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⑦

   

7. 아니무스의 눈물, 아니마의 미소 (1)

   
 
 나의 가치를 키우려면, 그대의 사랑을 더 키우라!
 Make thy love larger to enlarge my worth!
 - 엘리자벳 브라우닝
 
   
   
 

 몽상가의 몽상은 전 우주를 꿈꾸게 할 수 있다. 몽상가의 휴식은 물, 구름, 미풍을 쉬게 할 수 있다.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76~77쪽.

 
   
   
 

우리의 휴식의 원리인 아니마는 그 자체로 충족되는 우리 속의 본성이다. 그것은 조용한 여성성이다. 우리의 깊은 몽상의 원리인 아니마는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물’의 존재이다.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82~83쪽.

 
   


   아시타카가 원령공주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시간. 그가 죽음과 삶의 경계 위에서 서성이던 그 시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모든 일이 일어난 듯한, 치유와 몽상의 시간이었다. 아시타카를 치유한 세 가지 힘은 원령공주의 보살핌과 물의 치유력, 그리고 시시신의 치료(아시타카의 상처를 직접 핥아주던)였다. 아시타카는 자신을 이끌어오던 모든 존재의 중력으로부터 철저히 자유로워지는 휴식, 즉 여성적 휴식 속에서 부족을 잊고 운명을 잊고 저주를 잊는다. 걱정, 야심, 계획 등의 모든 ‘아니무스’적 고통을 떠나서 고요, 휴식, 치유, 돌봄의 세계에서 안식을 얻는 것이다.  

   아시타카는 연대기적 시간에서 도피함으로써 진정한 시간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는 부족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고민이 아니라, 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갈 것인가 하는 우주적 몽상으로 한껏 비약한다. 그는 시계적 시간에서 벗어남으로써 통과의례의 가장 고통스러운 문턱을 통과하게 되고, 비로소 ‘나 아닌 나’와의 우주론적 만남을 시도한다. 원령공주의 세계는 아시타카에게 있어서 잃어버린 아니마, 억압된 아니마의 존재가 아닐까. 바슐라르는 <몽상의 시학>에서 우주적 몽상이란 인간이 자기 안에 잠자는 아니마와 만나는 극적 체험이라고 했다. 이 순간 가스통 바슐라르는 칼 구스타프 융과 만나 철학의 연금술을 시도한다. 

   
 

몽상가에게 지독한 혜택을 주는 몽상 속의 상상세계는 자기 아니마를 위해 이루어진다. 아니마는 언제나 단순하고 조용하고 계속적인 삶의 피난처이다. 그래서 융은 “나는 아니마를 단순히 삶의 원형라고 규정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지식을 찾지 아니하고 삶, 단순한 삶을 꿈꾸는 사람은 여성성으로 기운다. 아니마 주위로 집중하면서, 몽상은 몽상가가 휴식을 발견하는 것을 도와준다. 가장 좋은 우리의 몽상은, 남자건 여자건, 우리 저마다의 속에 있는 우리의 여성성에서 나온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게 여성성의 흔적을 갖고 있다. 우리 속에 여성적 존재가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쉴 수 있을까?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108쪽. 

 
   

   파괴하고 정복하고 소유하여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에보시가 ‘아니무스’의 힘을 상징한다면, 고요한 치유와 조건 없는 보살핌, 휴식과 안정을 꿈꾸게 하는 시시신은 ‘아니마’의 힘을 상징한다. 아시타카를 간호하는 동안만은 전사의 가면을 벗고 타인의 고통에 몰두하는 원령공주의 모습 또한 아니마의 저력을 보여준다. 아니마는 결코 나약한 여성성이나 남성에게 결핍된 여성성이 아니라, 생물학적 여성들 스스로도 끊임없이 자발적 연마와 성숙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본원적인 여성성이다. 시시신의 존재 방식은 아니마의 모든 요건을 갖추고 있다. 사경을 헤매는 아시타카를 치료하기 위해 시시신이 나타나는 순간. 그곳에는 시간의 흐름도 공간의 구획도 사라지는 듯 신비로운 아우라가 감돈다. 시시신의 발자국이 머무는 곳마다 이름 모를 꽃들과 싱그러운 풀들이 솟아오르고 한없이 평화로운 정적의 기운이 감돈다.
   인류가 주인의 위치에 머무는 한, 인류의 1인칭 시점으로 우주가 관찰되는 한, 우리는 ‘보호’라는 미명하에 자연을 재단하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말 못하는 동물과 식물의 목소리를 들으려 애쓰는 원령공주는 동물들이나 식물들과 대화를 하는 데 굳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언어 없이도 대화할 수 있는 원령공주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놓인 간극을 매개하는 몽상의 귀재, 샤먼의 모델인 셈이다.


   한편 아시타카가 깨어나는 순간 거대한 멧돼지들의 무리가 원령공주와 모로를 방문한다. 에보시의 손아귀에 곧 파괴당할 위기에 놓인 시시신의 숲을 지키려고 왔다는 멧돼지들, 그 커다란 무리를 이끄는 수장은 ‘옷코토누시’다. 원령공주의 ‘엄마’인 들개 모로. 모로는 낯선 인간 아시타카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옷코토누시에게 말한다. “시시신이 이 청년의 상처를 치료해줬어 그래서 안 죽이고 돌려보낸다.” 옷코토누시는 대경실색한다. “시시신이 인간을 구했다고? 인간은 살리면서 왜 ‘나고신’은 구해주지 않았나? 시시신은 숲의 수호신이지 않은가?”
   재앙신이 되어 아시타카의 마을을 공격한 거대한 멧돼지가 바로 ‘나고신’이었던 것이다. 모로는 동요하지 않고 조용히 타이른다. “시시신은 생명을 구하기도 하지만 빼앗기도 하지. 나고신은 죽는 걸 두려워한 거다. 지금의 나처럼……. 내 몸에도 인간의 총알이 박혀있다. 나고신은 달아났지만, 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난 살만큼 살았다. 시시신은 내 목숨을 앗아갈 거다.” 삶뿐 아니라 죽음을 관장하는 일도 역시 ‘생명’의 신 시시신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삶을 통해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을 통해 삶을 일깨우는 것이야말로 생명의 영역이기에. 모로는 인간이 쏜 총탄을 몸에 지닌 채 죽음을 껴안고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견뎌내면서, 시시신의 존재를 더욱 가슴 깊이 느끼는 법을 터득한 셈이다.

