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②

   

2.  세균 없는 곳에서는 상상력이 배양되지 않는다? (2)

   
 

 객관적 인식의 측면에서는 진실한 것이 아니지만 무의식적 몽상에서는 매우 실재적이고 활발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 꿈은 경험보다 더욱 더 강력하다.  


 - 바슐라르, <불의 정신분석> 중에서

 
   

   바슐라르는 어느 날 정원에서 둥지를 틀고 알을 품은 새를 발견한다. 알을 품고 있지만 않았다면 부리나케 도망갔겠지만, 품고 있는 알을 포기할 수 없었던 새는 인간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도망가지 않고 묵묵히 버틴다. 바슐라르는 그 새가 몸을 바르르 떨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차마 도망칠 순 없지만 인간에 대한 두려움까지는 숨기지 못하는 새의 마음이 고스란히 바슐라르에게 전해진다. 그는 <공간의 시학>에서 이때의 경험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 새를 그렇게 떨게 했기 때문에 이제 나 자신이 떤다. 알을 품고 있는 그 새가, 내가 사람임을, 새들의 신뢰를 잃어버린 존재임을 알게 될까 봐 나는 두려운 것이다.” 그는 자신 때문에 떨고 있는 새의 몸짓을 바라보면서 온몸으로 ‘새처럼 움직이고 새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추상적 개념만을 닥치는 대로 포식하며 살아 있는 이미지를 꿈꾸는 몽상에 대해서는 극심한 거식 증세를 보여 온 서양 철학의 역사를, 바슐라르는 비판한다. 바슐라르에게 몽상이란 ‘깨어서 꿈꾸는 힘’, 즉 낮의 의식 상태에서도 밤의 무의식을 체험할 수 있는 역동적 행위를 뜻했다. 그에게 몽상은 결코 ‘사유의 포기’가 아니었다. 몽상은 ‘사유의 부재’가 아니라 사유를 준비하는 활동적 에너지가 될 수 있으며, 사유에 영양분을 제공하는 마음의 토양이며, 투명한 의식으로 무의식을 관찰할 수 있는 영혼의 광학 렌즈였다. 바슐라르는 예술가의 상상력과 철학자의 사유를 연금술적으로 종합하는 힘을 자연에서 찾고자 했다. 


   바슐라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죄책감에 호소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을 향하여 경이를 느낄 수 있는 인간의 감성, 자연의 삶에 경탄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서 희망을 찾는다. 자연의 존재가 자신을 개시하는 순간, 그 순간의 황홀경적 조우. 이 순간을 통해 인간은 우주와 대화하고 스스로의 존재가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되는 절대적 순간을 맛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자연을 ‘자원’으로밖에 계산하지 못하는 ‘의식의 무능’을 자연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무의식의 통찰’로 구원하려 했던 것이다. 자연에 가치를 부여하는 자기중심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한, 자연과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바슐라르는 우리의 ‘언어 습관’ 자체를 뒤집는 모험을 시도한다. 그는 괴테를 ‘위대한 숨꾼’이라고 격찬하면서 ‘숨을 잘 쉬는 법’을 알고 있는 작가 괴테가 뿜어내는 창조성의 원천을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이 숨 쉬듯, 저 멀리 숨을 내뿜으며 땅도 숨 쉰다. (……) 땅이 인간처럼 숨 쉰다고 말한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땅이 숨을 쉬듯이 괴테가 숨을 쉰다고 말해야 한다. 괴테는 땅이 충만한 대기(大氣)로 숨을 쉬듯이 폐를 힘껏 넓혀 숨 쉰다. 숨 쉬는 영광에 도달한 자는 우주적으로 숨 쉰다. 


