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영화 <아바타>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⑦

 

7. 두려워하지 마, 내가 너의 거울이 되어줄게 (1)


 그레이스 : 난 과학자라는 걸 잊지 마. 동화 같은 이야기는 안 믿어.
 제이크 : 나비족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줄 거예요. 
 그레이스 : 그들이 왜 우리를 도와주겠어?
 (……) 그녀를 봤어. 에이와는 정말 존재해.

 제이크 : 그런데 왜 나를 구해준 거야?
 네이티리 : 넌 강한 영혼을 가졌어.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지. 하지만 넌 멍청해! 아이처럼 무지하지!  




   레비스트로스는 현대사회를 ‘과잉 커뮤니케이션’의 사회라고 진단했다. 문명과 문명 사이에 너무 많은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서 서로의 문명을 끊임없이 모방하느라 점점 더 ‘차이’보다는 ‘획일성’이 지배하게 되는 사회가 되어간다고. A 문명이 B 문명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문명을 비교하고 정복하고 침탈하고 추격하느라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문명을 만들어내기 힘든 사회라고 말이다.
   낯선 문명을 만나러 떠난 여행에서도 현대인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똑같아지는 글로벌 시티를 발견한다. 현대인은 늘 새로운 문명을 꿈꾸면서도 한편으로는 완전히 낯선 문명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큰맘 먹고 해외여행을 떠난다 해도 ‘이미 아는 정보’를 ‘확인’하고 ‘기념’하는 데 급급하여 진정 새로운 체험을 맛보기 어렵다. 파리의 에펠탑과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을 텔레비전에서 수십 번도 더 본 후 ‘이미 잘 아는 바로 그 장소’에 가서 찰칵 기념사진을 찍고는 좋아라 한다. 현대인은 서로의 문명에 대한 경쟁심, 일류 문명에 도달해야 한다는 의무감, 선진국의 문명을 따라가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자기만의 문명의 독창성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나비족은 굳이 근대 문명을 모방할 필요가 없이 자연 속에서 무한한 감사와 은총을 누리고 살아간다. 그들의 삶에 다른 참고문헌이 없기에 오로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최선의 것을 창조해낸다. 파괴되는 아마존이 점점 풍요로운 공동체적 감수성을 잃어가는 이유 또한, ‘과잉 커뮤니케이션’의 치명적인 오류가 아닐까. 아마존의 부족들이 문명인의 영향을 받아 활이 아닌 총을 사용하기 시작한 순간, 공장에서 제조한 문명인의 티셔츠 한 장에 하루 종일 힘겹게 사냥한 짐승 한 마리를 바꾸기 시작한 순간, 잡아온 물고기를 모두 함께 나눠 먹지 못하고 ‘내 가족’ 먹이기에 급급해지는 순간, 아마존의 유토피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문명의 러브콜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인 아마존을, ‘우리 안의 판도라’를 시시각각 침식하고 있다. 
 




   제이크가 판도라의 생태계 속에서 나비족과 함께 하는 행복의 정체 또한 ‘과소 커뮤니케이션’ 사회의 힘에서 우러나온다. 굳이 다른 문명을 참고할 필요가 없기에, 외부세계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만으로도 ‘우리가 뭔가 뒤떨어졌다’는 집단적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다. 역사의 진보라는 획일적인 환상은 끊임없이 문명을 ‘발전’시켜야 문명이 유지된다는 강박을 낳았다. 이런 사회에서는 역사의 진보를 위해, 집단의 진보를 위해, 개인은 언제든 쉽게 희생될 수 있다. 아바타 프로그램에 투입된 제이크의 운명 또한 그랬다. 그는 아바타 프로그램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형의 죽음으로 인해 ‘대타’로 투입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깡그리 부정당했다. 쌍둥이형과 유전자가 같으니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소모품으로 취급받았던 것이다.

