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⑤

   5. 그래도 삶은 계속되는가 (1)

   
 

    그녀는 슬픔 때문에 화석이 되었다.
    - 오비디우스

 
   





   트루디는 남편과 마지막 여행을 떠나며 마음속으로 혹독한 이별의 예식을 치러낸다. 그녀는 아름다운 발틱 해변에서 남편과 거닐며 깨달았을 것이다. 당신과 모든 것을 함께 나눠왔지만 유일하게 나눌 수 없는 것은 바로 당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트루디는 이 마지막 여행에서 그의 죽음 뒤에 펼쳐질 바닥없는 슬픔은 온전히 그녀만의 것임을 알게 된다. 여행의 끝자락에서 트루디는 남편의 죽음 이후에 펼쳐질 기나긴 어둠의 나날들을 이미 속속들이 관찰한 듯 철저한 무력감을 느낀다. 그녀는 마음속에서 그녀가 다녀올 수 없는 슬픔의 극한까지 홀로 걸어 들어간다. 아무도 그녀 마음에 새겨진 어둠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이별의 슬픔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의 공간이 사라져가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차라리 슬픔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 ‘쿨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격정적인 슬픔을 조용히 억압하는 것이 보다 침착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세상이 된 것이다. 장례식장에서도 ‘난 분명히 슬픈데 왜 눈물이 나지 않을까’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머리를 풀어 헤치고 통곡하며 슬픔을 마음껏 표현하는 사람을 ‘우아하지 못하다, 촌스럽다, 교양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장례식장에서 끝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고 슬픔을 억누르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슬픔의 에티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모든 태도에서 발견되는 것은 ‘솔직하게 슬픔을 표현하는 것은 뭔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선입견이다. 게다가 슬픔의 눈물과 통곡을 쏟아내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슬픔에 ‘승리’한 것은 아니다. 오늘 마음껏 울지 못한 슬픔은 언젠가 우리의 삶 어디에선가 적당한 자극을 만나면 오래된 지뢰처럼 속수무책으로 터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슬픔을 잘 참고 있다’고 느낄 때, 그 순간은 슬픔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너무 슬퍼서 슬프다는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는, 감정의 마비 상태가 아닐까. 

 


   트루디는 오랫동안 어떤 슬픔도 자신이 혼자 껴안고 견뎌야 한다고 믿어온 사람 같다. 가족은 물론 어떤 지인에게도 이 슬픔의 비밀을 털어놓지 못한 그녀는 남편의 등 뒤에서 남편의 시선이 잠시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을 때에야 남몰래 눈물을 흘린다.“당신은 앞으로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면 뭘 하고 싶어요?” 트루디는 마치 남의 일인 듯 심상하게 질문한다. 아직 죽음에 대해 전혀 심각하게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처럼, 루디는 가볍게 말한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라고들 하지. 하지만 뭘 어떻게 하겠어? 난 아무것도 다른 건 안 해, 아무것도. 그저 언제나처럼 아침에 출근했다 저녁에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집에 와야지.” 트루디는 이렇게 남편과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린다. 어쩌면 이미 슬픔의 극한까지 자신을 밀어붙인 트루디와 아직 슬픔의 출발선에도 서지 못한 루디와의 진정한 대화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리비도라고 부르는 사랑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이 리비도는 성장의 초기 단계에 자아로 향해 있다. 비록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리비도는 나중에 자아에게서 벗어나 다른 대상으로 향하게 된다. 물론 그 대상도 어떤 의미에서는 자아 속에 들어 있다. 그런데 그 대상이 파괴되거나 상실되면 우리의 사랑의 능력(리비도)은 다시 해방되어 대신 다른 사랑을 찾거나 아니면 일시적으로 우리 자아에게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리비도가 그 대상과 분리되는 것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 과정으로 나타나는지는 불가사의한 것이고, 아직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 만한 어떤 가설도 세워놓지 못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리비도가 어떤 대상에 집착한다는 것, 그리고 그 대상을 상실했을 때 비록 다른 대체물이 있다 하더라도 애초의 그 대상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슬픔이 생겨나는 것이다.
- 프로이트, 정장진 옮김, <예술, 문학, 정신분석>, 열린책들, 2004, 337~3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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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olet 2010-03-29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슬픈 일이 너무 많아도 사람의 마음은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 같습니다....

