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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 ㅣ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내일을 준비하던 천지가, 오늘 죽었다."
창밖에서 낯선 여자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 서러운 울음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나는 낯선 여자의 울음소리가 불편해진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차라리 악다구니를 쓰며 싸우는 소리라면 "시끄럽다"고 소리라도 쳐서 그만 두게 하겠는데. 왜 우는 것일까 이런 저런 상상을 하는 동안 누군가에게 몹쓸 짓을 당했는지도 모르겠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고개가 절로 흔들어진다. 모르는 척 하고 내 할 일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 마음이 불편하다.
<우아한 거짓말>은 김려령 작가와의 두 번째 만남이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면서도 희망을 품게 해주었던 <완득이>의 매력에 끌려 바로 그 다음 작품을 집어 들었다. 역시 <완득이>에서처럼 톡톡 튀는 대사가 압권이다. 그러나 어째 시작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참으로 느닷없다. "내일을 준비하던 천지가, 오늘 죽었다."
<우아한 거짓말>은 예상치 못했던 한 여학생의 느닷없는 '자살' 앞에 독자를 세우고, 그 소녀가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을 되짚어보게 한다. 자살한 '천지'를 돌아오게 할 순 없지만, 책임져야 할 사람은 찾아내야 한다고. 독자는 퍼즐이 맞춰지듯 하나씩 제자리에 끼워지는 '사실' 안에 감추어진 '진실'을 찾아내야 하는 '배심원'이 된다.
<우아한 거짓말>을 통해 작가가 제기하는 현상은 '청소년 자살' 문제이다. 창밖에서 서럽게 울던 낯선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처럼 자살하는 청소년의 문제는 그렇게 내 삶 '밖'에 존재하는 현상이었는데, '천지'의 자살은 울음소리를 들으면서도 구경꾼으로 살아가는 나의 무관심에 죄책감이 들게 했다. '천지'를 떠나보낸 뒤에야 비로소 아파했던 '천지'가 보이기 시작했고,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힘들게 했을까를 뒤늦게 추척하는 엄마와 언니 '민지'는 지난 날의 흔적을 파헤치며 '관계자'들을 하나씩 밝혀낸다.
'천지'가 각각 선물한 '다섯 개의 봉인 실'은 '관계자'들을 한 명씩 소환한다. 천지는 단짝을 가장한 친구 김화연에게 교묘한 괴롭힘을 당했었고(화연이의 엄마는 화연이가 못된 짓을 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둠으로써 동조했고), 친구이면서 친구가 아닌 미란이는 그런 천지를 멍청하게 생각했고, 언니 만지는 자기 방식대로 반응하며 천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못했고, 천지의 엄마는 천지의 문제를 가볍게 생각했다. 작가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으로 그들을 엮어내며 한 사람씩 심판대 앞에 세운다. 그리고 그들의 '우아한 거짓말' 속에 또와리를 틀고 있는 징그러운 진실, 잔인하고 무자비하고 역겨운 위선과 교활하고 비열한 이중성. 그 죄가 밝혀진다.
미란이의 죄. "천지는 멍청한 게 아니라 착한 거야. 착한 애는 가만히 놔두면 되는데, 꼭 가지고 놀려는 것들이 생겨서 문제지. 자기 맘에 들면 착한 거고, 안 들면 멍청한 건가?"(195)
화연이 엄마의 죄(그리고 곧 화연이의 죄). "사과하실 거면 하지 마세요. 말로 하는 사과는요, 용서가 가능할 때 하는 겁니다. 받을 수 없는 사과를 받으면 억장에 꽂힙니다. 더군다나 상대가 사과받을 생각이 전혀 없는데 일방적으로 하는 사과, 그거 저 숨을 구멍 슬쩍 파놓고 장난치는 거에요. 나는 사과했어, 그 여자가 안 받았지. 너무 비열하지 않나요?"(210)
그리고 화연이의 죄. "너 말 참 우아하게 한다. 불쌍해서 못 했다고? 말은 못 하면서 행동은 어떻게 했니? 천지가 떠날 정도로 지독하게? 그냥 조금 더 가지고 놀고 싶었어요, 그게 네 진심 아냐?"(220)
천지보다 더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져 천지를 '우아하게' 돕고자 했던 미란이, 딸의 숨겨진 의도를 알면서도 모른 척 '우아하게' 자장면 한 그릇을 내밀며 천지에게 굴욕을 안겨주었던 화연이의 엄마, 그리고 친구인 척 가장하여 '우아하게' 천지를 괴롭했던 화연이, 그 '우아함'이 사람을 잡았다. 그 더럽고 냄새나고 역겨운 '우아함'이 폭력보다 더 잔인하게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멀쩡한 사람도 미치게 만든다는 것을 천지는 죽음으로 알렸다. 누구 하나 죽지 않고서는 끝나지 않을 일이라면 천지가 끝내야 했다. 손 내미는 천지에게 무심했고, 천지의 경고조차 무시했던 '관계자'들은 더 이상 자신을 변호할 말이 없다.
천지의 엄마와 언니 만지는 사랑하는 천지를 잃어버린 것으로 충분한 형벌을 받았으니 석방이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기억과 후회의 짐을 지고 살아가리라.
그러나 <우아한 거짓말>을 통해 김려령 작가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천지가 자신에게 남긴 '다섯 개의 봉인실 중 그 다섯 번째"라고 믿는다. '죽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끝내버린 '천지'가 바로 이 사건의 마지막 관계자이면서, 용서할 기회도 용서받을 기회도 잃어버린 가장 나쁜 관계자이다. 이 땅의 청소년들이여, 아무리 힘겹더라도 부디, 살아주기를.
만지와 화연이 찾아내지 못한 '마지막 털실 뭉치'를 우리가 찾아내야 한다. "잘 지내니?"라는 그저 진심어린 한마디 안부의 말이 자살하려는 '천지'를 지켜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