 


   아바타 한 명을 만들기 위해 투자한 엄청난 자본을 휴짓조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다행히 쌍둥이’였던 제이크는 훌륭한 대체재로 기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은 매 순간 분열되었다. 형은 대단한 과학자이지만 자신은 부상당해 다리도 쓸 수 없는 퇴역군인이라는 자괴감. 뛰어난 과학자가 필요하니 너 같은 ‘골 빈 해병’은 필요 없다는 그레이스 박사의 구박도 괴로웠고, 쿼리치 대령에게 나비족에 대한 각종 정보를 물어다 주는 스파이 생활도 고통스럽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것은 ‘나비족의 정체성’과 ‘인간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뇌하는 자신이다. 제이크가 온갖 힘겨운 통과의례를 거쳐 나비족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되는 순간 그의 고민은 절정에 다다른다. 더 이상 억지스러운 미션수행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나비족의 삶에 동화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네이티리와 아름다운 밤을 보내고 ‘가시버시’의 인연을 맺은 순간,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선택을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지금 당장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과잉 커뮤니케이션(over-communication)이라고 하는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세계의 다른 모든 지역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자 하는 경향입니다. 하지만 문화가 진정으로 문화 그 자체가 되고 무엇을 생산하려고 한다면, 문화와 그 문화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독창성에 대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게다가 어느 정도까진 다른 문화에 견주어 그들의 문화가 우월하다는 확신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과소 커뮤니케이션(under-communication) 아래에서만 문화는 무언가를 생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독창성을 상실한 채, 세계의 어느 곳을 가든지 모든 문화에서 그 어떤 것이라도 소비할 수 있는 유일한 소비자의 위치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지금 우리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 레비스트로스, 임옥희 역, <신화와 의미>, 이끌리오, 2000, 47~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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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lsend 2010-02-01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표가 없어서 처음엔 2D로 봤다가 어제 간신히 표를 구해 3D로 봤네요. 그런데 4D도 있다니, 이거 무슨 관객들 토끼몰이를 하려는지 ^^

니모 2010-02-01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버 커뮤니케이션의 사회, 그러면서 조금 더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고 자꾸만 외치는 사회. 우리 사회가 그런 것 같네요...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은 오히려 더 힘들어지는데.
 


 스포일러 주의!!


영화 <아바타>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⑥

 

 6. 나는 왜 ‘너’일 수 없는가 (2)

   
 

당신은 몰라요. 당신은 땅을 소유할 수 있을 거라 하지만 그건 땅을 죽은 존재로 생각하는 것일 뿐. 하지만 난 생명이 있고 영혼이 있고 이름이 있는 바위와 나무와 동물을 알아요. (……) 달을 보고 울부짖는 늑대의 울음소리를 들어보았나요? 야생 고양이에게 왜 우느냐고 물어봤어요? 산의 목소리에 맞춰 합창할 수 있나요? 바람의 색깔을 칠할 수 있나요? (……) 한 번만이라도 얼마짜리인가 생각지 말고 그냥 주위의 풍요로움을 즐겨보세요. (……) 바람의 색깔을 칠할 수 있어야 해요. 아무리 땅을 가진다 해도 바람의 색깔을 칠할 수 없으면, 그건 가진 게 아니에요.
- <포카혼타스> 주제가 ‘Colors of the wind’ 중에서

 
   

    

   원주민 여성에 대한 신비주의와 세련된 오리엔탈리즘, 미국인이 학살한 인디언에 대한 ‘불편하지 않은 정도의 죄책감’이 곁들여진 ‘가족용’ 애니메이션 <포카혼타스>. 인디언 학살에 대한 미국인의 집단적 죄책감은 인디언 소녀 포카혼타스가 멋진 백인 남자와 결혼함으로써 잠정적으로 봉인되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학살당한 원주민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살아남아 백인들의 집단 무의식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인디언들의 신화와 민담에 스며든 지혜는 다양한 형태의 출판물과 영상물로 만들어져 전 세계적으로 ‘수출’되고, 인디언의 가르침은 우울증에 빠진 현대인의 멘토가 되고 있다. 영화 <아바타>에서 묘사되는 나비족의 삶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생활상과 사유의 패턴과 매우 유사하다. 전 세계에 상영되며 흥행 돌풍을 일으키는 <아바타>의 관객들은 나비족을 보며 저마다 ‘아직 끝나지 않는 원주민 학살’을 생각할 것이다. 