 -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중에서

 
   



   바슐라르는 ‘땅이 인간처럼 숨 쉰다’고 말하지 않고 ‘인간이 땅처럼 숨 쉰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이 아닌 모든 것을 인간의 문법으로 길들이려는 언어적 습관을 의문에 부쳤다. 의인법은 인간중심적인 문법의 대표주자다. 의인법의 프리즘으로 보면 세상 모든 것이 ‘인간 따라잡기’와 ‘인간 흉내 내기’에 지내지 않는다. 새들은 사람처럼 도시를 배회하고(‘닭둘기’로 전락한 도시의 비둘기들이여!), 애완동물들은 사람처럼 옷을 입고 사람처럼 미용실을 들락거리며 사람처럼 질병을 앓고 있다. 자연을 ‘인간의 숨결에 맞게’ 길들이려는 인간의 노력은 한때 성공적으로 보였으나 지금은 그 돌이킬 수 없는 결과들로 인해 인간 스스로가 몸살을 앓고 있다.


   <원령공주>는 바로 문명을 이룩한 과학과 합리주의가 도달한 ‘사유하는 이성’과 문명에 다가갈수록 멀어져가는 ‘야생의 상상력’ 사이의 전투를 그리고 있다. 애니메이션 초반부에 등장하는 원령공주의 모습은 사람이라기보다는 늑대소녀에 가까워보인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가린 전사의 가면은 그녀가 선택한 삶의 방향성을 나타낸다. 그녀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문명화된 인간의 삶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연 속으로 저물어가는 길을 택한다. 에미시족의 마을에 살고 있던 소년 아시타카는 철기 문명으로 무장한 타타라마을과 원령공주가 지키고 있는 시시신의 숲 사이를 매개하는 메신저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 위에서, ‘몽상’이 숨 쉴 여백의 공간이 사라진 황폐한 세계를 벗어나는 꿈들의 궤적. 그것이 <원령공주>의 세계가 아닐까.


 

   
 

온갖 상상으로 가득한 나이일 때
 인간은 어떻게 그리고 왜 상상하는지 말할 줄 모른다
 어떻게 상상하는지를 말할 수 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상상하기 위해 우리는
 철학을 폐기 처분해야 한다,
 웃자란 지성의 키 높이만을 자랑하지 말고  


 -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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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슨 2009-10-23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땅처럼 숨쉬는 인간, 나비처럼 몽상하는 인간. ㅋ....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바슐라르는 언제나 시인처럼 말합니다.

sotkfkd 2009-10-24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자란 지성의 키 높이를 자랑하지 말기
잘 읽었습니다.
 

 


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①


   

1. 세균 없는 곳에서는 상상력이 배양되지 않는다? (1) 

   
 

 나는 바슐라르를 대할 때마다 경탄을 금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딛고 있는 문명을 정면으로 부인한 사람이다. 그는 서구 인식 전체를 향해 덫을 놓은 사람이다. 


 - 미셸 푸코, 바슐라르 탄생 100주년 기념 인터뷰 중에서

 
   
   
 

실용적 과학교육에서 철학교육으로 옮겨왔건만, 나는 완전히 행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불만족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지요. 어느 날 디종에서 한 학생이 ‘나의 살균된 세계’를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그건 하나의 계시였어요. 사람은 살균된 세계 속에서는 행복할 수 없는 법이지요. 그 세계에 생명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미생물 세균들을 들끓게 해야 했습니다. 상상력을 회복시키고, 시를 발견해야 했던 거지요.  


 - 바슐라르, 폴 지네스티에의 <바슐라르를 알기 위하여> 중에서

 
   

   


