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
최윤필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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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밀려나는 것에는 사연이 있다


고등학교 3학년, 입시 준비가 한창이었던 어느 여름 날 오후의 일이다. 비오는 수요일이었다. 점심 도시락을 이미 2교시 어간에 먹어치운 우리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급히 장미꽃 한 다발을 준비했다. 교탁 위에 꽃다발을 올려놓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5교시 수업을 기다렸다. 빗방울을 머금은 장미꽃은 두근거리는 우리 심장만큼이나 열정적인 붉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교실 문이 열리고 조용히 들어오시는 선생님. 우리는 깜짝 놀랄 선생님의 모습을 기대하며, 약속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 그대에게 안겨 주고파." 그런데 우리의 노래는 한소절도 지나지 않아 멈추고 말았다. 교탁 위에 올라서신 선생님이 장미꽃다발을 한쪽으로 밀치시며 출석부로 툭툭 그만 노래를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선생님은 우리들과 눈을 마주치시며 굳은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입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 앞에서 이 무슨 한가한 노름이야? 너희반 국어 모의고사 평균이 얼마인줄 알고 있어?" 모의고사에서 또 우리 반이 꼴찌를 했나 보다. 국어 교과서에 시선을 내려뜨리고 있던 내 눈에서 눈물이 났던 것 같다. 그때 내가 느낀 서러움은 실망이 아니라 어떤 배신감이었다. 평소 선생님의 가르침과 너무도 이율배반적인 태도. 그 선생님만은 우리의 마음을 알아줄 것이라 믿었는데, 그 선생님에게 만큼은 이해받고 싶었는데, 우리의 마음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도대체 왜 우리는 벚꽃 흐드러지는 봄날에도, 아카시아 향기 진한 여름날에도, 비가 내리는 수요일에도 하루 종일 입시 교재에 얼굴을 처박고 앉아 문제를 풀어대고 무엇인가를 달달 외워야만 하는 것인가. ’입시가 우리에게 떨어진 절체절명의 과제라고? 왜 우리가 그런 절체절명에 끌려가야 하지?’ 내 인생인데,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 당하는 것이 싫었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느낀 나는 입시를 포기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을 방황한 끝에 내가 할 일을 찾았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리고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얼마 전, 자퇴를 선언하며 대자보를 내걸었던 한 고대생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그 고대생을 보니 고등학교 때 그 선생님이 다시 생각이 났다. 왜 대학에 가야 하는지 묻었을 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반항하고 싶거든 일단 대학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후에 그때 버리라"고. "그것이 정말 멋진 것이지, 대학갈 실력도 안 되는 애들이 대학을 버리겠다고 반항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야"라고 하셨다. 그 고대생은 바로 그 일을 해낸 것이다.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는 뒤표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효용’이나 ’가치’의 세계로 병합되려는 시대에, 세월의 속도를 감내하지 못해 바깥으로 밀려난 이도 있고 안쪽에 포섭되지 않으려고 맞버티다 ’변방의 우짖는 새’가 된 이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안의 논리로부터 극복된 바깥의 존재들이 있다. 이 책은 바로 이 같은 바깥으로 "들어가려는" 시도이다.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는 기자였으나 목수가 되기를 꿈꾸었고, 목수 공부를 시작했으나 밥값 하는 목수가 되지 못해 신문사에 재입사를 해야 했던, 그러나 기자라 불리기를 거부하는 목수 지망생의 (기획 연재) 인터뷰이다. 책에는 ’큰 흐름의 바깥’, ’스포트라이트의 바깥’에 머물고 있는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의 인터뷰가 실렸다. 