맨손체조 2010-03-30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化石, 火石, 花石, 히...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④ 

  4. 애도와 우울 사이에서 길을 잃다 (2)

   
 

   정신분석 안에 인간의 가슴(heart)은 어디에 있는가? (……) 정신분석적 사고에서 가슴이라는 말이 생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이나 심리치료에서 피분석자나 환자들에게 말할 때 가슴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즉각적으로, 종종 생생한 반응과 함께, 무언가가 소통되고 있다는 느낌을 발생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가슴의 필요들, 바람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방어하고 있는 그것의 상처들을 불러일으킬 때, 거기에는 대체로 생생한 충격이 발생한다. 그것은 확실히 이드나 에고나 수퍼에고를 말하는 것보다, 심지어는 무슨 리비도적 자아니 또는 내적 파괴자로 인격화된 반-리비도적 자아에 대해서 말하는 것보다 정서적으로 더 잘 접촉할 수 있는 직접적인 통로이다.
 - 수잔 캐버러-애들러 지음, 이재훈 옮김, <애도>, 한국심리치료연구소, 2009, 16~17쪽. 

 
   








   트루디는 베를린에서 오랜만에 부토 공연을 관람한다. 온몸으로 죽음 저편의 세계를 그려내는 아티스트의 몸짓은 마치 남편의 죽음 이후를 생각하는 트루디의 마음처럼 소리 없는 절규로 가득하다. 트루디의 눈빛은 이미 삶의 저편, 피안을 바라보는 눈빛처럼 아득하다. 그녀의 시선은 단지 부토를 추는 아티스트의 몸짓이 아니라 부토가 표현하는 죽음 저편의 세계에 이미 가닿은 것만 같다. 그녀는 부토의 춤사위와 함께 죽음 저편의 세계로 건너가는 듯한 표정으로, 공연 시간 내내 무용수의 몸짓과 하나가 되어 마음으로 춤을 춘다. 

 


   한편 그녀가 홀로 다가오는 죽음의 망령과 싸우고 있는 동안 자식들은 여전히 냉담하다. 자식들은 어머니가 그토록 좋아하는 부토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그녀를 공연에 데려갈 생각 또한 없었다. 엉뚱하게도 딸의 여자친구 프란치가 트루디를 공연장으로 안내한다. 트루디는 프란치의 예상 밖의 친절에 감사하면서도 남편과 자식들과의 마지막 만남을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버리는 듯하여 마음이 무겁다. 그녀의 아들딸들은 부모에 대한 사랑이 별로 없으므로 애도조차 불가능한 것일까.  



   자식들이 저마다 바쁘다며 아무도 트루디 부부를 챙겨주지 않자 두 노인은 복잡한 베를린 거리를 더듬더듬 헤매며 점점 지쳐간다. 버스표를 끊을 줄 몰라 당황하던 남편 루디는 마침내 노여운 속내를 털어놓고 만다.“여보, 나 집에 가고 싶어져.”트루디는 남편의 마음을 이해한다.“한 놈도 시간 있는 놈이 없다잖아.” 낯선 베를린 거리를 헤매는 외로운 두 노인은 비로소 자신들에게는 이 거대한 도시가 어울리지 않음을 깨닫는다. 트루디는 문득 남편과 둘만의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그래요, 우리 발틱으로 가요.” 발틱 해변, 남편이 언젠가 죽으면 그곳에 뿌려지고 싶다고 했던. 



