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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교수의 예수를 믿는다는 것 - 백년 믿음으로 바라본
김형석 지음 / 두란노 / 2021년 1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고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함]
100세 철학자의 믿음의 길
이 책은 102세 철학자인 김형석 교수의 신앙관을 이야기하고 있다. 크리스천[christian]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현재까지 한국의 가장 큰 종교는 기독교이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종교가 있는 국민은 43.9%, 없는 국민은 56.1%였다. 전체 조사 대상자 중에서 개신교를 믿는다는 사람이 19.7%(967만명)였고, 불교를 믿는다는 사람은 15.5%(761만명)로 나타났다. 천주교는 7.9%(389만명)였다. 인구의 약 20%가 기독교+천주교 신자라는 소리인데 아직도 사회 곳곳에 어둠이 만연해 있는 사실을 외면할 수가 없다. 물론 개신교도들의 헌신과 사랑으로 수 많은 곳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단체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점점 세상은 악해져가고 사람들은 그런 악한 세상의 흐름에 동조하고 있다. 자살을 하는 연령은 점점 낮아 지고 살인을 비롯한 흉악한 범죄는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다. 또한 물질만능주의에 태어나는 순간 빠진 채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겐 명예, 양심, 존경이라는 단어는 어색한 말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이런 현실 속에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으로 14세 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자라며 널리 복음을 전파하는 김형석 교수의 신앙관을 한번 들어보자.
신앙은 인격적 체험에 속한다. 신앙적 체험을 겪은 사람은 후에 그 체험 내용을 이론적으로 정리하게 되고, 신학을 먼저 택한 사람은 후에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완전한 신앙을 갖게 된다. 저자는 먼저 체험을 했고 그 체험의 내용을 서서히 이론적으로 정립해 가는 순서를 밟았다. 저자는 교회가 사회의 덕이 되지 못하는 행동, 행위들을 통해 몇 가지 신앙 자세를 정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나는 기독교를 기성 교회의 독점물로 삼는 것도, 교회의 울타리 안에 가둬놓는 것도 옳지 않다는 생각이다. 교회의 개선과 더불어 울타리 밖에서도 기독교 정신은 성장하며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는 신념이다. 또 하나는 사랑의 실천이다. 크리스천들의 사랑은 대단히 편협하게 이해되고 실천해 왔다. 개인의 자기위안적 사랑이 사랑의 전부인 듯 착각해 왔다. 사랑이란 인간의 선한 가능성을 뒷받침하며 사회 정의와 질서를 지켜 주는 것이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보다 경제를 발전시켜 가난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보다 사회 질서와 윤리 기강을 확립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뜻이 나의 사명이 된다고 해서 내가 하는 일이 최고이거나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회적 사랑의 실천 자체보다 그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인간 개혁이 선행돼야 한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최후의 목적은 인간을 위한 봉사라는 대답 이상을 얻을 수 없다. 기독교는 인간에의 봉사가 최고의 목적임에는 틀림없으나 완전한 봉사는 우리의 회개와 거듭남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러우진다고 확신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으로 구원을 얻으며 그 구원은 종국에는 영원에 이르는 것으로 완성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위대한 결단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참 신앙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첫째, 양심의 회복이고 둘째,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 셋째, 휴머니즘에 동참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 선악보응의 역사적 심판을 강조하는 종교이다. 그 점에서는 구약과 신약에 차이가 없다. 오히려 기독교가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사실은 엄연한 역사적 심판 때문인지도 모른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란 역사 속에서 역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이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역사 종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역사적 심판에 능동적,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는 흘러가는 역사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을 위해 노력하는 종교이다. 기독교는 신(神)학이 아니라 신(信)학을 가진 종교다. 신(神)학은 옛날에도 있었고 기독교 이외에도 얼마든지 있다. 무신론자에게도 신(神)학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믿음의 학문적 이론과 체계를 원한다. 무엇을 어떻게 믿는가가 관건이다. 물론 신(神)학과 신(信)학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철학자들의 신(神)이 학문적 접근에 중점을 둔다면, 기독교의 신(信)학은 교회와 믿음이 그 중심을 이룬다.
일주일 내내 뛰어도 생계가 유지되지 않는 근로자에게 일요일에는 쉬면서 교회에 나오라는 말이 통할 리 없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신부나 목사들은 교회에 나올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을 부두나 광산으로 찾아 나선다. 양들이 따라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양떼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목자의 직책이 더 귀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신앙 자체가 생활이기 때문에 말보다 생활, 요구보다 모범, 시키기보다 섬기는 자세로 교회생활을 이끌어가야 한다. 만일 그렇게 살아간다면 지금 당장 눈에 띄지 않아도 더 많은 전도와 더 값있는 교회 생활을 영위해 갈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은 앎이 아니라 신념이며, 신념은 실천을 통해 얻는 확신이다. 그러므로 믿는 대로 이러우진다는 것은 실천의 신념을 뜻한다. 삶의 결실을 이웃과 사회에 전할 수 있는 것이 신앙인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교회가 많은 재물을 소유했을 때 과오를 범하는 경우가 많았다. 종교개혁 전후로 교회가 많은 재산을 소유했고 가난한 백성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기보다 피해를 주었다. 하나님 앞에서의 풍요로움은 가난한 사람들을 풍요롭게 해주는 일이다. 으리으리한 교회 건물 주변에 있는 오막살이나 빈민촌을 보면 마음일 편할 수 있는가. 수많은 빈민과 실업자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치는데 교회만 풍족한 생활을 즐길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풍요로움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풍요로움은 모든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값지게 쓸 때라는 가르침이다.
김형석 교수의 글을 읽고 있으면 교회를 벗어나 진리르 전하고 실천하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우물안 개구리처럼 교회 내에서 리더, 조장, 순장, 팀장, 교사 등 귀한 일을 감당하지만 세상에선 아무런 영향력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과 모욕을 피해 교회로 더 몰려드는 청년들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목사님의 설교나 성경 공부가 아닌 자신이 성경을 통해 직접 깨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고 주변에게 보여주는 노 철학자의 이야기를 통해 교회 생활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많은 이들에게 경각심으로 또한 교회라는 단어의 부정적인 생각에 함몰된 많은 비기독교인에게 진리가 무엇인 지 알려주는 좋은 책인 듯 하다.
<인상 깊은 구절들>
크리스천이 돈다는 것은 자기 직업에 더 성실해진다는 것이며 모든 일을 가장 신앙인답게 실천하는 일이다.(31p)
신앙이란 내 생명보다 더 귀한 무엇을 위하여 내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다.(32p)
예수(https://blog.naver.com/chihanjjang/222009869492)
백년의 독서(https://blog.naver.com/chihanjjang/222400144461)
기독교, 아직 희망이 있는가?(https://blog.naver.com/chihanjjang/222413808978)
삶의 한가운데 영원의 길을 찾아서(https://blog.naver.com/chihanjjang/221796052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