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

 

1. ‘바람직한 주체’가 되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 (1)

   
 

행복은 오직 반항의 대가로만 존재한다.
 - 줄리아 크리스테바

 
   

  


 

   어린 시절 동화를 읽고 나면 종종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더라’는 결말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존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그들은 어른들의 말처럼 죽거나 사라지거나 개과천선했을까. 내 마음속 네버엔딩 스토리 공화국에서는 백설공주에게 독이 든 사과를 준 마녀가 아직도 복수심을 삭이지 못하고 새로운 음모를 준비하고 있었고, 신데렐라처럼 왕자와 결혼하지 못한 심술쟁이 언니들이 아직도 짝을 찾지 못한 채 ‘결혼 시장’을 헤매고 있었으며, 해님이 되고 달님이 된 오누이를 놓치고 썩은 동아줄을 붙잡아 추락사한 호랑이가 다시 살아나 어디선가 또 다른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해피엔딩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마녀들, 괴물들, 악당들이 때로는 주인공보다 오히려 더 매혹적인 공상의 주인공이 되곤 했다. 그들은 정말 도저히 구제불능인 천하의 악역들이기만 했을까.

   우리가 읽은 동화들 대부분이 ‘어린이를 교화시키기 위해(?)’ 각색되고 변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마음속에서 은밀하게 꿈틀대던 악녀들과 괴물들이 더욱 마음 놓고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영원한 징벌의 대상으로 굳어져버린 악역들에 대한 호기심이 탄력을 제대로 받아 아예 동화의 내용 자체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 진짜 잘못은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마녀가 아니라 마녀를 파티에 초대하지 않은 부모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엄지 공주 이야기>에서 엄지 공주의 간택을 받지 못한 두꺼비와 풍뎅이와 두더지 총각들은 정말 엄지 공주 같은 ‘퀸카’의 사랑을 영원히 받지 못할까. <헨젤과 그레텔>에서 아이들을 삶아 먹으려던 노파는 정말 마녀였을까. 동화 속에서 악인으로 처벌받는 존재들은 마음속 네버엔딩 스토리 공화국에서는 아직도 죽거나 사라지지 않은 채, 좀처럼 말끔히 해결되지 않는 무의식의 영토에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날조된 동화’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품고 있던 사람들에게 <슈렉>은 정말 반가운 작품이었다. 동화 날조의 달인들이 모여 사는 전형적인 월트 디즈니 공화국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를 듣고 싶었기에. 식인 괴물 오거(ogre)를 자칭하는 슈렉(Shrek)은 별로 무섭지 않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동화 속에서 끝내 버려지고 짓밟히는 괴물의 기본 요건을 충실히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동화 나라에서 추방된 온갖 생물들이 슈렉의 서식지인 ‘늪(swamp)’으로 도망 와서 난민촌을 형성하는 설정도 흥미진진했다. 그 모든 다채로운 캐릭터들의 모습은 우리 마음속에서 미처 완전히 정리되거나 삭제되지 않은, 좌절되고 망각된 우리 안의 욕망들의 총집합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언어’를 통해 사회에서 필요한 존재로 길들여지는 인간.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토록 방대한 언어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야생의 갈증과 길들여지지 않는 야수성이 공존한다. 철학자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회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주체가 되기 위해 우리가 버려야 했던 것들의 잃어버린 가능성을 탐구한다. 우리의 바람직한 정체성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버려진 역겹고 더럽고 위험한 것들을 그녀는 ‘아브젝트(abject)’라고 불렀다. 슈렉은 바로 그 버려진 존재, 아브젝트를 코믹하게 구현해낸 성공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슈렉>은 지상의 모든 남녀를 ‘백마 탄 기사를 기다리는 공주’와 ‘공주를 구출하는 멋진 왕자’로 육성하려는 동화의 낭만적 환상을 첫 장면에서부터 와르르 무너뜨린다. 