   베를린의 마지막 밤. 트루디는 계속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의사의 선고를 들은 날부터 이미 트루디의 불면증은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남편과 자식들을 바라보며 트루디는 홀로 남아 걸어가야 할 저 수많은 나날들을 생각하며 아득해진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다면 내게 닥쳐올 저 막막한 나날들을 함께할 친구가 아무도 없겠구나. 너희들의 마음속에는 우리의 이별을 슬퍼할 만한 아무런 마음의 여유도 남아 있지 않구나. 그녀의 자식들에게는 사랑이 없기에 애도도 불가능한 걸까. 사랑이 있어야 뼈아픈 상실도 있고 사랑의 대상이 있어야 애도나 우울의 몸부림도 가능하다. 애도도 우울도 어쩌면 사랑을 지닌 자의 특권이 아닐까. 


   
 

 우울증에서 나타나는 불면증은 그 상태의 경직성, 즉 수면에 필요한 전반적인 리비도 집중의 철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우울중의 콤플렉스는 마치 아물지 않은 상처와 같이 모든 방향에서 리비도 집중을 끌어 모으고 자아가 완전히 빈곤해질 때까지 자아를 텅 비우게 된다. 이런 과정이 자아의 수면 욕구에 대한 저항 세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프로이트, 윤희기 · 박찬부 옮김,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04,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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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모 2010-03-27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애도는 사랑을 지닌 자의 특권이라...

맨손체조 2010-03-29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 흑백 사진은 도쿄 신주쿠의 어느 바에서 하염없이 아들을 기다리다 낯선 세계로 들어 가기 전의 모습?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목도리를 걸어 놓기 전의 모습? 너무 쓸쓸한 저 모습.....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③ 

  3. 애도와 우울 사이에서 길을 잃다 (1)

   
 

  애도의 경우는 빈곤해지고 공허해지는 것이 ‘세상’이지만, 우울증의 경우는 바로 ‘자아’가 빈곤해지는 것이다. 
 - 프로이트, 윤희기 · 박찬부 옮김,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04, 247쪽.

 
   




   남편의 임박한 죽음의 비밀을 혼자 간직한 트루디. 그녀는 마주치는 모든 대상들 속에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본다. 그녀의 일상을 둘러싼 모든 흔적들이 하나하나 남편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처음부터 ‘애도’도 ‘우울’도 허락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애도는 ‘남아 있는 나날’을 위해 슬픔을 극복하는 것이고, 우울은 사라진 대상과 혼자 남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아 있는 나날을 준비할 마음의 여유도, 자신의 상실감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마음의 여백도 없다. 그녀는 어떤 변화도 싫어하는 남편을 위해 그저 아무런 변화도 없는 듯 심상하게 행동한다.


   애도가 ‘의식’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슬픔의 극복 과정이라면 우울증은 ‘무의식’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감각의 마비 과정이다. 지금 트루디는 미래의 상실을 이미 처연하게 앓고 있다. 그녀는 남편이 없는 그 ‘다음’의 삶을 준비할 수가 없다. 자신과 남편을 분리할 수 없는 그녀에게 처음부터 ‘발전적인 애도’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사랑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그를 잃는다면 애도조차 불가능한 것. 그의 상실이 곧 나의 상실이기에 도저히 그를 향한 마음의 화살표를 거둘 수 없는 것.




   트루디는 불가능한 애도와 불가피한 우울 사이에서 표류한다. 그는 남아 있는 나날을 위해 슬픔을 극복하는 ‘애도’에도, 사라진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스스로의 자아를 파괴하는 ‘우울’에도 완전히 빠질 수 없다. 그녀는 애도의 희망을 가지지 않지만 우울증의 유혹에 쉽게 굴복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베를린에 살고 있는 아들과 딸에게 마지막으로 무언의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 했던 그녀는 자식들의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며 더욱 깊은 슬픔에 빠진다. 자식들은 “무슨 바람들이시래? 이렇게 불쑥?” 하고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며, 부모님이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얼마나 오래 계실 것인지부터 걱정한다. 오히려 레즈비언인 딸의 여자친구 프란치만이 트루디와 루디 부부의 외로움을 알아본다. 정작 아들과 딸은 바쁘다며 부모님을 방치하고, 처음 보는 낯선 아가씨 프란치가 루디 부부의 베를린 투어를 책임진다. 시골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아온 부부에게 거대한 도시 베를린은 한없이 불편하고 낯설기만 하다. 

