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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셰스쿠 - 악마의 손에 키스를
에드워드 베르 지음, 유경찬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4월
평점 :
우리는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1998년이었던가. 우리나라에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었을 때, 내가 살던 지역에서는 구의원 출마자가 없었다. 투표에 관심이 없었던 나는 뒤늦게 단일 후보로 나온 분이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나중에 그분의 이력을 듣고 경악했었다. 초등학교 졸업에 무직이있고, 딱히 할 일이 없어 출마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분을 보며 정치라는 것이 참 재밌으면서도 무서운 것이구나 하는 것을 처음 느꼈던 것 같다. 그 구의원의 사업장에서 근무했던 분과 친분과 생겨 전해들은 이야기가 있다. 구의원이라는 직함을 보고 사람들이 몰여들기 시작하더니, 구의원이라는 직함으로 대출을 받아 사업장을 열고, 사무실도 차렸다는 것이다. 명절 때면 사무실에 선물도 꽤 쌓인다고 했다. 가까운 재래시장의 상인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지지 세력도 생겼다고 했다. 가장 하부 조직이라 할 수 있는 ’구의원’이라는 직함에도 정치권력이 작동하는 것을 보고 왜 다들 정치에 목을 매는지 알 것 같았다.
"왜 우리는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차우셰스쿠와 엘레나가 휘둘렀던 철권 정치를 알지 못했을까?"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아니 내가 살아온 동시에 지구의 한 귀퉁이에서 무지막지한 정치적 촌극과 잔인한 독재가 벌어졌었는데, 나는 왜 그것을 몰랐을까. <차우셰스쿠, 악마의 손에 키스를>은 공산주의자의 탈을 쓴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일대기를 통해 그가 어떻게 장기간의 독재체제와 절대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차우셰스쿠, 그와 루마니아 역사를 몰랐던 것이 나뿐이 아니었나 보다.
공산주의 체제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북한과 대치 중이고, 독재 권력의 탄압정치를 경험한 바 있는 우리에게, 루마니아의 역사는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차우셰스쿠>가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이 맞다면, 정말 끔찍하다.
터무니 없고 어처구니 없는 촌극이 따로 없다. 철학도 없고, 정치적 신념도 없고, 성찰이라는 것도 모르고, 지도력도 없는 지도자. 공식적인 교육은 초등학교에서 끝이 나고, 원래 책을 가까이 하는 공산당원도 아니여서 공산주의 이론에 대한 이해도 형편 없던 상태에서 오직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원리를 줄줄 외우는 것이 전부였단다. 게다가, 무지와 경망스러운 행동은 물론, 현실에 대한 감각이 마비된 채 상상의 세계로 빠져 들 정도로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혔던 정치가 차우셰스쿠. 이런 사람이 어떻게 공산당 서기장을 거쳐, 4선 대통령이 될 정도로 장기집권을 할 수 있었을까. 적개심 가득 찬 군중들의 야유 속에 아내 엘레나와 함께 서둘러 진행된 재판에서 즉결처분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결말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이 오래도록 지도자로 군림했었다는 사실에 어떤 절망과 뒤늦은 분노를 느낀다.
독재가 차우셰스쿠가 연마한 것이라고는 오직 정치적 권모와 술수였다. "공산당 내의 권력투쟁을 보면서 차우셰스쿠는 정치적인 술수를 연마했고,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한 마키아벨리적 수법에도 능하게 되었다"(187). 변절과 충성심의 경계에 선 천박한 정치권력이 조직 폭력배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이런 터무니 없는 독재가 가능했던 이면에는 복합적인 기제가 서로 맞물려 있다. 루마니아 공산당 안의 혼합적 요인이라는 특별한 정치 상황과 라이벌 그룹의 형성, 음모, 원색적 민족주의의 작동, 그리고 여기에 체포, 희생양, 비밀경찰, 뒷조사, 숙청, 추방, 우상화, 탄압, 고문과 협박, 특별 감시, 국유화, 통제경제, 집단농장 등과 같은 전형적인 독재권력의 공포정치가 더해졌다. 또하나 안타까운 사실은 전쟁 기간 중 처음에는 독일에게, 다음에는 소련군에게 철저히 약탈당했던 루마니아의 국가적 트라우마가 루마니아 국민을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심지어 소련 내부에서조차 차우셰스쿠 시대의 루마니아처럼 강압체제가 횡행했던 곳은 없다. 루마니아 비밀경찰은 루마니아의 모든 것을 지배했다"(318).
비밀경찰의 위협과 협박에 순종적인 자세를 보인 루마니아에는 무명의 반체제 투사들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루마니아 사람들의 특이한 기질에 넘쳐나는 정보원, 상호 불신의 분위기, 차우셰스쿠 정권의 독특한 면까지 곁들여지자 저항 기미의 싹은 뿌리 내리지 못했다. 사회적 불만 억제에 모든 역량이 동원됐고, 자식인들의 활동에 관한 한 최소한의 노력으로도 그런 성과는 쉽사리 거둘 수 있었다. 루마니아의 지식인들과 민초들 사이의 역사적으로 오래된 상호 불신은 비밀경찰의 역할을 수월하게 만들었다"(278).
이러한 정치 분위기일 때, 반드시 나타나는 무리가 있다. 바로 권력에 편승하여 자기의 이를 챙기는 천박한 기회주의자이다. 국가의 주요 직책에는 말 잘 듣는 사람, 체제에 충성심을 보이는 사람들로 채워지고, 권력에 아부하는 사람들은 고속 승진의 대가를 누린다.
여기에 언론까지 합세를 하면 그야말로 환상의 조합이다. 차우셰스쿠 역시 그러한 기민함을 보였는데, 그는 특별히 자기의 위상에 도움이 되는 닉슨이나 브란트 수상 같은 사람들만 환대하고, 외국 저명인사들에 대한 융숭한 대접으로 해외에서 그의 지명도를 높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은 반드시 유명한 언론인들을 대동하게 마련이었고, 언론인들 또한 당시 루마니아 상황에 대해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232). 서방 세계도 루마니아의 정치 상황과 차우셰스쿠라는 독재자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차우셰스쿠와 그의 아내는 즉결처분되었다. 그러나 암울했던 독재의 역사는 청산되지 않았다. "그의 수하였던 수많은 공산당 비밀 정보원들은 여전히 권력의 상층부에 포진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에드워드 베르가 루마니아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혁명’이라는 단어에 의문을 표시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루마니아 혁명이 미완의 혁명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지도자는 가고, 국민들은 남았다. 영도자는 사라졌지만 그 체제나 기구, 또 통치 방식에 대항해서 투쟁했던 사람들이 없애려고 노력했던 수많은 잔재들은 놀랍게도 아무 탈 없이 잘 가동되고 있다"(11). "권력자가 바뀌면 어리석은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이 책의 마지막 장 제목을 계속 곱씹어본다.
<차우셰스쿠>를 읽으며 생각해본다. 역시 약자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연합과 연대라는 것을 말이다. 부패한 절대 권력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 그것은 약자들의 ’연대’가 아닐까. 지식인들의 사회적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는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 냉소적 태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도 보았다. 그리고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철지난 문화처럼 촌스럽기 그지 없는 교훈이 가슴에 새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