모두가 탐내지 않는 자리에 있기에, 모두의 관심 바깥으로 밀려난 존재들의 이야기,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는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연상시킨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으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던 것처럼, 필자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이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준다. 그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이름을 말이다. 그렇게 스물여섯의 ’바깥’은 비로소 우리에게 하나의 ’의미’가 된다.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는 비록 ’바깥’이지만 저마다의 자리에서 나름의 빛깔과 향기를 뿜어내는 ’꿈’을 이야기한다. 강요된 ’안’의 자리를 탐내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의 저항이라면 저항이다. 세상은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 버티고 선 자들 때문에 괴롭다. ’바깥’에서 만난 이들은 주어진 곳에서, 있어야 할 곳에서, 스스로 찾아든 곳에서 미련할 만큼 정직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어쩐지 숨통이 좀 트이는 기분이다.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를 읽으며 생각한다. 그동안 내가 지향해온 자리, 내가 탐을 내온 삶의 빛깔과 향기는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지금 있어야 할 곳에 있는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서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이름을 갖고 싶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그렇게 서로에게 가서 서로의 빛깔과 이름을 불러주는 아름다운 ’꽃’ 세상이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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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 - 타인의 생각 훔치기,‘멘탈리스트’가 되는 길
토르스텐 하베너 지음, 신혜원 옮김 / 위즈덤피플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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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방법, 핵심은 관찰이다!


평소에 기르고 있는 강아지의 ’생각’을 읽고 싶을 때가 많다. 무엇인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 강아지의 눈동자와 마주친다든지, 무엇인가 메시지를 전하는 몸짓을 보고도 이해하지 못할 때, 특히 시름시름 아파보이는데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할 때면 강아지의 ’생각’을 알지 못해 몹시 답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생은 신기하게도 강아지와 대화가 잘 통한다. 배가 고픈 것인지, 나가고 싶은 것인지, 놀아달라는 것인지, 안아달라는 것인지 잘도 알아맞춘다.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보면, 그때마다 강아지가 보내는 ’신호’가 있다고 말한다. 동생은 그 ’신호’를 놓치지 않고 읽어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사람을 ’멘탈리스트’라고 한다. 이 책의 표지에 "The Mentalist"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남의 행동을 능히 조절하는 사람, 정신적인 예리함과 관찰력, 암시를 이용하는 사람’이라고. 흔히 유심론자라고 번역되는 개념보다 조금 확장된 개념으로 와 닿는다. (뒤표지의 설명을 보면) 멘탈리스트들은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나 관찰을 통해서 상대가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 혹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마술에 심취한 저자가 최면술, 신체 언어, 주의를 모으는 기술, 심령론 등에 관심을 가지고 훈련하던 중에 어느 순간 직관적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예측할 수 있게 되면서 ’멘탈리스트’의 기술을 일반화시킨 책이라 하겠다. 실제 ’멘탈리스트’로 불리는 저자는 무대 공연, 강연, 트레이닝 세미나 등을 통해 타인의 마음을 읽는 방법을 전파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에서 타인의 생각을 읽는 방법들은 심리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상대를 꿰뚫어볼 수 있는 심리학자, 셜록 홈즈처럼 예리한 관찰력으로 상대의 직업 등을 알아맞히는 명탐정, 범인을 잡는 일에 관록이 붙은 형사의 능력을 합쳐놓은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중에서도 기술의 포인트가 되는 것은 ’관찰’이다. 심리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상대방의 작은 신체적 변화나 미묘한 언어의 뉘앙스를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것과 믿음과 강렬한 이미지를 통한 ’암시’를 훈련하는 것이 포인트이다.

이 책을 읽고 실제로 이 책이 정의하는 ’멘탈리스트’로 거듭난다면 대단히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타인의 생각을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남의 행동을 능히 조절한다거나, 정신적인 예리함과 관찰력, 암시를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다면 가히 ’초능력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화나 드라마 속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초능력이 훈련으로도 가능하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래 산 부부나, 사랑하는 연인들, 친밀한 가족들, 팀워크가 좋은 팀원들은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상대방이 원하는 것과 말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에서 타인의 생각을 읽어내는 핵심적인 기술은 바로 ’관찰’이다. 우리가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이 보내는 ’신호’를 잘 포착해내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 상대방의 작은 움직임까지 관찰하도록 만들기 때문인 듯하다. ’타인의 생각 훔치기’, ’남의 행동을 능히 조절하는 사람’ 등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능력은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고자 하는 따뜻한 관심 속에서 활성화된다고 믿는다.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에서 소개되는 방법들을 훈련한다면 자신을 가꾸고, 타인을 이해하는 일종의 ’초능력’을 갖게 되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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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즈 칼리파 Burj Khalifa - 대한민국이 피운 사막의 꽃
서정민 지음 / 글로연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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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건물의 차이를 알아보려고 사전을 찾아보니 건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건축(architecture)이라는 말은 원래 ‘큰, 으뜸, 으뜸이 된다, 우두머리’ 등의 뜻을 가지는 ‘archi’ 라는 접두어와 ‘기술’을 뜻하는 ‘tecture’의 합성어로서 ‘모든 기술의 으뜸’ 또는 ‘큰 기술’이라는 뜻이다. 동양의 한자문화권에서는 ‘세울 건(建)’자와 ‘쌓을 축(築)’자를 합한 ‘건축(建築)’이라는 말을 그에 대응시켜서 쓰고 있다.

