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눈에 대한 백과사전 - 눈보라 속에 남겨진 이상한 연애노트
사라 에밀리 미아노 지음, 권경희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2월
평점 :

포스트모던니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있는가? 책을 읽는 내내 기권을 외치고 싶었다.
별점을 매길 수 없는 책이다. 스토리와 교훈을 읽어내는 독서에 길들여진 나에게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이 소설은 당황스럽기 그지 없다. 줄거리가 전혀 없는 소설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의 구성은 스토리에 길들여진 독자를 난처하게 만든다.
<눈에 대한 백과서전>을 제대로 읽어내려면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에 대한 선행 이해가 필요할 듯 하다. 몇 년 전, ’다세포 소녀’라는 기괴한 영화를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저런 영화를 누가 볼까?’ 싶을 만큼 유치하고 요상하다 생각했다. 그때까지 ’B급 문화’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B급 문화’라는 새로운 문화 기조를 배우고 나서야 ’다세포 소녀’라는 영화가 가진 문화적 의미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눈에 대한 백과사전>이 가진 문학적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듯 하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한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특징은 무엇일까? 몇 가지 자료를 검토하며 찾아본 설명을 인용하면 이렇다. "포스트모던 소설은 이제 부조리에 관한 게 아니라 부조리 그 자체가 되었다고 하여 모더니즘으로부터의 이탈현상이 지적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논리적이고 인과론적인 이야기의 구성과 모티프의 구사, 혹은 완전한 이해나 전달이 전제된 관례적인 수사, 작중인물들의 자아의 현상과 발견의 계기, 사회적 현실에 대한 대항과 고발 의식, 완결된 하나의 형태로서의 소설 등 정통소설의 일반적 관례들에 대한 불신이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19세기적 이념과 기법으로부터 반발하고 벗어나고 뛰어넘은 ’포스트모던 픽션’이야말로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유일한 문학형태라고 단언한다."
부조리 그 자체, 정통소설의 일반적 관례들에 대한 불신, 19세기적 이념과 기법에의 반발이라는 설명들을 토대로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에 대한 대략적인 그림이 그려진다. <눈에 대한 백과사전>을 읽으면서 가장 당황스러웠던 이 소설의 ’구성’이 가진 의미가 희미하게나마 이해되기 시작한다.
<눈에 대한 백과사전>은 이러한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뉴욕 버펄로에서 심각한 교통 사고가 있었고, 남자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친인척의 통고가 없어 경찰은 사상자의 신원을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그런데 심하게 찌그러진 자동차가 눈밭에 처박혀 있는 현장에서 ’눈에 대한 백과사전’이라는 원고 뭉치가 발견되었다. 이 노트 안에는 A부터 Z까지 알파벳순으로 ’눈’(雪)에 대한 표제어들이 가득 수록되어 있다.
<눈에 대한 백과사전>은 바로 눈 속에서 발견된 이 노트의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프롤로그’가 있고, ’편집자 노트’가 나오고, Angel(천사), Blindness(설맹), Comrts(혜성), (...) Zenith(천정)까지, 그리고 ’주’가 나오고, ’에필로그’로 끝난다. 현장에서 즉사한 한 남자, 그리고 그 현장에 남아 있던 노트가 이야기의 전체 틀과 줄거리를 이끌어가지만, 사실 이 책은 줄거리가 그리 큰 의미가 없는 책이라 ’느껴진다.’ A부터 Z까지 알파벳순으로 ’눈’(雪)에 대한 표제어들을 주제로 하여, 책 제목 그대로 ’눈’에 관한 과학적인 정의, 역사적인 명제나 환상적인 이야기, 고전에서 발췌한 이야기들이 유기적으로 엮여 있다. 그런데 그 모든 내용이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각각 지나치게 독립적이여서 책장을 넘길수록 아마도 "뭐지?"라는 의문이 더 커질 것이다. 이 책의 저자도 그것을 예상하고 있으니 말이다.
"처음엔 그가 한 이야기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깨닫지 못했는데, 독자도 처음엔 그럴 것이다. 그렇다. 난 그의 말, 그가 수집한 스크랩과 인용문, 사진, 주석, 농담, 일화, 시, 노래들의 집합체인 이 이야기가 한 사람의 전 생애를 기울인 작업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었다. 너무도 잊히기 쉬운 이야기들이기에, 그는 그 이야기에 자물쇠를 달아 열쇠로 채워 보관하려고 자기 생애를 전적으로 바쳤다. 이 책은 바로 그 책이다"(18).
스스로를 설명하는 이 문장에 이 책을 이해하는 열쇠가 보인다. 이 책은 줄거리보다 ’눈’ 하면 떠오르는 연상 단어들을 매개로 어떤 이야기를 꾸려간다. 사실 ’실험적인 연애소설’이라는 책 소개를 읽고, 각각의 설명을 ’연애’와 연결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렇게 읽기 보다는 각각의 독립된 이야기가 주는 ’느낌’에 더 충실해야 할 소설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예를 들면, Dream(꿈)을 읽어 보자. "꿈…. 눈이 내렸습니다. 낮에도, 낮이 아닐 때도 알프스 고원지대에 눈이 내렸습니다. 소리 없이, 꿈도 없이 아주 깊이, 아주 가볍게 내렸습니다. 나는 테라스를 나와 샤츠알프로 자꾸자꾸 올라갔습니다. 입을 벌린 채, 그렇게 무(無)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얼음 바람에 맞서 밧줄을 꼭 잡고서, 내 심장 소리에 귀 기울이며 기다렸습니다. 더 이상 눈을 헤쳐 나오기 힘들어졌을 때, 내가 지팡이로 낸 구멍에서부터 녹색이 도는 깨끗한 푸른빛이 발산됐습니다. 그 빛을 받아 하얀 눈송이들이 쉼 없이 빙그그로 돌았습니다. 그리고 그 눈은 나를 쓰러뜨렸습니다. 그다음엔 어떻게 됐을까요? (생략)"(50).
정말 난해하다. ’꿈을 꾼다. 눈이 내린다. 고개를 든 채, 눈이 내리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리고 점점 무(無) 속으로 들어잔다. 빛나는 눈, 그 빛을 통해 금광석처럼 반짝이는 깨달음을 얻는다.’ 혼자 이런 식으로 그림을 그려본다. 그리고 그 느낌을 간직한다. ’연애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 심오한 메시지가 숨어있을 듯 한데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차갑고, 순결하고, 깨끗하고, 순수한 결정체를 상징하는 하얀 ’눈’(雪), 그러나 그 눈은 무엇보다 빨리 녹아버린다. 뒷표지 인용문에 보면, <눈에 대한 백과사전>은 차가운 눈에 빗댄 뜨겁고 절절한 사랑 고백이라고 한다. 노트의 주인이 차마 생전에 고백할 수 없었던 이 사랑이 그가 떠난 자리에서 발견되었다는 애잔함까지. 이러한 힌트를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읽었을 때, 내게 가장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은 이것이었다.
"눈보라를 볼 때마다 일상적 삶에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을 당신을 떠올리게 되겠죠. 나를 당신과 사랑에 빠졌던 남자로 추억하진 마십시오. 그보다는 지평선에 뜬 작은 무지개를 보여주려 당신을 앨버타 주로 데려갔던 남자로, 스위스의 산장에서 당신에게 담배를 가르친 남자로, 당신이 자신을 괴롭힐 때마다 영국에서부터 달려왔던 남자로 기억해주십시오. 나 역시 당신을 그런 방식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내 마음 속으로 걸어 들어오면서 온 공간을 환하게 밝혔던 미소의 주인공영혼을 감동시킨 글의 저자로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