   쿼리치 대령은 제이크를 통한 나비족의 정보 수집이 거의 끝났다는 판단 아래 제이크를 철수시키려 한다. 쿼리치는 제이크가 더 이상 ‘아바타’가 되어 나비족의 삶에 침투할 필요가 없다는 통보를 한다. 이미 ‘원본’보다 ‘아바타’의 삶에 매혹을 느끼기 시작한 제이크는 아직 자신이 할 일이 더 남았다고 말한다. 이제 곧 나비족의 ‘성인식’에 참여할 수 있으니, 그렇게 되면 자신은 나비족과 협상하는 데 훨씬 유리한 위치를 점령할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는 나비족과 협상한다는 공적인 업무보다 ‘나비족의 삶’ 자체에 대한 사적인 매혹을 떨쳐내기 힘들다는 것을. 그는 마침내 평생 단 한 명의 사람만을 자신의 등에 태운다는 거대한 새 이크란을 길들이는 데 성공한다. 자신을 죽이려고 덤벼드는 이크란을 제압하고 오직 자신만의 이크란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는 순간, 제이크는 ‘나비족’의 성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를 성공적으로 치러낸다. 
 




   제이크의 주요 무기는 이제 ‘총’에서 ‘활’로 바뀌었다. 그는 최첨단 기술을 이용한 문명인의 전투보다 온몸의 근육과 오감을 작동시키는 나비족의 전투에 매혹을 느낀다. 그는 이제 해병대의 추억보다 나비족의 생활에 더욱 밀착된 존재가 되었다. 제이크는 이제 점점 ‘꿈’에서 깨어나기가 싫어진다. 현실로 돌아오면 움직일 수도 잘라낼 수도 없는 그의 초라한 다리가 기다리고 있다. 명령만을 일삼고 복종만을 강요하는 쿼리치 대령이 있다. 원주민의 생존권을 빼앗아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는 인간들의 탐욕이 있다.
   그리고 아바타의 삶 속에서는 무엇보다도 증오와 분노로 얼어붙은 제이크의 마음을 녹여준 네이티리가 있다. 그가 대열에서 낙오되어 판도라의 정글에 혼자 남았을 때 그를 살려주었던 네이티리. ‘인간’과 ‘인간 이하’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던 제이크를 ‘인간’과 ‘나비족’ 사이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게 한 네이티리. 그는 네이티리의 노란 눈동자가 담은 아름다운 판도라의 삶에 이미 행복하게 감염된 상태다. 



   제이크는 지옥이 있을 거라 믿었던 곳에서 낙원을 발견했고, 자신의 적들이라 믿었던 곳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를 발견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적 사고의 힘은 ‘대립의 인식’으로부터 ‘대립의 중재’로 나아가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신화의 목적은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논리적 모델을 제공하는 데 있다고도 말했다. 제이크는 이제 지구인과 나비족의 대립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대립을 정확히 인식하는 데 성공했다. 대립을 ‘중재’하는 것은 더 큰 에너지를 요구한다. 과연 아직 자신의 역할에 아무런 확신도 할 수 없는 제이크가 이 엄청난 신화적 미션을 수행해낼 수 있을까.   




   
   에리봉 : 당신의 <신화론>이 막스 에른스트의 콜라주처럼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죠!
 레비스트로스 : 막스 에른스트가 그의 콜라주들 속에서 실행하기를 원했던 것과 같은, 거칠고 돌발적인 비교rapproachments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운 것은 바로 이들 초현실주의자들로부터입니다. (……) 막스 에른스트는 타문화에서, 다시 말해 19세기 고문서의 문화에서 차용해온 이미지들을 사용해 개인적인 신화들을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범상한 눈으로 보았을 때 이들 이미지들이 의미했던 것 이상의 의미를 이끌어냈죠. <신화론> 속에서, 나도 신화적인 재료를 오려내어 그 단편들을 재구성해 거기서 더 많은 의미가 솟아오르도록 했어요.
 - 디디에 에리봉 대담,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강, 2003,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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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lsend 2010-01-30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립의 인식으로부터 대립의 중재로! 밑줄 쫘악! 돼지꼬리 땡야~~^^

doingnow 2010-02-01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늘 정여울님 책 샀어요!ㅎㅎ 블로그로 봐서 후다닥 지나갔던 이야기들을 책으로 만나서 완전 반가웠답니다! 그런데 언제나 머릿글이 제일 반가운 것은 님의 진짜 이야기가 들어있어 그런것 같아요!ㅎㅎ 암튼 언제나 화이팅이에욧
 


스포일러 주의!!! 


