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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원리 - 스마트버전
차동엽 지음, 김복태 그림 / 동이(위즈앤비즈)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스스로 나의 생존과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어른’이 된 이후로는 희망찬 꿈으로 ’내일’을 살기보다 좌절된 꿈을 안고 그저 ’오늘’을 견디고 있는 듯하다.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어도, 늘 ’예산(비용) 때문에’, ’나이 때문에’, ’여자기 때문에’와 같은 ’안 되는 이유들’이 내 발목을 잡는다. 그렇게 주저 앉아 낙심하는 나를 향해 세상은 헛꿈 꾸지 말고 깨끗하게 포기하는 것이 평안의 근거라고 비웃는 듯하다. 살아온 날을 통째로 보면, 아마도 노래하는 날보다 한숨을 내쉬는 날이 더 많지 않았을까. 하루 하루 나이를 먹어갈수록 긴 한숨 속에 그렇게 깨어지고, 접어지고, 포기되고, 잊혀지고, 버려지는 꿈들만 쓰레기통에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다. 차동엽 신부님의 <무지개 원리>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도 쓰라린 마음을 달래며 또 몇 가지의 꿈과 기대를 쓰레기통 속에 집어넣어야 했을 것이다.
차동엽 신부님의 <무지개 원리>는 무엇이든 ’안 되는 이유들’을 몽땅 걷어서 태워버리고, ’되는 이유들’을 하나씩 들이밀며, ’이제는 안 된다’고, ’너무 늦었다’고 맞서며 강력하게 저항하는 내 안의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을 차례로 굴복시킨다.
<무지개 원리>는 세계적인 위인들을 많이 배출한 유다인 교육에 그 비밀이 숨겨져 있다. 오늘날도 모든 유다인들이 매일 아침, 저녁 최소 두 번 낭송해야 하는 ’셰마 이스라엘’이라는 말씀이 바로 그 비밀이다. ’셰마 이스라엘’은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임하는 자세를 훈련시키는 말씀이다. ’마음을 다하여’는 감성 계발을 의미하고, ’목숨을 다하여’는 의지 계발을 의미하며, ’힘을 다하여’는 지성 계발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을 ’거듭 거듭’(반복성, 지속성, 성취성)하는 것이 무지개 원리이다.
차동엽 신부님은 이 ’무지개 원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삶에 적용할 수 있는지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데, 내가 이해한 대로 요약하면 ’생각’, ’꿈’, ’말’, ’믿음’, ’반복’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언젠가 다른 동물들처럼 몸에 공격적인 무기가 없는 ’인간’이 자신보다 몇 배나 크고, 몇 배나 빠르고, 몇 배나 사나운 짐승을 잡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잡으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무지개 원리>는 말한다.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생각으로 먼저 점령하고, 원하는 것을 이미지화 해서 ’꿈’으로 만들어 품고, 그대로 될 것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믿고’, ’포기하지 말라’(반복)고.
나는 ’노트’를 펴서 생각, 꿈, 말, 믿음이라고 쓰고 내가 품어야 할 생각, 품어야 할 꿈, 해야 할 말, 그리고 그대로 되리라는 믿음을 글자로 적어보았다. 터져 나오는 욕심을 스스로 제한하며 내 인생에서 반드시 이루고 싶고, 되고 싶고, 해보고 싶은 것을 열 가지로 줄여보았다. 그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인지 묻고 또 물으며 다시 여덟 가지로 줄이고 두 가지를 여유로 남겨 두었다. 아, 노트에 적힌 내 꿈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 가슴은 희망과 희열로 벅차다. 지금의 이 희망이 다시 환경에 부딪히고, 합리와 이성에 부딪쳐 희미해질 때마다 <무지개 원리>를 다시 읽으며, 그 약속을 마음에 새기리라.
<무지개 원리>는 이미 검증된 이론이며, 차동엽 신부님의 삶이 바로 그 증거이다. 오랜 역사와 사건과 개인의 경험은 이 <무지개 원리>가 사실임을 입증해주는 객관적인 증거를 넘치게 보유하고 있다. 이제 나도 그 증인이 되어, 곧 세상 가운데서 ’오늘의 나를 가능하게 해준 에너지’는 바로 차동엽 신부님의 <무지개 원리>였다고 증언하리라. 5년 안에 말이다! (차동엽 신부님께 이 약속을 드립니다. 그리고 이 약속을 꼭 지키고 싶습니다!)
무지개를 볼 때마다 소리를 지르며 골목이나 운동장을 내달렸던 기억이 난다. 무지개는 이제 내 안에 있다. 하나님께서 창공에 걸어두신 약속의 무지개처럼, 차동엽 신부님이 약속하신 무지개 원리는 내 마음 안에 떠 있다.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는 책 한 권의 위력을 실감한다. 책 한 권이 얼마나 거센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 말이다. 나는 다시 달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