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 - 상처에서 치유까지, 트라우마에 관한 24가지 이야기
김준기 지음 / 시그마북스 / 2009년 7월
평점 :
다른 사람이 우리를 화나게 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
(카를 구스타프 융).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라는 진단명은 상당히 거창하고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나 <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을 읽어 보면 그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주변의 이야기 그리고 바로 나의 이야기일 만큼 흔한 질병이다. 다만, 살면서 단 한 차례도 ’충격’을 받은 일이 없다면 예외일 수 있지만 말이다.
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진단을 받은 분을 알고 있다. 그분은 자주 머리가 아프다고 하셨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치료할 방법도 없었다. 평범한 남편의 아내로, 착하고 모범적인 두 딸의 엄마로, 늘 부지런하고 씩씩하게 사는 분이셨기 때문에 그분에게 다른 어떤 문제가 있다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나중에야 그분이 신혼시절 허리 디스크를 심하게 앓았고, 큰 수술을 받고 누워있을 때 시아버지 되시는 분이 당신 아들의 인생을 망칠 며느리라고 식칼을 들고 쫓아와 당장 내 아들과 헤어지라고 위협했으며, 그때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그 자리에서 맨발로 도망친 경험이 있음을 알았다. 이분의 두통이 이때의 일로 생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진단을 받았고, 상담 치료를 받은 몇 년을 괴롭히던 두통이 거짓말 처럼 사라졌다.
’트라우마’(Trauma)란 ’일반적인 인간 경험의 범주를 넘어서는’ 충격적인 외상 사건을 경험한 후 그 후유증으로 발생하는 장애를 말한다(30). 충격적인 외상 사건이란 강렬한 두려움과 무력감을 동시에 경험하게 하는 충격을 말하는데, 대개 신체적인 안녕이나 목숨을 위협하는 비인간적인 폭력성과 연관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한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상실과 연관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트라우마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빅 트라우마’이다. 이것은 전쟁, 재난, 천재지변, 불의의 사고, 강간, 아동기 성폭행 등과 같이 일상을 넘어서는 커다란 사건이 한 개인의 삶에 극적인 영향을 주는 경험을 말한다. 다른 한 가지는, ’스몰 트라우마’이다. 이것은 각 개인의 삶에서 자신감 혹은 자존감을 잃게 만드는 일상에서의 경험, 사건을 말한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 친구들로부터 반복적으로 놀림을 받은 경험, 너무 급한 나머지 교실에서 오줌을 싼 경험, 발표할 때 실수를 했거나 길을 잃어버렸던 경험 등이 여기에 속한다(59). 스몰 트라우마란 작은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삶 곳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자유할 수 있는 대단히 운 좋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전형적인 특징은 극단적인 흥분 상태의 증상들(과도 각성, 재경험)과 극단적인 마비 상태의 증상들(회피와 둔감화)이 주기적으로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미 마음(정신)에 충격을 준 사건이 종료된 뒤에도 그 사건의 충격에서 계속해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트라우마의 사건들은 덫에 빠진 것처럼 영구적으로 차단되어 갇히게 된다. 그리고 망가진 레코드 음반처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우리의 몸과 마음에 외상의 경험을 불러일으킨다"(62).
그곳을 빠져나가는 최선의 방법은 그곳을 거쳐 가는 것이다(로버트 프로스트).
마음의 상처는 쉽게 드러나지 않고, 별로 드러내고 싶지도 않으며, 또 의지적으로 드러내려 해도 잘 설명될 수도 없다. 그래서 많은 경우 방치하게 되거나, 지독하게 아픈데도 잘 공감받지 못하기 때문에 치료도 쉽지 않다.
<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은 직접 자신의 문제를 드러내지 않고도, 영화 속에 나타나는 다양한 트라우마를 통해 접근하기 때문에 은밀하고도 조심스럽게 자신의 마음에 스스로 다가가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영화 속 다양한 트라우마들은 나 혹은 내 주변 사람들의 상처와 행동을 반추해볼 수 있는 좋은 거울이 된다. 영화 이야기 사이사이에 트라우마에 대한 전문적인 설명이 곁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트라우마의 정체에 대해 보다 정확한 이해도 가능하다.
<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은 트라우마의 원인과 증상과 공동 운명을 지닌 공동체의 트라우마까지 다루며 치료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에, 인지적인 측면에서 독서만으로도 어느 정도 치료가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혹시 본인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트마우마가 자신에게 있는 것을 발견하고 새롭게 분노가 폭발할 경우도 예상되기 때문에,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극심한 상처가 건드려지는 것이 조심스럽기도 하다.
지금 나와 다른 내가 되고 싶다면, 지금의 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에릭 호퍼).
문제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치유의 시작이라고 한다. 고통스러울지라도 이제 직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이 상처를 다시 헤집어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을 열어 보자. 나도 이 책을 읽으며,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어떤 기억이 건드려져서 몹시 괴로웠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은 이제 그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겠다는 의지가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