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슬로우 영성 - 영적 무감각에 빠뜨리는 '바쁨'을 제거하라
존 마크 코머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1년 8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고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함]
영적 무감각에 빠뜨리는 '바쁨'을 제거하라
이 책은 이 시대에 걸맞는 영적 훈련을 통해 삶에서 바쁨을 가차 없이 제거하고,흐릿해진 영적 삶을 선명하게 되살리라는 초대를 하고 있다. 사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영악하다. 오늘날 사탄은 성경책을 펴고도 휴대폰을 힐끗거리거나, 매일 밤 지친 몸을 소파에 누이고 밀린 넷플릭스 드라마를 따라잡거나, 인스타그램에 중독되거나, 주말에도 회사에 출근하거나, 축구 중계를 빠짐없이 챙겨 보느라 바쁜 삶의 형태로 나타난다.
현재 문화는 느린 것은 나쁜 것이고 바쁜 것은 좋은 것이라는 메시지를 준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거꾸로 나라에서는 가치 체계가 완전히 뒤 바뀐다. 바쁨은 사탄의 속성이고 느림은 예수님의 속성이다. 예수님은 살과 피로 이루어진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나라의 핵심 속성인 사랑과 기쁨과 평안은 예수님이 우리 삶에 불어 넣으시려는 모든 것의 핵심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바쁨과 양립할 수 없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인들의 삶은 청교도 법률에 따라 가게들이 안식일에는 문을 닫았다. 정부가 국민들의 삶의 속도를 강제로 제한했다. 당시에는 온 도시가 평일에는 저녁 6시에 문을 닫고 일요일에는 종일 쉬었다고 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스마트폰 사용자들은 평균 하루에 2617번 자신의 스마트폰을 만진다. 스마트폰으로 하루 평균 76번 작업을 하며 하루 중 2시간 반을 사용한다. 밀레니얼 세대(Millennial Generation, 1980년대 초(1980~1982년)부터 2000년대 초(2000~2004년)까지 출생한 세대)를 대상으로 한 또 다른 연구에서는 이 수치가 두 배로 높게 나왔다.
현대 세상의 유행병인 조급증 (躁急症, hurry sickness)은 계속해서 급히 뛰어다니고 불안해 하는 행동 패턴, 만성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껴서 모든 일을 더 빨리 하려고 하고 뭐든 지체되면 허둥지둥하는 병이다. 계산대에서 더 짧고 빠른 줄로 옮겨 가거나 운전 중에 앞에 있는 차들이 가장 적거나 가장 빠르게 이동하는 차선을 타거나 한 가지 일을 잊어버릴 정도로 멀티태스킹을 하는 사람은 조급증을 앓고 있다.
아래 10가지는 저자가 생각하는 조급증 증상들이다. ➀성마름, ➁과민성, ➂쉬지 못함, ➃일 중독, ⑤감정적 마비, ⑥그릇된 우선순위, ⑦몸을 돌보지 않음, ⑧도피주의적 행동, ⑨영적 훈련의 부재, ⑩고립
바쁨은 정서적 건강에만 나쁜 것이 아니라 영적 삶에도 해롭다. 바쁨은 관계를 죽인다. 사랑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바쁘면 그럴 시간이 없다. 바쁨은 기쁨과 감사를 죽인다. 바삐 달려가는 사람은 순간의 아름다움을 음미할 시간이 없다. 바쁨은 지혜를 죽인다. 지혜는 조용하고 느린 순간에 탄생한다. 지혜는 나름의 속도가 있다. 지혜를 얻으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바쁨은 우리 사회에 풀려난 반사회적 맹수다.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관심은 가장 희소한 자원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보물을 따라간다고 말씀하셨다.(마 6:21) 대게 우리는 ‘보물’을 두 가지 기본적인 자원, 곧 시간과 돈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귀한 자원은 바로 관심이다. 관심이 빠지면 우리의 영적 생명은 세상 빛도 보지 못한 채 영적 자궁 속에서 사그라져 버린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가장 중요한 것을 중심으로 삶을 단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침 출근길 버스에서 모바일 게임을 하는 20분이면 친구들과 가족들의 이름을 빠짐없이 불러 가며 기도할 수 있다. 잠자기 전 텔레비전을 보는 한 시간이면 6개월 만에 성경 전체를 읽을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6절에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답은 예수님을 따르면 된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 말씀을 읽으면 예수님의 초대는 그분의 멍에를 메라는 것이다. 그분의 곁에서 함께 살면서 삶의 무게를 편하게 짊어지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탈진한 사회에서 빠져나와 영혼이 쉬는 삶으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도제들에게 삶의 무게를 짊어질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신다. 쉽게, 그분과 나란히. 서로의 어깨를 연결하고 같이 일하는 밭의 두 소처럼.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속도로. 천천히. 서두리지 않고. 현재에 집중하면서. 사랑과 기쁨과 평안이 가득한 채로. 쉬운 삶은 없다. 쉬운 멍에만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서두르지 않는 삶을 보여 주셨다. 언제나 하나님을 위한 시간과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최우선이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그분의 나라를 우선시하셨기 때문에 쓸데없는 것들에 끌려다니지 않으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의 의미는 간단하다. 예수님이 사신 방식대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영적 훈련을 가장 먼저 하고 나서 잠, 운동, 일, 놀이, 독서, 여가 생활 등을 한다.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 원칙을 고수한다. 사실 이 개념은 천 년 전 수도원에서 시작되었다. 생홀 수칙은 예수님의 길에 따라 일정과 습관을 정돈한 것이었다. 삶의 속도를 늦추는 방법이다. 저자는 바쁘지 않는 삶을 사는 네 가지 방법을 추천한다. 첫째는 침묵과 고독 훈련, 둘째는 안식일 훈련, 셋째는 단순함 훈련, 마지막은 늦추기 훈련이다. 각각의 훈련이 왜 필요한 지 성경적 이유와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예시들이 나와 있다. 바쁨이 자랑이 되고 느림이 수치가 되어 가는 이 시대에 저자는 오히려 예수님을 닮아 가기 위해선 인위적인 느림을 지향(志向)해야 한다고 한다. 삶이 너무 바빠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들이 있다면 당장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실천해보면 좋을 듯 하다.