 영화 <아바타>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⑤

 

 5. 나는 왜 '너'일 수 없는가 (1)

   
 

에리봉 : 돈키호테주의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레비스트로스 :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박해받는 자들의 옹호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나는 돈키호테주의의 본질이 현재 너머에 있는 과거를 재발견하고자 하는 끈덕진 욕구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훗날 레비스트로스가 어떤 인물인지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혹 존재한다면, 난 그에게 이 열쇠를 제공하고 싶군요.
 - 디디에 에리봉 대담,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강, 2003, 150~151쪽.

 
   

   문자 없는 부족들이 보기에 문명인의 가장 독특한 습관 중 하나는 ‘메모하는 습관’이라고 한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는 ‘종이 부족’이다. 혹시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닥치는 대로 무언가를 메모하여 쌓아두는 종이 부족. 문자 없는 부족을 처음 만났을 때 문명인들은 궁금했다. 그럼 당신들은 어떻게 중요한 기억을 정리하고 보관하는지 묻자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종이가 아니라 온몸에 쓴다고.
   정형화된 문자가 아니라 체험의 느낌 자체를 온몸에 기록하니 종이도 펜도 필요 없다. 그들은 문자가 아니라 체험의 총체 자체를 온몸의 세포로 기억한다. 그들은 문자가 없어서 열등한 종족이 아니라 문자가 없기에 문자로부터 자유로운 종족이 아닐까. 

 
   기억을 축적하여 소유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기억의 상실’에 대한 공포 때문에 더욱더 진화된 메모의 기술을 발명한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나 기억할 것이 많아진 문명사회에서 현대인은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통해 자신의 기억을 대체하는 ‘기억의 아바타’를 만들어 늘 턱없이 부족한 기억의 용량을 보충한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의 신체는 기억을 활용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 아닐까.

   휴대폰이나 컴퓨터가 없을 때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기억하고 있었다. 꼭 연락해야 하는 곳의 전화번호 정도는 자연스럽게 외웠고, 스스로에게 중요한 대부분의 정보는 ‘몸 바깥의 기계’가 아니라 ‘마음속 메모리’에 저장되어 있었다. 명인과 명창의 기술을, 장인의 노하우를, ‘메모리칩’으로 전수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의 기예는 오직 그들의 몸 안에 있고 그들로부터 배우는 길은 오직 ‘몸’과 ‘말’을 통한 직접적인 소통뿐이다. 우리는 ‘기록의 기술’을 얻는 대신 ‘구전의 지혜’를, 몸으로 기억하는 아날로그적 정보처리기술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지금 우리는 휴대폰을 잃어버리는 순간,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가 날아가는 순간, 패닉 상태에 빠진다. 나보다 나를 더 잘 기억하는 영혼의 분신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아바타>에 등장하는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 군인들은 ‘문자 없는 부족’인 나비족의 정보처리능력을 불신한다. 언옵타늄이라는 위대한 광물질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절대로 지구인과 협상하지 않으려는 나비족의 ‘어리석은’ 선택에 코웃음을 친다. 문자가 없기에 열등하고, 열등하기 때문에 대등한 협상이 불가능하며, 그들에게서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서는 어떤 폭력도 정당화되며, 그런 야만인들은 얼마든지 학살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원시문명에서 ‘그들과 우리의 차이’가 아니라 ‘그들과 우리의 같음’을 찾으려 했던 레비스트로스의 태도는 바로 진보를 자처하는 문명의 어둠, 문명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야만의 잔혹성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레비스트로스가 이끌었던 구조주의 혁명은 문명의 바다 속에서 문명의 바깥 공기를 탐지하는 거대한 사유의 잠망경이었던 셈이다.


   아바타 프로그램은 원래 ‘나비족’의 신체에 인간의 의식을 주입하여 원격 조종이 가능한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즉 인간의 영혼으로 아바타의 육체를 원격조종하여 나비족을 교란시키는 스파이로 만드는 것이 아바타 프로그램의 본래 목적이었다. 그런데 제이크가 ‘열등하고 야만적이다’라고 생각했던 나비족은 그의 상상과 전혀 달랐다. 그는 지옥이라 믿었던 곳에서 천국을 발견했고, 자신의 적들이라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사랑과 우정을 배워나가고, 사육되고 조련되는 동물이 아니라 인간과 교감하는 동물-친구까지 만나게 된다. 그는 이제 인간의 영혼으로 아바타의 육체를 원격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아바타의 신체가 거꾸로 인간의 영혼을 물들이는 행복한 역설에 빠져드는 것이다.