건축은 원래 인간적 요구와 건축재료에 의해 실용적·미적 요구를 충족시키도록 만들어진 구조물을 말하며, 단순한 건조기술에 의하여 만들어진 구조물은 ‘건물(建物)’ 이라고 한다. 따라서, 구조물을 형성하는 공간에 작가의 조형의지가 담긴 구조물을 ‘건축’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네이트 백과사전)

’모든 기술의 으뜸’, ’큰 기술’이라는 건축의 정의가 마치 두바이에 세워진 ’부르즈 칼리파’를 두고 만들어진 말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이다. ’부르즈 칼리파’는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높은 건축물로 21세기 건축의 백미라고 한다. 이 대단한 건축을 바로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해냈다고 한다. 사막의 한복판에 세계 최고의 건축물이 세워지기까지 열정과 땀의 신화를 기록한 <부르즈 칼리파>는 승전가를 높이 부르는 전사들의 합창처럼 승리의 열기와 자부심의 열기가 가득하다.

<부르즈 칼리파>는 마치 중동건설의 신화를 일구어내었던 ’은근’과 ’끈기’의 대한민국을 재현하는 듯 하다. 사막 위에 세워진 828m의 건축물은 두바이를 상징하는 최고의 건축물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신력과 기술력을 세계에 알리는 상징물로 우뚝 섰다.

"하늘 아래 인류가 세운 최고(最高) 건축물"이라는 ’부르즈 칼리파’는 하늘에 닿고자 했던 바벨탑을 연상시킬 만큼 대단한 높이를 자랑한다. "총 162층 건물로 높이가 828m다. 여의도 63빌딩(249m)과 남산(262m) 높이의 세 배 이상이고, 서울에서 가장 높은 산인 북한산(836m)과 비슷한 수준이다. 기존 최고 높이 건물이었던 타이베이 금융센터(508m)보다도 320m나 더 높다"(36).

세계 최고층 건물이지만, 위로만 뾰족하게 솟은 건물이 아니다. 그 면적도 상당하다. "부르즈 칼리파는 언뜻 보면 날렵한 모양의 펜촉을 연상시킨다. 828m의 높이를 실현하기 위해 위로 갈수록 상당히 좁아지는 모습이다. 그러나 연면적은 약 50만㎡에 달한다. 정확히 말하면 49만 5870㎡다. 삼성동 코엑스몰(11만9000㎡)의 4배, 여의도 공원(21만㎡)의 2배보다 넓다. 또 잠실종합운동장의 56배에 이른다"(43).

어른들을 숫자를 좋아한다고 꼬집었던 어린왕자에서 처럼, 나도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수치로 비교를 하고 보니 ’부르즈 칼리파’가 얼마나 대단한 건축물인지 더 사실적으로 와닿는다. 그러나 건축물에는 실용성이나 창의성, 예술성 뿐만 아니라, 상징성과 기념성도 포함되어 있다. 세계가 ’부르즈 칼리파’에 주목하는 이유도 단순히 높은 건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진보한 기술력에서도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며, 경제적인 파급 효과에 대한 논의도 뜨겁다. 

그러나 (부르즈 칼리파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우려의 목소리도 높지만, 이 세계적인 건축물이 완공되기까지 그것을 짓고 있는지도 몰랐던 나의 무지를 고백하며) ’부르즈 칼리파’는 대한민국의 무너진 자존심을 다시 세워준 건축물이라는 데에 나는 의의를 두고 싶다.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무너지면서, 국제적인 망신은 물론 스스로의 자부심에도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던 대한민국의 재기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진다. 중동의 신화가 오로지 노동력으로 승부한 처절한 역사였다면, ’부즈르 칼리파’는 땀과 눈물은 물론 앞선 기술력으로 일궈낸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부르즈 칼리파 건설은 대부분 대한민국 순수 기술력과 노력으로 이뤄진 것이다. ’한스의 콩나무’처럼 한없이 올라가는 최고층을 건설하는 데는 적지 않은 고난이 따랐다. 그러나 사막 한가운데서 한국인들은 도전정신과 끈기로 신화를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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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력의 탄생 - 현대인의 지성을 회복하기 위한 강력한 로드맵
매기 잭슨 지음, 왕수민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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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력이 사라지면 지성이 소멸한다. 