   마치 ‘당신들은 절대 우릴 몰라요’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는 듯, 부모님을 귀찮은 짐짝처럼 밀어내는 아들딸의 모습을 보며 트루디는 절망한다. 그저 마지막 며칠을 함께 보내고 싶을 뿐인데, 그조차 불가능하다니. “애들 어릴 때 기억도 잘 안 나지만. 지금은 아예 저 아이들을 잘 모르겠어요.” 남편 루디는 쓸쓸한 표정으로 묻는다. “애들한테 실망한 거야?” 트루디는 체념 섞인 표정으로 대답한다. “그냥 더는 쟤들을 모르겠어요.” 루디는 오래전에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아내를 위로한다. “뭐, 다들 건강하잖아. 그럼 됐지, 뭘 바래.”  트루디는 남편의 죽음을 앞두고서야 자신과 자식들 사이에 놓인, 건널 수 없는 시간의 장벽을 절감한다. 남편이 떠나고 혼자 남을 자신의 생이 얼마나 허허로울까, 그 아득한 미래의 고독이 더욱 명징하게 인식된 것이다. 

 



   프로이트는 우울증을 단지 치료해야만 하는 질병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우울증자가 지닌 비범한 예지력을 간파했다. 프로이트는 우울증자가 진정한 자기 이해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을 포착한다. 마치 햄릿처럼. 차라리 프로이트는 왜 인간이 우울증에 걸리고 나서야, 질병에 걸리고 나서야 그런 소중한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가를 묻는다.   






   
 

아주 격앙된 자기 비난 속에서 우울증 환자가 스스로를 편협하고, 이기적이고, 부도덕하고, 독립심이 없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또 오로지 자신의 약점을 숨기는 데만 급급했던 사람으로 스스로를 표현할 때 어쩌면 그는 진정한 자기 이해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은, 왜 사람은 병에 걸리고 난 뒤에야 그런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 우울증 환자는 대상과 관련된 상실감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을 들으면 그것이 자아와 관련된 상실감이라는 것이다.
 - 프로이트, 윤희기 · 박찬부 옮김,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04, 248~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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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y2010 2010-03-24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맞다. 매력적인 우울증 환자 햄릿이 있었지요^^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② 
 

  1. ‘바람직한’ 이별은 가능할까 (2)

   
 

  애도는 보통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똑같은 종류의 상실감이 애도를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울증을 유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 프로이트, 윤희기 · 박찬부 옮김,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04, 244쪽.

 
   





   “늘 일본에 가보고 싶었다. 후지산과 벚꽃을 그와 함께 꼭 한번 보고 싶었다. 남편 없이 구경하는 건 상상할 수가 없다. 그건 구경도 아닐 테니까. 그이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남편 루디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선고를 들은 날, 아내 트루디의 독백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의사는 이미 치료시기를 놓쳤음을 알리고, 남편과 함께 여행이나 작은 모험을 시도해보라고 충고한다. “남편은 모험을 싫어해요.”