    옛날 옛적에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저주가 걸려 있었답니다.
    사랑하는 남자의 첫 키스만이 이 저주를 없앨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성에 갇혀 있었고 무서운 불을 뿜는 용이 그녀를 지켰습니다.
    많은 용감한 기사들이 그녀를 구출하려고 시도했으나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용의 성에서 기다렸습니다.
    가장 높은 탑의 맨 위에서 그의 사랑과 키스를 기다렸습니다.

   슈렉은 뒷간에서 큰일을 보던 중 이 동화를 읽다가 다음 페이지를 쭉 찢어 ‘휴지’로 사용한다. 슈렉에게 그런 아름다운 동화 속 이야기란 얼간이들의 말장난일 뿐이다. 슈렉은 자신을 스스로 악당의 자리, 괴물의 자리에 고립시킨다. 어차피 정상인들의 세계에서 환영받지도 이해받지도 못할 존재이니 타인에게 사랑받는 통로를 아예 차단해버리고 세상에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것이다. 수다쟁이 당나귀 동키는 세상의 냉대를 참다못해 스스로를 유배시킨 슈렉의 숨은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알아봐 준 존재다. 동키 또한 주인의 말을 잘 듣고 묵묵히 일하는 ‘바람직한 당나귀’가 되지 못하고 주인에게 버려진 존재였기에 자신도 모르게 슈렉의 상처에 공감했던 것이 아닐까.  

 

   
 

  우리 중 그 누구도 장애, 금지, 권위 또는 법률과 맞서지 않고서는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 반항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로 인식할 수 있다. 행복의 개인적 경험을 동반하여 나타나는 반항은 쾌락 원칙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 소외 계층이 반항의 문화를 갖지 않고, 쾌락의 요구를 결코 만족시켜주지 않는 이데올로기와 쇼와 오락 등에 안주해야 할 때, 그들은 폭도가 된다.  


 - 줄리아 크리스테바, 박선영 역, <정신병 모친 살해 그리고 창조성>, 아난케, 2006,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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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12-28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앗, 슈렉. 수다쟁이 당나귀와 핑크 드래곤의 로맨스가 더욱 재밌었던 영화.

love hurts 2009-12-29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우, 슈렉. 괴물이 그렇게 귀여울 수 있다니^^ 언제 봐도 유쾌한 애니~

둥이 2009-12-29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화신은 고양이^^
우리집에 있는데^^
 

 


영화 <매트릭스>와 미르치아 엘리아데 마지막회

 

13. 너와 함께, 네 안에서, 너를 통해, 내가 된다

   
 

초월이라는 신의 의지는 ‘진실과 사랑이 넘치는 투쟁’에 혼신을 바치는 나의 참 자아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 칼 야스퍼스

 
   

  


    네오는 스미스의 숨겨진 두려움을 간파하고 사력을 다해 그를 공격하지만, 잠시 방심하는 사이 스미스 일당의 교활한 팀플레이로 죽음의 위기를 맞는다. 탕, 탕, 탕……. 스미스의 총격으로 매트릭스 안의 네오는 피를 토하며 죽어간다. 매트릭스 안에서의 죽음은 곧 정신의 죽음. 정신이 죽으면 매트릭스 바깥의 육신도 죽는다. 스미스는 더 이상 뛰지 않는 네오의 심장박동을 확인하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선다. 이제야 자신이 ‘그’라는 것을 알 것만 같은데, 바로 그 황홀한 깨달음의 순간 네오는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고야 만다.

   모피어스와 탱크는 믿을 수 없는 광경 앞에서 전율한다. 매트릭스 바깥에서 심장 박동을 멈춘 네오의 육체. 설상가상으로 그들이 타고 있는 호버크래프트를 침략하는 스퀴디(매트릭스를 방해하는 저항군을 찾아 파괴하는 살인기계)의 무리들. 그들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모피어스 일행은 이제 네오의 죽음으로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상황이다. 
   이 순간 차분히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트리니티가 네오의 식어가는 육체를 바라보며 말문을 연다. 모두가 망연자실한 순간, 트리니티는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더욱 차분하고 평화롭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이다. 트리니티는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생에 단 한 번뿐일 수밖에 없는, 눈부신 고백을 시작한다.