   나고신의 억울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옷코토누시는 모로에게 분노하며 멧돼지부족의 몰락을 시시신과 모로의 탓으로 돌린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려는 순간, 아시타카는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며 고통스럽게 고백한다. “나고신을 죽인 건 나야. 나고신이 마을을 습격해서 어쩔 수 없이 죽였지. 그는 커다란 멧돼지 신이었어. 이것이 증거야(그는 점점 무섭게 번져가는 팔뚝의 흉터를 보여준다). 시시신을 만나 저주를 풀려고 여기 왔어. 시시신은 에보시 부족이 입힌 총상은 치료해줬지만 나고신이 남긴 저주의 멍은 없애지 않았지. 나는 이제 이 저주의 상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천천히 죽어갈 거야.” 옷코토누시는 아시타카의 진솔한 고백에 분노를 잠재우고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인 인간들에게 멧돼지 부족의 마지막 힘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한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는 인간의 사냥감밖에 안 돼. 모두 함께 덤비면 인간들한테 전멸당할 거야. 우리 일족이 멸망한다 해도 인간에게 힘을 보여주고 말 테다.”

   한편 에보시 부족이 제조해낸 엄청난 분량의 철을 탐내는 아사노 막부는 에보시로 하여금 ‘철의 절반’을 넘기라고 협박하고, ‘시시신’의 목을 노리는 사냥꾼 무리들이 국왕의 명령이라는 명목으로 숲을 침범한다. 에보시는 숲을 파괴하며 제철소를 운영하여 ‘시시신의 숲’과도 적대하게 되고, 철제 무기를 바탕으로 부를 축재함으로써 막부 세력과도 반목하게 된다. 에보시의 해법은 간단명료하다. 숲을 더욱 전면적으로 파괴하여 제철소의 자원을 확보하고 더 ‘강한 부족’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우리가 계속 철을 만들면 숲은 점점 약해질 것이다. 그럼 인명피해도 줄일 수 있어.” 에보시는 타타라 마을을 정복했듯이 시시신의 숲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숲을 적대적 자원으로 본다는 점에서, 땅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우주적 몽상의 여백을 잃어버린 인간이다. 게다가 사냥꾼들은 시시신의 목을 잘라 오면 불로불사의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국왕의 왕명을 받아, 시시신의 목을 베기 위해 숲 속에서 잠복 중이다. 그들 또한 시시신의 목을 소유함으로써 숲 전체를 자신들의 영토로 흡수시키려 하는 셈이다. 이렇듯 소유의 집념, 스톡(stock)의 욕망은 인간의 창조적 몽상을 가로막는 가장 치명적인 장애물이 아닐까. 이제 숲을 소유하려는 에보시와 시시신의 목을 요구하는 국왕에 맞서, 죽음을 불사하고 숲을 지키려는 멧돼지들과 모로 일족의 결사항전이 시작된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변증법은 심층의 리듬에 따라 펼쳐진다. 그것은 덜 깊은 곳에서, 언제나 덜 깊은 곳(남성)에서, 언제나 깊은 곳, 언제나 더 깊은 곳(여성)으로 간다. 우리가 아주 풍요롭게 펼쳐진, 단순한 고요함 속에서 휴식하는 여성을 발견하는 것은 몽상, 앙리 보스꼬가 말하는, ‘숨어 있는 삶의 한없는 저장소 속’에서이다. 날이 새면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에, 내적 존재의 시계는 남성으로-남자건 여자건 모든 사람에게 남성으로 종을 친다. 그러면 사회적 활동의 시간, 본질적으로 남성적인 활동의 시간이 되돌아온다. 감정적인 삶에서까지도, 남자나 여자는 저마다 자신의 이중의 힘을 이용할 줄 알고 있다. (……) 몽상가에게 조용한 고독을 되돌려주는 몽상 속에서는 남자건 여자건 인간은 ‘몽상의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언제나 내려가면서, 심층의 아니마 속에서 휴식을 발견한다. 추락이 없는 하강이다. 이 불확실한 심층에서는 여성적인 휴식이 지배한다. 이 여성적 휴식 속에서, 염려, 야심, 계획에서 떨어져, 우리는 구체적인 휴식, 우리의 전 존재를 쉬게 하는 휴식을 알아본다.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7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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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finder 2009-11-02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의 가치를 키우려면 그대의 사랑을 더 키우라~ 멋진데요^^

맨손체조 2009-11-03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날이 새면 다시 직장으로 가서 자리보전에 대한 집념과 월급에 대한 집착으로 창조적 몽상을 할 시간도 없다ㅠㅠ

sotkfkd 2009-11-03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상. 영원으로 가는 길!
잘 읽었습니다.
 


 


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⑥

   

5. 문명의 진보 vs 몽상의 몰락 (2)

   
 

 범선이나 증기선을 발명한다는 것은 곧 난파를 발명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열차의 발명은 탈선의 발명이며, 자가용의 발명은 고속도로 위에서 일어나는 연쇄 충돌의 발명이고, 비행기의 발명은 곧 추락의 발명이다.  


