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문장 이덕무를 읽다 - 간서치 이덕무와 그의 벗들이 들려주는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내면 풍경
한정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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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문장, 이덕무를 읽다



"인문학자들은 조선의 18세기를 '위대한 백 년'이라고도 부른다"(5).



<조선의 최고 문장 이덕무를 읽다>는 18세기 성호학파와 북학파가 양대 축을 이루는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이 등장했고, 그들이 조선 인문학의 르네상스를 형성했으며, 그 중심에 '이덕무'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덕무는 "북학파 또는 백탑파라고 불리는 지식인 그룹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입니다(6). 그런데 아마도 많은 독자들에게 이덕무는 유명한 역사적 인물이면서 동시에 낯선 역사적 인물일 것입니다. '간서치'(책에 미친 바보)라는 별명으로 독서, 글쓰기 관련해서 새롭게 조명되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대하 사극이나 역사 드라마에서 비중 있게 그려지거나 조명을 받아본 적은 없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덕무는 아직 대중적이면서, 대중적이지 않은 역사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최고 문장 이덕무를 읽다>는 이 대중적이면서도 대중적이지 않은 이덕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에 미친 바보 정도가 아니라, 그가 남긴 사료를 중심으로 그가 섭렵한 학문의 깊이와 넓이를 전방위적으로 읽어냈습니다. 동서양의 학문을 두루 섭렵했을 뿐 아니라, 조선의 문물과 제도, 문화와 풍속 등 백과사전적 지식을 유산으로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책만 보는 바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 책만 보는 바보는 아니였기도 하다는 것을 이 책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빌려서라도 온갖 서적을 폭넓게 읽은 이덕무는 독서가, 문장가, 비평가였을 뿐만 아니라, 민속학자, 박물학자, 북학사상가이자 남학(일본학)의 최고 권위자로서도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그가 개인의 개성과 기호를 중시하며, 사소하고 하찮은 주변의 사물을 관찰하고 성찰하는 능력과 생활 철학을 가지지 못했다면 이처럼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학문의 세계를 형성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자는 이덕문의 이러한 인문학적 지식과 사유의 특징을 개방성, 확장성, 혁신성, 창의성이라는 네 가지 단어로 특징짓습니다. 그리고 이덕무의 이렇나 특징은 그가 "평생 성현의 삶만을 모델로 추구했던 성리학적 지식인들"을 답습하지 않고, "자신이 속한 세계, 즉 조선이라는 세계에 갇혀 있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조선의 최고 문장 이덕무를 읽다>가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이덕무의 모습과 학문의 세계 중에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겼던 내용은 바로 '영처의 철학'이라는 한 단어였습니다. 이덕무라는 한 인물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처의 철학은 "이덕무가 지형한 삶과 글쓰기의 철학"이 무엇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저자는 독자에게 짧막한 설명과 함께 아래와 같은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줍니다.


그의 나이 스물이 되는 해인 1760년(영조 36) 3월, 자신의 시문을 모아 엮은 최초의 원고에 '영처'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영처는 그가 사용했던 수많은 자호 중 하나다.글자 뜻 그대로 보면 '어린아이와 처녀'를 말하는데, 글 쓰고 독서하는 일을 전업으로 삼은 선비가 느닷없이 어린아이와 처녀를 가리켜 자신이 뜻을 둔 곳을 드러낸 까닭은 무엇인가?(35)


이에 대한 이덕무 본인의 대답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덕무는 자신이 글을 쓰는 근간에 어린아이의 천진함과 처녀의 순수함이 자리하고 있어서 '진정' 그대로임"을(36) 말합니다. 