     트리니티 : 네오……. 난 이제 두렵지 않아.
    오라클은 내가 사랑에 빠지는 남자가 바로 ‘그’라고 말했어.
    그러니까 ……당신은 죽을 수 없어.
    왜냐하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들려?
    사랑해…….
    이제 일어나야지.

    트리니티는 이미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듯 가망이 없어 보이는 네오에게 키스한다. 이제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떤 떨림도 없고 오직 ‘그’에 대한 흔들리지 않은 믿음이 아로새겨져 있다. 트리니티의 눈물 어린 키스를 받는 순간 네오는 기적처럼 깨어난다. ‘그’의 진정한 부활의 순간이다.  

   오라클의 예언-모피어스의 믿음-트리니티의 사랑이 합체하는 순간. 마침내 네오가 완전한 ‘그’로 거듭나는 순간. ‘그’는 매트릭스의 철칙(매트릭스에서 죽으면 현실에서도 죽는다)에 어긋나는 단 하나의 존재라는 예언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네오를 꼬박꼬박 ‘앤더슨’이라고 부르며 네오가 ‘그’임을 끈질기게 부정하던 스미스. 그는 이제야 네오가 ‘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기 시작한다.
   그 순간 네오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스미스를 ‘격파’한다. 순식간에 온몸을 스미스의 몸 안으로 침투시켜, 스스로를 잠시 스미스의 몸속으로 사라지게 한 후, 말 그대로 스미스를 ‘내파(內破)’해버리는 것이다. 이제 네오는 자신의 몸을 완전히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천부적 매뉴얼을 스스로 완성시킨다. 어떤 인공무기의 성능도 압도하는 최고의 무기는 바로 인간의 몸 그 자체임을, 네오는 그렇게 증명한다. 그리고 네오는 이렇게 자신감 넘치는 피날레 멘트를 날린다. 

   네오 : 난 미래를 모른다. 이것이 어떻게 끝날지 말하려는 게 아니다. 어떻게 시작할지를 말하려는 거다. 이제 전화를 끊고 이 사람들에게 전부 다 보여주겠다. 진짜 세상을 보여주겠다. 규칙이나 통제, 경계나 국경이 없는 세계.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를. 


   
 

폴 리쾨르는 한 인간이 일생을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다음의 여섯 가지 문제를 잘 처리해야 한다고 했다. 첫째, (죽음이라는 운명과 관련된) 인간의 유한성. 둘째, 신이나 신령한 존재로부터 소외당한 인간의 현실. 셋째, 생성과 초월의 과정,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 있는 존재인 개개의 인간에게 진리는 절대로 온전하게 완성된 것일 수 없다는 점. 넷째, 선택에 대한 인간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 사이의 모순성. 다섯째, 인간이란 타자들과 함께, 그들 속에서, 그들을 통해(with, in, and through others)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의미를 인식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 여섯째, 우주 속에서의 인간의 정체성과 그 역할.
 

 - 비얼레인, 배경화 역, <살아 있는 신화>, 세종서적, 2000, 18쪽.

 
   

   그들과 함께, 그들 속에서, 그들을 통해(with, in, and through others) 비로소 존재하는 우리. 네오를 위해 다치고, 의심 받고, 죽음을 불사했던 친구들이 없었다면 네오는 평생 ‘그’가 될 순간을 단 한 번도 포착하지 못한 채 매트릭스 안에서 방황하다 죽어갔을 것이다. 온종일 말 한 마디 안 하고 ‘디지털 무언족’으로 살아도 충분히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더더욱 친구가 필요하다. 나를 일깨우고, 나를 시험하고, 나를 뒤흔드는 타인이 없다면 우리는 평생 각자의 ‘그’가 되는 길을 찾지 못해 운명의 미궁 속을 헤매지 않을까. 

