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너와 함께, 네 안에서, 너를 통해, 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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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이라는 신의 의지는 ‘진실과 사랑이 넘치는 투쟁’에 혼신을 바치는 나의 참 자아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 칼 야스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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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는 스미스의 숨겨진 두려움을 간파하고 사력을 다해 그를 공격하지만, 잠시 방심하는 사이 스미스 일당의 교활한 팀플레이로 죽음의 위기를 맞는다. 탕, 탕, 탕……. 스미스의 총격으로 매트릭스 안의 네오는 피를 토하며 죽어간다. 매트릭스 안에서의 죽음은 곧 정신의 죽음. 정신이 죽으면 매트릭스 바깥의 육신도 죽는다. 스미스는 더 이상 뛰지 않는 네오의 심장박동을 확인하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선다. 이제야 자신이 ‘그’라는 것을 알 것만 같은데, 바로 그 황홀한 깨달음의 순간 네오는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고야 만다.
모피어스와 탱크는 믿을 수 없는 광경 앞에서 전율한다. 매트릭스 바깥에서 심장 박동을 멈춘 네오의 육체. 설상가상으로 그들이 타고 있는 호버크래프트를 침략하는 스퀴디(매트릭스를 방해하는 저항군을 찾아 파괴하는 살인기계)의 무리들. 그들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모피어스 일행은 이제 네오의 죽음으로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상황이다.
이 순간 차분히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트리니티가 네오의 식어가는 육체를 바라보며 말문을 연다. 모두가 망연자실한 순간, 트리니티는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더욱 차분하고 평화롭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이다. 트리니티는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생에 단 한 번뿐일 수밖에 없는, 눈부신 고백을 시작한다.
트리니티 : 네오……. 난 이제 두렵지 않아.
오라클은 내가 사랑에 빠지는 남자가 바로 ‘그’라고 말했어.
그러니까 ……당신은 죽을 수 없어.
왜냐하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들려?
사랑해…….
이제 일어나야지.
트리니티는 이미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듯 가망이 없어 보이는 네오에게 키스한다. 이제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떤 떨림도 없고 오직 ‘그’에 대한 흔들리지 않은 믿음이 아로새겨져 있다. 트리니티의 눈물 어린 키스를 받는 순간 네오는 기적처럼 깨어난다. ‘그’의 진정한 부활의 순간이다.
오라클의 예언-모피어스의 믿음-트리니티의 사랑이 합체하는 순간. 마침내 네오가 완전한 ‘그’로 거듭나는 순간. ‘그’는 매트릭스의 철칙(매트릭스에서 죽으면 현실에서도 죽는다)에 어긋나는 단 하나의 존재라는 예언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네오를 꼬박꼬박 ‘앤더슨’이라고 부르며 네오가 ‘그’임을 끈질기게 부정하던 스미스. 그는 이제야 네오가 ‘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기 시작한다.
그 순간 네오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스미스를 ‘격파’한다. 순식간에 온몸을 스미스의 몸 안으로 침투시켜, 스스로를 잠시 스미스의 몸속으로 사라지게 한 후, 말 그대로 스미스를 ‘내파(內破)’해버리는 것이다. 이제 네오는 자신의 몸을 완전히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천부적 매뉴얼을 스스로 완성시킨다. 어떤 인공무기의 성능도 압도하는 최고의 무기는 바로 인간의 몸 그 자체임을, 네오는 그렇게 증명한다. 그리고 네오는 이렇게 자신감 넘치는 피날레 멘트를 날린다.
네오 : 난 미래를 모른다. 이것이 어떻게 끝날지 말하려는 게 아니다. 어떻게 시작할지를 말하려는 거다. 이제 전화를 끊고 이 사람들에게 전부 다 보여주겠다. 진짜 세상을 보여주겠다. 규칙이나 통제, 경계나 국경이 없는 세계.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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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리쾨르는 한 인간이 일생을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다음의 여섯 가지 문제를 잘 처리해야 한다고 했다. 첫째, (죽음이라는 운명과 관련된) 인간의 유한성. 둘째, 신이나 신령한 존재로부터 소외당한 인간의 현실. 셋째, 생성과 초월의 과정,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 있는 존재인 개개의 인간에게 진리는 절대로 온전하게 완성된 것일 수 없다는 점. 넷째, 선택에 대한 인간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 사이의 모순성. 다섯째, 인간이란 타자들과 함께, 그들 속에서, 그들을 통해(with, in, and through others)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의미를 인식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 여섯째, 우주 속에서의 인간의 정체성과 그 역할.