<인상 깊은 구절들>
이제 쇼핑은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레저 활동이다. 쇼핑은 종교의 아성을 무너뜨렸다. 아마존닷컴은 새로운 신전이다. 신용카드는 새로운 제단이다. 더블클릭이 새로운 전례다. 라이프스타일 블로거들이 새로운 제사장들이다. 돈이 새로운 신이다. 예수님이 언급하신 유일한 신이 맘몬(돈의 신)인 데는 이유가 있다(마 6:24) 그것은 맘몬이 그만큼 지독히 나쁜 신이요 나쁜 종교이기 때문이다.(200p)
책을 읽으면서 머릿 속에 예전에 들었던 이재철 목사님의 설교 중 한 부분이 기억이 났다. 이 부분을 다시금 머릿속에 기억하며 오늘 하루를 살아야겠다.
조남철 선교사님의 설교 중 일부
<그 날이 오면 -이재철 목사 설교1>
오늘 밤 나에게 죽음이 임한다면 나는 그 죽음을 정말 평화롭게 맞이할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내세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소망이 없다면 죽음은 두렵고 피하고 싶고 세상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재수 없는 이야기 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깊이 생각하면 우리의 삶은 진지해 질 수밖에 없고, 우리의 영혼은 더욱 맑아지기 마련입니다.
이재철 목사의 설교에 의하면 지방에 있는 카톨릭 사제들의 묘지 입구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 동료 사제의 시신을 메고 이 글을 눈으로 마음으로 읽으며 그 공동묘지를 드나드는 사제들의 삶은 얼마나 진지해 지겠습니까?
또 터키의 공동묘지에는 이런 비문도 있다고 합니다. 나 어제 너와 같았으나 너 내일 나와 같으리 지나온 삶을, 앞으로 남은 삶을, 얼마나 숙역하게 해 주는 글인지요. 우리가 서 있는 자리보다 더 중요한 자리는 우리가 머물렀던 자리입니다. 지금 우리는 남편과 아내, 사랑하는 가족들과 죽음 이후의 삶을, 공동묘지 너머의 삶을 얼마나 나누고 있습니까? 공동묘지를 넘어서지 못하는 믿음으로는 눈에 보이는 그 너머의 삶을 나눌 수 없습니다.
내일은 내 차례요. 그 다음 날은 너 차례요, 또 그 다음 날은 우리들 차례인데 무슨 욕심낼 것이 그렇게도 많습니까? 왜 그렇게도 움켜줄 것이 많습니까? 움켜잡으면 잡을수록 배고픔과 허무감만 더 커지는데도 말입니다. 사람을 욕심에서 벗어나 속되지 않게 해 주는 분명한 것으로는 내세에 대한 소망만 한 것이 없습니다.
이 소망이 희미하다면 영적 오지 중 오지인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에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평생 짝퉁 그리스도인으로, 평생 불구자이면서도 아닌 것처럼 스스로 속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생명처럼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순간까지 무엇에 주리고 목말라 해 왔습니까? 복음에 주리고 하나님의 의에 목말라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재산은 지켰지만 깨어진 가정은 얼마나 많습니까? 건강은 지켰지만 영적으로 중환자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노후대책은 철저하게 세웠는데 영혼의 최종 대책은 전무하지 않습니까? 주일은 꼬박꼬박 지키면서 열심히 헌금도 했지만 삶 속에서는 진리의 생명력이 없이 거짓된 기쁨으로, 평안으로 감격으로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잠깐 있다가 없어질 세속의 천박한 것들에는 목숨을 걸면서도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으로 사는 우리들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내가 정말 포기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내가 정말 내려 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정말 희생한 적은 있었습니까? 포기와 희생은 영혼의 안경을 쓴 사람에게만 가능합니다. 공동묘지 너머의 삶을 바르게 인식한 사람만 포기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할 때 희생할 수 있습니다. 이 생과 세상을 너머 죽음과 무덤을 너머 그 너머에 있는 본향을 우리는 얼마나 고대하고 또 소망하고 있습니까? 지닌 것이 너무 많아 아직은 아닙니까? 누리는 것이 너무 많아 아직은 아닙니까? 벌려 놓은 일들이 너무 많아 아직은 아닙니까?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은 예고도 없이 별안간 찾아오는데 그 날을 늦추거나 멈추게 할 재간을 지니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본향에 대한 소망과 기다림을 지닌 사람만 영생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영생을 소유한 사람만 언제든 평화롭게 죽음을 맞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만 보이는 세계를 뛰어 넘어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위해 살 수 있습니다.
그 사람만 언제 어디서나 포기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할 때 희생 기꺼이 희생하는 작은 예수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는대로 거둔다는 말씀보다 더 큰 위로의 메시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보다 더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도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대체 무엇을 심어왔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지금 무엇을 거두기를 기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은 다 같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까지 심장의 고동이 멎는그 순간까지, 코끝에서 호흡이 멎는 그 순간까지 주어진 소명의 자리에서 각자 믿음의 경주장에서 매일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기필코 승리하시어 남은 날이 남은 삶이 주님안에서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이 시간에는 우리 부부가 아프리카에서 즐겨 부르는 복음성가 가사 한 소절을 읽는 것으로 기도를 대신하겠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주시리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