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공부법 - 공부의 대가, 정약용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나만의 북멘토 1
김문태 지음, 김정진 그림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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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대가, 정양용 할아버지에게 배우는 공부법!  



   


  


  


  


  


  


  


 

 

 

동시에 몇 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의 외국어를 마스터한 사람들은 다른 외국어도 비교적 쉽게 마스터하게 되는 경우를 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외국어를 잘 익힐 수 있는지 외국어를 공부하는 원리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머리 좋은 사람이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단기간은 그럴지 몰라도, 장기간은 아닙니다. 공부 방식, 즉 공부법을 아는 사람이 공부를 잘합니다. 

 

학교 다닐 때 가장 안타까웠던 친구는 죽어라 노력을 하는데 노력만큼 성적이 성적이 오르지 않는 친구였습니다. 공부는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학습 방법을 익히는 것이 먼저입니다. 공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과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요즘처럼 최첨단 지식이 날마다 쏟아지고 빠르게 유통되는 시대에는 '공부법' 자체가 경쟁력일 것입니다.  

 

<정약용의 공부법>은 꼴지 대장이 깨돌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깨비의 도움으로 정약용 할아버지에게서 공부법을 배우고 돌아오는 내용입니다.  

 

다산 정약용 할아버지는 오백 권의 책을 쓰셨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책을 쓰기 시작해서 100살까지 살며 매년 한 권씩 책을 쓴다고 가정을 해도 그 사람이 쓸 수 있는 책은 100권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역사, 지리, 법, 건축, 의학, 문학 등 다방면에 걸쳐 오백여 권의 책을 쓰신 정약용 할아버지야말로 진짜 공부 도사라 할 수 있습니다.  

 

 도깨비 방망이를 가진 깨돌이는, 무엇이든 다 잘하지만 딱 하나 공부만 잘 못하는 꼴지 대장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정약용 할아버지가 살았던 이백오십 년 전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꼴지 대장의 소원은 공부를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책을 읽거나 공부를 했는데도 머리에는 남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꼴지 대장은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는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꼴지 대장과 깨돌이는 정약용 할아버지가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루 한가지씩 공부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정약용 할아버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주시며, 공부하는 방법을 아주 쉽게 설명해주셨습니다. 

 

꼴지 대장과 깨돌이가 정약용 할아버지이게 배운 공부법은 여섯 가지입니다. 월요일에는 '목표 정하고 집중하기', 화요일에는 '기초부터 순서대로 하기', 수요일에는 '종류별로 정리하기', 목요일에는 '독창적으로 뒤집어 보기', 금요일에는 '관찰하고 기록해 요점 찾기', 토요일에는 '묻고 따지고 주장하기'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백오십 년 전의 공부 방법이 오늘날에도 통할까요? 정약용 할아버지가 살았던 시대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엄청나게 다른데 말이죠. 정약용 할아버지가 공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공부하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정약용 할아버지의 공부법이 유용할까요? 

 

이렇게 질문해보는 것은 바로 정약용 할아버지가 토요일에 가르쳐주신 공부법, 즉 '묻고 따지고 주장하기'를 실천한 것입니다. 정약용 할아버지는 공부를 할 때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고, 의심하고 그 이유를 따져 물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의문을 가지고 정약용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신 공부법을 다시 읽어봤습니다. 정약용 할아버지의 공부법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그것은 단순히 시험 점수를 잘 맞을 수 있는 '잔꾀'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학원에 가면 정답을 잘 찍을 수 있는 '요령'을 가르쳐주는 도사 선생님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정약용 공부법>은 방대하고 다양한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학습 원리'입니다. 정약용 할아버지는 바로 그 '학습 원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원에 있는 화성을 지을 때, 설명도 몇 줄 되지 않는 서양 책을 보고 '거중기'라는 새로운 기계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공부법을 몸에 익히려면 많은 시간 인내하며 연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법이 한번 몸에 익으면, 그 다음부터는 공부에 놀라운 가속도가 붙을 것입니다. 이제 큰 꿈을 가지고 뭔가 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도전해보자고. 골찌 대장,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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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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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무 생각 없이 태평하게 살던 시절에도 누군가에게 소중했던 사람들이 날마다 죽어갔구나(549). 

