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아니무스의 눈물, 아니마의 미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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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팽한 활의 떨리는 활시위여
달빛에 수런거리는 그대의 마음
예리하게 연마한 칼날의
그 아름다운 칼끝을 닮은 그대의 옆얼굴
슬픔과 분노에 숨어있는 진실한 마음을 아는 자는
숲의 정령 모노노케(원령)들뿐 모노노케들뿐……
- <원령공주>의 주제곡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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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신의 몸에서 솟아오르는 저주의 촉수에 갇혀 함께 재앙신이 되어버릴 위기에 처한 원령공주. 에보시를 설득하고 원령공주를 구해내려는 아시타카. 아시타카의 충언에 아랑곳 않고 시시신을 기어코 살해하려는 에보시. 그리고 에보시의 군사들과 옷코토누시의 멧돼지들과 들개들. 이 모두가 벌이는 전쟁의 아수라로 숲은 짓밟히고 불탄다. “숲과 마을이 함께 살 수는 없나요?” 아시타카는 만나는 사람마다, 들개마다, 멧돼지마다 붙들고 이렇게 질문하지만 모두들 단호히 ‘No!’를 선언한다.
아시타카는 계속 ‘넌 도대체 어느 편이냐’라는 질문을 들으며, 누구도 질문하지 않는,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 그의 해법은 이것이다. 너를 구원할 순 없지만 너와 ‘함께’ 살아가겠다는 것.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운명 앞에 섰을 때, 운명 앞에 거만 떨지 않는 인간의 우직한 정공법이다. 나에겐 너를 구할 엄청난 능력은 없지만, 너와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책임을 묵묵히 짊어지겠다는.

인간들의 총탄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죽어가는 모로는 마지막으로 에보시에게 복수하기 위해 남겨두었던 힘을, ‘들개의 딸’이었던 원령공주를 재앙신으로부터 구하는 데 쓰고 조용히 죽어간다. 모로가 참혹하게 죽어간 자리에서 아시타카가 원령공주를 구하는 동안, 에보시는 시시신을 찾아내 화승총을 겨누며 의기양양하게 외친다. “다들 잘 봐! 신을 죽이는 건, 바로 이런 거야!” “쏘지 마요! 제발!” 아시타카와 원령공주는 필사적으로 에보시를 말리지만 에보시는 기어이 총을 쏘고 만다.
시시신의 목을 정조준하여 날려버리는 에보시. 그 순간 아름답고 풍성한 뿔로 무성하던, 시시신의 가녀린 목이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순간, 투명한 비췻빛을 뿜어내는 ‘시시신의 체액’이 숲 전체를 적시기 시작한다. 시간이 멈춘 듯, 이 세상 모든 인생들의 스토리가 멈춘 듯, 모두가 망연자실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이때, 현상금을 타내기 위해 시시신의 목을 노리던 사냥꾼은 재빨리 시시신의 목을 ‘전리품’으로 챙겨 미리 준비한 나무 상자에 담아버린다.

시시신의 체액이 거대한 숲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장이 온통 쏟아져 나와 땅 위를 적시는 듯한, 고통스러운 환각을 느낀다. 대지를 뒤덮은 시시신의 체액에 닿으면 모두 죽는다며 혼비백산하는 사람들. 노아의 홍수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홍수에 숲의 모든 생물들은 살길을 찾아 숲을 버리고 도망간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전쟁’을 멈추고 시시신의 체액을 피해갈 궁리에 바쁘다. 시시신의 체액은 천천히 촉수를 뻗어 자신의 ‘잃어버린 머리’를 찾으려 한다. 그는 지금 살아 있는 것도 죽어 있는 것도 아니다. 머리를 찾지 못하는 한, 그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다. 그의 몸 밖으로 빠져나온 액체는 단지 시시신의 체액이나 혈액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참혹한 풍경은, 바로 시시신을 바라보는 우리의 몸 안에서 가장 소중한 무언가가, 결코 세상 밖으로 빠져나와서는 안 될 무언가가 빠져나와 속절없이 흘러넘치는 듯한 절망감을 불러일으킨다.