글을 짓는 것이 어찌 어린아이가 장난치며 즐기는 것과 다르겠는가? 글을 짓는 사람은 마땅히 처녀처럼 부끄러워하며 자신을 감출 줄 알아야 한다. ... 그러나 어린아이가 장난치며 즐기는 것은 천진 그대로이며, 처녀가 부끄러워 감추는 것은 순수한 진정 그대로인데, 이것이 어찌 억지로 힘쓴다고 되는 것이겠는가?(35)


이덕무의 천진함과 순수함이 글에만 들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또한 매탕, 즉 '매화에 미친 바보'라는 자호를 지을 만큼 매화 마니아였다는 것도 이덕무라는 한 인물이 가진 매력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덕무의 새로움에 대한 시대적인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덕무의 작풍은 중국의 고문을 문장의 전범처럼 추앙하던 당시 사대부들로부터 숱한 비난을 샀다. ... 그렇다면 이덕무는 과연 옛것 곧 중국의 고문을 배척했을까? 아니다. 그는 옛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결코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생 동안 옛 문인과 학자들이 남긴 시문과 사상을 배우고 익히는 독서인의 삶을 살았다. 다만 옛것을 비슷하게 모방하거나 그대로 답습하는 일을 배척한 것이다. 그는 옛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짓을 인명창, 즉 사람 몸에 나는 종기나 부스럼이라고까지 질타했다(168).


학문의 대가로 고결한 선비이면서도 동시에 어린아이의 소꿉놀이처럼 글쓰기를 즐기며 천진함과 처녀의 순수함을 잃지 않았던 이덕무의 가르침이 한 편으로 엄중하고 매섭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천진함과 순수함이 결코 가볍지 않은 까닭입니다. 


견문과 지식을 쌓더라도 동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만약 동심은 잃어버린 채 견문과 지식에만 의존해 글을 짓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감정과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을 옮겨 적은 '가짜 글'에 불과할 뿐이다(39).



<조선 최고의 문장 이덕무를 읽다>는 이덕무라는 지식인을 통해 본 18세기의 역사(지성사)이기도 합니다. 저자의 오랜 연구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흥미위주로 읽을 수 있는) 대중적인 교양서적을 원하는 독자들에게는 다소 무거울 수도 있겠다 싶지만, 역사적인 한 인물에 대해 전문적으로 탐구한 연구서 한 권을 깊이 있게 읽는 것도 이덕무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반할 수 있는 역사적 인물을 가졌고, 그를 즐거이 연구한 연구서가 출간되어 모든 독자에게 공평히, 그리고 널리 읽힐 수 있는 시대에 산다는 것은 또다른 의미의 축복이라는 생각이 드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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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된 악인, 유다 - 누가 그를 배신자로 만들었는가
피터 스탠퍼드 지음, 차백만 옮김 / 미래의창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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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유다라는 이 사내는 그리스도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야. 

오히려 예수가 요한에게 배신을 당했다면 훨씬 감동적이면서 사실적이었을 거야. 

왜냐하면 요한이야말로 예수가 가장 아끼던 자였으니까."

- 데이비드 헤어의 연극 <유다의 입맞춤>(1988)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대사(57)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면접을 본다면"이라는 제목의 예화를 메모해 둔 것이 있습니다.


만약 한 회사가 유능한 신입사원을 뽑기 위해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대상으로 인물분석을 했다고 가정하자.

회사가 이들의 학력, 경력, 적성을 종합해 컴퓨터에 분석을 외뢰했다면 아마 이런 결과가 나왔을 지도 모른다.


야고보와 요한은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다.

도마는 매사에 의심이 많고 부정적인 성경의 소유자다.

베드로는 성격이 급해서 실수할 가능성이 높다.

안드레는 너무 내성적이어서 매사에 추진력이 떨어진다.

야고보는 혁명가적인 기질이 있어 위험한 존재다.

세리 출신 마태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제자들 중 적격자는 가룟 유다뿐이다.

그는 학식과 경험을 겸비한 인물이며 실업가의 김각과 사교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변화시킨 사람은 실격자로 판정난 제자들이었다.

