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영화 <의형제>와 미하일 바흐친 ⑮


  15. 나는 네가 아니다. 그러나……(3)  

   
 

 인간은 예술 속에 있을 때는 삶 속에 있지 않고, 삶 속에 있을 때는 예술 속에 있지 않다. (……) 내가 예술에서 체험하고 이해한 모든 것이 삶에서 무위로 남게 하지 않으려면 나는 그것들에 대해 나 자신의 삶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책임은 죄과와도 결합되어 있다. 삶과 예술은 서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죄과도 떠맡아야 한다. (……) 무책임을 정당화하기 위해 ‘영감’에 의지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삶을 무시하고, 그 자신이 삶에게 무시당하는 영감은 영감이 아니라 사로잡힘이다. (……) 삶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고 창조하는 것이 더 쉽고, 예술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예술과 삶은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 안에서, 나의 책임의 통일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 미하일 바흐친, 김희숙 · 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도서출판 길, 2007, 26쪽.

 
   

  



   피를 뚝뚝 흘리며 쓰러진 이한규 곁에서 신음하던 지명훈은 묻는다. “당의 지시로 온 거냐? 누구의 지시로 온 거냐?” 송지원은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진다. 그럼 이 모든 것이 당의 지시가 아닌 그림자의 단독 행동이었단 말인가. 그림자는 망설임 없이 지명훈에게 잔혹한 총질을 해대고 지명훈은 즉사한다. “변절자 새끼. 말이 많구먼.” 송지원은 그림자에게 항변한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당의 지시로 온 게 아니었습니까? 그럼 태순이도 그냥 동무가 죽인 겁니까?” ‘변절자’를 처단하는 일은 당의 지시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그림자. 이제 그림자의 총구는 송지원을 향한다. “너, 북에 있는 가족들 빼돌렸지?” 지원은 이성을 잃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제 가족은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됐을 것 같네?” 이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한규가 기적처럼 깨어난다. 


   이한규의 복부에서 흐르던 피는 실은 이한규의 피가 아니라 송지원의 피였다. 송지원은 이한규의 복부를 찌르는 척하면서 남몰래 자신의 손을 찌른 것이다. 아무도 다치게 할 수 없어 스스로를 난자한 송지원. 날카로운 자상(刺傷)을 입어 선혈이 뚝뚝 흐르는 지원의 손을 바라보며 이한규는 가슴이 시리다. “미련하긴.” 지원은 아픔조차 잊은 채 가족의 안부를 걱정한다. 그림자의 암시처럼 가족들이 잘못되었다면 이젠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어져버린 지원은 자신에게 총구를 겨눈 그림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죽음에 대한 공포조차 잊은 표정이다. 이한규의 총구는 그림자에게, 그림자의 총구는 송지원에게 향해 있다. 송지원은 아예 그림자의 총구를 손으로 꽉 잡은 채 차라리 자신을 죽여버리라고 절규한다. 일촉즉발의 순간. 그림자와의 몸싸움 끝에 지원은 그림자와 함께 건물 아래로 추락하고 만다. 

 


   숨이 끊어질 듯 긴박한 상황에서 송지원은 자신을 껴안고 눈물 흘리는 이한규를 바라보며 유언처럼 속삭인다.

 송지원 : 저는…… 아무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이한규 : 알아, 임마…….

   송지원은 자신의 손바닥에 전해지는 날카로운 고통을 통해 스스로 이한규가 되었고, 이한규는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끝까지 애쓰다 추락한 송지원을 바라보며 어느덧 자신의 분신이 되어버린 그의 고통을 깨달았다. 스스로의 존재를 깡그리 부수어서라도 그 누구도 배신하지 않으려는 그의 몸부림을 읽어낸 것이다. 아무리 접근해도 영원히 닿지 않는 점근선 같았던 ‘나’의 존재가 드디어 ‘너’의 경계를 구성하는 단단한 이성의 각질을 뚫는 순간. 나의 존재가 무한히 작아질수록 나는 타인의 고독에 무한히 가까워질 수 있다. 영원히 나와 네가 일치할 수는 없지만 나의 존재는 너의 존재에 끊임없이 다가가는 몸부림 그 자체가 될 수는 있다.  