   네오가 진정으로 성숙하게 되는 계기는, 단지 그의 뛰어난 학습 능력이나 놀라운 해킹 실력 때문이 아니라, 늘 혼자 생각하고 혼자 행동하고 혼자 결정하던 네오가 드디어 모피어스라는 타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순간이다. 모두가 ‘시온’이라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소중한 모피어스라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오직 네오만이 모피어스를 살리자고 한다.
   모피어스와 네오 중 둘 중 한 명의 목숨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오라클의 비극적인 예언이 ‘틀리는’ 순간 네오는 비로소 진정한 ‘그’가 될 수 있다. 오라클은 단지 ‘너는 아무리 피해도 그가 될 수밖에 없을 거야’라고 손쉽게 운명의 진로를 귀띔해준 것이 아니라, ‘네가 진정으로 넘어야 할 운명의 장벽은 바로 이것이다’라고 일깨워준 것이다. 그 운명의 장벽을 넘을 것인가 아닌가는 바로 네오 스스로의 선택이고 능력이고 용기였던 것이다. 

   엘리아데는 캐나다의 정신과 의사 버크 박사의 신비한 체험을 이야기하며 우리 안에 내재한 ‘그’가 발현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묘사한다. 세속의 틈바구니에서 신성을 발견하는 체험. 그것은 완전히 낯선 경험은 아니다. 내 안에 깃든 타자, 가장 익숙하지만 동시에 가장 낯선 타자를 발견하는 순간. 내 안의 빛, 바로 너와 함께, 너를 통해, 네 안에서, 우리는 언젠가 비로소 ‘그’가 될 수 있다. 너와 함께, 네 안에서, 너를 통해, 비로소 나는 존재한다. 

 

   
 

버크박사는 어느 봄날 밤 자신에게 닥친 일을 3인칭으로 서술했다. 친구들과 함께 워즈워드와 셸리, 키츠, 특히 휘트먼의 시를 읽으며 파티를 즐긴 뒤 자정에 빠져나온 그는 승합마차를 타고 오랜 드라이브를 했다. (일은 영국에서 일어났다.) 그는 거의 수동적인, 고요한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그는 불꽃 색깔의 구름에 파묻혔다. 순간 그는 불, 대도시의 돌발적인 화재를 떠올렸다. 그러나 곧 그는 빛이 자신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즉시 고양된 감정이 그를 감쌌는데, 이는 엄청난 기쁨의 감정이었으며, 여기에 형언할 수 없는 지적 계시가 수반되고 또 뒤를 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브라만의 찬란함을 지닌 순간적인 번갯불이 일렁이고 있었는데, 이 불은 그 뒤로 그의 일생을 밝힌다. 브라만의 지복 한 방울이 심장으로 떨어져, 천국의 뒷맛을 그에게 영원히 남긴다. (……) 그는 보고, 알았다. 우주는 죽은 물질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존이다. 인간의 영혼은 불멸이며(……) 세상의 근본 원리는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이고, 길게 보면 각자의 행복은 절대적으로 보장된 것이다. 그는 단 몇 초의 계시에서 그 후의 몇 달, 심지어 몇 년의 연구에서보다 더 많이 배웠으며, 어떤 연구도 가르쳐줄 수 없었을 많은 것을 배웠다.
 

 - 엘리아데, 최건원·임왕준 역,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 문학동네, 2006,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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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12-24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울님, 메리크리스마스^^*

spade 2009-12-24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with, in, and through others!

skah 2009-12-27 0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세상의 근본 원리는 사랑, 아주 길게 보면 각자의 행복은 절대적으로 보장된 것! 음....가슴을 후벼파는 메시지입니다.^^
 

 


영화 <매트릭스>와 미르치아 엘리아데 ⑫

 

12. 난 이제 그들이 두렵지 않아 (2)

   
 

신화는 별들에게 열정의 옷을 입히고,
 신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지닌 결함과 과오를
 덧씌우기도 했다네. 신화 속에서 바람과
 파도는 음악이었다네. 모든 호수와 시내,
 샘물과 산, 숲과 향내 그윽한 골짜기는
 온갖 요정들의 놀이터였다네 


 - 로버트 G. 잉거솔

 
   

  