표지부터가 우리의 집중력을 시험하는 듯 하다. 우리 주변의 모든 정보 기술들이 우리의 집중력을 겨냥하면서 경쟁하고 있다는 진단은 이미 익숙하다. 이 책이 제기하는 문제는 새로운 IT 기기들이 속속 도입되면서 오랜 세월 축적돼 온 집중력 분산은 선을 넘어버렸다는 것이고, 집중력이 사라지면 인간의 지성도 소멸한다는 다소 극단적인 예측이다. 집중력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절대적인 핵심이라 힘주어 강조한다. 

입시를 준비할 때까지 줄기차게 들었던 잔소리가 바로 "집중하라"는 것이었는데, 오랜만에 그 잔소리를 다시 듣는 기분이다. 그러나 <집중력의 탄생>에서 말하는 집중력의 가치가 차원을 달리 한다. "집중력은 삶을 나누어주는 것"이라는 이 한마디가 마음에 깊이 남는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관심(집중력)을 줄 때도 우리는 그만큼 우리 삶을 나누어 주고 있는 겁니다. 돌려받지 않지요. 매순간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가치 있다고 보이는 것에 우리의 관심(집중력)을 나눠 주고 있습니다"(410). 

바꿔 말하면, 우리의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이 산만한 시대가 갉아먹고 있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라는 섬뜩한 자각이 일어난다. 집중력이 분산되면 마음이 흐트러지고, 결국 이것저것에 주의를 빼앗기면서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속사람은 생기를 잃어버린 허수아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그런데 <집중력의 탄생>은 우리의 집중력을 시험하는 표지만큼이나 집중하기 힘든 책이다. ’집중력 분산’을 경고하기 위해 이 시대를 통찰하는 저자의 시야가 참으로 광범위하다. 전체를 하나의 주제로 꿰어냈다는 것이 감탄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시대를 분석해낸다. 

<집중력의 탄생>을 읽으니 얼마 전 온 국민을 열광하게 했던 밴쿠버 올림픽의 열기가 떠오른다.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선전을 펼친 국가대표 선수들의 경기를 지켜볼 때마다 해설자들은 "집중해야 된다"고 외쳤었다. 김연아 선수가 모든 부담을 이겨내고 금메달을 따내었을 때도 모두가 김연아 선수의 무서운 집중력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었다. 끊임없이 우리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요란한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집중력을 훈련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가르침이다. 집중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퇴보를 의미한다는 무서운 경고와 함께 말이다. 

"머리를 컴퓨터에 처박은 채 걸러지지 않은 인생의 소소한 부분들에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팔려 있다. 또 집중력을 분할시킨 채 산만하고 서로를 외면하는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집중력은 지혜와 기억 건설을 위한 가장 중요한 초석이자 사회 발전의 핵심 열쇠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집중력을 갉아먹고 있다. 집중력을 통해 우리는 선택의 힘을 갖게 된다. 주위에서 끝없이 몰아치는 광대한 정보의 바다 속에서 지식을 건져내기 위해서는 이 힘이 꼭 필요하다. 또 의미 있는 삶, 합리성과 비전을 갖춘 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와 끈기도 집중력을 통해 다지게 된다.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문화를 양산해서는 과거도 미래도 통찰할 수 없다. 우리 미래를 우리 손으로 만들려는 싸움에서 우리는 지고 만다"(374).

집중한다는 것은 핵심 가치를 안다는 말일 것이다. 지금처럼 계속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문화를 방치한다면 저자의 경고대로 인류는 다시 암흑의 시대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는 이미 암흑의 시대에 들어서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집중력을 훈련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저자는 희망의 불꽃을 본다. 올림픽 경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집중하지 못하는 인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김연아 선수와 아사다 마오 선수는 비슷한 실력을 가졌지만, 집중력의 싸움에서 김연아 선수의 완승이었다고 생각한다. 영어 공부든, 후회 없는 삶이든, 앞으로는 집중력의 싸움이 될 것이라 예상한다. 