 - 폴 비릴리오, <미지수Unknown Quantity>, 2003, 24쪽.

 
   

   진보의 핵심은 시간의 불가역성이다. 기차가 발명되어 교통 시스템이 일단 바뀌고 나면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나룻배의 낭만을 찾을 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기차로 정상적인 통행을 할 수 있을 때’, ‘여분의 쾌락’을 찾아나서는 감정의 사치에 속한다. 기차의 속도에 일단 길들어지면, 처음에는 공포와 경탄의 대상이었던 기차도 어느새 당연한 습관이 된다. 기차보다 조금이라도 느린 운송수단은 어느새 퇴행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더 높이, 더 빨리, 더 편리하게 움직이는 기술만이 끊임없이 발명된다. 아시타카는 문명 내부에 있으면서도 이러한 문명의 무한 속도전에 제동을 거는 존재다. 아시타카의 존재는 이분법적으로 ‘진보(문명)’와 ‘야생(야만)’을 분류할 수만은 없는 모순적 상황을 암시한다.


   아시타카의 입장에서 봤을 때 원령공주 측은 물론 에보시 측도 나름의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에보시는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받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생활을 선물한 것이다. 문제는 에보시(문명)의 힘이 너무 일방적이고 막강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비대칭적 대립의 상황을 깨뜨리려면 그 상황에 균열을 내는 메신저가 필요하다. 아시타카가 그런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 위험천만한 메신저의 삶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양측 모두에게 첨예한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에보시 일족이 ‘문명의 의식’(합리주의)를 상징한다면 원령공주와 모로 일족은 ‘문명의 무의식’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의 의식은 곧 ‘자연’ 그 자체다. 문명은 자연을 질료로 창안되었지만 스스로 자연에서 멀어짐으로써 자기 자신을 타자화했다. 이 타자화된 자아의 그림자가 바로 자연인 셈이다. 단지 문명의 입장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입장에서 단지 문명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 모두에게서 무언가를 배우려 하는 아시타카는 ‘몽상’의 존재로서 문명의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해주는 메신저가 아닐까. 우리의 마음속에는 에보시와 원령공주와 아시타카가 모두 공존한다. 문제는 에보시적인 라이프스타일이 원령공주와 아시타카, 즉 몽상과 환상의 세계를 가차 없이 배제해버려 이제는 그 ‘흔적’을 찾는 일조차 점점 어려워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바슐라르는 밤의 무의식적인 환상과 낮의 의식적인 이성 사이에 존재하는, 정신분석 전문가들조차 별로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 ‘몽상’을 사유의 중심에 올려놓는다. 상상력의 매트릭스는 바로 이 ‘몽상’의 에너지에서 탄생한다. 인간이 자신이 이룬 문명의 업적에 자만하지 않고(처음부터 자연이 없었다면 문명 또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간은 너무 자주 망각한다), 대책 없이 웃자라버린 지성의 키 높이를 자랑하지 않는 것. 그럼으로써 단지 ‘인류’의 시점으로 자연을 해부하고 재단하지 않는 태도는 자연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자연의 리듬에 맞춰 몽상하는, 사유의 여백에서 탄생한다. 
   몽상의 세계는 심리학자의 입장에서는 드라마틱함이 부족하고, 철학자나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논리성이 부족하다. 몽상은 길 잃은 의식이거나 결핍된 환상처럼 어정쩡한 위치에 있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몽상이야말로 인간의 사유가 다다를 수 있는 상상력의 새로운 진경을 보여줄 것이라고 믿는다. 몽상은 깨어 있는 무의식이며 검열에서 자유로운 의식이기 때문이다. 

   
 

산업시대에서 문명인으로 살면서, 우리는 물건들에 사로잡혀 있다. 물건 하나하나는 한 떼의 물건들의 대표자이다. 그런데 물건에 개체성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이 힘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러나 물건들의 머나먼 과거로 좀 가보자. 친숙한 물건 앞에서 우리의 몽상을 회복시켜 보자. 그리고는 조금 더 멀리, 우리가 어떻게 하나의 물건이 제 이름을 찾아낼 수 있었나 알아보려 할 때 우리의 몽상 속에서 길을 잃어버릴 만큼 그렇게 멀리 꿈꾸어보자. (……) 몽상은 대상을 성화(聖化)한다. 사랑받는 친숙한 대상에서 성스러운 개인적 대상에 이르는 사이는 백지 한 장이다. 곧 물건은 부적이 된다. 그것은 삶 속에서 우리를 도와주고 보호해준다. (……) 정말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절제 없이 검열 없는 몽상을 꿈꿀 수 있는 것은 ‘지식’에서부터가 아닌 것이다.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46~47쪽. 

 
   

 