   구두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우체국 전신기사로, 1차 세계대전 당시 통신 중대 중대장에서 고향마을의 과학교사로, 대학에서 과학사를 강의하는 과학자에서 소르본 대학 철학교수가 되기까지. 드라마틱한 라이프스토리로 유명한, 그러나 그보다도 더 드라마틱한 글쓰기 방식으로 유명한 바슐라르. 시인보다 더욱 시적인 문체로 철학을 강의했던 바슐라르에 따르면, 상상력은 미생물 혹은 세균을 닮은 존재다. 우리에게 영혼의 질병을 선물하여 고통에 시달리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비로소 ‘살아 있게’하는 생명체 내부의 타자, 그것이 바로 상상력이기에. 기계와 숫자로 깔끔하게 마름질된 합리성의 세계, 즉 ‘살균된 세계’에서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원령공주>가 개봉된 지 한참이 지나서야 봤다. 그런데 생태주의 애니메이션으로 잘 알려진 <원령공주>는 내 짐작만큼 ‘생태주의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당시 유행하기 시작했던 생태주의 너머, 그보다 훨씬 커다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원령공주>는 단지 ‘환경을 보호하자’는 김빠지는 교훈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도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 <원령공주>는 우리에게 환경 파괴에 대한 윤리적 책임감을 가지라고 채찍질하는 영화가 아니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함께 보니 그런 막연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길 잃은 몽상이 더욱 확장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에게는 ‘-이즘(ism)’으로 구획될 수 없는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는데 과연 그게 무엇인지 좀처럼 포착할 수 없었다. 




   <원령공주>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분명 생태주의 그 이상이다. 그런데 그 너머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몇 년 후 우연히 바슐라르를 읽다가 비로소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더욱 풍요롭게 향유할 수 있는 프리즘을 얻게 되었다. 원령공주는 악을 퇴치하는 정의의 사도로서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대표하는 여신상이 아니다. 인간의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 대중화된 생태주의는 인간을 ‘죄책감의 동물’로 격하시켜버린다. <원령공주>는 생태주의 그 이상의 메시지, 생태주의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엄청난 스케일의 영화로 다가왔다.

    <원령공주>는 인간의 두뇌운동의 두 경향을 강렬한 보색대비로 보여주는 영화가 아닐까. 자연을 착취 가능한 ‘자원’으로 파악하는 합리적 이성과 자연을 자신의 존재론적 태반으로 인식하는 신화적 상상력 사이의 근원적인 갈등. <원령공주>는 인간의 두뇌운동의 구조를 격렬한 갈등과 대립의 형태로 보여주는 미야자키 하야오식 철학의 클라이막스를 보여준다. 바슐라르의 프리즘으로 보면 이 애니메이션은 ‘이미지의 세계’와 ‘개념의 세계’라는 인간의 두 가지 두뇌활동의 근원적인 충돌을 보여주는 거대한 스펙터클이 아닐까. 개념의 세계가 과학주의의 산물이라면, 이미지의 세계는 상상력의 산물이다. 계몽주의의 확산 이후로 끊임없이 ‘합리적 이성의 장애물’로 인식되어왔던 이미지의 세계, 비논리적 상상의 세계, 주관적 몽상의 세계야말로 바슐라르의 필생의 연구 과제였다. 
 

   
 

이미지는 이미지에 의해서만 연구될 수 있다. 몽상 속에서 모여드는 이미지들의 모습 그대로를 꿈꾸면서 말이다. 상상력을 객관적으로 연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난센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이미지에 대하여 경탄을 할 때만 진정으로 이미지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 이와 같이 이미지와 개념은 인간의 정신활동의 서로 대립되는 두 개의 극을 형성하는데, 그것은 바로 상상력과 이성이다. 이들 사이에는 배척하는 극성이 작용한다. 자장의 극성들과는 공통점이 없다. 그들은 서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밀어낸다. 