머리가 잘린 것은 시시신만이 아니었다. 평생을 바쳐 인간의 딸 원령공주를 키우고 시시신의 신변을 보호했던 들개들의 수장 모로. 이미 몸은 죽어 머리만 남은 들개 모로는 죽어서도 에보시를 향한 원한을 잊지 못해 그녀의 팔을 잘라 버린다. 그의 잘린 머리에 맞아 팔이 잘려버린 에보시는 그제야 광기에서 벗어나 ‘수치심’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이제야 자신이 저지른 짓이 얼마나 엄청난 만행인지를 깨닫게 된다. 숲을 접수하려는 그녀의 야망은 곧 자기 자신뿐 아니라 숲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던 모든 존재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부상당한 에보시를 타타라 마을로 되돌려 보내려는 아시타카를 향해, 그녀 때문에 엄마 모로를 잃은 원령공주는 절규한다.
원령공주 : 그 여자 내게 넘겨! 죽여버릴 거야!
아시타카 : 모로가 복수했어. 이젠 잊어…….
원령공주 : 싫어! 너도 인간들과 한패야! 그 여자 데리고 썩 꺼져! (아시타카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안으려 하자) 오지 마! 인간 따위 질색이야!
아시타카 : 나도 인간이고 너도 인간이야…….
원령공주 : 닥쳐! 난 들개야! 저리가!
아시타카 : (원령공주를 포옹하며) 미안해……. 막으려고 최선은 다했어.
원령공주 : (흐느끼는) 이젠 끝이야. 숲은 죽었어.
아시타카 : 아직 안 끝났어. 우리가 살아 있잖아.

이때 시시신의 머리가 움직이며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한다. 없어진 머리를 찾는 몸과 없어진 몸을 찾는 머리의 꿈틀거림이 시작된다. “머리가 움직인다! 머리가 몸을 부른다!” “시시신이 머리를 찾으러 왔어요! 이 액체에 닿으면 죽어요! 물에 들어가면 피할 수 있어요!” 아시타카는 사람들을 신속히 대피시키고 시시신의 머리를 찾아 그에게 돌려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친다. 사냥꾼은 숲이 파괴되는 광경을 버젓이 보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현상금에만 눈이 멀어 시시신의 머리를 내놓지 않는다.
“햇빛에 닿으면 저놈은 끝이야! 보라고! 이제 시시신은 죽기 직전에 발광하는 저주의 신일 뿐이야! 해만 뜨면 놈은 끝장이지!” 그러나 시시신의 체액이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항복한다. 원령공주와 아시타카는 시시신의 잘린 머리를 소중히 감싸 안아 하늘높이 들어올리며, 시시신에게 기도한다. “시시신이시여! 이제 머리를 가져가시오! 부디 진정하시오!” 그 순간 시시신의 목은 몸과 합체되고, 제 머리를 찾은 몸은 거대한 육신을 대지에 뉘이며, 이제야 안식을 찾은 듯 천천히 스러져간다.

이윽고 시시신이 스러져간 대지 위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숲, 모든 것이 불타버린, 이제는 ‘숲’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거대한 폐허 위로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꽃과 나무와 식물들이 피어오른다. 시시신을 해묵은 전설의 귀신쯤으로 여기던 사람들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 수군거린다. “시시신은 싹을 틔우는 신이었나 봐…….” “시시신은 꽃을 피어나게 하는 신이었나 봐…….” 모두가 이 숲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마법처럼 피어오르는 꽃들을 바라보며 행복해 한다. 자신을 겨냥하는 에보시의 화승총 위에까지 아름다운 꽃을 피워 올렸던 시시신의 넋은 그렇게 아름답게 부활했다. 그는 자신의 온몸을 대지에 공양하여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된 것이다. 사력을 다하여 마지막으로 이 아름다운 숲을 다시 되찾아준 시시신, 총탄에 맞아 머리를 잃고도 잔인한 인간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숲을 되돌려준 시시신의 가없는 사랑 앞에 사람들은 떳떳이 고개를 들지 못한다.