  송지원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가족을 되찾게 되고, ‘이한규’의 동생 티가 팍팍 나는 새로운 이름 ‘이상규’도 갖게 되었다. 이한규가 영국에 있는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비행기 표를 선물하고는 자신도 몰래 그 비행기를 탄 이상규-송지원. 언뜻 보아 ‘해피 엔딩’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송지원이 아무리 이상규가 되어도 다가갈 수 없는 ‘평범한 삶’의 아득한 장벽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지만 남파공작원이었다는 사실은 그를 평생 따라다닐 것이다. 아무도 배신하지 않았지만 그 누구의 ‘편’도 아니기에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마음 편히 살 수 없게 된 송지원. 교육비는 물론 생활비 자체가 터무니없이 비싼 한국은 송지원 같은 ‘우리 안의 디아스포라’가 살기에는 너무 척박한 땅이 아닐까.




   <의형제>는 ‘자기 땅’에서 디아스포라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21세기 판 오디세이다. 오디세우스는 돌아올 집과 든든한 삶의 토대가 있었지만, 송지원에게는 돌아갈 집은커녕 삶의 토대 전체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스스로의 가난한 몸뚱이 자체가 ‘늘 움직이는, 불안한 집’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상황에도 아주 작은 희망의 틈새는 남아 있다. ‘싸구려 흥신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한규의 회사 ‘인터내셔널 테스크포스’는 이한규뿐 아니라 이 메마른 디아스포라들의 기나긴 겨울 같은 삶을 끌어안는 따스한 요람이 되지 않을까. 이한규는 이미 엄청난 현상금이 걸린 라이따이한 출신 조폭을 늠름한 직원으로 고용한 상태다. 그러고 보면 이한규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죄인조차 자신의 가족으로 만드는 뛰어난 용병술의 대가다. ‘빨갱이 잡는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 ‘잃어버린 사람 찾기’로 자신의 직업을 바꾸어버린 이한규의 사람 찾기 프로젝트는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제 자리로 돌아오게 만드는 멋진 사업으로 거듭나지 않을까. 


   바흐친이 말한 ‘이질성’의 언어가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잃지 않고 ‘정해진 질서’가 아닌 매번 새로 만들어지는 ‘카니발의 언어’로 거듭나는 그곳. ‘나’라는 존재가 영원히 종결되지 않고 타자를 향해 끝없이 열린 정체성으로 기쁘게 살아가는 그곳. 육체와 육체, 문화와 문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사이, 그 모든 ‘경계’와 ‘접촉지점’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차이의 충돌을 이질성의 카니발로 만드는 지혜. 너와 나의 차이로 인해 너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돌이킬 수 없는 차이로 인해 내가 더욱 풍요로워지는 그곳. 바흐친의 말처럼, 타자를 향해 끊임없이 열려 있는 존재의 기원은 ‘대화’가 아닐까. 혼자 있을 때도 우리에겐 대화가 필요하다. 단지 ‘동일성’으로 수렴되는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깃들어 이미 오래전부터 살고 있는 수많은 타자들과의, 소리 없이도 이미 왁자지껄한, 서로의 차이로 인해 더욱 풍요로워지는 수많은 그대들과의 대화가. 영원히 완결되지 않을 나를 향해 말을 거는 타자의 모든 의심과 비판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대화를 향한 창조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타자의 말은 내가 나의 말의 잠재력에 말을 걸 수 있게 한다. 내적 대화를 통해 생성되는 것은 아직 한 번도 실현된 적 없는 내 말의 잠재력이다. 나의 말도 타자에게는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타자 또한 낯선 나의 말을 통해서 자신의 잠재력에 말을 걸게 될 것이다. 그가 나의 말을 향해 열려 있다면 말이다. 타자를 향해서 마음을 열었을 때 나와 타자는 모두 자신의 말에서 ‘잠재력’을 발견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창조성을 발휘하게 된다. 진정한 대화는 그 자체가 창조를 부추기는 행위인 것이다. (……) 일상이란 매일 틀에 박힌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창조 행위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일상의 말과 행위는 그 자체로 나의 것이며 내가 내 말에 책임을 지는 한 나의 말은 언제나 창조적이다. 책임지는 자아, 창조하는 자아야말로 바흐친의 산문학에 거주하는 시민이다. 책임지는 자아, 창조적인 자아는 언제나 자기 말의 외부를 통해, 잉여를 통해, 타자를 통해 자신의 말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말에 대한 타자의 시험을 두려워하는 사회, 말에 대한 타자의 의심을 통과하지 않는 말을 내뱉는 사회, 그렇게 의심받지 않은 말이 지배하는 사회에 필요한 것은 대화다. 그런 뜻에서 바흐친은 다른 사람의 말에 응답하는 자신과 먼저 대화하기를 권한다.
 - 게리 솔 모슨 · 캐릴 에머슨 지음, 오문석 외 옮김, ‘옮긴이의 말’ 중에서, <바흐친의 산문학>, 책세상, 2006,  799~8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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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릭 2010-03-19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영화를 보면서 "나는 아무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라는 송지원의 말이 마음을 울렸다. 그 말은 누구의 편에도 설 수 없었던 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자기땅에서 디아스포라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말에 공감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디아스포라들의 '희망의 틈새'를 보지는 못했다. 그냥, 해피엔딩으로 뭉뚱그린 느낌? 정여울 님의 말대로 '잃어버린 사람찾기'는 정말로 그들이 찾은 '희망'을 보여주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lily2010 2010-03-20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물론 분명한 확신에 찬 희망은 발견하기 어렵지만, 아주 어렴풋이 조심스럽게 흔들리는 듯한 희망의 조짐들이 느껴지기는 했어요. 그렇게 텍스트 너머로 계속 아스라한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겠지요?^^