 -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중에서

 
   

 

   이미지를 설명하고 분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진정한 이미지가 아니다. 이미지는 감성의 차원에서는 실존하지만 논리적으로 재생할 수 없는 상상력의 운동이다. 논리적 분석이나 개념적 규정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미지를 꿈꾸는 것. 아무런 ‘언어’도 발설하지 않는 토토로에게 우리가 매혹되는 이유 또한 그것일 것이다. 개념적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해한 편안함, 분석할 수 없는 치유의 힘,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상상력의 자유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토템적 이미지를 구현하고 있는 토토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토토로의 장수비결은 우리 안의 원시적 야생의 꿈을 일깨우는 토템적 상상력에서 발원한 것이 아닐까. 토토로는 애니메이션 속에서 한 번도 ‘언어’를 발설하지 않는다. 토토로가 뿜어내는 그 푸근함, 그 따뜻함, 그 푹신함만으로 우리는 모든 걸 느낄 수 있다.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이 상상의 생명체를 향한 전 세계 팬들의 열광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바슐라르는 ‘사유하는 의식’보다 ‘꿈꾸는 의식’이 훨씬 더 어려운 지적 행위임을 통찰했다. 말하자면 합리적 이성이 ‘쓸모없다’고 몰아세우는 ‘몽상(daydream)’, 인간의 낮 꿈이야말로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하는 상상력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상상력은 사유에 따르는 부차적 능력이거나 진정한 사유를 추구하다 남은 쓸모없는 잔여물 같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서구철학은 ‘몽상’ 자체를 사유하지 않음으로써, 몽상을 철학적 사유의 대상에서 배제해버림으로써, ‘사유만을 다시 사유하는’ 쳇바퀴를 돈 것이 아닐까. 사유는 창백한 개념의 시체, 물고 물리는 개념들만의 무의미한 연쇄작용으로 전락해버린 것이 아닐까. 바싹 마른 개념들의 무미건조한 사유의 퍼즐이 아니라, 생생한 촉감과 온도와 빛깔을 지닌 이미지의 세계 속에서, 바슐라르는 문명의 역사에서 배제된, ‘망각된 몽상의 가치’를 발견해냈다.  


   
 

단순한 인상주의와 몽상에 기반을 둔 주관성을 어떻게 구분하느냐 (……) 이 문제에 대한 바슐라르의 대답은 ‘자신에게 충실하기’이다. 인상주의는 사물의 겉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몽상을 통하여 사물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를 원한다. 인상주의는 자신에게 최초로 전달되는 정보를 중요시한다. 그것은 다음 정보를 기다리지 않고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최초의 인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최초의 인상이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혜안의 눈을 가진 몽상이 시작되는 것은 이 최초의 인상이 걷힌 다음이다. 인식의 오류를 경계하기 때문이다. 이 혜안은 사물의 깊이를 보고자 하는 눈이다. 몽상가의 혜안은 최초의 경험이 지나간 후라야만 제대로 볼 수가 있다. (……) 문학적 몽상의 활동은 텍스트를 충실하게 다시 읽을 때에만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학은 두 번째 독서에 있다고 바슐라르는 말하고 있다.  


 - 홍명희,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살림, 2005,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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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finder 2009-10-22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 모노노케 히메. 하야오 선생의 마스터피스죠, 암요~!^^

sotkfkd 2009-10-22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상가의 혜안은 최초의 경험이 지나간 후라야만 제대로 볼 수가 있다. 맞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올 겨울은 바쁠 것 같습니다. 영화들을 모두 다 다시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질 들뢰즈 ⑩

   

10. 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3)  


   
 

 유목민은 물론 움직이지만, 앉아 있으면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앉아 있다. (……) 유목민은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 안다. 그들은 무한한 참을성을 갖고 있다.   


 - 들뢰즈·  가타리, <천의 고원>2, 연구 공간 ‘너머’ 자료실, 2000, 165쪽.

 
   
   
 

우리에게 발생하는 것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 그래서 그것을 원하고 그로부터 사건을 이끌어내는 것, 그 고유한 사건들의 아들이 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것, 탄생을 다시 이룩하는 것.
 

 - 들뢰즈, 이정우 역, <의미의 논리>, 한길사, 1999, 261쪽.