   세속의 아수라 속에서도 신성의 숨결을 발견하는 열쇠. 그 열쇠는 바로 ‘몸’이었다. 네오를 비롯하여 매트릭스에 갇혀 있던 모든 인류는 자신의 진짜 몸을 AI(인공지능로봇)에게 건전지로 헌납한 채 가상의 이미지로만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태어나서 자신의 눈, 코, 입, 손, 발을 단 한 번도 진짜 세계에서 써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네오가 매트릭스로 철저히 세뇌된 자신의 두뇌를 해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몸’을 매트릭스의 회로에서 빼내 육체와 정신의 혼연일체를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역으로, 매트릭스 안에서는 거의 신의 경지에 올라 있는 스미스가 이상하게도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던 것은 그의 ‘몸’이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스미스는 모든 것을 갖췄지만 자신의 ‘건전지’를 인간의 육체로부터 쥐어짜내야 하는 참혹한 운명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다. 스미스가 모피어스를 협박하며 투덜거리는 장면은 결국 매트릭스 안의 ‘적자’인 인공지능로봇조차도 결코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님을 실감하게 만든다.

   스미스는 자신의 몸을 자신의 욕망대로 사용할 수 없기에, 아니 자신의 욕망 자체가 곧 매트릭스의 욕망이기에, 그 불완전한 육체조차 인간에게 철저히 기생해야만 유지할 수 있기에, 결코 ‘구식 인간’들처럼 몸과 마음이 일치하는 순간의 희열을 평생 누릴 수 없다. 그는 한 번도 햇살의 따스함을, 얼음물의 청량감을, 향기로운 꽃냄새를, 사랑하는 여인의 체온을 ‘몸’으로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난 여기가 싫어. 이 동물원, 감옥……. 뭐라고 부르든 간에 더 이상은 못 참아. 냄새 때문이지. 그런 게 있다면 말이야. 네 냄새가 느껴져. 마치 감염될 것 같아. 아주 불쾌해. 안 그래? 여기서 벗어나야 해. 네 머릿속에 열쇠가 있어. 시온이 파괴되면 내가 여기 있을 필요가 없어지지. 시온으로 들어가야 해. 코드가 뭔지 빨리 말해.” 

   스미스는 마치 권태에 지친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살아 움직이는 인간들을 향해 유혹의 미끼와 저주의 화살을 동시에 던진다. 스미스의 엄청난 파워에 기가 질렸던 네오는 스미스와 ‘몸’으로 싸우면서 그의 불안과 공포를 차츰차츰 읽어낸다. “너희를 느낄 수 있다. 너희는 우리를 두려워한다. 변화가 두려운 거야.” 네오는 천하무적으로 보였던 스미스 일당이 실은 자신들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스미스는 바로 매트릭스의 명령체계를 향해 저항하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인간에게 운동과 생명 대신 휴식과 정지, 죽음을 강요하듯이. 네오가 싸워야하는 것은 바로 스미스라는 강력한 상징적 존재로 대변되는 매트릭스의 의지, 즉 ‘생의 운동성’을 부정하는 거대한 시스템의 만유인력이었다. 스미스는 단지 사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운동’을 부정하고, ‘생명’을 부정하고, 마침내 자유와 저항을 부정하기에 위험한 존재였던 것이다. 끊임없이 꿈틀대고 미끄러지는 인간의 욕망,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살아있는 육체이기에. 매트릭스의 인공지능로봇은 그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인간의 ‘살아있는 육체’를 결코 소유할 수 없기에.    

   
 

 괴테가 구상한 메피스토펠레스는 항의하고 부정하는 영이며, 특히 삶의 흐름을 멎게 하고 일의 진행을 방해하는 영이다. 메피스토펠레스의 행위는 신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생을 거스르는 것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모든 방해의 아버지다”. 그가 파우스트에게 요구하는 것은 멈추라는 것이다. “어쨌든 멈춰라!”는 특히 메피스토펠레스를 연상시키는 문구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가 멈추는 순간 그 영혼을 잃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멈춤은 창조주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부정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신에게 직접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중요한 창조물인 생을 방해한다. 운동과 생명 대신 휴식과 정지, 죽음을 강요하려고 애쓴다. 바뀌고 변화하지 않는 것은 부패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 엘리아데, 최건원·임왕준 역,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 문학동네, 2006, 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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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12-23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스미스야말로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내 모습처럼 보일때가 많아, 네오보다 더 매력적일때가 있지요^^*

you & I 2009-12-24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스파이더맨 2>에 나오는 닥터 옥타비우스와 <매트릭스>의 스미스, 모두 매력적인 악역이었죠. 지성미 넘치는 진화된 메피스토펠레스들^^
 

