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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어트 걸
페터 회 지음, 박산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소리로 읽어야 하는 소설!
"그녀는 B단조였다.
바흐는 위대한 미사곡을 작곡할 때 B단조를 선택했다. 베토벤도 그랬다. 장엄 미사곡 마지막 부분에. 베토벤은 매번 괴테를 만날 때마다 그에게서 B단조와 평행음인 D장조를 듣고 어딘가에서 그 곡을 썼다. B단조는 심오하다. 극적이고, 내성적이고, 영적이다. B단조는 거의 검게 보일 정도의 푸른색이다. 그 앞에 있는 여자는 검푸른 색이었다. 그녀의 옷뿐 아니라 존재 자체가 그랬다. 깊은 물과 같은 색. 카스퍼는 그녀와 초면이었다."(197)
어떤 심리학 책에서 감정에도 색깔이 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엄마들은 아기의 숨소리만 듣고도 아기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책의 주인공은 ’소리’를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발산되는 소리(음조)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이나 기분 등을 파악하는 신비로운 능력의 소유자이다. 바흐의 광팬이기도 한 카스퍼를 따라다니다 보면, 음악이 문자가 되고 문자가 음악이 된다. 마치 바흐의 음악처럼, 음악과 문자라는 두 개의 멜로디가 동시에 결합하는 대위법적 서술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설명하기 어렵지만 음악적인 느낌이 독특하다. 바흐의 음악을 알았다면 저자의 의도 속에 더 깊이 다다랐을 텐데 아쉽다.
나는 이 책을 ’소리로 읽어야 하는 소설’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제대로 읽어낸 것이 맞다면 ’문자적’이 아니라, ’감각적’인 소설이다. 강렬한 느낌! 그런데 책을 몇 장 읽다 말고 작가에 대해 알아보았다. 도무지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심상치 않은 문장을 구사해내는 작가는 누구일까?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는 꽤 알려진 작가인 듯한데, 나에게는 이름도, 그의 독특한 글의 색채도 낯설었다. 한마디로 내겐 공부가 필요한 소설이다!
일단 작가의 명성이 대단하다. 안데르센 이후 최고의 덴마크 작가로 칭송받는다고 한다. 그의 경력이 독특하다. 작가가 되기 전, 무용가, 배우, 펜싱 선수, 선원, 등반가 등으로 살았다고 한다. "인간의 내면과 본질, 사랑, 자유, 사회와의 관계 등을 다룬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작품들을 발표했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평가를 종합해볼 때, ’페터 회’라는 작가가 세계적인 유명세를 가지게 된 것은 ’어느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는 문체’에 있는 듯하다. 세계적으로 인기로 얻고 있다는 이 작가의 작품에는 대부분 ’획기적’이라는 말이 달려 있다. 10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소설이라는 <콰이어트 걸>도 획기적인 추리소설로 평가될 것이 확실하다.
<콰이어트 걸>은 특별한 청각 능력을 가진 주인공 ’카스퍼’가 미스터리한 수녀들에 의해 자신과 똑같은 능력을 가진 한 무리의 아이들을 보호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고, 그중 한 소녀가 사라지자 그 소녀를 찾아나가는 추리소설이다.
"그 대신에 사람들은 현실 속의 재앙와 맞닥뜨릴 뿐이다. 아이들은 학대받고, 유괴되고, 사람들은 고독하고, 연인들은 헤어진다.
그의 분노가 커졌다. 하느님에게 화가 날 때의 문제는 가서 불평을 토로할 만한 하느님의 직속 상사가 없다는 점이다.
그는 의지를 돌려 그 자리와 풍경 모두에서 도망치려 했다. 그러자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주방과 레스토랑 사이의 카운터가 보였다."(223)
나에게 <콰이어트 걸>은 한 문장, 한 문장이, 퀄트 조작처럼, 조각 조각 끊어지듯 읽히는데, 그 선율이 상당히 철학적이다. 차가운 감성으로 읽어내는 세상. 게다가 뒷통수를 치듯 부적절하게 튀어나오는 유머 감각,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선율처럼 읽히는 이야기. 내게는 참 여로 모로 당황스럽고, 감당이 안 되는 작품이다.
"사랑은 상대를 알아보는 것이다. 미지의 것에 매료되고 끌릴 수는 있지만, 사랑은 신뢰 속에서 천천히 자라나는 것이다. 해변에서 처음 스티나를 봤을 때부터 그는 신뢰와 믿음의 소리를 반복적으로 들었다. 지금도 그 신뢰와 믿음은 존재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지금처럼 뭔가 다른 것, 마치 미지의 대륙처럼 낯설고 정복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그것은 시간이 흘러도 줄어들지 않았다."(514)
주인공의 신비로운 청각 능력은 물론, 세계적인 서커스 광대라는 비범한 직업까지, 사실 처음부터 내겐 난해하기만 했지만, 세상의 불협화음 속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선율 하나가 들린다. 독특한 감각의 새로운 화법의 소설을 읽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이 책에 도전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솔직히 이렇게 난해한 작품을 만날 때마다 나도 이제 새로운 조류에 밀려나는 세대인가 싶어 우울해지도 하지만, 문학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는지 지켜보고 싶은 독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