 
   

   왜 인간은 사건의 폭풍이 잦아들고 나서야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일까.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후적 깨달음의 동물일까. 지나간 시간이, 과거의 기억이 ‘소중하다’는 감각은 기억이 생성된 후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지각된다. 특히 익숙하고 친밀한 관계일수록 대상의 상실은 더욱 오랜, ‘깨달음을 위한 발효 기간’을 요구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정작 그 상실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견디기 힘든, ‘이별’이나 ‘애도’라고 이름붙이기도 어려운 감각의 총체적 혼돈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렇게 인간은 현재에 몰두할 때는 지금 이 시간 자체를 대상화할 수 없다. 현재의 상황 자체에 몰입하지 않고서는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를 ‘과거’로 회상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뒤늦은 깨달음’은 인간의 우매함 때문이 아니라 ‘시간 자체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타임 리프로 인해 마코토가 깨달은 것은 시간의 ‘조형 가능성’이 아니라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한 깨달음이 아닐까. 아무리 객관적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도, 과학의 힘이 그 불가능의 영역에 도전하여 성공할지라도, 우리의 삶 속에서 잃어버린 시간은 물리적인 힘으로 되찾을 수 없다는 것. 몇 번이나 타임 리프를 한다 해도, 우리 몸과 마음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은, 나의 욕망이 너의 시간에 새긴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는 언제나 지나간 시간의 의미를 사후적으로 발견하고 뒤늦게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은 단지 인간의 ‘한계’라기보다는, ‘과거’로 멀어져간 시간에 대한 인간의 오만을(‘나는 과거를 이해하고 과거를 기록하고 과거를 이용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합리적 이성) 일깨우는 시간의 매혹적인 속성이 아닐까.


    마코토는 타임 리프를 통해 7월 13일을 몇 번이나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이 한 번도 ‘동일한 감각’으로 체험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그녀가 기억을 수정하고 삭제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개입한 시간은 하나같이 그녀의 ‘의도’를 배반하고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시간의 형상으로, 저마다 새로운 ‘차이’의 시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타임 리프로 인해 일어난 진짜 기적은 단지 기계적 시간의 이동가능성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아무런 자발적 사유도 하지 않던 한 소녀가 ‘시간’에 대해, 즉 ‘삶’ 자체에 대해 예전과는 전혀 다른 각도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아닐까.
   타임 리프로 인해 과거-현재-미래로 지속되는 선형적 시간의 상식이 깨져버리자 마코토는 엄청난 혼란을 느낀다. 그러나 그 시간의 비연속성은 시간 자체가 이미 지니고 있는 내재적 속성이다. 지금 마코토는 미래에서 온 마코토 자신에게 심문당하고 있는 현재의 자신을 느낀다. 과거의 마코토와 현재의 마코토와 미래의 마코토가 한 공간 안에 존재함으로써 지금까지 믿어왔던 스스로의 자기 동일성이 참혹하게 깨어지는 고통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한 화면 안에 공존하며 마코토의 고정된 정체성을 분열시킨다. 미래의 마코토가 현재의 마코토에게 과거의 마코토를 넘어서라고 충동질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치아키가 떠난 빈자리를 바라보는 고스케의 마음도 편치 않다. “난 그렇다 쳐도, 너한테도 아무 말 없이 떠나다니. 널 좋아했으면서…….”  “날 좋아한다고…… 치아키가 그렇게 말했어?” “딱 보면 알지. 몰랐냐? 하긴 넌 그런 데는 좀 둔하니까. 그래서 치아키가 더 말 못했는지도 몰라.” 치아키는 ‘아직 고백하지 않은 시간’을 살다가 떠났지만, 마코토는 ‘이미 고백을 받았으나 그 고백의 시간을 말소해버린 시간’을 살고 있다. 그러나 마코토의 시간 속에서 이미 치아키는 고백을 했고, 그렇게 ‘들었으나 듣지 않은 고백’이 마코토를 뒤늦게 괴롭힌다. “나 정말 못된 애야. 치아키가 어렵사리 해준 얘기를,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렸어. 난 왜 더 귀 기울여 듣지 않았을까?” 
   치아키가 떠난 후 풀이 죽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마코토에게, 이모는 말한다. 자기도 학창 시절에 좋아했던 친구가 있었다고. 어른이 되어 헤어졌지만 ‘언젠가 반드시 돌아올 거’라는 그의 말을 자신도 모르게 믿다가 이렇게 시간이 흘러버렸다고. 이모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 원작 소설에서 타임 리프라는 ‘기이한 능력’을 갖는 것이 두려워 한사코 그 ‘초능력’을 거부하고 싶어 했던, 수줍고 겁 많은 바로 그 소녀였던 것이다. 아직도 그 ‘미래의 소년’을 기다리는 듯 처연한 눈빛을 지닌 이모는 마코토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코토. 넌 나랑은 성격이 다르잖아. 친구가 늦게 오면, 네가 먼저 달려가 친구를 데려오는 게 너 아냐?”