   <원령공주>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낸 숲의 수호신 시시신은 아마도 바슐라르적 몽상의 힘이 다다를 수 있는 상상력의 극단일 것이다. 생명력으로 충만하던 원령공주의 숲에 밤이 깃드는 시간. 시시신이 거대한 몸집을 지닌 푸르고 투명한 데다라신의 모습으로 변해 아름다운 숲을 거니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다. 몽상의 세포가 깨어나는 시간. 대지와 휴식의 몽상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아시타카는 시시신의 물속에서 치유의 밤을 맞이하고 있다. 사경을 헤매는 아시타카 가까이로, 시시신이 천천히 움직일 때마다 그의 발자국 위에 아름다운 꽃과 식물이 피어난다. 시시신이 아시타카의 상처를 천천히 핥아주자 사경을 헤매던 아시타카는 거짓말처럼 상처를 딛고 일어난다.
   어느새 마술처럼 돋아난 새살에 아시타카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남아 있는 ‘재앙신의 저주’를 다시금 발견하고 절망한다. 시시신은 아시타카가 목숨을 걸고 원령공주를 구한 것은 ‘인정’하지만 부족을 지키기 위해 재앙신을 살해한 것은 ‘긍정’할 수 없다는 것일까. 아직 끝나지 않는 저주의 늪을, 깨어나자마자 인식해버린 아시타카. 그는 간신히 힘겨운 꿈에서 깨어나자 더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는 듯 고통을 감추지 못한다. 물 한 모금 삼키지 못하는 아시타카에게 이번에는 원령공주가 먼저 다가온다. 원령공주는 자신의 입속에서 풀을 오물오물 씹어 아시타카의 입속에 넣어준다. 눈을 감은 아시타카는 할 수 없이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면서도 밀려드는 슬픔을 가누지 못한다.


   다시 살아갈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데, 살아남기 위해 작은 소녀의 입속을 빌어 음식을 삼켜야 한다는 사실이, 죽어도 삼키기 싫지만 삼켜야 하는 가혹한 운명처럼 곤혹스럽다. 아시타카를 살리기 위해 음식을 대신 씹어 입에 넣어주는 소녀의 모습에는 적대적인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한없이 따스한 치유의 모성이 살아 숨 쉰다. 아시타카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 지겨워서, 부족을 위해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의 짐짝이 너무 무거워서, 그렇지만 자신을 살리기 위해 낯선 사람에게 풀까지 씹어 먹이는 원령공주의 품이 너무 따뜻해서, 눈물을 뚝뚝 흘린다. 원령공주와의 만남을 통해 아시타카는 자신이 인식하지 못했기에 미처 그 고통을 감지하지도 못했던, 무의식 속에서 등을 돌린 채 흐느끼는 또 다른 자아의 그림자와 만난 것이다.

 

   
 

자아는 원래 자기 방어를 하고 자기의 야망을 좇기 때문에 방해가 되는 것은 뭐든지 억압해야 한다. 이 억압된 요소가 그림자가 된다. (……) 그림자는 두 가지 모습을 지닌다. 먼저 자아의 어두운 측면이다. 평상시 이 부분은 깊숙이 잘 감춰져 있다. 삶의 어려움에 직면하기 전까지 자아는 이 존재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자아 본위의 삶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우리의 내면 깊숙이 억압된 부분이다. 그것이 아무리 사악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이 부분은 근원적으로 자기(the Self)와 연결되어 있다.
 궁극적으로 하느님(혹은 자기 the Self)은 자아보다 그림자를 선호하신다. 그림자는 아주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중심, 즉 진정한 우리 자신과 훨씬 가깝다.  


 - 로버트 존슨, 고혜경 역,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에코의 서재, 2008, 6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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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r hurts 2009-10-29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삼키기 싫지만 삼켜야 하는 가혹한 운명이라.... 그래서 그 장면이 그토록 찡했나 봅니다.

sotkfkd 2009-10-31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steal heart 2009-10-31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렇죠. 속도의 발명은 곧 재난의 발명인 것을....문명이 낳은 각종 재앙은 어쩌면 문명의 등뒤에서 울고 있는 그림자일지도.

doingnow 2009-11-06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림자...ㅠㅠ
 


 


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⑤

   

5. 문명의 진보 vs 몽상의 몰락 (1)

   
 

 몽상이 우리의 휴식을 강조하러 올 때는 온 우주가 우리의 행복에 기여하러 오는 것이다. 잘 꿈꾸려는 자에겐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선 행복하세요. 그러면 몽상이 자기의 진정한 운명을 답파(踏破)한다. 그것은 시적 몽상이 된다. 그 시적 몽상을 통해, 그것 속에서 모든 것은 아름답게 된다. 몽상가가 ‘손재주’를 가지고 있으면 자기의 몽상으로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작품은 웅장할 것인데 왜냐하면 꿈속의 세계란 자동적으로 웅장하기 때문이다.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22쪽.

 
   

   에보시의 총탄에 맞은 들개 모로의 복수를 감행하기 위해 한밤중에 타타라 마을에 잠입한 원령공주. 에보시 일족은 모두 모여 원령공주와 들개들의 침입에 맞서고, 아시타카는 혼란에 빠진다. 적(敵)의 적(敵)은 아군이란 말인가. 그는 에보시 일족에게는 ‘정체를 확실히 밝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원령공주에게는 에보시의 부상자들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간악한 인간의 무리’로 취급받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가 서로의 가슴에 칼이나 총을 겨누지 않는 것이다. 아시타카 또한 자기 부족의 평화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났지만, 그는 에보시에게도 원령공주에게도 아직은 마음의 거리를 둘 수 있는 위치다. 이 거리감이 그에게 상황을 ‘이익의 관점 바깥에서’ 통찰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그러나 원령공주가 목숨을 걸고 타타라 마을에 침입하여 에보시의 목을 노리는 상황에서 이런 ‘평화의 몽상’은 통하지 않는다. 