   트루디는 남편의 취향과 습관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모험은커녕 아주 작은 변화도 싫어하는 남편은 20년 동안 딱 한 번 독감을 앓은 것 빼고는 아픈 적조차 없었다. 남편 루디는 우체국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폐기물 관리국장으로 장기근속 중이다. 남편의 회사에는 폐기물 관리국에 딱 어울리는 캐치프레이즈가 붙어 있다. “재활용은 좋은 것이고 재사용은 더욱 좋다.” 루디의 성격은 바로 이 문장에 딱 들어맞는다. 그는 아무것도 버릴 수 없고,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만 같은, 지나치게 빈틈없는 사람이다. 그는 뼈아픈 상실과는 거리가 먼, 평화롭고 안전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아내 트루디가 평생 가고 싶어 했던 일본은 막내아들 칼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 그녀의 잃어버린 꿈 ‘부토(舞踏 Butoh)’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죽음의 춤, 폐허의 춤, 그림자의 춤으로 알려져 있는 일본의 현대 무용 부토는 아내 트루디가 평생 꿈꾸던 이상이었다. 트루디는 남편에게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되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후지산을 보고 싶지 않느냐고 간절한 표정으로 묻는 아내 앞에서 남편은 지나치게 심드렁하다. “후지산은 그냥 산일 뿐이야.” 그래도 막내아들을 볼 수 있지 않느냐는 아내의 말에, 남편은 더욱 무뚝뚝하게 대꾸한다. “녀석이 이쪽으로 오는 게 돈이 덜 들걸.” 남편은 모든 것을 ‘퇴임 후’로 미룬다. 아직 자신의 몸 상태를 모르는 남편은 언제나처럼 모든 일을 ‘다음’으로 미룬다. ‘다음’이 없음을 아는 트루디의 마음은 무너진다.  





   차마 남편에게 ‘당신에게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대요’라고 말할 수 없는 아내의 눈에서는 남모르는 눈물이 그렁하다. 그녀는 무사태평인 남편의 등 뒤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남편의 옷을 다리다가, 아들에게 전화해 심상하게 안부를 묻다가, 자신도 모르게 툭툭 눈물을 흘린다. 세 아이를 키우느라 힘겹게 포기했던 자신의 오랜 꿈, 그 꿈보다 사랑했던 남편을 잃는다는 생각에 그녀는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가 없는 삶을 결코 상상할 수 없는 트루디. 그녀는 자신이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듯, 감각의 마비 상태에 빠진다. 그를 잃는 것은 곧 나를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 자체는 병리적이지 않으며 지극히 ‘정상적’인 슬픔의 극복 과정일 뿐 아니라 상실을 극복하는 발전적 행위이기도 하다. 반면 우울증은 자기를 파괴하는 부정적 에너지로 작용한다. 애도와 우울증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자기애의 소멸’이다. 우울증자는 사랑하는 대상이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대상에게 집중되던 리비도를 철회하지 못하고 차라리 현실에 등을 돌리며 사라진 대상에 집착한다. 프로이트는 ‘고통의 경제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울증은 물론 애도 또한 ‘효율적’이지는 않다고 진단한다. 

 프로이트는 현실의 명령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타협이 왜 그토록 큰 고통을 안겨주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와 같은 고통을 우리 모두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엄청난 감정의 ‘낭비’를 겪는다 해도, 일단 ‘애도’의 과정을 극복한 자아는 언젠가는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다시 음식의 맛을 느낄 수 있고, 불면증에서 놓여나며, 웃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울증은 ‘대상의 상실=자기의 상실’이 되어버릴 뿐 아니라 자신이 진정으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까지 치달을 수 있다. 
  


   
 

우울증의 특징은 심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낙심,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의 중단,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 모든 행동의 억제, 그리고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을 정도로 자기 비하감을 느끼면서 급기야는 자신을 누가 처벌해주었으면 하는 징벌에 대한 망상적 기대를 갖는 것 등으로 나타난다.
 - 프로이트, 윤희기 · 박찬부 옮김,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04,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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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루 2010-03-23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후지산과 벚꽃. 생의 마지막과 너무 잘 어울리는 풍경...