   마코토는 실연당한 사람처럼 넋이 나가 침대를 뒹굴다가 팔뚝에 새겨진 숫자를 확인한다. ‘0’이어야 할 숫자가 ‘01’로 보인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그때 치아키가 고스케를 살리려고 시간을 다시 돌렸으니까, 치아키도 분명 타임 리프 회수가 남았을 거야. 이제 마코토는 이 생의 마지막 타임 리프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마음으로, 가벼운 유희가 아니라 온몸과 온 마음을 건 도약으로, 멋지게 해낸다. 그녀가 잃어버린 시간을 ‘발견’한 이후의 타임 리프는 이전의 타임 리프와 전혀 다르다. 그녀는 치아키와 함께 걸어왔던 시간의 세포 하나하나를 올올이 만지는 느낌으로 타임 리프에 자신의 온몸을 던진다. 너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이, 너로 인해 웃고 울던 모든 시간이, 지진처럼 해일처럼 격렬하게 내 몸을 향해 돌진한다.
   내가 알지 못하던 그 시간의 ‘의미 없는’ 파편들이 이제 저마다 절실한 의미를 품어 안고 다시 내 안에서 깨어난다. 그녀는 이 생의 마지막 타임 리프로 인해 단지 시간을 돌린 것이 아니라 치아키의 마음이 되어, 치아키의 눈이 되어, 자신들이 걸어온 시간을 다시 되짚는다. 그녀가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 만난 것은 잃어버린 타인이었다. 타인의 시간을 되찾는 것이 곧 그녀의 시간을 되찾는 것이었다.

   마코토는 영화의 시작부분에서 등장한, 호두처럼 생긴 타임 리프 기계를 과학실에서 찾아낸다. 미래로 다녀온 마코토에게 이 기계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녀는 타임 리프 장치를 잃어버려 노심초사하고 있을 치아키에게 달려간다. 시간을 되돌려 간신히 되찾은 치아키를 마지막으로 만나기 위해 달려가는 마코토. 달리기에 목숨을 건 사람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치아키를 향해 달리는 마코토의 표정은 더 이상 장난스럽지도, 철없지도, 어리지도 않다.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존재의 문턱을 넘은 사람의 강인한 아름다움이 마코토의 얼굴에서 배어나온다. 언제나 시간에 뒤처지던 그녀는 어느새 시간을 따라잡고, 시간이 더 이상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을 수 없도록, 시간의 중력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그녀만의 속도로 뛰어간다. 치아키를 미래로 보내기 위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놓아주기 위해.