<집중력의 탄생>을 읽으며 집중력에 대한 경각심이 내 안에 새로운 불안을 만들어내고 있다. 나의 집중력은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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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이벤트 높새바람 24
유은실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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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할머니)를 보내드리는 장례식장에서 인생을 배우다.


네 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 장례식은 기억나지 않는다. 오빠는 그때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고, 너무 슬프게 울어서 자기도 많이 슬펐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입시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몇 십 년이나 흐른 지금까지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다. 아직도 외가에 가면 할아버지가 계실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엄마는 외할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다 여섯 딸들이 밤새 통곡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여섯 딸들이 아버지에게 보내드린 선물들이 포장지만 뜯긴 채 새것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딸들이 보내준 선물이 아까워 두고 보기만 하신 것이다. 엄마는 그것들을 마당에 놓고 태우며 여섯 딸이 많이 울었다고 하셨다. 가장 많은 땅을 가진 마을 어른이셨지만 평생을 부지런히 농사일만 하셨던 외할아버지는 무뚝뚝하셨지만 누구보다 속사랑이 깊은 분이셨다. 할아버지는 마지막 가시는 길에도 말없이 사랑을 표현하고 가셨다. 외할머니 앞으로 남겨 놓은 통장, 그리고 할아버지 떠난 뒤에 자식들 눈치 보지 말고 용돈으로 쓰라는 작은 쪽지가 발견되었을 때는 모두 말을 잃었단다. 입금만 되고 한 번도 출금되지 않은 통장, 그 통장에 찍힌 입금일과 액수는  할아버지가 그 돈을 아주 오랫동안 모아 오셨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천성적으로 장례식장에 잘 가지 못하는 나는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할머니 장례식장에서도 겉돌았다. 장례식장에 있던 가족 중에 입관에 참석하지 않은 가족은 나뿐이었다. 어른들은 마지막 모습을 봐야 보내드릴 수 있다며 함께 들어가자 했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한 방을 써온 나는 마지막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마지막 이벤트>는 유난하게 할아버지와 정이 좋은 손자 영욱이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통해 인생을 배우는 이야기이다. 할아버지와 한 방을 쓰며 사이좋은 친구처럼 다정하게 지내던 영욱은 어느 날 갑자기 할아버지를 떠나보내게 된다. 할아버지가 미리 준비한 마지막 이벤트 때문에 어른들은 모두 당황하게 되고, 영욱은 그러한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지켜보며 할아버지와 작별한다.

<마지막 이벤트>는 ’장례식’이라는 특정한 공간을 통해 죽음을 통한 이해와 용서, 그리고 화해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장례’라는 예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풍경들은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축소해서 보여주는 한 폭의 그림 같다. 세상에 태어나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하게 되는 때는 대부분 조부모의 장례식장일 것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이 책은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장례식장에서 배우게 된다고 말한다. 성경에도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한다. 모든 사람이 결국 이르게 되는 ’죽음’을 깊이 생각할 때, 진지한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결국은 한줌 흙으로 돌아갈 인생인 것을 모르고 아옹다옹 다투며, 먹고 마시고 즐기느라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장례식장에서 인생을 배우라는 것이다. 지혜자의 마음은 잔칫집이 아니라 초상집에 있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대부분 할머니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장례식장을 가득 메우고, 집안의 사회적인 위치를 보여주듯이 경쟁적으로 들어서는 조화의 행렬이었다. 그 요란했던 장례식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 가족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상실감에 시달려야 했다. 아마도 할머니와 함께 살아온 그 세월만큼 우리는 오래도록 할머니를 추억할 것이다.

<마지막 이벤트>는 장례식과 장례식장이라는 특수한 장치를 통해 용서와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누군가를 떠나보내며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는 우리도 곧 그곳을 통해 이 땅을 떠나게 될 것이다. 죽음이라는 영원한 이별이 가져다주는 삶의 허무와 슬픔은 어제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오늘의 미움을 덜어주며, 내일의 욕심을 비워준다. 어린이를 위한 동화지만, 오히려 어른들에게 더 큰 울림을 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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