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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네 방향 ㅣ Dear 그림책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글.그림, 이지원 옮김 / 사계절 / 2010년 3월
평점 :
네 방향의 시간의 창을 통해 바라보는 인생극장!
초등학생이 보는 그림책이라는데 심오하기 그지 없습니다. 초등학생들이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수준이 높아 보입니다. 빨리 크고 싶은데 시간이 더디게만 흘러간다고 느끼는 어린이에게는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가만히 있는데 시간이 저 혼자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저에게는 시간의 잔혹함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었습니다. 시청 광장의 시계탑 속에 자리잡은 ’시간’이 600년 동안 그 땅에서 나고 자라고 죽어간 인생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 무서웠어요. 끊임없이 피고 자라고 시드는 꽃처럼, 흘러가는 시간 속에 그렇게 피었다가 지고, 피었다가 지고, 피었다가 지는 인생들처럼, 언젠가는 나도 이 인생의 연극 무대에서 사라지고 잊혀지겠지요.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어쩐지 오싹해집니다.

"유렵의 한쪽, 어느 오래된 도시 한가운데
사방으로 시각을 알려 주는 시계탑이 서 있어요.
여섯 시, 아홉 시, 한 시, 다섯 시, 여덟 시, 열두 시,
시계가 알려 주는 똑같은 시각에
동, 서, 남, 북, 서로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무슨 걱정을 하고 어떤 일에 즐거워할까요?
백 년 전, 이백 년 전, 삼백 년 전, 사백 년 전,
서로 다른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저마다 무슨 일을 하고 어떤 꿈을 꾸었을까요?
커다란 금빛 시계를 따라 시간여행을 떠나요." (뒷 표지)
시내 한가운데 네모반듯한 광장에는 시계판 네 개가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는 네모난 시계탑이 있습니다. 광장의 동서남북으로 서 잇는 집들마다 시계를 바라보는 창문이 있어요. 첫 번째 창문은 동쪽 집에 나 있는데, 그 창문이 있는 방은 부엌입니다. 두 번째 창문은 남쪽 집에 나 있는데, 그 창문이 있는 방은 누군가의 작업실입니다. 세 번째 창문은 서쪽 집에 나 있는데, 아이들 방이 들여다 보여요. 네 번째 창문은 북쪽 집에 나 있는데, 그 창문 안쪽에는 항상 거실이 있었어요(14).
몇백 년 동안, 날마다 광장에서는 인생극장이 펄쳐져 왔어요. 이 책은 광장의 시계가 정각을 알릴 때, 시계판이 보이는 네 집에서 각각 어떤 드라마가 펼쳐지는지 보여주는 책이에요. 100년에 한 번씩, 다른 시대, 다른 계절에 각각 그 네 개의 창문을 통해 어떤 인생극장이 펄쳐지고 있는지 구경해보아요(15).
그런데 왜 이 책은 왜 네 개의 창문, 즉 네 개의 방향으로 인생을 관찰할까요? 네 개의 창문은 세상의 네 방향을 상징하는 것 같아요. 나름대로 해석을 해보자면, 종교적인 축제와 관련해서 어떤 음식을 먹고 사는지를 보여주는 동쪽의 부엌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생존을, 무엇인가를 만들거나 일을 하고 있는 남쪽의 작업실은 발명과 관련된 문화를, 가족들의 관계와 아이들의 꿈을 보여주는 서쪽의 아이들의 방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세대와 인간의 삶(꿈, 사랑, 걱정, 슬픔 등)을, 북쪽의 거실은 인간의 삶을 보여주는 아이들 방과 비슷한데, 이곳에서는 이웃관의 관계와 한치 앞을 모르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600년의 시간을 가로질러 펼쳐진 인생극장이 한 눈에 보고나니, ’이런 것이 인생이구나’ 하고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시간의 네 방향>은 시간에 따라 변하는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같은 꿈을 꾸고, 같은 걱정을 하고, 같은 일에 즐거워하는 인간의 모습도 보여줍니다. 세월 따라 세상이 아무리 발전하고 변한다 해도 근본적인 인간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지금 우리 우리 인생도 "몇 세기 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된, 그리고 앞으로도 끊이지 않고 이어질 연극 속으로"(79) 들어와 있는 겁니다.
<시간의 네 방향>은 갓 태어난 아기가 시간이 지나면 증조할아버지 되고, 다시 백 년이 지나면 누군가의 기억 속에만 남게 되고, 또 백 년이 지나면 그들을 기억하던 아이들도 기억 속에 남게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덤덤하게 알려주네요. 슬프지만 나도 이제 그러한 사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앞으로 이 도시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지만, 한 번 태어나고 한 번 살다가는 인생, 서로 사랑하며 착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너무 욕심부리지 않고요. 사랑만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