맨손체조 2010-03-26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죽음의 춤이고 폐허의 춤인데, 분홍색(?) 전화기를 들고 춤을 추던 모습은 참 묘하기도, 또 묘하기도....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 

  1. ‘바람직한’ 이별은 가능할까 (1)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 김광석, <서른 즈음에>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내 몸 안에 있지만
 내가 더 이상 없으면 그 사람은 어디 있게 되지?
 내게 남은 그녀의 기억은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갈까?
 -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중에서
 
   






   내게 허락된 모든 정규교육을 마친 후 나는 자주 이런 몽상에 빠지곤 했다. 만약 나에게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새로운 과목을 개설할 자유가 주어진다면 어떤 과목을 만들어낼까. 학교에서 배운 것이 결코 적지 않은데, 왜 이렇게 나는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지, 알 수 없는 자괴감에 빠질 때가 많았다. 그렇게도 많은 과목이 있었는데 정작 인생의 커다란 갈림길에 섰을 때는 어떤 과목의 도움을 받아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내게 가장 필요한 과목은 ‘사람들을 잘 만나고 잘 헤어지는 법’이라는 걸 깨달았다. ‘관계학’이라는, 우리가 매일 고민하지만 결코 교과서와 같은 정제된 지식의 통로를 통해서는 배울 수 없는 과목.




   나는 모든 만남에 서툴렀다. 친구를 좋아하면 ‘적당히’ 좋아할 줄을 몰랐다. 애인처럼 친구를 좋아하다가 정작 친구와 크고 작은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수도 없이 친구들과 연락이 끊기곤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토록 치열했던 갈등과 서운함은 휘발되어버리고 누군가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만 남곤 했다. 대학생이 되고 나니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주로 같은 여자이며 거의 동갑내기로만 이루어져있던 여고생의 인간관계를 벗어나니, 호칭과 인사법부터 천차만별인 엄청난 인간관계의 네트워크가 펼쳐졌던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더욱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니 사람을 만나는 법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잘 헤어지는 법임을 알게 되었다. 김광석의 노래처럼 ‘매일 이별하고 있음’을 마음속 깊이 인정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만남보다 더 어려운 이별의 기술을 터득하지 못한 내게 가장 필요한 과목은 ‘이별학’이 아니었을까. 제대로 이별하지 못한 모든 헤어짐은 내 마음 속에 켜켜이 쌓였다. 그리하여 나는 결국 어느새 이별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기를 쓰고 타인을 ‘덜’ 사랑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파니핑크>의 감독 도리스 되리의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은 내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이별학’을 강의하는, 지상에 없는 교과서 같은 작품이었다. 이 아름다운 교과서에는 엄격한 교훈도 암기할 공식도 없다. 다만 피할 수 없는 이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남은 생을 다 바치는 한 노부부의 아름다운 사랑이 있다. ‘이별학’의 창시자 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역시 지그문트 프로이트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실에 대처하는 인간의 두 가지 자세를 언급한다. 첫 번째가 대상의 상실을 ‘애도’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는 대상의 상실을 자아의 상실로 흡수해버리는 우울증이라고. 애도(Trauer)가 이별을 극복하기 위한 영혼의 제스처라면, 우울증(Melancholia)은 이별의 원인을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린 채 어느새 ‘잃어버린 대상’을 ‘잃어버린 자아’로 대체해버린다. 잃어버린 대상을 향해 최선을 다해 슬퍼하지 못하면 결국 그 못다 한 슬픔의 화살표는 자기 자신에게로 향해버리는 것일까. 

   
 

예전이라면 시인이나 철학자의 피를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을 우울증자에게 나타나는 세계에 대한 무관심과 자신 속으로의 끊임없는 침전은 그에게서 리비도라는 촉수가 손상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세계에 무관심하며, 세계 또한 그에게 무관심하다. 우울증자에게는 인간 고유의 기적 같은 능력, 즉 세계를 리비도의 마법에 빠지게 만드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오히려 그에게 능력이 있다면 자신이 만지는 모든 것을 돌로 만들어버리는 마술이 있을 뿐이다. 요컨대, 세계를 무감각한 무기질 덩어리로 만들어버리는 검은 마술.
 - 맹정현, <리비돌로지>, 문학과 지성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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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10-03-23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흔 즈음에, 너무 내 가슴을 후벼파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영화. 슬픔을 웃는 법을 말하시려나, 궁금....

lily2010 2010-03-23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할머니의 춤, 부토가 너무 멋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