   “너도 원한을 갚으러 왔겠지만, 여기에도 들개한테 남편이 물려 죽고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있어.” 아시타카는 원령공주를 설득해보지만, 그녀는 아예 귀를 막아버린다. 총탄으로 무장한 수백 명의 에보시 일족과 들개 몇 마리와 어린 소녀뿐인 모로 일족의 혈투. 언뜻 봐도 이건 ‘게임’이 되지 않는다. 아시타카는 원령공주를 살리기 위해 계속 그녀를 설득하지만 소용이 없다. “원령공주, 숲으로 가! 헛되이 죽어선 안 돼. 물러서는 것도 용기라고! 돌아가!” 복수심에 불탄 원령공주는 온몸을 던져 에보시에게 돌진하여 결투를 벌이고 부족들은 에보시를 응원하며 언제라도 어린 소녀 한 명에게 무더기로 총탄을 퍼부을 기세다.
   그러나 진화된 화승총으로 무장한 그들의 눈빛은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단검 하나 손에 쥐었을 뿐인 원령공주는 무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에보시에게로 돌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령공주에게는 문명화된 인간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기묘한 신비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완전한 들개도 완전한 인간도 아닌, 인간의 지혜와 들개의 속도를 겸비한 원령공주는 미묘한 반인반수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에보시와 원령공주의 싸움을 말리려는 아시타카의 팔뚝을 원령공주가 덥석 물어버리자, 헝겊으로 친친 동여맨 그의 팔뚝에서 재앙신의 저주가 그 끔찍한 위용을 드러낸다. 아시타카는 자신의 치명상을 가리키며 모두에게 말한다. “이것이 내 속의 원한과 증오의 모습입니다. 육신을 썩게 하고 죽음을 부르는 저주라고요. 더 이상 증오에 휩쓸리지 마세요.” 에보시는 들은 척도 안 하며 원령공주를 기어이 죽여버릴 태세다. 용맹과 무예와 인격을 두루 갖춘 아시타카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은 에보시는 아시타카의 팔을 싹둑 잘라내려 한다. 저 흉측한 상처로 뒤덮인 ‘저주받은 팔’만 잘라내 버리면 아시타카의 ‘건강한 육체’는 써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극히 근대적인 사고방식인 것이다.  


   원령공주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아시타카는 에보시와 원령공주 모두를 잠시 기절시킨 후 원령공주를 데리고 숲으로 달아나려 한다. 이때 에보시 부족의 여성이 자신들을 배신한(?) 아시타카에게 화승총을 쏴버린다. 적을 도와줬으니 아시타카도 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 속에서 아시타카의 평화의 몽상은 자리 잡을 틈이 없다. 총에 맞은 아시타카는 선혈을 뚝뚝 흘리면서도 죽을 힘을 다해 원령공주를 들쳐 매고 타타라 마을을 빠져나온다. 그러나 원령공주를 간신히 숲으로 옮겼을 땐 이미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태였다. 원령공주는 죽어가는 아시타카에게 심문하듯 다그친다.
    

   원령공주 : 왜 날 방해한 거야? 죽기 전에 대답해!
    아시타카 : 널, 죽게 내버려두긴 싫었어…….
    원령공주 : (잔뜩 날선 표정으로 아시타카를 경계하며) 죽는 건 두렵지 않아! 인간 만 쫓아낸다면 죽어도 상관없어!
    아시타카 : (점점 의식을 잃어가는 목소리로) 넌…… 살아야해…….
    원령공주 : 닥쳐! 인간 말은 안 들어!
    아시타카 :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의식을 점차 잃어가며) 넌…… 아름다      워…….
    원령공주 :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아름답다’는 표현에 화들짝 놀라 흠칫 뒤로 물러선다.)

   ‘목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원령공주에게 아시타카는 말한다. “넌 아름다워.” 원령공주는 너무 놀라 멈칫하며 물러선다. 그녀는 자신이 소년 앞에 얼굴 붉힐 줄 아는 소녀라는 것, 가면과 피 냄새에 가린 그녀의 얼굴이 누가 봐도 숨 막히게 아름답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 그녀는 ‘문명의 시선’으로 봤을 때 ‘들개에게 혼을 빼앗긴 불쌍한(혹은 무서운) 소녀’였을 뿐 누군가에게 관심과 애정의 눈길을 받아본 적이 없다. 인간에 대한 증오가 그녀의 삶 전체를 장악하고 있어서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또 다른 삶을 생각할 몽상의 여유가 없는 셈이다.
   그녀 또한 ‘몽상의 시간’이 없기로는 철두철미한 여전사 에보시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시타카는 ‘너는 아름답다’고 말함으로써 그녀에게 이전에는 꿈꾸지도 못했던 사유의 여백을 선물한다. 자기를 위해서 목숨까지 건 소년이 있다는 것, 그런 그가 자신에게 아름답다고 말하며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에, 원령공주는 아직 감동을 느낄 여유도 없다. 늘 인간을 향한 심리적 전쟁 상태에 놓여 있는 원령공주에게는 휴식과 몽상을 위한 마음의 여백이 없다. 

   
 

심리학자들은 아주 특징적인 것에 매달리는 법이므로, 그들은 먼저 꿈, 놀라운 밤의 꿈을 연구하고, 몽상, 그들이 보기에는 구조도 없고 이야기도 없고 수수께끼도 없는, 모호한 꿈에 지나지 않는 몽상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몽상은 그때 대낮에는 기억되지 않는 약간의 밤의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 무의식은 진짜 수면의 꿈속에서야 제 활동을 하게 될 것이다. 심리학은 명확한 사고와 밤의 꿈이라는 두 극점을 향해 일을 하는데 그럼으로써 인간 심리의 전 영역을 검토하게 된다.
 그러나 낮의 삶과 밤의 삶이 섞이어 있는 황혼 상태에 속하지 않는 다른 몽상이 있다. (......) 몽상은 아주 자연스러운 정신적 현상이어서, 그것을 꿈에서 파생된 것으로 취급할 수 없으며, 다짜고짜 꿈의 현상 속에 위치시킬 수는 없다.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19~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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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슨 2009-10-29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꿈꾸려면, 우선 행복하라! 밤에 발뻗고 잘 잠들 수 있는 능력이 최고의 철학이라던 누군가의 말이 생각나는 밤입니다. 아, 오늘밤에도 잠들기는 글렀다~~~

sotkfkd 2009-10-30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④

   

4. 24시간 'ON AIR'의 세계에서 길을 잃다 (2)

   
 

 반 고흐의 황색은 연금술적인 황금이며, 무수한 꽃으로부터 채취되어 햇빛에 굳어진 꿀과 같이 만들어진 황금이다. 그것은 결코 단순히 밀이나 불꽃이나 밀짚의자의 황금빛이 아니다. 천재의 한없는 꿈에 의해 영원히 개성화된 황금빛이다. 그것은 이미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재산, 한 인간의 마음, 전 생애를 통한 응시(凝視) 속에서 발견된 근원적인 진실이다.  