- 비얼레인, 배경화 역, <살아 있는 신화>, 세종서적, 200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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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 함께, 그들 속에서, 그들을 통해(with, in, and through others) 비로소 존재하는 우리. 네오를 위해 다치고, 의심 받고, 죽음을 불사했던 친구들이 없었다면 네오는 평생 ‘그’가 될 순간을 단 한 번도 포착하지 못한 채 매트릭스 안에서 방황하다 죽어갔을 것이다. 온종일 말 한 마디 안 하고 ‘디지털 무언족’으로 살아도 충분히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더더욱 친구가 필요하다. 나를 일깨우고, 나를 시험하고, 나를 뒤흔드는 타인이 없다면 우리는 평생 각자의 ‘그’가 되는 길을 찾지 못해 운명의 미궁 속을 헤매지 않을까.
네오가 진정으로 성숙하게 되는 계기는, 단지 그의 뛰어난 학습 능력이나 놀라운 해킹 실력 때문이 아니라, 늘 혼자 생각하고 혼자 행동하고 혼자 결정하던 네오가 드디어 모피어스라는 타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순간이다. 모두가 ‘시온’이라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소중한 모피어스라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오직 네오만이 모피어스를 살리자고 한다.
모피어스와 네오 중 둘 중 한 명의 목숨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오라클의 비극적인 예언이 ‘틀리는’ 순간 네오는 비로소 진정한 ‘그’가 될 수 있다. 오라클은 단지 ‘너는 아무리 피해도 그가 될 수밖에 없을 거야’라고 손쉽게 운명의 진로를 귀띔해준 것이 아니라, ‘네가 진정으로 넘어야 할 운명의 장벽은 바로 이것이다’라고 일깨워준 것이다. 그 운명의 장벽을 넘을 것인가 아닌가는 바로 네오 스스로의 선택이고 능력이고 용기였던 것이다.
엘리아데는 캐나다의 정신과 의사 버크 박사의 신비한 체험을 이야기하며 우리 안에 내재한 ‘그’가 발현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묘사한다. 세속의 틈바구니에서 신성을 발견하는 체험. 그것은 완전히 낯선 경험은 아니다. 내 안에 깃든 타자, 가장 익숙하지만 동시에 가장 낯선 타자를 발견하는 순간. 내 안의 빛, 바로 너와 함께, 너를 통해, 네 안에서, 우리는 언젠가 비로소 ‘그’가 될 수 있다. 너와 함께, 네 안에서, 너를 통해, 비로소 나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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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크박사는 어느 봄날 밤 자신에게 닥친 일을 3인칭으로 서술했다. 친구들과 함께 워즈워드와 셸리, 키츠, 특히 휘트먼의 시를 읽으며 파티를 즐긴 뒤 자정에 빠져나온 그는 승합마차를 타고 오랜 드라이브를 했다. (일은 영국에서 일어났다.) 그는 거의 수동적인, 고요한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그는 불꽃 색깔의 구름에 파묻혔다. 순간 그는 불, 대도시의 돌발적인 화재를 떠올렸다. 그러나 곧 그는 빛이 자신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즉시 고양된 감정이 그를 감쌌는데, 이는 엄청난 기쁨의 감정이었으며, 여기에 형언할 수 없는 지적 계시가 수반되고 또 뒤를 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브라만의 찬란함을 지닌 순간적인 번갯불이 일렁이고 있었는데, 이 불은 그 뒤로 그의 일생을 밝힌다. 브라만의 지복 한 방울이 심장으로 떨어져, 천국의 뒷맛을 그에게 영원히 남긴다. (……) 그는 보고, 알았다. 우주는 죽은 물질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존이다. 인간의 영혼은 불멸이며(……) 세상의 근본 원리는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이고, 길게 보면 각자의 행복은 절대적으로 보장된 것이다. 그는 단 몇 초의 계시에서 그 후의 몇 달, 심지어 몇 년의 연구에서보다 더 많이 배웠으며, 어떤 연구도 가르쳐줄 수 없었을 많은 것을 배웠다.
- 엘리아데, 최건원·임왕준 역,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 문학동네, 2006,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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