세상적 판단으로 가장 유능한 가룟 유다는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예정된 악인, 유다>는 독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그를 배신자로 만들었는가?" 다윗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골리앗의 이름을 알듯이, 예수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에서는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배신자 '유다'의 이름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정된 악인, 유다>는 그 유명한 입맞춤으로 스승을 은화 30냥(노예의 한 사람의 몸값)에 팔아넘긴, 그리하여 역사장 가장 악명 높은 '배신자'로 낙인 찍힌, '유다 이야기'를 추적한 책입니다. '유다'가 아니라, '유다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그에 관한 사료가 턱없이 부족할 뿐 아니라, 얼마 안 되는 기록물의 조각들도 서로 이야기가 맞지 않으며, 교회의 역사와 함께 덧입혀지고 가공되어져 왔다는 전제 하에 저자가 '유다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구체적 내용들은 수많은 역사적 렌즈와 선입견을 거치면서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해석을 낳는다. ... 유다의 경우에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이야기가 지나칠 정도로 확대된 것이 사실이다"(33).


<예정된 악인, 유다>는 역사적 발자취를 추적하며 "유다 이야기"를 다각도에서 재조명하는데, 우선 유다는 전형적인 '희생양'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묘사된 유다의 이야기가 "문화역사학자이자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가 지적한 희생양의 특징에 정확하게 부합한다는 것입니다. "마태가 유다의 죄를 조금이라도 덜어주려 했던 반면, 다른 복음서 저자들은 유다를 유대교 지도자와 같은 사악한 자로 묘사하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다. 그들은 유다를 배신자로 낙인찍었고, 유다가 후회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희생양을 만드는 전형적인 과정을 밟은 셈이다"(119).


이런 이유를 들어, 사복음서에 기록된 유다가 허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유다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 그저 희생양이 필요해서 창조된 허구의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저자가 이의를 제기합니다. "만약 유다가 철저하게 가공의 인물이라면, 다시 말해 배신자나 희생양 역할을 맡기 위해 작가의 입맛에 따라 창조된 허구라면, 사대 복음서의 유다에 대한 기록은 심각할 정도로 내용의 일관성이 부족하다. 즉 유다를 사대 복음서 작가들의 창작으로 보기에는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거나, 시기가 일치하지 않거나, 논리적 전개가 빈약하거나, 내용이 불일치한다"(126).


"5세기부터 15세기까지 중세를 지배했던 시각에서 보면, 유다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사탄의 대변인이나 악의 화신처럼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 그려낸 모습이었"고, "중세 시대에 유다의 이미지는 열두 제자에 포함되어 언제든 구원을 받을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끝내 사탄에 항복한 자였"습니다(159).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유다의 성격과 배반의 동기, 죄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로 변모했"습니다. "심지어 유다가 정말로 죄인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이들도 생겨났"습니다(272). "유다를 사탄의 도구나 배신자로 보지 않고, 그저 잘못된 선택을 한 인간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다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시선이 혼재합니다. 유다가 타고난 악인이었기에 자발적으로 죄를 저절렀다는 시각, 신이 예비해둔 계획에 따라 사용된 것일 뿐이라는 시각, 악마에 사로잡혀 그랬다는 시각이 그것입니다. <예정된 악인, 유다>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며 시대별로 유다에 대한 해석과 이미지가 어떻게 달려져 왔는지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유대는 배신이 본인의 책임이기에 오랜 세월을 거치도록 저주를 받아 마땅한가? 아니면 유다는 신이 예비한 계획과 사탄의 계약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선과 악의 대결에서 희생된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인가?"(85)