오늘은 또 몇 명의 사람들이 죽음으로 생(生)을 마감할까.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생명이 나고 죽으며, 그렇게 삶과 죽음이 교차하고 있으리라. 

내 기억 속의 첫 장례식은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이다. 오랫동안 병상에 계시다 돌아가신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은 쓸쓸하기 그지 없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머물렀던 시간이 길어서 그런지 깊은 슬픔을 토해내는 가족도 없고,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조문객도 없었다. 회사도 퇴직한지 오래여서 몇몇의 친인척말고는 찾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 처음 가본 화장터에서 나는 담담한 친구를 대신하기라도 하려는 듯, 울고 또 울었다. 

잠시 진정하고 주변을 보니, 여기저기 다른 가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젊은 청년의 영정을 들고 오열하는 어머니, 어머니를 보내드리며 애통해 하는 딸들, 누구를 보냈는지 손수건으로 주름진 눈가를 조용히 훔치고 있는 노신사. 화장터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계속 울고 있는 나를 보고, 한 친구가 이렇게 놀렸었다. "영화 보니?"


너희는 무슨 기준으로 어떤 고인은 동정하고, 어떤 고인은 내팽개치는 거냐......?(213)

난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때' 돌아가신 할머니께 감사드렸다. 아흔두 해를 사시고 돌아가 나의 할머니. 할머니의 장례식장에는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하고, 할머니를 추억하는 조문객보다 인사를 위해 들린 '누구와 어떻게 아는 사이'인 사람들로 가득찼고, 경쟁적으로 들어서는 조화는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고 있었다. 장례식장이야말로 빈부와 계층의 격차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곳이었다. 아버지 사업이 부도났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면 어쩔뻔 했는가.


나는 돌아가신 분을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로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것을 '애도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65).

<애도하는 사람>은 죽은 이를 찾아다니며는 한 청년의 이야기이다. 그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전국을 떠돌아다닌다. 그를 중심으로 그와 관계가 있는 세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며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야기를 꾸려나간다. 

<애도하는 사람>은 말한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태평하게 살아가는 시간에도 누군가에게 소중했던 사람들이 날마다 죽어가고 있다고. 어떤 고인은 슬픔과 사랑 속에 이 땅을 떠나지만, 내팽개쳐지는 죽음도 있다고. 그러나 결국에는 모두 잊혀질 뿐이라고.

<애도하는 사람>이 제기하는 문제는 이것이다. 주목받지 못한 죽음, 아무도 돌이켜 생각하지 않는 죽음이 있다는 '현실'과, 죽음의 무게는 다르지 않는데 어째서! 하는 '슬픔'이 그것이다(476). 

저자는 ’애도하는 사람’이 태어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당신을 ’애도하는 사람’으로 만든 것은 이 세상에 넘쳐나는 죽은 이를 잊어가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차별당하거나 잊혀가는 것에 대한 분노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도 별 볼일 없는 사망자로 취급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세상에 만연한 이런 부담감이 쌓여서, 그리고 그것이 차고 넘쳐서 어떤 이를, 즉 당신을 '애도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431-432).

그리고 세상 어딘가에 또다른 '애도하는 사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도 어떤 이유로 죽었건 차별하지 않고, 사랑과 감사에 관한 추억에 따라 가슴에 새기고, 그 인물이 살아 있었음을 오래도록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이 태어났을지도 모른다"(432).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로 네 가슴에 담으려 하는구나......(286).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는 '죽음에도 차별이 존재한다. <애도하는 사람>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 죽음의 차별을 슬퍼한다. 그가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죽음도 존재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존재에 대한 존중이요, 생명에 대한 경외심인 것이다. 어떤 삶을 살았건, 어떠한 죽음을 맞았건, 이 세상에 살았던 유일한 존재'에 대한 예우이다.

<애도하는 사람>을 읽으며 죽음의 경계를 어슬렁거리고 나서, 나는 며칠을 앓았다. 생과 죽음의 에너지가 팽팽하게 들어찬 우주 안에서, 바로 그 생과 죽음의 사슬에 묶여 있는 기분이었다. "넓은 하늘 아래서 웃고, 대지 위에서 운, 새끼 직박구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시즈토처럼, 머릿속으로 내가 기억하는 수많은 삶과 죽음이 정신없이 교차했다. 그러면서 내가 느낀 감정은 질식할 것 같은 인생의 허무도 아니고, 나에게도 닥쳐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고, 흔적도 없이 잊혀질 것에 대한 분노도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죽음)에 대한 슬픔이면서 동시에 존재(죽음)에 대한 경건한 마음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야 해(257).