   치아키: (마코토가 건네준 타임 리프 장치를 보며) 이걸 네가 어디서 찾았어? 아니 너! 이게 뭔지는 알아?  
    마코토: 알아.
    치아키: 누가 가르쳐 줬는데?
    마코토: 네가.
    치아키: 난 그런 소리 한 적도 할 리도 없어.
    마코토: 네가 모두 다 얘기해 줬어. 네가 살던 시대도, 이게 뭔지도.
    치아키: 너 어디서 온 거야?
    마코토: 미래에서.
    치아키: 너도 타임 리프를 할 줄 알아?
    마코토: 이젠, 못해. 
    (……)
    치아키: 이 얘기를 하려고 일부러 과거로 돌아온 거야?
    마코토: 응.
    치아키: 바보같이 내가 왜 얘기했을까?
    마코토: 그 그림은 미래에 가서 봐. 이젠 없어지거나 타버리지 않을 테니까. 네가 온 미래까지 무사히 남아 있게끔,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치아키: 그래, 부탁해……. 돌아갔어야 했는데. 어느새 여름이 됐어. 너희랑 함께 있는 게 너무 즐겁다 보니.
    (……)
   치아키: 마코토! 늘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너 말이야……. (이제 ‘고백’을 들을 준비가 된 마코토의 잔뜩 설렌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함부로 뛰다가 다치지는 마라. 넌 주의력이 부족하잖아. 먼저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해.
   마코토: (치아키의 고백을 기다리던 설렘이 사라져버리자, 잔뜩 실망한 얼굴로) 뭐야? 그게 마지막 인사야?
    치아키: 바보, 다 널 걱정해서하는 말이야!
    마코토: 그래! 걱정해줘서 고맙다! 알았으니까 얼른 가.
 (치아키의 등을 밀어내며 억지로 치아키를 보내버리는 마코토.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솟구치는 흐느낌을 막을 수 없다. 엄마 잃은 아이처럼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엉엉 우는 마코토를 향해, 치아키가 다시 돌아온다. 너무 놀라 눈물을 뚝 그친 마코토를 살짝 안고, 미친 듯이 뛰고 있을 마코토의 심장을 향해, 치아키는 드디어 고백한다. 예전에 마코토가 ‘삭제해버린’ 그 고백보다 훨씬 멋진 대사로.)
   치아키: 마코토……. 미래에서 기다릴게.
   마코토: (치아키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일순간에 모든 아픔이 치유된 듯, 언제 울었냐는 듯이, 이제야 마코토다운 밝고 명랑한 표정으로) 응! 금방 갈게! 뛰어갈게!

   의미 없이 기계적으로 흘러가던 시간이, 이 세상 단 한 번뿐인 사건의 시간이 되었다. 치아키가 살고 있는 미래가 몇 십 년 후인지 몇 백 년 후인지 모르지만, 도대체 치아키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그 그림을 어떻게 저 거대한 시간의 풍화작용으로부터 지켜낼 지는 알 수 없지만. 마코토는 기다릴 것이다. 치아키를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라도, 막상 치아키를 만났을 때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있을지라도, 그녀에게 이제 ‘시간’은 이미 다른 의미로 흐르기 시작했다. 미래에서 날아온 소년 치아키로 인해 그녀의 현재는 완전히 다른 빛깔과 냄새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녀 안에 둥지를 튼 치아키의 미래는 그녀의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함께, 따로 또 같이, 살아갈 것이다. 미래 소년과 날카롭게 조우한 이모의 현재가 행방을 알 수 없는 그 옛날 그 소년의 미래와 모순 없이 공존하듯이.
   그러므로 순수한 현재란 없다. 과거-현재-미래라는 편의상의 경계를 매번 무너뜨리며 미처 제 몫을 다하지 못한 과거는 오늘을 살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은 현재의 우리 몸에서 체현된다. 때로는 예술의 이름으로, 때로는 사랑의 이름으로.
   비자발적인 기억은 ‘나는 나의 이야기를 만들고, 연출하고 기록할 수 있는 주체다’라는 인간의 착각 혹은 오만을 일거에 날려버린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여 기상천외한 타임 리프 능력이 주어진다 해도 우리는 ‘시간의 지휘자’가 될 수 없다. 잃어버린 타인의 시간이 곧 잃어버린 나의 시간임을 기억하는 한. 너와 나의 시간을 분리할 수 없는 그 끝없는 모호성 위에 우리의 인연이, 너와 나의 ‘마주침’이라는 사건이 존재하는 한. 