아마도 유다가 돈궤를 맡은 자로서 탐욕스러운 제자였다는 이미지를 가진 교인이라면, 유다가 본래 선한 사람이며, 예수가 보기에는 다른 모든 제자보다 '더 뛰어난 제자'였고,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이유는 악의나 탐욕 때문이 아니라 우정과 존경 때문이었으며, 유다는 그저 예수가 명한 바를 충실히 따랐을 뿐이었다는 주장이 충격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다의 배신은 세속적인 것과 천상의 것 간에 존재하는 장벽을 허무는 과정을 돕는 행위로 봐야 한다. 한마디로 유다는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예수를 돕고 있는 셈이다"(149). 심지어, 유다의 자살이 예수의 용서를 얻기 위한 지름길이었다는 주장도 소개됩니다. "유다가 목을 매었던 밧줄이 체념한 유다의 도피 수단이 아니라 속죄의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마태의 기록에 의한 시간 순서로 볼 때) 예수가 죽기 전에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다. 따라서 예수가 부활하기 전에 지옥에 들러서 모든 고통 받는 영혼을 구원했을 때, 이미 유다도 지옥에 있었던 셈이 된다"(273).


<예정된 악인, 유다>의 저자는 유다를 악인으로 보는 시간과 반대로 그저 어쩔 수 없이 악역을 수행해야만 했던 인물로 보는 시각을 동시에 보여주지면, 저자 자신이 그리 객관적인 입장은 아니라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저주받은 제자를 축복받은 제자로 복원하고 싶은" 저자의 욕망이 스며 있다고나 할까요? "유다는 교회는 물론이고, 그 반대파도 각자의 목적을 위해 휘둘렀던 무기이자 희생양이다. 또한 유다는 사탄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신의 대리인이다"(376). 


가장 사악하면서도 불행한 자, 유다! 유다에 대한 동정심을 갖는 것이 신앙에 위배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예정된 악인, 유다>는 전형적인 유다의 이미지에 익숙했던 독자(성도)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 제자훈련 때에 유다가 지옥에 간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한 분 때문에 교회에 큰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는데, 책 한 권을 읽고 신앙이 흔들릴 정도의 믿음이라면 이 책은 신앙성장이 그리 유익하지 않은 책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비판적 책읽기가 충분하고, 세상에 회자 되는 이야기에 열린 마음으로 경청할 준비가 된 독자(성도)들에게는 보다 다양한 시각과 다각도의 성경(인물) 연구를 위한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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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인문학 - 그리스도인 작가 만들기
서상우 지음 / 가나북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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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작가 만들기 프로젝트, 크리스천 인문학! 그런데 …



대단히 독특한 콘셉트의 책입니다. 기독교, 교회, 성경, 믿음에 관해 전반적인 인문학적 지식을 나누고, 크리스천의 독서와 글쓰기를 독려하며 책 쓰기의 실전을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제목은 인문학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데, 결론적으로는 글쓰기,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책 쓰기를 권하는 데 더 최종적인 목적이 있어 보입니다. 그리하여 이 책은 크리스천 책 쓰기 실전을 다룬 독특한 콘셉트의 자기계발서처럼 읽힙니다. 


기독교 인문학, 교회 인문학에 관한 글은 꽤 짜임새가 읽고, 읽을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인문학부터 지식이 얕아보이기 시작하더니, 믿음 인문학은 갑자기 설교가 등장한 느낌이고, 독서와 글쓰기를 권유하는 크리스천 인문학부터는 사태가 심각해집니다. 페이지가 뒤로 갈수록 글과 째임새의 집중력이 떨어지고, "한 권을 책"을 쓰라고 권하고 가르치는 책인데도, 이율배반적이게도 이 책의 후반부는 마치 여러 편의 강의 원고를 그냥 목차에 추가해 넣은 느낌마저 듭니다(반복되는 내용이 많음). 그러나 가장 실망스러웠던 부분은 '교열' 부분입니다. 아마추어도 이런 아마추어가 없습니다. 



p.25

그리스도인의 자유(The Freedom of a Christian)이라는 그의 글을 통해서도 -------> 라는  //  항상 큐티(Quiet Time)을 강조한다(127)


이웃들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이라고 -------> 이웃들 안에서



p.28

그리고 과거의 위대하모가 미래의 고상함을 -------> 위대함과 ??



p.35

이 만남이라는 사건이야말로 진정한 교회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 교회라고 



p.47

이런 전통을 살려 중, 대형 교회의 분립이 가속화시켜야 한다 -------> 분립을 ??



p.67

요셉의 이 말에서 원수를 사랑하는 그 말의 의미를 -------> 사랑하라는 ??