삶과 죽음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이모는 평생을 친구처럼 의지했던 이모부를 떠나보내고도 살아가고, 내 동생은 온 마음으로 사랑했던 강아지를 잃고도 살아가고, 내 친구는 십대 시절 한꺼번에 부모님을 잃고도 살아가고, 우리는 모두 그렇게 끊임없이 누군가를 떠나보내면서 살아간다. 장례식장에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온 가족이 평온하게 둘러앉아 식사할 수 있는 그 순간이 바로 기적이라는 것을 실감하며 말이다.


인생의 본질은 어떻게 죽었나가 아니라, 사는 동안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사랑받고 어떤 일로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았는가에 있는 게 아닐까(551).

인생 별거 없다고 느낄 때마다, 죽음이 나의 현실로 느껴질 때마다, 누군가를 떠나보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오늘 단 하루만 산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하나님이 내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항상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저 사랑하며 사는 일이 아닐까'라고. 누구의 죽음도 차별하지 않는 '애도하는 사람'과 같이 누구의 존재도 차별하지 않으며 말이다.

’애도하는 사람’은 어떤 인물이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세 가지 요건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누구를 사랑했는가? 누구에게 사랑받았는가? 누군가가 어떤 일로 그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는가?"(265). 이것은 '사랑하며, 사랑 받으며, 감사하며' 살자는 작가의 초대이리라. 

언제가 나를 보내줄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나의 장례식장에 와준 사람들 모두가 "내가 누구를 사랑했고, 누구에게 사랑을 받았고, 누군가가 어떤 일로 나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는지"를 함께 추억하며, 그렇게 애도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나를 영원히 기억하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그 장례식장에서만큼은 나를 '유일한 존재'로 가슴에 담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모두의 기억 속에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 남기고 가는 인생이고 싶다. 그때를 위해 오늘도 나는 열심히 사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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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왈드 챔버스의 기도 오스왈드 챔버스 시리즈 8
오스왈드 챔버스 지음, 스데반 황 옮김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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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유익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뜻 가운데 어떠한 일이 발생한다고 해도 주께서는 우리를 통해 주의 작정을 이루어가신다는 점이다. 사람은 기도를 통해, 어떠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때문에’ 변화한다
 
페이지 : 20  



거룩하고 단순한 기도를 드리는 비결!


2009년 토기장이 출판사를 통해 처음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책을 접한 뒤로,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영적 지도자이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저서는 강의를 하든 설교를 하든, 가장 많이 인용하는 가르침이며, 가장 많이 소개(선물)하며 가장 많이 추천하는 책이기도 하다. 함께 책을 읽은 동역자들도 같은 증언을 한다. 

이번에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부분은 바로 <기도>이다. 언제나 그렇듯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가르침은 성경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데 있어서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예리하고 날카롭다. 그 교훈이 너무도 거룩하고 순결하여, ’온전하라’ 하신 하나님이 명령 앞으로 우리를 다시 불러 세우는 듯한 체험을 한다.

<기도>에 관한 가르침 역시 예외가 아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날카로운 통찰은 열심 있는 신앙인들도 간과하기 쉬운 간극을 정확하게 찾아낸다. 그 때문에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가르침 앞에 서면 우리의 죄성이 낱낱이 드러나게 되고, 날카로운 것에 찔리듯 신앙양심이 찔림을 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 삶이 고통스러워질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기도는 개인적인 야망의 걸림돌이다. 그래서 바쁜 사람은 기도할 시간이 없다." 나는 이 말씀 앞에 얼어붙듯 멈추어 섰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이 가르쳐주시는 기도는 한마디로 ’거룩하고 단순한 기도’를 드리는 비결이다. 기도에 관한 한 ’어리석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도의 본질은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가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치르신 대가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치르신 고통과 대가에 초점을 맞춰 기도하면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기도한다. 그런데 그것은 어떠한 믿음인가?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완벽한 신뢰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함으로 성령 안에서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을 누릴 수 있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명쾌한 문장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진리의 핵심을 함축적으로 보여주시는데 탁월하다. <기도>를 읽으며 마음에 새긴 교훈 몇 가지를 정리하면 이렇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그의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이 고통을 당한다."
"당신이 기도할 때 상황은 그대로 유지된다. 그러나 당신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를 드릴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 증표는 가득찬 느낌이 아니라 비어 있는 느낌이다."