 - 바슐라르, 김현 역, <꿈꿀 권리>, 열화당, 1995, 72쪽.

 
   

    

    ▲빈센트 반 고흐, <까마귀 나는 밀밭>, 1890


   그저 단순한 노란색이 아니라 반드시 ‘고흐빛 노랑’이라 불러야 할 것만 같은 빛깔 앞에서 우리는 흐뭇이 미소를 흘린다. 단지 물감이 아니라 ‘무수한 꽃으로부터 채취되어 햇빛에 굳어진 꿀’을 바른 듯한, 이 세상 하나뿐인 황금빛의 아우라 속에서 우리는 고흐의 눈이 되어, 고흐의 숨결을 느끼며 행복해 한다. 바슐라르는 고흐만이 낼 수 있는 그 선연하고도 야생적인 황색이야말로 고흐의 ‘한없는 꿈’이 만들어낸, ‘영원히 개성화된 황금빛’이라고 말했다. 고흐빛 노랑은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전 생애를 꿰뚫는 응시 속에서 발견된, 예술가의 생애 그 자체라고.

 
 

   원령공주가 자신이 인간임을 부정하고 ‘들개의 딸’이길 원했던 이유 또한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는 ‘숲의 빛깔’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단순한 ‘초록색’이 아니라 그 수많은 동물들과 숲의 정령들을 한 아름에 품어 안는, 그녀에겐 세상에 하나뿐인 ‘원령빛 초록색’을 말이다. 그녀는 인간에게는 한없이 적대적이지만 숲의 동식물 하나하나, 깜찍한 숲의 정령 하나하나에게는 한없이 친절하다. 그녀가 밤마다 들개 모로의 등허리를 타고 몰래 인간의 마을에 잠입하여 하는 일도 단지 ‘나무를 심는 일’을 위해서다. 그녀의 초록빛, 아니 숲의 모든 생물들을 위한 초록빛을 지키기 위해, ‘시시신’의 숲을 인간의 자연개발을 위한 미끼로 던져주지 않기 위해,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 되는 길을 포기하고 ‘숲의 전사’가 되는 길을 택했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타라 마을 사람들은 원령공주가 “들개들에게 혼을 빼앗긴 불쌍한 계집애”라고 말한다. 그들이 시시신의 숲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면, 원령공주도 ‘정상적인’ 인간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그들은 숲을 정복하여 마음껏 자원으로 이용하고 숲의 개발을 가로막는 들개들을 몰살하여 ‘풍요로운 국가’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아시타카는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힌 재앙신이 바로 타타라 마을의 부족장 에보시의 총에 맞아 한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타타라 마을 사람들은 에보시가 가져온 풍요로운 삶에 만족하여 그녀를 향한 절대적인 응원을 보낸다. 화승총을 비롯한 무기 제작 기술에 뛰어난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불로 연마한 철’의 이미지는 오랫동안 자연의 힘에 조화롭게 순응하던 인간이 ‘자연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된 상징적인 이미지다. 불과 철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게 된 인간은 무기와 농기구를 비롯한 각종 첨단의 문명을 발전시키게 된다. 아시타카는 타타라 마을 사람들이 추앙하는 에보시의 총에 맞은 멧돼지신이 재앙신으로 변했다는 사실, 재앙신의 저주는 숲을 파괴하려는 인간 때문임을 알게 되고 절망에 빠진다. 원령공주의 최대 적수도 바로 에보시다. 에보시는 타타라 마을을 이끄는 부족장이자 걸출한 전략가로서 수많은 전쟁 경험도 갖고 있다. 에보시는 거리낌없이 숲을 파괴하며 숲을 ‘자원’으로 이용하여 인간의 재화로 편입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에보시가 타타라 마을 부족 전체에게 전폭적인 신임을 얻고 있는 까닭은 그녀가 가난한 사람들, 나병에 걸린 사람들, 사회에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여성들까지 모두 거두어주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에보시의 선택은 ‘가장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한 자본가의 합리적 선택일지도 모른다.) 나병에 걸린 노인은 에보시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아시타카에게 부디 그녀를 죽이지 말라고 애원한다. “자네의 분노와 슬픔은 잘 알겠네. 허나 저 분을 죽이진 말게. 우릴 인간 대접하는 유일한 분이라네. 우리의 병을 두려워하지 않고 썩은 살을 씻기고 붕대를 감아주셨지. 산다는 건 정말 힘들고 괴로워. 난 세상과 사람을 저주하지만 그래도 살고 싶어. 날 봐서라도 제발, 그분을 죽이지 말게.” 노인은 아시타카의 연민을 자극하지만 그의 에너지는 세상을 증오하면서도 삶에 집착하는, 더 이상 새로운 삶을 창조하지 못하는 인간의 자기연민처럼 보인다.
   에보시는 ‘인간의 생존’과 ‘자연의 이용’을 등가로 판단한다. 자연을 제대로 이용할 수 있다면 자신은, 그리고 자신이 속한 부족은 번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옛 신들만 사라지면 괴물들도 보통 짐승이 되지. 숲에 인간의 빛이 들고 들개가 잠잠해지면 풍요로운 국가를 만들 수 있어. 원령공주도 인간이 될 수 있겠지. 시시신의 피는 병 치료에 유용해. 나병환자들도 고치고 자네 상처도 고칠 수 있을지 몰라.” 