   
 

  신화의 사고에서 동물은 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으며, 털가죽을 벗으면 인간과 똑같은 모습이 되어 처녀들을 유혹해 결혼하거나 동물과 인간 사이에 아이를 만들거나 하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인간 역시 변신하여 동물로 변할 수가 있었습니다. 늑대인간에 관한 전설은 그런 신화적 사고에서 탄생한 것이지요. (……) 늑대인간이나 흡혈귀 드라큘라가 십자가를 싫어한 것은 십자가가 변신을 금하는 구속 원리를 의미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유럽에서는 이미 오랫동안 십자가가 상징하는 구속 원리에 의해 ‘이교’의 사고가 제압을 당해왔습니다. (……) ‘이교’의 예술이 트랜스를 지향하는 데 비해, 그리스도교의 예술은 ‘구속’에서 창조의 원리를 발견하려고 하지요. 그 사이에는 깊은 도랑이 파여 있습니다.
 - 나카자와 신이치, 김옥희 역, <예술인류학>, 동아시아, 2009, 150~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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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go 2010-01-27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종이 부족'의 슬픔이 새삼 실감나네요. 저는 열심히 메모만 해놓고는 그 다음에 그 메모를 거의 안 본답니다. 쿨럭~ ㅠㅠ

맨손체조 2010-01-28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인간의 영혼을 물들이는 건 특정한 <종교>여야 한다는 인간의 지독한 욕망!

qlsend 2010-01-28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맞아요. 침략자들이 토착민을 몰아내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종교이지요...
 

스포일러 주의!!! 


 영화 <아바타>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④

 

 4. 내가 아닐 때, 가장 나답다? (2)

   
 

  신화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의 몸속으로 스며들어온 것을 말한다.
 - 레비스트로스  


 우리는 진화의 맨 꼭대기에서 살아가는 가장 우월하고 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사실은 나무와 바위, 코요테, 독수리 물고기, 두꺼비들과 함께 각자의 목적을 완성하면서 삶이라는 성스런 고리를 구성하고 있는 일원일 뿐이다. 그들 모두가 그 성스런 고리 안에서 주어진 일을 해내고 있으며, 인간 역시 다르지 않다
 - 류시화,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김영사, 2003, 495쪽.

 
   

  

    레비스트로스가 원시문명 탐험을 떠났던 시기, ‘문자 없는 사람들’의 원시문명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말리노프스키로 대표되는 기능주의 혹은 실용주의적인 관점. 이 관점에서는 ‘문자 없는’ 사람들의 사유가 전적으로 생존을 위한 기본적 욕구의 충족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았다. 원시문명의 의식주와 성적 충동 등 아주 기본적인 생활 패턴만 알면, 그들의 사유 시스템 전체, 즉 그들의 신념, 신화, 제도 모두를 설명할 수 있다는 관점이었다.
   둘째, 레비브륄로 대표되는 신비주의적 관점. 그것은 원시문명이 근대문명과는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종류의 감성과 사유로 지탱된다고 본다. 원시문명은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사유가 아니라 전적으로 강렬한 감정과 신비로운 상상의 힘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관점은 과학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원시문명의 ‘감성’을 무시했고, 두 번째 관점은 서구인의 관점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원시문명만의 독자적인 ‘과학’을 배제해버렸다.

 


   레비스트로스는 원시문명을 바라보는 실용주의적 관점과 신비주의적 관점 모두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원시 부족은 문명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합리적이고 과학적이었으며, 동시에 문명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예술적이고 감각적인 존재였다. 그는 ‘문자 없는’ 사람들의 사고는 주변 세계를 단지 ‘이용’하는 실용적 욕구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려는 지적인 욕망에 의해 움직인다고 보았다. 또한 그들이 단지 ‘신비주의적’ 사유가 아닌 과학적 사유를 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문자’가 없다고 해서 ‘문명’이 없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문자 있는’ 문명이 ‘문자 없는’ 문명보다 우월하다는 편견을 가슴 속에 각인시킨 것일까. 