한 명, 한명은 -------> 한 명, 한 명은    // 한 권, 한권(116)


p.77

이를 악용하여 이단을 발생하되거나 -------> 이단이 ??


갖추어어야할 기본 원리 -------> 갖추어야 할


p.113

세상 만물을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 세상 만물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p.133

오히려 받아 들이지지 않겠지만 -------> 들여지지 않겠지만


p.134

염두 해야 한다 ------->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수)


결국 아무리 진중한 내용을 한다하더라도 -------> 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이미지는 오래가기 된다 -------> 오래가게 된다


p.137

접근해야 할 줄 알아야 한다. -------> 접근할 줄 알아야 한다.


p.142

작게 써라는 진정한 의미는 -------> 작게 쓰라는 ?? 작게 써라의 ???



p.152

무엇이든 쓰는 일을 매진해야 해야 한다. -------> 쓰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p.155

글을 쓰는 흐름이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 글을 쓰는 흐름을 파악할 수 있기



p.170

타국에서도 관심을 끌 만한 책이라도 판단되면 -------> 책이라고 


p.177

책을 써야 한ㄷ. -------> 한다.



p.181

여러 번 아내 곁에서 목회를 들었습니다만 -------> 설교 ???



솔직히 이밖에도 다른 오탈자는 물론, 띄어쓰기 오류, 분장부호 오류, 어색한 문장들도 많은데 많아도 너무 많아서 귀찮아서 다 정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후반부 글들은 읽기를 포기하고 싶을 만큼 어색한 문장들 투성이입니다. 예를 들면, 

언제나 어딘가의 누군가를 감동 주기도 하고(159)

여간 쉬운 일은 아닐 수밖에 없는데(164)



시중에는 이보다 오탈자가 많은 책들이 출간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유독 이 책이 실망스러운 이유는, <크리스천 인문학>이기 떄문이며 글쓰기(책 쓰기)의 실전을 가르치는 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출판사의 잘못이 크겠지만, 초고를 쓴 저자가 "다양한 직업군의 예비 작가 코칭"과 글쓰기 "첨삭 지도"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망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크리스천 인문학>이며, 저자는 "목차를 정할 때도 반드시 기도와 명상(이것도 묵상이라고 하면 더 좋았을텐데)"(187)을 가진 뒤 진행한다고 고백하며, 성경 인문학 파트에서는 성경을 읽되 제대로 읽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습니다. 또 본문에 인용된 성경구절은 <개정개역판>이라고 밝혔습니다(256). 그런데 카톨릭계 자료를 혼용하여 글을 썼는지, 성경 인물이나 지명들의 이름이 혼란스럽습니다. 같은 페이지에서도 이삭, 이사악, 이시악(심지어 오타), 형 에사우, 베텔, 카인, 요셉, 요나, 나네베(71)라고 인용되고 있으며, 열왕기 하권(70), 고린도후서처럼 인용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겠지로 웃어넘기겠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이런 책을 내는 저자의 실수치고는 치명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가 책을 써야 한다는 논리도 억지스럽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힘주어 말합니다. "자신이 쓴 글을 누군가가 봐주고 윤문이나 교정, 교열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바로 책으로 나오기 때문에 독자들이 보기에는 어색하고, 아마추어 같은 느낌을 많이 받게 되는 것이다"(157). 이 말을 저자와 출판사에게 돌려주고 싶습니다.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더 응원하고 싶은 책이기에 어쩌면 더 엄격해질 수밖에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싫은 소리를 할지언정 내가 아끼는 사람이 나가서 욕 먹는 것은 싫으니까요. 이 쓴소리가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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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하루는 27시간이 된다 - 나만의 3시간을 만드는 46가지 작은 습관들
기무라 아키라코 지음, 김혜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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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바쁜 하루 중에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3시간'을 만드는 방법이 담겨 있다"(4).