맨손체조 2010-03-23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화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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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의형제>와 미하일 바흐친 ⑭


  14. 나는 네가 아니다. 그러나……(2)  

   
 

 변신은 개인의 삶 전체를 좀더 중요한 위기의 순간 속에서 그려내는 방법의 토대가 된다. 그것은 한 개인이 어떻게 과거의 자신과 달라지게 되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의 진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한 인간의 위기와 갱생만을 볼 뿐이다.
 - 바흐친, <소설의 시간 형식과 크로노토프 형식> 중에서

 
   




   두 사람의 상처가 은밀하게 연대하는 이 순간. 이한규가 송지원으로 인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신했듯 송지원도 이한규의 시선 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변신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 순간. 뜻밖의 사건이 터지고 만다. 국정원 후배의 연락을 받고 급히 외출하는 이한규. 그를 송지원은 조용히 미행한다. 이한규가 달려간 병원 영안실에는 송지원의 친구 손태순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 손태순 살해, 누가 봐도 ‘그림자’의 끔찍한 솜씨다. “나, 살고 싶다…….” 그렇게 절규하던 친구의 목소리가 지원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진다. 친구를 잃은 충격으로 망연자실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주저앉아 고개 숙인 송지원을 국정원 직원이 발견한다. “너, 송지원 맞지?” 국정원 직원들은 송지원을 회유하여 그림자를 체포하려 한다. 

 

   송지원의 딱한 사정을 모두 참작해주겠다고, ‘그림자’만 넘겨주면 너만은 자유롭게 해주겠다는 국정원 직원들의 설득. 그러나 6년 동안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살아왔지만 여전히 조직을 버리지 않았던 송지원에게 이런 논리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당신 눈엔 내가 그런 시시한 배신자로 보여?” 송지원은 단호하고, 이한규는 그 순간 부끄러움을 느낀다. 송지원과 국정원 직원들 사이의 숨 막히는 추격전이 시작되고 이한규의 눈빛에서는 안타까움과 함께 절박함이 스쳐간다. 아직 네 손목시계에 GPS가 달려 있다는 말을 해주지 못했는데……. 