 


영화 <매트릭스>와 미르치아 엘리아데 ⑪

 

11. 난 이제 그들이 두렵지 않아 (1)


 

   
 

대자연은 오류에 대해 근심하지 않는다. 자연은 스스로 이를 수정하며, 이 모든 것들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생각해보지 않는다.  


 - 괴테

 
   

   네오는 ‘과연 내 몸이 마음대로 움직일까’ 내심 걱정하지만 모피어스를 구해야 한다는 지상과제 앞에서 모든 두려움을 잊는다. 그는 ‘과연 이런 방법이 통할까’를 고민할 틈도 없이 몰려드는 적들의 주먹과 총알을 피해 자신도 모르고 있던 스스로의 잠재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잡생각을 할 틈조차 없이 ‘친구를 살리는 일’에 완전히 몰입하기에 ‘생각의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스미스와 트리니티가 매트릭스 바깥으로 무사히 탈출하고 나서도 네오는 끝까지 자신을 추격하는 스미스 일당을 제거하기 위해 천의무봉의 무술 실력을 뽐낸다. 어느새 두려움도, 불안도, 미련도 사라진 네오의 눈빛에는 비로소 자기 안의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찾은 자의 무한한 여유가 서린다.


   스미스와 무시무시한 추격전을 펼치는 네오. 이제는 네오에게서 얼마 전까지 스미스 일당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회사원 ‘토마스 앤더슨’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스미스는 네오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마지막 두려움을 자극한다. 그를 ‘네오’가 아니라 ‘앤더슨’으로 부르며, 그의 ‘평범함’에 대한 두려움에 호소하는 스미스. 스미스는 자신에게 맞아 비틀거리는 네오를 계속 ‘앤더슨’으로 부르며 이죽거린다. “앤더슨, 너 이러다 죽겠다?” 스미스는 네오가 ‘그’임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네오의 잠재력을 부정한다. 달려오는 열차를 향해 네오의 몸을 내팽개치며 스미스는 싸늘하게 미소 짓는다. “저 소리가 들리나? 피할 수 없는 소리다. 네 죽음의 소리지. 잘 가라, 앤더슨.”

   그 순간 네오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일으켜 기차를 피하고 오히려 스미스를 기차 쪽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그는 절규한다. “내 이름은, 내 이름은……네오다!” 모피어스도 탱크도 트리니티도 모두 네오가 ‘그’임을 인정했지만 아직 네오는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었다. 이제 네오는 자신의 가장 커다란 적수 앞에서 드디어 자신이 바로 ‘그’임을 믿기 시작한다.
   네오는 자신이 ‘그’가 아님을 인정하고 떠난 길 위에서 오히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바로 ‘그’임을 발견하는 역설적 루트를 밟아 되돌아온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고뇌의 통로를 지나자 지금까지 믿어왔던 세계의 ‘앞면’과 전혀 다른, 세계의 ‘이면’이 나타난 것이다.

   세상을 향해서는 죽고, 자신의 내면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용기. 토마스 앤더슨은 바로 그 용기를 조금씩 키워가는 과정에서 네오가 되고, 파란 약이 아니라 빨간 약을 삼키고, 의심의 터널과 죽음의 터널을 거쳐 마침내 ‘그’가 되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순간. 매트릭스가 길들인 육체의 감각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는 이제 단지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총알이 달리는 시간’과 ‘총알이 머무는 공간’을 사로잡아 스스로를 중력의 법칙에서 해방시켜버린다. 그가 ‘정지시킨’ 총알을 하나하나 떼어내어 땅에 떨어뜨리는 장면. 그것은 네오가 ‘그’가 되기 위해 마침내 공간과 시간(=인간의 한계)을 쥐락펴락하는 마술적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스스로 자신의 책임을, 운명을, 신화를 완전히 긍정하는 희열의 순간에 도달한 것이다.