   에보시는 카리스마 넘치는 CEO이자 용의주도한 정치가이자 주도면밀한 전쟁전문가의 원형으로 그려진다. 타타라 마을 사람들이 개발한 화승총은 그 시대 최고의 전쟁 무기였던 것이다. “이 총은 괴물이건 무사의 갑옷이건 모두 박살낸다.” 아시타카는 화승총의 위력에 놀라 타타라 마을 사람에게 말한다. “숲을 빼앗고, 산의 신들을 재앙신으로 만들고도 모자라 그 총으로 원한과 저주를 살 셈이오!” 아시타카는 아직 원령공주와 한 마디 대화조차 나눠보지 못했지만 인간이길 포기해가면서까지 들개와 동거하며 짐승처럼 살아가는 그녀의 뼈아픈 고독을 이해한다. 원령공주에게 숲의 빛깔을 잃어버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과 정확히 등가인 것이다.
   그녀는 자연을 그저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가 되어버린, 자연 속으로 저물어가기를 선택한 존재다. 만약 바슐라르가 <원령공주>를 보았다면 자신이 꿈꾸던 낙원을 가꿀 용맹스러운 전사의 이미지를 바로 여기서 찾았다며 감탄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자신의 행복과 숲의 행복을 결코 분리하지 않는다. 숲의 수호신인 시시신의 피를 질병 치료에 이용하려는 문명인의 상상력으로는 결코 원령공주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잃어버린 반 고흐의 황금빛을, 잃어버린 원령 공주의 초록빛을, 마르크 샤갈의 잃어버린 낙원의 빛깔을,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샤갈의 그림은 대지와 인간이 반목하지 않았던 시대의 바로 그 원초적 낙원을, 대지의 목소리에 인간이 귀 기울일 줄 알았고 인간이 ‘땅처럼 숨쉬는 법’을 알고 있었던 시대의, ‘아름답다’라는 형용사만으로는 결코 담을 수 없는 낙원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다. 

            ▲ 마르크 샤갈, <낙원>, 1961. 


   
 

낙원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한 장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낙원에 대한 모든 몽상가의 원초적 몽상에 있어서, 아름다운 색깔들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화해시킨다. (……) 생명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생명은 되돌아오지도 않는다. 초벌그림이란 결코 있을 수 없고, 언제나 불꽃뿐이다. 샤갈이 그리는 존재들은 모두 최초의 불꽃이다. 그러므로 우주적인 정경에 있어서, 샤갈은 발랄함의 화가인 것이다. 그의 낙원은 싫증나지 않는다. 새들의 비상과 더불어 무수한 눈뜸이 하늘에 울려 퍼진다. 대기 전체에 날개가 돋쳐 있는 것이다. 


 -바슐라르, 이가림 역, <꿈꿀 권리>, 열화당, 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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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finder 2009-10-27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흐와 바슐라르와 원령공주와 샤갈이라...묘하게 잘 어울리는 데요?^^

sotkfkd 2009-10-30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doingnow 2009-11-06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호.. olleh!!는 이럴때 쓰는거죠?ㅋㅋ 재밌게 잘 읽었어용
 

 


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③

   

3. 24시간 'ON AIR'의 세계에서 길을 잃다 (1)

   
 

 나의 수줍은 램프를 격려하려고
 광대한 밤이 그 모든 별들을 켠다 


 - 타고르, <반딧불> 중에서

 
   
   
 

인공위성에서 내려다보면, 전기가 어둠을 서양의 바깥으로 몰아낸 것을 뚜렷이 감지할 수 있어. (……) 성서에는 빛이 어둠 속에서 빛난다고 묘사되었는데, 이와 반대로 여기에서는 빛이 어둠을 몰아내네. (……) 파괴된 도시들의 운명에 대한 근심으로 예언자들이 비탄에 잠겨 울부짖던 옛날과는 달리, 오늘날 우리는 숲이나 사막, 카르투지오회의 수도원과 사원, 사유하기에 좋은 정적과 고독 등의 상실과 파괴를 슬퍼하고 있어. 도시-빛은 어두움 속으로 파고들고, 떠들썩한 소란으로 고요함을 깨뜨리고, 자연의 침묵에 문자를 들러붙게 하고, 생물을 멸종시키지.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새로운 탄식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어. 절망의 아우성이 퍼지던 그 옛날의 적막한 공간을 박탈당했기 때문이야.  


 - 미셸 세르, 이규현 옮김, <천사들의 전설>, 그린비, 2008, 67~70쪽. 