예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고난주간, 나는 오늘 새벽기도회 자리에 나가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헤아리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펼쳐던 <오스왈드 챔버스의 기도>는 나에게 이런 경고를 주고 있었다. "최근에 기도하기보다 기도를 숭배하는 위험성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눈을 떼게 되면서 나타나는 위험한 현상으로서 명령을 내리신 ’주님’보다 주께서 내리신 ’명령’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기도는 구속이라는 가장 위대한 근본 위에 서야 한다"(139). 기도의 자리에 앉아 있어도 언제나 다급하기만 한 마음, 빨리 ’주의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조바심을 핑계로 나는 얼마나 자주 기도 시간을 소홀히 했던가. <오스왈드 챔버스의 기도>를 통해 정결한 기도를 배우는 동안, 우리의 얉은 신앙이 성경의 고상한 진리를 얼마나 저급하게 만들어버리고 있는지 생각하며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날카로운 가르침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다. 말씀의 빛을 통해 우리를 완전한 자유를 선포하는 해방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는 말씀의 은혜가 가르침 속에 충만히 임한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가르침은 오히려 ’우리의’ 모든 열심을 내려놓고, ’주님의’ 깊은 은혜 속으로 우리를 인도해준다. 이것이 내가 토기장이의 <오스왈드 챔버스> 시리즈를 기대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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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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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하는 인간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고 외쳤던 한 광고 카피처럼, 현대인들은 일과 안식, 일상과 놀이를 구분짓는 경향이 있다. '놀이'는 특별한 이벤트로 우리의 일상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스스로를 '노동자'라 이름하며 '생산성'에 목숨 걸고 사는 현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인간은 원래 '놀이하는 존재'였다는 한 인문학자의 통찰이 반갑기만 하다. <호모 루덴스>는 1938년에 발간되어 권위 있는 '고전'으로 통하는 책이라는데, 연암서가를 통해 이 책의 존재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거의 100년의 기간을 두고 계속해서 읽혀지고 발간되는 것을 볼 때, 여전히 유효하며 권위 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인간과 동물에게 동시에 적용되면서 생각하기와 만들어내기처럼 중요한 제3의 기능이 있으니, 곧 놀이하기이다. 그리하여 나는 호모 파베르 바로 옆에,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수준으로,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를 인류 지칭 용어의 리스트에 등재시키고자 한다"(20-21).

생산성에 가치를 두고 놀이를 '천박한' 것으로 여기는 입장에 선 사람들에게는 '사고의 전복'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획기적이고 신선한 통찰이다. 저자는 서문을 통해 이렇게 확언한다. "나는 지난 여러 해 동안 문명이 놀이 속에서(in play), 그리고 놀이로서(as play) 생겨나고 또 발전해 왔다는 확신을 굳혀왔다." 문명 속에 자리한 일종의 '놀이 문화'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행위와 문명 자체를 '놀이'의 연속으로 보는 것이다. 생존 양식과 다소 동떨어져 보이는 '놀이'가 문화의 한 요소가 아니라 문화 그 자체라는 시각은 문명을 탐구하는 전혀 다른 시각임에는 틀림없다.

<호모 루덴스>는 인간의 몸과 영혼을 동원해서 사물을 표현하려는 자연스러운 욕구에서 발생한 놀이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원동력으로 작동한다고 본다. 즉, 삶의 재미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놀이가 다채로운 형태로 발전하면서 법률, 문학, 예술, 종교, 시, 철학, 심지어 전쟁까지 놀이가 그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문명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놀이'의 개념을 동양적으로 표현하면 '흥'(興)의 개념과 가깝지 않을까 싶다.