   
 

세계를 갱신한다는 것은 세계를 성스럽게 만든다거나 원형과 비슷한 형태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 때로 이와 같이 다시 성스러운 존재로 만든다는 것은 세계를 ‘천국’ 상태로 회귀시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인간이 풍요롭고 의미 있는 우주 안에서 존재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풍요롭다는 것은 음식물이 풍부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우주는 일종의 기호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우주는 ‘말을 하고’, 자신의 구조와 양식과 리듬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인간은 그 메시지를 듣고 또는 읽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우주를 일관성 있는 의미체계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 마지막으로, 종교적 인간은 세계의 개혁에 책임이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엘리아데, 최건원 임왕준 역,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 문학동네, 2006, 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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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lxmfqlxmf 2009-12-22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총알 멈춰서 땅에 떨구기 묘기, 압권이었죠 ㅋㅋ 코믹액션의 진수^^

심슨 2009-12-23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세상을 향해서는 죽고, 자신의 내면 안에서는 다시 태어나는 용기라....
 

 


영화 <매트릭스>와 미르치아 엘리아데  ⑩

 

10.  “미안해, 난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vs “아니, 그게 너의 비범함이야.” (2)

   
 

 우리는 모순으로 인해 비옥해진다.   
  

 - 괴테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다.     


 - 김수환 추기경

 
   

    
   내가 바로 ‘그’여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자 네오는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내가 반드시 ‘그’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내가 ‘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잊고, 오직 소중한 친구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꽉 찬 네오. 오라클의 예언이나 네오의 엄청난 능력 때문만이 아니라, 네오가 자신의 삶을 잊고 오직 모피어스를 살려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네오는 진정한 ‘그’가 된다. 이제 네오는 세상에서 제일 멀다는 그 거리, ‘마음과 머리 사이’의 거리를 극복했다. 이제 마음과 육체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 남았다.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육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네오는 이제 매트릭스의 중력장에 갇힌 스미스 일당뿐 아니라 마지막 남은 인간의 땅 ‘시온’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가 만들어낸 매트릭스의 촘촘한 그물에 갇혀 사는 현대인에게는 ‘마음과 머리’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마음과 육체’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다. 소파에 누워 하루 종일 텔레비전만 봐도 충분히 ‘하루 분의 경험’을 다 해낸 것 같은 가상의 충족감. 몇 시간의 인터넷 웹서핑만으로도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의 진실을 다 알아버린 것 같은 환상적인 착시. 우리는 점점 육체의 생생한 촉각과 멀어지며 규격화된 문명의 언어와 이미지에 길들여진다. 네오는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가 모피어스를 구해내는 과정에서 자신을 길들인 그 미디어 매트릭스의 익숙한 감각과 싸우는 것이 아닐까. 네오는 모피어스를 구하기 위해 매트릭스 최고 정예 요원들과 ‘몸으로’ 싸우면서, 그들의 ‘가상의 신체’와 싸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평생 동안 한 번도 마음대로 쓰지 못한 자신의 육체를 ‘제대로’ 쓰는 방법을 배운다.

   스미스 : 이곳에 있는 동안 깨달은 사실이 있어. 너희들의 종족을 분류하다가 영감을 얻었지. 너희는 포유류가 아니었어. 지구상의 포유류들은 본능적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데 인간들은 안 그래. 한 지역에서 번식을 하고 모든 자연 자원을 소모해 버리지. 그리고 또 이동하는 거지. 지구상에는 똑같은 방식의 유기체가 있어. 그게 뭔지 아나? 바이러스야. 인간은 질병이야. 바로 암이지. 너희는 역병이고 우리가 치료제다. 
   모피어스 : (고문에 지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점점 정신을 잃어간다.)
 