오늘도 야근모드입니다. 사실 주말 야근을 하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학생시절에는 어른만 되면 나의 시간을 나의 맘대로 쓸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공부는 하기 싫으면 접고 놀면 그만이었는데, 업무는 내가 하기 싫다고 접을 수도, 미룰 수도 없는 일이라 일에 매이고 시간에 쫓기는 삶의 연속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하루는 27시간이 된다>는 약속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당신의 하루는 27시간이 된다>는 일본의 한 세무사가 자신의 하루를 '27시간'으로 만든 노하우를 공개한 책입니다. 세무사 시험에 합격하고 개업까지 하며 성공한 세무사로서 휴일도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는 저자는 계속되는 야근으로 심신이 피폐해지자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쎄게 찾아왔다고 고백합니다. 이 책은 저자가 직접 "6년 간의 시행착오 끝에 노동 시간을 대폭 줄여 하루 3시간의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던 생생한 체험담이기도 합니다. 시간 관리, 일정 관리, 효율적인 업무 관리를 가르쳐주는 단순한 이론서가 아니라, 이론의 실효성을 자신의 생활로 직접 증명한 일종의 '간증'이라도 보아도 좋을 듯합니다. 


이 책에서 공개하는 "하루 3시간의 여유를 확보"할 수 있는 비결은 비교적 간단합니다. 한 주에 한 단계식 적용하는 4주 프로그램과 46가지의 작은 습관들은 일하는 방식과 사고방식의 전환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일거리가 만성적으로 쌓이지 않도록 방식을 전환하고, 정신적인 여유를 확보하고, 책상이 너저분해서 물건을 찾는 데 많은 시간을 빼앗기는 비효율의 악순환을 끊는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단시간에 업무를 끝내는 4가지 포인트>

1. 하루를 어떤 식으로 보냈는지 재검토한다.

→ 야근을 해서라도 일을 잘해 보자는 생각을 버린다


2. 업무 순서를 확실히 정한다

 일을 쌓아 두지 않고 효율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방법을 모색한다.


3. 업무 환경을 효율적으로 바꾼다.

→ 물건을 찾는 시간을 제로로 만든다.


4. 업무 처리 속도를 높인다.

→ 1초라도 빨리 손을 움직을 방법을 궁리한다.


이 4가지 포인트가 큰 뼈대를 이루고, 일정 관리법, 정리의 기술, 업무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주는 사소한 습관 46가지가 속살을 채웁니다. 사소한 습관 46가지는 나의 업무 형편에 맞게 다시 재조정이 필요하지만,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한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완성에 무게를 두지 말고 진행에 주력한다거나, 장시간이 걸리는 덩어리 업무를 짤막한 과업들로 나누라는 조언 등은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를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야근이나 장시간 노동의 '습관화'이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다"(9).


저자가 가장 강조하는 포인트는 '마인드의 전환'입니다. 곧 야근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먼저 버려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시간을 얼마든지 써도 좋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으면 효율화, 즉 '편해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게 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지금껏 야근으로 해결해 왔던 일을 다음 날 아침에 하자!"는 것입니다. 저자는 하루 3시간 확보를 위해 매일 3시간 일찍 출근하는 습관을 들였다고 고백합니다. 3시간 확보를 위해 3시간 일찍 출근하는 것을, 산술적으로 생각하면 특별한 비법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핵심은 '아침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과 '단시간 집중을 습관화하는 것'이다. 아주 사소한 비법과 생각의 변화로 하루를 더 신나게 보낼 수 있다"(12)는 것입니다. 