 


   영화 <아바타>에서 제이크 또한 나비족의 문명에 대한 엄청난 편견 속에서 나비족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문명사회가 원시문명에 파견한 침입자 제이크는 한없이 야만적이고 불합리한 종족이라 믿었던 나비족이, 뭔가 인간의 각별한 치료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열등한’ 종족이라 믿었던 나비족이, 그의 짐작과는 달리 훨씬 역동적이고 풍요로운 문명을 가꾸고 있음에 놀란다. 무엇보다도 제이크는 뭔가 단단히 결핍된 것이라 믿었던 나비족의 문명이 더없이 충만하고 풍요로운 삶의 열정 위에 뿌리를 박고 있음을 느끼며 점점 더 그들의 삶에 매혹을 느낀다. 


 


   나비족은 자동차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진 친구 ‘이크란’과 ‘다이어호스’가 있다. 평생 단 한 명만을 자신의 몸 위에 태우는 이크란은 그들에게 단지 운송수단이 아니라 평생의 지기가 된다. 나비족은 고함과 채찍으로 동물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카락을 동물의 감각기관과 연결하여 ‘서로’의 마음을 읽어낸다. ‘주체’의 명령을 일방적으로 대상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나누고 교감하는 입체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연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교감’하여 자연을 친구로 만들고 자연의 친구로서의 책임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레비스트로스 또한 제이크처럼 원시문명을 충분히 가까이 바라봄으로써 비로소 ‘멀리서만’ 바라봤을 때의 근거 없는 루머와 턱없는 스캔들을 떨쳐낼 수 있었다. 레비스트로스에게 ‘신화’란 ‘과학의 부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과학의 힘을 통해 비로소 신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레비스트로스 : 나는 인간 경험의 총체를 수학 모델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 적은 결코 없어요. (……) 이와는 바대로, 사회생활과 그것을 둘러싼 경험적 현실은 인간 세계에서 무작위로 펼쳐지는 영역인 것으로 내게는 생각됩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전적으로 우연적인 역사에 복종합니다. 나는 그저, 무질서가 지배하는 이 거대한 경험의 수프 속에는 여기저기에 구성의 섬들이 형성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 내가 하고 있는 이런 종류의 접근으로 전체 현상을 철저히 규명할 수 없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어요. 기상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정교한 기호논리학 모델이 일몰 때 느끼는 미학적인 감정을 설명해줄 수 없듯이 말이에요.
 - 디디에 에리봉 대담, 송태현 역,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강, 2003,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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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se 2010-01-26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판도라 행성에서 가장 탐나는 것 중 하나, 이크란 타고 멀리멀리 날기~!^^

qlsend 2010-01-27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아바타 또 보고 싶네요. 행복한 중독...
 

스포일러 주의!!! 


 영화 <아바타>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③

 

 3. 내가 아닐 때, 가장 나답다? (1)

   
 

 저는 한 번도 제 개인의 정체성을 깨달았던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제 자신이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는 장소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든지 ‘나를’과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사건이 일어나는 일종의 교차로입니다.
 - 레비스트로스, 임옥희 역, <신화와 의미>, 이끌리오, 2000, 16쪽.

 
   

  

   나비족의 여전사 네이티리는 평화로운 판도라를 침입한 외부자 제이크를 죽이려 하지만 불현듯 그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계시를 느끼고 차마 제이크에게 활을 겨누지 못한다. 나비족의 여신 ‘에이와’의 계시는 그녀를 비롯한 모든 부족민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네이티리는 나비족 전체를 소집한 부족회의에서 제이크가 정말로 ‘에이와의 계시’에 적합한 인물인지 결정하기로 한다. 의심과 호기심이 반반 섞인 얼굴로 제이크를 나비족의 모임 장소로 데려가는 네이티리. 미묘한 적의와 야생적 관능이 동시에 깃든 네이티리를 묵묵히 따라가며 제이크는 가슴이 두근거린다.  




 
   나비족 전체가 모인 회의에서 제이크의 생사 여부가 판가름 나는 순간이 다가온다. 모두가 낯선 이방인의 침투를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이지만, 네이티리의 어머니이자 부족의 치유자 역할을 하는 ‘모앗’만이 제이크를 살려두고 지켜보자고 말한다. 네이티리는 제이크의 개인 교습을 맡아 나비족의 문화와 야생의 밀림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준다. 단지 ‘건강한 인간의 다리’를 얻기 위해 아바타 프로젝트의 일원이 된 제이크는 난데없는 스파르타 훈련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네이티리의 훈육은 나비족의 언어와 문화는 물론 야생의 삶에 적응하기 위한 온몸의 감각구조 자체를 바꾸는 맹훈련이었던 것이다.  




