다 다양한 주제의 책 10권이 꽂혀 있는 책장의 주인이 보다 융통성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스눕>은 사람이 어떻게 공간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보고서이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다양한 방법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외부에 알리고 있는가. 소통을 원하는 수많은 신호가 주변에 널려 있는데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스눕>에서 설명하는 추론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들이다. 다만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보고 싶은 대로 보면서 마음대로 판단해버리는 것이다. <스눕>은 일상적인 생활공간이나 사소한 소지품을 등을 통해 우리가 서로에게 의식적으로든, 또는 무의식적으로든 공개적으로 내보고 있는 내면의 신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싶다. 다만, <스눕>이 가르쳐주는 추론은 그 사람을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또는 몇 가지의 단서로 그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선입견이라는 오류에 빠질 위험성을 내포한다고 본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역동적이고 복합적이여서 하나의 틀 안에 가둬둘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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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연
필립 그랭베르 지음, 홍은주 옮김 / 다른세상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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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우정)을 가장한 악연의 덫, 아름다울수록, 간절할수록 더 치명적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똑같은 중량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어쩌면 이런 바람을 갖고 있는 것부터가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는 소리지.

그러나 우리가 사랑을 할 때, 사랑을 하면서도, 상처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얼마 전, 요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그룹 ’2PM’의 일부 팬들이 안티로 돌아서면서, "팬이 안티가 되면 더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선언한 적이 있다. 그들은 왜 한때 격하게 아꼈던 대상에게 분노를 쏟아놓고, 과격한 공격도 서슴지 않는가. 통속적이지만, 사랑이 큰 만큼 배신감도 컸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배신이라고 하는가? 내 사랑에 대한 거절? 시간이 흐를수록 가벼워지는 사랑의 중량? 

중학교 시절, 자꾸만 나의 우정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친구가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과 짝이 되면 조용히 그 짝을 협박해(!) 자리를 바꾸었고, 무엇을 하든 함께 하려 하고, 어디를 가든 함께 가려 했다. 그 친구가 가장 견디기 힘들어 했던 것은 내가 다른 친구들과도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날, 청소시간이었다. 그 친구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물었다. "너, 정말 나를 좋아해?" "응, 좋아해!" 그러자 친구는 마룻바닥에 칠하는 왁스를 내밀며 내게 말했다. "정말 좋아하면 이 왁스를 먹어봐!" 그 이후로 그 친구를 피했던 것 같다. 그 아이가 무서웠다. 나의 마음을 눈치 챈 친구도 생각보다 쉽게 돌아섰다. 길에서 마주쳐도 눈인사조차 하지 않는 차가운 사이가 되었다. 모르는 사람보다도 못한 그런 사이가, 차라리 좋아하지 않았던 것만도 못한 그런 사이가. 

<악연>에서 내가 읽은 것은 서로 중량이 다른 사랑(우정)이었다. 한 사람의 사랑이 시들해질수록, 상대의 사랑은 집착으로 변질되는 사랑. 루는 어린 시절 공원에서 처음 만난 만도와 단짝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무엇이든 ’함께’하며, 죽어서도(!) 변치 않을 우정을 약속했다. 

"같이 놀고, 같은 책을 읽고, 첫 경험도 같이 치르면서 숱한 것을 나눴던 우리였지만 나날이 독재처럼 변모하는 우정에서 나는 벗어나고 싶었다. (...) 닌느에게도 가비에게도 유일한 존재였고, 그녀들 가슴속의 내 자리를 유지하고자 나름으로 분투했던 내가 이제 만도에게 유일한 존재란 사실은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이다"(119).

루는 점점 만도의 우정을 버거워한다. 만도는 여자 친구가 루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여자 친구와 헤어진다. 루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루가 자유롭기를 원할수록, 만도는 더욱 견고히 결속되기를 원한다. 결국, 그들의 우정은 루와 만도 모두에게 재앙이 되고 만다.

<악연>의 작가 필립 그랭베르는 소설가이자 정신분석가라고 한다. "인간의 내밀한 심리를 끄집어내는 데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특히 병적인 심리를 그려내는 데 탁월한 듯 하다. 작가는 책에 등장하는 정신분석학 교수의 입을 빌어 "정신질환자는 정신병에 ’걸리는’ 게 아니라 ’애초부터’ 정신질환자이다"(151)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증상은 ’악연’이라고 부르는 것의 결과로 나타날 때가 많다고 한다. 예를 들면, 실연이나 절교가 계기가 되어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교수는 악연을 이렇게 정의한다. 

"등 없는 작은 의자가 전부 다리 네 개로 서 있는 건 아니다. 그중엔 다리 세 개로 버티는 것들도 있다. 거기서 다리 하나가 더 없어지면 치명타가 된다"(152).

이 강의를 듣고, 루는 생각한다. "우리가 둘도 없는 친구였던 시간 동안 나는 만도에게 무엇이었나?" 그는 자신이 만도의 광기를 가로막고 있었던 그 무엇이라고 느낀다. 결국, 루와의 절교로 "만도의 고집, 찌꺼기 하나 없이 깨끗한 우정을 간직하려는 강박 관념이 비로소 전모를 드러낸다"(152-153). 바로 악연의 작동으로 말이다.

작가는 만도의 집착에 가까운 사랑이 ’애초부터’ 만도 안에 잠재되어 있던 광기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악연'은 계기이지, 원인이 아니다. 건강한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애초부터' 병들어 있던 마음 때문이지, 악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작가가 <악연>을 통해 그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단서는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둘을 갈라놓은 건 다른 것, 처음부터 도사리고 있던 어떤 것이었지만 그때는 누구도 그걸 짐작할 수 없었다"(11). 

<악연>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중심은 만도의 일기장에서 깨끗이 지워진 ’한 사건’이다. 그 사건이 진실을 드러냈을 때, 만도가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알게 되었을 때, 아름다운 우정 뒤에 숨어 있는 검은 광기가 우리를 오싹하게 만든다. 

"내가 그 애의 악연이었나, 그 애가 나의 악연이었나?"(205)

악연은 사랑을 걷어내고, 사랑에 달라붙어 있던 어두운 그림자를 불러온다. ’악연’은 사랑했던 사람 모두를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로 만드는 것 같다. 치명타를 입고 상처받은 쪽도 그렇지만, 치명타를 입힌 쪽도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악연’이지 않을까.

<악연>은 기대했던 것만큼 스토리가 재미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면, 장면의 강렬함이 독특한, 상당히 인상적인 작품이다. 두 번쯤 읽으니 책이 무엇을 말하는지 조금 보이는 듯하다. 대수롭지 않던 것들의 실체를 마주했을 때, 사랑(우정)이라 믿었던 인연이 재앙으로 변하는 순간, <악연>이라는 제목이 오싹하게 다가올 것이다. 사랑(우정)을 가장한 악연의 덫, 아름다울수록, 간절할수록 더 치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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