 
   

 

   전기는 인류의 오랜 공포였던 어둠을 몰아내면서, 동시에 어둠에 깃드는 몽상의 시간도 함께 추방해버렸다. 촛불은 빛을 생성하면서 어둠이 거처할 여백을 남겨두지만, 형광등은 빛을 생산하는 동시에 어둠을 말끔히 삭제해버린다. 어둠과 빛을 한 공간 안에 담아내는 촛불의 너른 품 안에서 인간은 밤의 무의식과 낮의 의식을 결합시키는 몽상의 공간을 창조할 수 있었다. 바슐라르는 <촛불의 미학>에서 스위치를 올려 불을 켜는 전등으로 인해 ‘통제되고 관리되는 빛의 시대’가 열렸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기름으로 빛을 내는 저 살아있는 램프의 몽상을, 전등으로 인해 빼앗겨버렸다고. 전등 앞에서 우리는 스위치를 올리고 내리는 기계적인 주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로맨틱 가이의 프로포즈 이벤트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품, 그것은 바로 ‘촛불’이다. ‘저 남자를 사랑할까 말까’하고 고민하는 여성에게, ‘흔들리는 촛불’은, 어둠과 빛을 모순 없이 공존케 하는 촛불의 널따란 품은, 계산적 이성을 마비시키고 몽환적 감성을 일깨우는 멋진 뮤즈의 역할을 자임한다. 흔들리는 여인의 마음을 더욱 제대로 뒤흔들어 버리는 촛불의 미학을 활용할 줄 아는 남성들의 지혜. 그것은 사랑에 빠진 남성의 마음에 평등하게 내재한 본능적인 천재성(?)이 아닐까.
    이 순간 촛불은 ‘문명의 도구’가 아니라 ‘사랑의 메신저’이며, 어둠의 몽상을 빛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유혹의 주체로 거듭난다. 촛불의 빛을 굳이 없애버리지 않고 ‘가만히 남겨두는’ 어둠 너머로, 우리는 몽상의 나래를 펼친다. 촛불 너머의 세계, 무지개 저편의 세상, 합리적 이성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의 꿈을. 촛불은 의식이 ‘불확실성’이라 명명하는 어둠의 공간을 꿈과 이상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원령공주>에서 평화로운 에미시족의 마을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재앙신’은 ‘몽상의 시간을 빼앗긴 자연’의 은유처럼 보인다. 에미시족의 후계자인 아시타카는 성난 멧돼지의 모습을 한 재앙신을 설득하여 원래의 유순한 모습을 되찾아주고자 하지만 그의 분노를 가라앉힐 길이 없다. 결국 부족을 지키기 위해 아시타카는 목숨을 건 결투 끝에 재앙신을 쓰러뜨리지만, 자신도 오른 팔에 끔찍한 저주의 상처를 입고 죽어갈 운명에 처하게 된다. 결국 재앙신의 탄생 원인을 밝혀 자신에게로 옮겨온 저주를 풀기 위해 아시카타는 서쪽으로 길을 떠나게 된다. 여행 중에 ‘지코’라는 수도승을 만난 아시카타는 재앙신의 탄생이 ‘시시’신의 숲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시시’신의 숲. 그곳에서는 모든 짐승이 태곳적 모습 그대로 거대한 몸을 지니고 있다더군.”


   한편, 서쪽 끝 ‘시시’신의 숲 건너편 타타라 마을에 사는 ‘에보시’ 일행은 식량을 운반하던 도중 거대한 들개의 신 ‘모로’ 일행에게 습격을 당한다. 철로 된 각종 무기를 만들며 살아가는 에보시 일행은 강력한 총포를 쏴 들개들에게 큰 상처를 입힌다. 양쪽 모두 커다란 타격을 입지만 왠지 들개에게 거대한 총포를 쏘아대는 인간의 모습은 자연을 ‘압도’하기보다 자연에 대한 ‘공포’에 질려 있는 듯하다. 들개들의 수장 모로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은 더 많이, 더 강력한 화약으로 들개들을 위협하게 만든다. “저놈이 모로야. 놈은 불사신이다! 이 정도론 안 죽어!”

   마침 ‘시시’신이 살고 있다는 숲을 지나던 아시타카는 모로 일행에게 습격당한 에보시의 부하들을 구해낸다. 아시타카가 에보시의 부하들을 구해주는 모습을 먼발치서 지켜보는 들개의 신 ‘모로’와 원령공주 ‘산’. 모로의 곁에서 상처 입은 들개들을 치료해주는 원령공주의 모습을 처음 본 아시타카는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인하면서도 신비로운 기운에 매혹된다. 아직 자신이 ‘원령공주의 적들’의 편으로 의심받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아시타카는 타타라 마을로 가서 귀빈 대접을 받게 된다. 에모시의 여인네들에게 아시타카는 죽을 뻔한 남편들을 구해준 영웅이 된 것이다.  
   원령공주가 들개들과 함께 사는 숲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우리는 우리 안의 잃어버린 몽상, 밤의 저편으로 추방해버린 무의식의 세계와 조우하는 듯한 환상을 느낀다. 합리적 이성의 세계, 낮의 세계에 초대받지 못한 우리의 가여운 몽상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최근 도심 곳곳에서 일어나는 ‘멧돼지 습격 사건’은 더 이상 ‘동화 속 은유’로 멈추지 않는, 문명의 세계에서 버림받은 우리 시대의 재앙신이 내뿜는 절규의 몸짓이 아닐까.


 

   
 


정신분석가는 지나치게 생각한다. 그는 충분히 꿈꾸지 않는다. 낮의 삶이 표면에 맡겨 놓은 찌꺼기들로 우리 존재의 밑바닥을 설명하려 하다가, 그는 우리 속에 있는 심연의 의미를 지워버린다. 우리의 지하실로 내려가는 걸 누가 도와줄 것인가?  (……) 몽유병 환자는 내려간다. 언제나 태고의 숙소를 찾아 내려간다. (……) 그는 자기 속으로 내려가는가? 자기 저 너머로 가는가? 


 - 가스통 바슐라르, 김현 옮김,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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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r hurts 2009-10-26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랑에 빠진 남자들의 본능적인 천재성~ㅋㅋ 그러게나 말이예요.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어쩜들 그렇게 잘 아는지^^

sotkfkd 2009-10-27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엔 '전기'에 더해진 탐욕이 아닐까. 충분히 꿈꿀 수 없는 것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