   마지못해 아바타 프로그램에 투입된 제이크의 눈에서는 어느새 싱싱한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점점 더 ‘아바타에 링크되는 시간’, 즉 꿈꾸는 시간이 현실의 시간보다 매혹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아바타의 꿈속에서 그는 불편한 다리도, 형의 갑작스런 죽음도, 복잡한 세상사도 모두 망각하고 자신도 모르게 나비족의 푸른 꿈을 이식 당한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걱정스런 ‘세뇌’이겠지만 나비족의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동화’다. 지옥보다 더 지옥 같다는 루머의 진원지 판도라는 알고 보니 더 없이 매혹적인 비밀로 가득한 꿈의 놀이터였다.  




   제이크가 ‘아바타의 꿈’에서 깨어나면 삭막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아바타 제이크처럼 마음대로 걸을 수도 없고 자신의 의지대로 미래를 계획할 수도 없는, 꼭두각시 신세. 그는 점점 네이티리와 함께 하는 아바타 체험, 아니 나비족-되기의 시간이 현실보다 더욱 현실 같은 생생함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바꾸고 있음을 깨닫는다. 제이크와 함께 아바타 체험을 하고 있던 과학자 그레이스는 이런 제이크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눈치 챈다. 그레이스는 제이크가 쿼리치 대령에게 ‘건강한 새 다리’를 구실로 매수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눈감아준다. 지금까지 그녀와 함께 했던 그 어떤 과학자들보다 빠르게 아바타 훈련에 적응하는 제이크를 바라보는 그레이스의 눈길이 점점 따스해진다.  




   한없이 ‘적대적’이기만 했던 판도라의 밀림은 점점 매혹적인 신비와 풍요를 상징하는 암호로 변해간다. 제이크의 임무수행지역에 불과했던 판도라는 제이크에게 때로는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추억처럼 따스한 노스탤지어를, 때로는 인류가 잃어버린 낙원의 기억처럼 신비로운 감성의 놀이터로 변모해간다.
   아마 레비스트로스도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었던 원시부족의 문명탐험을 하며 이런 과정을 겪지 않았을까. ‘위험하다, 야만적이다, 무모하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온갖 주변의 걱정들을 뒤로 하고 그는 브라질 대륙의 마투그로수를 탐사하며 카두베오족과 보로로족의 원시 문명을 체험했다.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 위험한 여정 속에서 그는 자신의 ‘상상력’이 부족한 것이 원시 부족 탐험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위험을 상상하는 능력이 떨어졌기에 닥쳐올 위기를 모르고 지나친 것이 오히려 원시 문명 탐험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에리봉 : 탐사 기간을 잘 견뎌내자면 상당한 용기와 육체적인 건강이 필요했을 텐데요. 당신은 접근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곳을 말을 타고 가거나, 강을 건너거나, 카누로 여행하는 등의 이야기를 <슬픈 열대>에서 하고 있더군요.
 레비스트로스 : 젊을 때는 누구나 그 정도 난관은 다 견뎌내죠.에리봉: 그렇지만 당신 책을 읽으면서 난관을 헤쳐 나가는 당신의 힘이 각별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레비스트로스 : 그렇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병에 걸리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때 난, 내가 살아오는 동안 흔히 그랬듯이, 상상력의 결핍 덕을 톡톡히 봤죠.
 에리봉 : 위험에 대한 무감각 말인가요?
 레비스트로스 : 바로 그렇지요.
 - 디디에 에리봉 대담, 송태현 역,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강, 2003, 40쪽
 
   




 

   
  레비스트로스는 신화를 구성하는 복잡한 코드의 조합을 발견해 그것들의 상호관계를 밝혀냈습니다. 신화는 다른 신화로 계속 모습을 바꾸어 변형해 가는데, 그 변형은 라벨이 작곡한 '볼레로'와 같은 걸음걸이로 진행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스스로 이 '볼레로'의 걸음걸이를 뒤쫓으며, 몇 백 개에 달하는 신화가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묘사해냈습니다.
 - 나카자와 신이치, 김옥희 역,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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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이 2010-01-25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들어 왔는데^^
아바타네
처음부터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