원령공주 : 아무리 숲이 살아나도, 이젠 더 이상 시시신의 숲이 아니야……. 시시신은 죽었어.
아시타카 : 시시신은 죽지 않아……. 시시신은 생명 그 자체거든. 그는 삶과 죽음을 모두 갖고 있지. 내겐 삶을 돌려주셨어. (어느덧 그의 온몸으로 퍼져나가던 저주의 흉터가 사라지고 분홍빛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원령공주 : 난 널 좋아하지만. 인간은 용서 못해.
아시타카 : 그래도 좋아. 너는 숲에서, 나는 타타라 마을에서. 우리 그렇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더 좋은 마을을 세우자.

자신의 종족인 에미시 부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났던 아시타카는 결국 부족에게 돌아가지 않고 이 낯선 공간에서 ‘타인의 꿈’을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자신에게 삶을 돌려준 시시신의 사랑에 보답하는 것은 단지 자기 부족의 안위를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숲을 함께 일으키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아시타카. 그는 굳이 원령공주를 ‘문명화’시켜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길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녀 곁에서, ‘들개의 딸’이라는 그녀의 정체성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그녀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 그는 그렇게 그녀를 사랑하기로 한다. 완전히 바뀌어버린 자신의 미션을 스스로 선택하는, 들개와 인간 사이, 자연과 문명 사이의 그 위험천만한 길을 선택하는 아시타카. 나의 목숨, 나의 가족, 나의 땅, 나의 부족, 나의 삶……. 이 모든 ‘나의’ 소유격에 들러붙은 욕망의 가면을 벗어던졌을 때 아시타카에게는 진정한 ‘몽상의 시간’이 시작될 수 있었다.

시시신의 육체가 파열되는 순간. 우리는 시시신의 육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본질을 처음으로 ‘대상’으로서 마주하는 충격을 느낀다. 이 순간은 바슐라르가 말하는 ‘수직적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는 시계적 시간, 자연과학적 의미의 양적 시간과는 달리 인간이 존재를 시적 이미지로 파악할 수 있는 몽상의 시간. 바슐라르의 수직적-우주적 시간은 이토록 둔감하고 무신경한 인간에게 우주의 비밀을 잠깐 엿볼 틈을 주는 기적적인 찰나의 순간이다. 이 수직적 시간은 한 인간이 우주로 향할 수 있는 비밀 통로이다.
인간들은 숲을 파괴하면서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있었던 것이며, 숲을 파괴함으로써 우주와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를 파괴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설명도 없이 그 순간의 ‘시적 이미지’가 바로 이해되는 그 순간. 아무런 해설자도 필요 없이, 어떤 주석도 어떤 언어도 필요 없이, 그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모든 생의 비밀이 곧바로 온몸으로 이해되는 그 순간. 바슐라르는 그 순간을 시적 순간이자 형이상학적 순간이자 우주적 순간이라고 했다. 이토록 작은 인간이 저토록 커다란 우주와 직통으로 통화하는 시간, 운명이 우리의 ‘머리’가 아닌 ‘몸’을 관통하는 순간. 위대한 시인이, 오랫동안 고민하던 시적 대상에 가장 어울리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형용사’를 마침내 찾았을 때의, 그 섬광 같은 환희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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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가는 슬프다는 것이 행복스러우며, 홀로 있고 기다린다는 것이 만족스러운 것이다. 그 구석 속에서 그는, 열정의 정상에서는 으레 그러하듯, 삶과 죽음에 대해 명상한다. (……) 그는 곧 세계는 명사의 영역에 속하는 게 아니라 형용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 바슐라르, 곽광수 역, <공간의 시학>, 동문선, 2003, 259~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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