인류의 기원을 '창조'에 두고 있는 부류도 원죄 이후로 노동이 형벌로 전락하여 혹독한 땀을 흘려야지만 생존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오고, 인류의 기원을 '진화'에 두고 있는 부류도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치열한 생존 경쟁의 전쟁터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즐거움과 흥겨움을 동반하는 가장 자유롭고 해방적인 활동, 즉 '놀이'가 문명의 동력이라는 <호모 루덴스>의 통찰은 인류(삶)의 정체성에 새로운 도전을 준다. 학문적인 견지에서도 의미가 깊은 책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생산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더불어 잘 노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어준 책이다. 놀기 위해 사는 놀이를 위한 인생이 아니라, 삶 자체가 놀이인 제대로 즐기는 즐거운 인생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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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하나님 - 15개의 핵심 키워드를 통해 본 하나님
마크 갤리 지음, 장택수 옮김 / 하늘산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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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두려운 분이시다. 경외하라!


언젠가 나를 따라다니던 남자가 있다. 나는 일방적인 그 사람의 사랑이 몹시 불편하고 싫었다. 그 사람이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도 드러내놓고 싫은 티를 냈다. 서로 알던 사이도 아닌데 첫눈에 반했다는 그 사람의 고백에, 나는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더 지독하게 굴었었다. 그런데 그런 나를 지켜보던 친구가 이런 말을 해주었다. "누군가 너를 사랑한다고 해서 네게 그 사람을 모독할 권리는 없다." 처음엔 친구의 쓴소리가 몹시 서운했지만, 꼽씹을수록 그 말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친구의 한마디는 누군가의 진심을 함부로 무시했던 나의 오만함을 진심으로 뉘우치게 만들어주었다.

마크 갤리의 <거친 하나님>은 바로 이와 같은 신앙인의 오만함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터프가이 예수>를 읽은 동역자를 통해 ’마크 갤리’라는 이름을 기억해두고 있던 차에 만나게 된 책이라 더욱 기대가 컸다. 마크 갤리의 <거친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해 그동안 당연하게 가져왔던 신앙인들의 고정관념을 깨끗하게 날려준다. 강력한 한방이다. 

<거친 하나님>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더욱 두려운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가볍게 여겨왔는지를 하나님도 잘 아신다는 점이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죄를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도전이며, 그분의 자비에 대한 침범이며, 그분의 인내에 대한 조소이고, 그분의 권능에 대한 경멸이며, 그분의 사랑에 대한 멸시"라고 말했다. 우리의 동기는 언제나 복합적이다. 우리는 은혜가 얼마나 거룩하며,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자주 욕되게 하는지를 잘 모른다"(124).

버릇 없는 자녀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여기며, 그 사랑을 욕되게 하고 있는가. 고난주간을 보내며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 분이신지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 R. 오토는 <그의 저서 성()스러운 것>에서 피조물이 하나님을 처음 만날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을 ’누미노제’(Numinose)라는 말로 정의하혔다. 그것은 ’무서운 신비’, 즉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매혹적이면서도 전율적인 무서움을 표현하는 말이다.

<거친 하나님>은 이처럼 '사랑'과 '은혜'의 교리 안에 감추어지고 왜곡된 하나님의 또다른 속성, 즉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두려운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회복시켜준다. 마크 갤리는 '극단적인 역설'로 논지를 펼치는 독특한 방식을 쓴다. 그의 역설적인 방식은 충격적이면서도 동시에 강력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탁월한 효과가 있다.

그의 역설적 교훈은 이런 식이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신데, 역설적이게도 구하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 하나님은 편재하시지만 부재하신다. / 하나님은 전능한 오른손도 있는 반면, 무능한 왼손되 있다. 등등"

인간은 모고 싶은 것만 보려는 못된 습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습성이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을 왜곡하여 보고 싶은 부분만 확대, 양산하는 심각한 죄를 저지르고 있다. 너무나 청난 사랑을 받은 은혜에 감격하면서도, 동시에 그 사랑에 기대에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고 가볍게 여기는 무서운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거친 하나님>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은 물론, 신앙공동체 안에서도 '즉시로'로 회복해야 할 심각하고 중요한 시대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묵은 공기를 환기시켜주는 창문과 같은 책이라 표현하고 싶다. 우선적으로 모든 교회에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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