   이한규는 국정원 후배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지원이 놔줘라. 지원이 그림자한테 사형선고 받은 애야. 지원이가 알아서 자수할 거야.” 후배는 이한규에게 항변한다. “그런 거 다 봐주면 간첩은 언제 잡습니까?” 후배의 눈빛에는 이한규에 대한 노골적인 불신이 꿈틀거린다. 이제 이한규는 마지막 남은 국정원 후배의 신뢰까지도 잃을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지원을 살려야한다는 생각뿐이다. 언젠가부터 그렇게 되어버렸다. 다른 무엇보다도 다만 그의 안부가 중요해져버렸다.


   
   도망친 송지원은 드디어 6년 만에 ‘그림자’와 접선에 성공하고, 그림자는 송지원의 스승이었던 통일문제연구소 지명훈 교수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한편 송지원과 그림자를 모두 체포할 작정으로 작전에 돌입한 국정원 고위 간부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필요하다면 전원 살해해도 좋다.” 다급해진 이한규는 지원에게 끊임없이 전화를 하지만 지원은 받지 않는다. 이한규가 송지원에게 남기는 음성 메시지. “왜 전화 안 받아, 지원아! 네 손목시계에 GPS 달려 있어! 그 시계 버려!” 한편 송지원은 그림자의 명령을 받고 움직여야 하는 순간, 가족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제 정말 마지막을 준비한다. 그는 오랫동안 가족들의 송환을 준비해왔던 사람에게 연락하여 가족들의 탈출을 부탁한다. “민 피디님. 저 때문에 가족들까지 위험해졌습니다. 제가 없더라도 꼭 진행시켜주세요.” 

 

   그림자의 살해 위협을 눈치채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지명훈. 그림자는 지명훈을 추격하고 이한규는 송지원을 추격한다. 인근 건물 옥상으로 도망친 지명훈을 기어이 잡아 쓰러뜨린 그림자는 스승의 ‘마지막 처리’를 제자인 송지원에게 맡긴다. “조국이 네게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다. 마저 끝내라우.” 지명훈을 ‘처리’해야 하는 그 순간, 이한규가 나타난다. 이제 건물 옥상에는 마침내 가혹한 운명으로 얽힌 세 사람이 조우하게 된다. 그림자와 이한규는 오랜 숙적 관계였고 이한규는 그림자를 잡더라도 송지원은 반드시 풀어주려 한다. “시계부터 풀어! 왜 전화를 안 받아! 널 죽일지도 모르니까, 빨리 도망가!”

   지원의 손목을 덥석 잡아 시계를 풀어 옥상 밑으로 던져버리는 이한규를, 그림자가 숨어서 몰래 지켜보고 있다. 그림자는 총구를 송지원 쪽으로 겨눈 채 이한규마저 ‘처리’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파도처럼 흔들리던 지원의 눈빛은 마침내 결정을 내린 듯 단호해진다. 그 순간 송지원의 칼은 이한규의 복부를 향해 정확하게 꽂힌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이한규의 시야는 암전되고 송지원의 눈빛은 냉혹하게 번득인다. 간신히 ‘친구’가 될 뻔했던 두 사람은 이렇게 ‘돌이킬 수 없는 차이’의 늪을 건너가지 못하는 것일까. 


   
 

  임종 직전 바흐친은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청한다. 그것은 <데카메론> 중에서 성자로 여겨졌으나 사실은 끔찍한 악당이었던 사람의 무덤가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는 내용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들 중에서 우리가 바흐친을 이해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도망갈 길loophole은 어디엔가 항상 있다는 것, 삶은 예기치 않은 일들로 가득 찬 것, 혹은 신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방법으로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이다. 
 - K. 클라크 • M. 홀퀴스트 지음, 이득재 • 강수영 옮김, <바흐친>, 문학세계사, 1993, 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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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의형제>와 미하일 바흐친 ⑬


  13. 나는 네가 아니다. 그러나……(1)

 

   
 

어느 것도 완전히 사라져버리지는 않는다. 모든 의미는 미래의 어느 날에는 환영파티를 갖게 될 것이다.
 - 미하일 바흐친

 
   





