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자정쯤 시작한 100분토론. 누구 누구 나오는지만 보고 자야지, 했다가 심상정 언니가 나오는 바람에 의리 없이 혼자 잘 수 없어서 좀더 보기로 했다. 그 자신을 위해서라도 방송에 나서기보다는 경찰의 보호를 받아야 할 것 같은 뉴라이트씨, 정말이지 화장이라도 창의적으로 헀으면 좋겠는 한나라씨를 보고 있자니 속이 부글거려서 심언니 미안, 속으로 말하고 잠을 청했다. 잠이 안 왔다. 계속 잠이 안 왔다. 아침에 겨우 일어나 비척비척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나는 진보신당의 당원이 되었다. (이 부분에서 진보신당은 특히 나경원 의원에게 감사해야 한다.)
나는 세계가 안전한 장치에 의지해서, 정해진 기제에 따라 움직이길 바라는 사람이다. '훈육'까지는 아니어도 어린이들은 엄하게 키워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역동적인 변화보다는 믿을 만한 전통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나는 진보신당의 당원이 되기엔 적절치 않은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왜 입당했느냐. 나에게 당적이 필요했기 때문이고, 적어도 내가 보기에 기존의 정치권에는 당적을 두고 싶은 당이 없기 때문이었다. 진보신당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차선의 선택인 것이다.
지난 주 내내 나는 참 고민이 많았다. (이 사태가 지금 일어났으니 망정이지 죽도록 바빴던 지난 달에 터졌으면 회사 못 다닐 뻔.) 물대포가 고민의 분수령(!)이었을 것이다. 탄핵 때와는 다른 촛불의 온도도 나를 떨게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화가 막 난다. 내가 알기로 우리나라는 대의민주주의로 운영될 텐데. 왜 이 많은 사람들이 바빠 죽겠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돼? 야당의원들이 옳다꾸나 국회등원을 거부하면서 누가봐도 어색하게 구호를 외치는데 뒤통수를 한 대 딱 때려주고 싶었다. 우리 각자 낮에 일하거나 공부하거나 일거리를 찾거나 그러거든? 그러니까 너네 일은 너네가 똑바로 해야 할 것 아냐? 그러라고 뽑아놨더니 이것들이 진짜. 아,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나. 대운하 터지면 또 거리로 나와야 하나?(그래야겠지.) 수돗물 민영화 발표하면? (나와야겠지) 기타 공기업 민영화하면?(나오자.) 이런 젠장. 개헌해! 이게 무슨 대의민주주의야?
그런데 더 생각해보니까 직접민주주의라고 답이 아니다. 그리고 사실 이명박, 직접민주주의로 우리가 뽑았다. 나는 안 뽑았다, 너는 왜 뽑았냐, 따지자는 얘기가 아니다. 거리에 나선 수많은 인파 중에는 분명, 이명박을 뽑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 안에서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강요하거나 그들을 탓할 생각은 없다. 다만 문제의 핵심은 정당정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에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보았다. 이 많은 사람들이 다중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름답지만 우리에겐 이 목소리를 나라를 운영하는 힘으로 만들어줄 장치도 필요하다. 정당이 필요하다. 차선의 정당이라도 필요하다. 한나라당도, 사회당도, 민주노동당도, 민주당(요즘 최고 밉지만)도 어디든 좋으니 각자의 정당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이 촛불 집회의 다음 단계라고 생각했다. 졸린 눈을 비비면서 진보신당 홈페이지를 찾아가 당비를 내고 당원이 되었다. 어쩐지,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클레어씨와 함께 광화문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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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언니들이 많이 와야 할 텐데. 귀여운 남자들도, 섹시한 오빠들도 많이 와야 할 텐데. 그래야 어느 언론에서 찍어가든 예쁜 그림들이 나올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시청앞에 도착하니 어차피 다들 예뻤다. 하여간 뭘 하든 예뻐야 한다. 애고 어른이고 다 예쁜 사람들이 왔다. 교복을 입은 여중생들이 정말로 전경차에 꽃을 던졌다. "오빠, 받으세요~" 그러자 뒤에 있던 아저씨들이 우렁차게 따라했다. "오빠, 받으세요." 교통이 차단된 세종로 바닥 여기저기에 낮부터 그냥 앉아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어? 누구누구야!" 하고 인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지간한 사람은 헤어진 애인도 만나겠다. 유모차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아기가 예쁘다고 덕담을 주고받았다. 예쁜 강기갑아저씨한테 싸인 받으려는 사람들 줄이 끝이 없다. 거리는 난장판. 여기저기서 노래 부르고 떠들고 난리다. 곳곳에 재치 넘치는 촌평이 넘쳤다. (이명박, 모든 국민을 카피라이터로 만드는구나.)

대통령 너 기분 나쁘면 이번호로 전화해, 맞장 뜨자.

고기 양보하긴 처음이다. ㅠ_ㅠ

약간 울컥했다. '안티 이명박 대구경북'.... 클레어씨 왈, 그간 얼마나 힘들었을까.
무엇보다 나는 예쁜 언니들이 많이 와서 좋았다. 하이힐 레이스 스커트 명품 가방 언니들이 모여서 아그르르 소리를 내면서 웃고 있었다.

깃발 색깔 봐라. ♡
이 언니가 대장인 듯한데, 다른 언니들한테 하는 얘길 가만 듣고 있자니 이렇다. "아까 어떤 여자분들이 막 지나가시는데요, 정말 너무 예쁘신 거예요. 그러니까 옆에 지나가던 예비역 옷 입은 분들이요, "와아 예쁘다~" 이러면서 막 휘파람 불고 그러는 거 있죠. 근데 그 여자분들 등 뒤를 보고 다들 깜짝 놀랐어요." 그 등 뒤, 나도 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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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서체와 ^^의 쎈스. 이날 내가 본 최고 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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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웬디양님과 나는 그 인파 속에서 용케 서로 알아봤다. 그녀는 예뻤다. 여전히 예쁜 아프님도 만났다. 클레어 씨가 처음 본 아프님께 (시국이 안정되면) 소개팅을 제안했다. 이명박이 별걸 다 하는구나. 마노아님은 여전히 환하고 예쁜 눈으로 "고시철회 협상무효, 이건 너무 약해요. 딴 거 없어요?" 했다. 멜기세댁님은 아프님 서럽게 미모로웠다. 아마 그 밤에는 나도 조금은 예뻐 보였을 것이다. 꼭 내가 천하장사 쏘세지를 돌려서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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