   스미스는 인류 문명의 치명적인 오류를 날카롭게 지적하지만 ‘너희는 역병이고 우리가 치료제다’라는 결론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 스미스는 마치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인간의 욕망에 기생하면서 인간의 오류를 들춰내는 존재다. 모피어스와 네오는 스미스라는 강력한 적을 통해 배운다. 네오는 스미스 일당과 몸으로 싸우면서 자신도 모르게 점점 강해지는 것을 느낀다. 트리니티는 매트릭스의 정예요원들처럼 신출귀몰한 속도로 움직이는 네오의 액션에 감탄한다. “어떻게 그랬지? 네가 그들처럼 움직였어. 그렇게 빠른 건 처음 봐!” 네오는 이제 여유롭게 웃으며 으쓱한다. “아직 멀었어.” 

   네오는 적과 싸우면서 진정으로 강해지는 법을 배운다. 자기가 강해지는 것을 몸으로 느끼면서 자신이 아직 멀었다는 것도 동시에 깨닫는 네오의 눈부신 비약. 네오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적과 싸우면서 진짜 ‘그’가 되는 중이다. 혹시 내가 ‘그’가 아닐지라도 상관없이 그 길을 가는 것, 내가 선택받은 자가 아닐지라도 내가 아는 최선의 길을 발견하고 그 길로 향해 나아가는 용기. 그것이 네오를 ‘그’로 만든다. 드디어 트리니티와 네오는 천신만고 끝에 모피어스를 구해낸다.

  마지막 의혹을 떨쳐버리지 못하던 트리니티도, 네오의 능력에 반신반의하던 탱크도, 이제는 네오가 ‘그’임을 믿기 시작한다. “네오가 바로 ‘그’였어!” “이젠 믿겠나, 트리니티?” 아직도 자신이 ‘그’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네오는 모피어스에게 자신은 ‘그’가 아니라고 말하려 한다. 그러자 모피어스는 미소 지으며 말한다. “오라클은 네게 필요한 말을 한 거야. 너도 나처럼 곧 알게 돼.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의 차이를.”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의 차이. 그것이 머리와 마음의 거리, 그리고 더 나아가 마음과 육체의 거리가 아니었을까. 네오의 뛰어난 학습능력이나 엄청난 해킹능력이 아니라, 내 목숨이 아니라 너의 목숨을 구하려는 네오의 진심이 그를 진정한 ‘그’로 만들어준 것이 아닐까. 엘리아데는 이 순간을 ‘존재론적 이행’이라 불렀다. 평범한 회사원 토마스 앤더슨이 모피어스의 전화를 받는 순간, 그가 ‘하얀 토끼’를 따라 트리니티를 만나는 순간, 파란 약의 유혹을 뿌리치고 빨간 약을 삼키는 순간,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지만 모피어스를 구하려고 결심하는 순간. 그 모든 순간이 네오의 ‘존재론적 이행’을 위한 ‘세속적인 세계의 파열’이었다. 이 존재론적 이행의 끝자락에는, 나보다 타인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스스로가 자신도 모르게 위대해지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네오가 스스로의 평범함을 인정하는 순간이었고, ‘나의 존재’에 가려 미처 보이지 않던 ‘너의 존재’를 끌어안는 순간이었다.  

   
 

   거룩한 것이 공간 속에 자신을 현현시키는 곳에서 실재가 모습을 드러내며 세계가 출현한다. (……) 거룩한 것의 출현은 단지 세속적인 공간의 형태 없는 유동성에 고정점을 투사하고, 카오스에 중심을 부여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지평의 돌파를 가져온다. 즉 우주적인 여러 차원 사이(지상과 천상 사이)의 교섭을 열어주고, 하나의 존재양식에서 다른 존재양식으로 가는 존재론적 이행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공간의 균질성에 이 같은 파탄이 일어남으로써 하나의 중심이 창조되는데, 그것을 통하여 초세계적인 것과의 교섭이 정립되며, 결과적으로 세계가 창건된다.  

 - 엘리아데, 이동하 역, <성과 속>, 학민사, 1996, 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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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hurts 2009-12-21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의 차이....그걸 깨닫는다면 인생의 좌충우돌이 절반 이상 확 줄어들겠지요? ^^

tnsehddl 2009-12-23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캬.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이 매트릭스에 어울릴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