   이한규에게 칼을 겨눈 송지원의 눈에는 전에 없던 분노와 살기가 서린다. “왜 날 데리고 있었어? 왜 신고 안 했어?” 이한규는 자신을 향해 날카롭게 번득이는 칼을 보고도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말한다. “너 하나 잡아서 뭐하겠냐? 잡으려면 간첩단 정도는 돼야지.” 가눌 수 없는 분노로 결국 송지원은 이한규의 팔에 상처를 내고 만다. “그래 요샌 나 같은 놈 잡으면 얼마 준답니까?” 이한규는 피가 뚝뚝 흐르는 팔을 부여잡고도 평온한 표정으로 송지원을 진정시킨다. “모든 일이 잘 되면, 우리 사업이나 제대로 키워보자.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대박 날 거야. 좋은 일 한번 해보자.” 
 
 

   이한규에게 자신을 해칠 의도가 전혀 없음을 알게 된 송지원은 절망과 분노와 회한, 알 수 없는 죄책감과 참담함이 밀려드는 얼굴로 소리 없이 흐느끼기 시작한다. “하던 절 마저 해. 나도 너희 부모님께 절 한번 올릴게.” 송지원의 부모님께 절을 올리겠다는 이한규의 맑게 가라앉은 음성. 이것으로 지원의 평생을 가로지르던 견고한 에고의 빗장은 비로소 부서져버린다. 그의 삶에 처음으로 가족이나 이념이나 국가가 아닌, ‘타인의 존재’가 스며든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타자의 범주를 통해 바로 그의 고통으로 경험한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나의 반응은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것이 아니라, 위로의 말과 도움의 손길이다.
 - 미하일 바흐친
 
   



 

   그림자가 준 칼을 힘없이 던져버리는 송지원. 그의 눈 속에는 차마 마음 놓고 흐르지도 못하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다. 그의 눈은 어느 때보다 슬퍼 보이지만 잠들어 있을 때조차 놓을 수 없었던 불안과 긴장의 끈이 풀려 어느 때보다 아름다워 보인다. 그의 눈 속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고향과 만날 수 없는 가족과 버릴 수 없는 이념과 얼굴조차 모르는 딸과 먼저 간 동지들이 미처 다하지 못한 삶이 함께 고여 있는 것만 같다. 저 거대한 슬픔의 짐짝을 혼자 등에 지고 살아왔을 그의 인생이 새삼 눈부시다. 이제 두 사람 앞에는 완전히 새로운 미래가 펼쳐질 참이다. 둘 사이에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아닌,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밖에 없는 가장 가까운 타인을 향한 믿음이 태어난다.

   그래, 나는 네가 아니다. 너도 내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아님’의 뼈아픈 엇갈림 속에서 서로 조금은 닮았을지도 모를 나의 잃어버린 분신을, 너의 잃어버린 조각을 발견한다. 우리는 타인의 육체를 접촉함으로써 나는 네가 아니고 너는 내가 아님을 확인한다. 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육체를 통해 타인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출구를 발견한다. 송지원은 자신이 찌른 이한규의 팔뚝에서 흐르는 붉은 피를 보며 그 찢어진 팔만큼 쓰라리게 아파오는 자신의 마음속 파동을 감지한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흐느끼는 송지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한규 또한 마음속 깊이 무너지는 울음을 삼킨다. 송지원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과 이한규의 팔에서 흐르는 피는 같은 슬픔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영원처럼 긴 순간이 있다. 송지원이 흐느껴 우는 이 순간은 관객도 카메라도 문득 시간의 흐름을 잊고 싶다. 감독의 카메라는 별다른 기교 없이 오래도록 송지원의 두 눈을 관통하듯 묵묵히 그의 얼굴을 비춘다. 영화 속 인물들도,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들도, 잠시 ‘나’라는 존재의 경계를 잊는 순간이다. 너와 나의 존재를 가르는 선명한 경계를 잊는 순간, 우리의 마음이 타인의 존재를 향해 무한히 가까이 다가가는 점근선이 되는 순간. 이 순간만은 혼자가 아니라고 느낄 때,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만 진정한 내가 존재함을 깨달을 때. 너의 삶이라는 프리즘에 비춰보아야 비로소 드러나는 나의 존재를. 나의 본질은 나에게 있지 않다. 너의 본질도 너에게 있지 않다. 내가 너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너는 비로소 너다울 수 있고, 네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일 수 있다. 