실제로 야근을 한다고 남아도 저녁을 챙겨 먹고 뭐하고 하다 보면, 일에 집중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또 야근을 한다고 생각하면 일하는 속도가 느려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아침시간은 다릅니다. 저자는 시간을 분단위, 초단위로 쪼개어 쓰며, 집중력이 높은 아침 시간을 활용하여 일을 하면 얼마든지 저녁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실제로 저자는 3시간 조기 출근을 하며 확보한 3시간을 자신을 위한 투자에 집중한 덕에 여유는 물론, 삶의 질도 높아졌다고 자랑합니다. 3시간의 여유 시간 동안, 각종 취미 생활, 블로그 운영, 세미나 강사로 활동하며 활동의 폭이 넓어진 덕에 연봉도 배로 올랐고 4년째 유지 중이랍니다. 

<당신의 하루는 27시간이 된다>는 사실 대단한 비법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깨알팁입니다. 그러나 사고방식의 전환 하나, 작은 습관의 변화 하나가 불러일으키는 파장은 어마어마합니다. 이 책을 읽어보니 정말 저절로 얻어지는 것, 쉽게 얻어지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변화를 원한다면 그만큼의 고민과 작아도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니까요. 이 책이 가르쳐주는 노하우가 시시할 수도 있지만, 알고 실천하는 것과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것과 아예 모르는 것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차이입니다. 야근이 일상이신 분, 만성피로에 시달리시는 분, 열심히 하는 데도 일이 자꾸만 쌓여가는 분, 여행을 떠나고 싶어도 도무지 시간을 낼 수가 없는 분, 이렇게 시간을 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시는 분들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일독을 권합니다. 작은 습관의 변화 하나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선물해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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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보낸 자 요셉 - 영화편 김남국 목사의 창세기 파헤치기 4
김남국 지음 / 두란노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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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꿈의 사람이 아니라, 먼저 "보냄을 받은 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할까?


<앞서 보낸 자 요셉>은 김남국 목사님의 <창세기 파헤치기> 시리즈 중 네 번째 책입니다. 그리고 '영화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중 아브라함이 '칭의의 상징'이요, 야곱이 '성화의 상징'이었다면, 이번 책에서 다루고 있는 요셉은 '영화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갈 때나 가능한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왜 요셉을 영화의 모델로 삼을까요?"(13)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이 이것이요, 답변은 이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사람"(14)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영화의 모델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이 책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요셉이 "앞서 보낸 자"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꿈꾸는 자, 꿈의 사람'이라고 부르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앞서 보낸 자'라고 부르셨습니다"(15). 요셉은 꿈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에 순종한 자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꿈을 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뜻)이 요셉을 이끌어 가셨다는 뜻입니다. 비전이라는 명목 하에 자기 욕심, 자기 야망에 붙들린 사람이 아니라, 고된 노동과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꿈, 하나님의 뜻에 붙들린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꿈의 사람이 아닙니다. 꿈은 하나님이 꾸게 하셔야 꿀 수 있습니다. 꿈은 요셉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낼 뿐입니다. 요셉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먼저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162).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가고 있을 때는 형통하다고 말합니다"(54). 성경은 요셉이 노예로 팔려 갔을 때도, 죄수로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을 때도 그가 형통하였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주목하고 바라봐야 할 것은 어린 나이에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싸움을 한 요셉입니다. 


<앞서 보낸 자 요셉>는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진리를 선포하고, 영혼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는 독설도 주저하지 않는 김남국 목사님다운 메시지가 시원시원하게 선포되며 답답한 현실의 벽을 뻥뚫리게 해줍니다. 그리고 우리 하루치의 싸움에 집중하도록 도와줍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기 원하며, 창세기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고 요셉의 입체적인 모습을 통해 나의 신앙을 점검하기 원하는 성도님들께 일독을 권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붙들어주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요셉은 인생을 하루씩 살았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심지어 애굽의 궁정에서도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하루치 고통을 견뎠고, 하루만큼의 전쟁을 치렀습니다. 우리 신앙의 싸움은 하루를 어떻게 사느냐에 달렸습니다. 과거는 주님께 맡기고, 미래는 주의 손에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루를 잘 살아내면 승리한 것입니다. 사탄은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하루만 망치면 된다는 것을... 그러면 인생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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