   
 

 사회적으로 조직된 집단들이 보다 우월하다는 명목으로 극단적인 개별성을 거부하는 여타 철학들과는 달리 바흐친의 철학은 개개인의 존엄성의 싹을 잘라내지 않는다. 바흐친의 대화주의는 우리 모두가 의미를 만드는 데 반드시 참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인간을 해방시킨다. 인간이 그 자신 스스로에 대해서 그리고 서로서로에 대해서 책임의 구조학에 참여하고 있는 한 우리 모두는 이 세계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질서와 의미의 저자이며 창조자들인 것이다.
 - K. 클라크 • M. 홀퀴스트 지음, 이득재 • 강수영 옮김, <바흐친>, 문학세계사, 1993, 3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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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10-03-16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문제는 '시선'이다? 음....

홀릭 2010-03-16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래, 나는 네가 아니다. 사실, 내가 너와 다름을 인정함으로써, 그와의 관계가 시작되는 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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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의형제>와 미하일 바흐친 ⑫


 12. ‘에고’와의 내전(內戰) (3) 

 

   
  우리는 타인의 육체를 포옹하거나 덮어주면서 육체 안에 갇혀 있고 육체로 표현되는 그의 영혼을 포옹하거나 덮어주는 것이다.
 - 미하일 바흐친
 
   

 




   흔들리는 눈빛 연기가 힘들었다. 겹겹이 싸인 감정을 숨기고 살아가는 것이 답답했다. 상황 상황마다 감독님과 얘기하면서 감정선을 정리하고 이런저런 욕심을 버리고 눈빛으로 많이 표현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캐릭터가 밋밋해질까 걱정도 하고…… 눈으로만 감정을 전달하는 게 힘드니까 나중에는 감독님께 못하겠다면서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 배우 강동원 인터뷰 중에서

 


   두 사람은 함께 살면서도 서로의 앞모습보다는 옆모습이나 뒷모습에 익숙하다. 자신의 표정을 숨기고 겹겹이 포장된 상대방의 내면을 읽어야 할 때가 많으므로. 옆모습과 뒷모습은 앞모습만큼 의식적인 통제와 관리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앞모습에 신경을 쓰느라 옆모습과 뒷모습에서 흘러나오는 우리의 감정을 간수하지 못하곤 한다. 송지원이 미처 수습하지 못한 뒷모습의 쓸쓸함은 고스란히 이한규의 망막에 맺히고, 이한규가 미처 통제하지 못한 옆모습의 무력감은 고스란히 송지원의 눈동자에 맺힌다.  



이한규 : (자조 섞인 표정으로 체념한 듯이) 남의 돈 가져다가 내 행복 찾는 게 자본주의야.
송지원 : 사장님은 남의 마누라나 찾아주는 게 행복합니까? 사장님은 사람들이 돈으로만 보이세요?

   남편에게 구타당하다가 간신히 탈출한 필리핀 여인을 둘러싼 두 사람의 논쟁이다. 온수영. 그녀의 한국이름이다. 온수영을 그녀의 법적인 남편이 아닌, 그녀가 너무도 그리워한 친동생에게 데려다준 후. 그들은 격앙된 감정으로 몸싸움까지 벌이고 한참동안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그녀에게 걸린 ‘몸값’을 포기한다. “기준아. 그냥 가자.” 이한규가 필리핀 여인을, 아니 이제는 한국인이 된 온수영을 놓아주는 순간, 송지원의 굳은 얼굴에서는 오랜만에 해맑은 미소가 번진다. 둘은 이제 이전보다 한결 편안하게 서로의 ‘앞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제 두 사람은 알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 의심하고 경계하며 미행하고 도청하는 사이지만, 서로의 안부를 가장 먼저 걱정하는 사이가 되어버렸음을. 두 사람이 몸싸움을 하며 바닥을 뒹굴 수 있는 것 또한 따스하고 온화하게 ‘친밀감’을 표현할 수 없는 무뚝뚝한 남자들의 우정 표현법이 아닐까. 그들은 남편에게 구타당하다가 끝내 도망친 필리핀 여인의 모습에서, 힘겹지만 자신의 노동으로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기 시작한 그녀의 모습에서, 그들이 오래전에 잊어버린 무언가를 발견한 것 같다. 그것은 상처 입은 사람만이 알아보는, 서로 닮은 상처를 지닌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치명적인 흉터가 아니었을까.  





   다음날 아침, 난데없는 차례상이 조촐하게 차려져 있는 것을 보고 송지원은 놀란다. “다행히 마트가 문을 열었네. 늦었지만 차례 지내려고.” 이한규는 송지원에게도 예를 차리도록 하고 부모님의 지방까지 대신 써준다. “지방 쓸 줄 몰라? 어머니 성씨가 어떻게 되나? 안동 김씨?” 멋진 붓글씨로 지방을 척척 써내려가는 이한규의 옆모습을 보며 송지원은 든든함과 의아함을 동시에 느낀다. 차례상 앞에서 절을 올리는 송지원의 서글픈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한규의 눈빛에서는 전에 없이 무섭도록 차분한 단호함이 스쳐간다.

   그리고 마침내 송지원에게 고백하듯 뇌까린다. “요즘은 이북에서도 제사 지낸다지?” 송지원은 경악한다. ‘그림자’가 건네주었던 주머니칼을 꺼내 이한규를 겨냥한다. 여전히 소름끼치도록 차분한 표정으로, 이한규는 말한다. “앉아라. 제사 지내는데 설마 잡아가기야 하겠냐?” 드디어 송지원의 굳게 닫은 에고의 빗장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노크로 열리는 순간이다. “다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왜 날 데리고 있었어? 왜 신고 안했어?”


   
 

   나는 자신을 사랑하듯이 가까운 이를 사랑할 수 없으며, 더 정확하게는, 가까운 이를 사랑하듯이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만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보통 행하는 모든 행위들의 총합을 그에게 전이시키는 것뿐이다.
 - 미하일 바흐친, 김희숙 · 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도서출판 길, 2007,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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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10-03-15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전이시킬 그 무언가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 에고는, 정말, 에고~에고~

니모 2010-03-15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요즘은 이북에서도 제사 지낸다지?" 정말 소름 쫙! 송강호, 유 윈!^^
 


 스포일러 주의!!


 영화 <의형제>와 미하일 바흐친 ⑪


 11. ‘에고’와의 내전(內戰) (2) 


 이한규 : (송지원이 미행하여 자신의 통화를 도청 중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영국에 있는 딸에게 전화한다.) 알버트가 피아노 가르쳐 줬어? 새 아빠 좋아? 아빠가 더 좋아? 생일 선물로 뭐 갖고 싶어? 디카? 그건 그쪽에서 사도 되잖아. 아빠가 돈 더 보내줄 테니까 엄마한테 사달라고 그래. (명절이라 바쁜 일도 전혀 없으면서) 아빠 바빠서 그만 끊을게.
 송지원 : (이한규의 통화를 도청하던 중, 깊은 한숨을 내쉰다. 딱히 도청할 내용조차 없는 이한규의 신산한 삶이 안쓰럽다. 지독하게 고독한 저 중년 남자의 뒷모습을 빤히 보면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그 순간 송지원의 가명 박기준을 향해 문자메시지가 도착한다.)
 이한규가 보낸 문자메시지 : 기준아. 저녁에 나 맛있는 거 좀 해줄래?



   이한규의 가슴 시린 문자메시지가 도착하는 순간, 송지원의 가슴 속에서는 칼바람이 스쳐간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경계심을 내려놓는 순간. 불현듯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6년 동안 남모르게 증오해왔던 옛 친구, 손태순이 나타났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는데. 너만 아니었어도, 너만 아니었어도. 갑자기 이한규와 송지원 사이에 조심스레 흐르던 인간적 연민의 감정선이 뚝 끊기고 본래의 긴장감이 되살아난다. 이한규에게 생활비를 타 쓰고 있는 손태순의 몰골은 말이 아니다. 초라한 행색에 심각한 알콜중독까지. 손태순을 미행한 송지원은 텅 빈 집에서 머그컵에 소주를 부어 먹는 손태순의 절망적인 모습을 보고 경악한다.  

 

    “겨우 이따위로 살라구 조국과 동무까지 팔아먹었네? 간나새끼, 너 때문에 변절자 취급받고……. 북으로도 돌아가지 못하고……. 무슨 말이라도 좀 해보라!” 손태순을 때려눕히고 부질없이 항변하는 송지원의 두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술에 절어 저항할 힘도 없이 그저 맞고만 있는 태순을 주먹으로 때리는 지원. 그의 주먹에는 원망보다 무력한 절망이 서려 있다. 멱살을 잡힌 채 숨을 헐떡이던 손태순의 입술에서는 핏물과 함께 뜻밖의 절규가 비어져 나온다. “사, 살고…… 살고 싶다.”



   친구 태순에게서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의 실마리도 찾을 수 없음을 깨달은 지원은 어떻게 해서든 돈을 마련하여 북에 있는 가족을 탈출시키기 위해 애쓴다. 그러던 중 또 다른 엄청난 사건이 터져버린다. 집에서 함께 뉴스를 보던 이한규와 송지원은 각기 다른 이유로 어안이 벙벙해진다. 북한이 급작스레 ‘핵실험’을 선언하여 국제사회가 들썩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간신히 화해 무드로 돌아섰던 남북관계가 다시 얼어붙기 시작한다. 송지원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이한규 또한 당혹스럽다. 송지원을 이용해 그림자를 잡으려는 계획을 포기하지 못한 이한규는 지원의 손목시계에 몰래 최첨단 GPS를 설치한다. 다시 연락을 취하기 시작한 국정원 간부로부터 받은 GPS. 그들 사이에는 아직 건널 수 없는 존재의 장벽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어깨 위에 아직 무겁게 닻을 내리고 있는 ‘조직’의 안개를 제거하고 나면, 상처받은 개인만이 남는다. 두 사람은 여전히 마음속에 ‘당’과 ‘국정원’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지만, 한편으로는 더 가까워진 서로의 관계를 어렴풋이 깨닫는다. 아름다운 필리핀 아내를 되찾아달다며 거드름을 피우는 ‘고객’ 앞에서 송지원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는다. 아내를 구타했다는 말까지 자랑 삼아 떠들어대는 고객 앞에서 송지원은 ‘살아남기 위해’ 이런 일을 해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한심하다. 송지원은 우울한 얼굴로 이한규에게 묻는다. “저 사람 아내 우리가 찾아주면……. 또 때리겠지요?” 이한규의 얼굴에서도 송지원과 같은 빛깔의 우울함이 스쳐지나간다. 

   
 

자연으로서의 인간은 자기 자신 속에서가 아니라 타자 속에서만 직관적으로 확신에 차서 체험된다. 나는 자신의 외적 세계와 전혀 동종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내 안에는 항상 그 세계에 대립시킬 수 있는 본질적인 어떤 것, 다시 말하면 그 안으로는 포함되지 않는 나의 내적인 자기 활동성, 외부세계를 대상으로 직면하게 만드는 나의 주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적인 나 자신의 자기활동성은 자연과 세계를 모두 능가한다. 나는 항상 세계에 대한 행위 속에서 내적으로 자기 자신을 체험하는 선을 따라가는 출구를 갖고 있다 나는 마치 완전히 자연적으로 주어진 소여에서 자기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구멍 같은 것을 항상 가지고 있다.
 - 미하일 바흐친, 김희숙 · 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도서출판 길, 2007, 7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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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lsend 2010-03-14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녁에 나 맛있는 것 좀 해줄래?" 정말 가슴 시린, 먹먹한 대사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