   이로써 우리 앞에 겹겹이 닫혀 있었던 시간의 문이 열리고, 그렇게 살짝 벌어진 시간의 틈새로, 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으로 분리되지 않는 뫼비우스적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미래 소년 치아키가 다녀간 이 도시에서 이제는 지각할까 봐 휙휙 지나가버린 그 모든 사소하고 당연한 장면들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의 반짝이는 순간으로 거듭나 ‘잃어버릴 수밖에 없지만 끝내 되찾을 시간’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이제 시작될 마코토의 기다림은 마음에 드는 미래가 오기를 기다리는 대책 없는 수동성이 아니다. 미래가 주저하느라 좀처럼 오지 않는다면 달려가 미래의 손을 꽉 붙들고 데려올, 그런 능동적인 기다림, 시간을 창조하는 기다림이다. 미래를 계산하지 않는 마코토의 무구한 ‘기다림’으로 인해, 그들로 인해 되찾은 우리의 시간 또한 21세기의 새로운 ‘마들렌의 시간’으로 부풀어 오를 것이다. 이제 마코토는 시간보다 더 빨리, 시간보다 더 멀리, 시간보다 더 깊이 달려가는 ‘그녀만의 리듬’을 살아낼 것이다.  

   
 

과거의 환기는 억지로 그것을 구하려고 해도 헛수고요, 지성의 온갖 노력도 소용없다. 과거는 지성의 영역 밖,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우리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물질적인 대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하는 것은 우연에 달려 있다. (……) 우중충한 오늘 하루와 음산한 내일의 예측에 풀 죽은 나는, 마들렌의 한 조각이 부드럽게 되어가고 있는 차를 한 숟가락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부스러기가 섞여 있는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쳤다. 나의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깨닫고, 뭐라고 형용키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외따로,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솟아나 나를 휩쓸었다.
(……) 마치 일본 사람이 재미있어 하는 놀이, 물을 가득 채운 도자기 사발에 작은 종잇조각을 담그면, 그때까지 구별할 수 없던 종잇조각이, 금세 퍼지고, 형태를 이루고, 물들고, 구분되어, 꿋꿋하고도 알아 볼 수 있는 꽃이, 집이, 사람이 되는 놀이를 보는 것처럼. 이제야 우리들의 꽃이란 꽃은 모조리, (……) 수련화 마을의 선량한 사람들과 그들의 조촐하나 집들과 성당과 온 콩브레와 그 근방, 그러한 모든 것이 형태를 갖추고 뿌리를 내려, 마을과 정원과 더불어 나의 찻잔에서 나왔다.  


 -마르셀 프루스트, 김창석 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국일미디어, 65~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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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10-20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코토와 치아키의 사랑이 '키스'가 아닌 '포옹'으로 끝나서 너무나 예쁘고 뭉클했던 기억이 되살아 나네요^^*

도란도란 2009-10-20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ㅋㅋ 전 무지무지 안타까웠는데요.

종이비행기 2009-10-21 0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키스도 아니고 포옹도 아닌 그 애매모호한 그 자세가 너무 이뻤지요~!특히 치아키가 마코토 머리 쓰다듬어줄 때 완전 기절하는 줄 알았음^^

sotkfkd 2009-10-21 0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후적 깨달음의 동물!

love hurts 2009-10-21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시간보다 더 빨리, 시간보다 더 멀리, 시간보다 더 깊이 달려가는 마코토가 눈앞에 그려집니다~!^^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질 들뢰즈 ⑨

   

9. 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 (2)

   
 

 사유는 (……) 나 이외의 타자가 되기 위해 행해지는 모든 작업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심문하는 방법이다.  


 - 푸코, 폴 라비노우와의 인터뷰 중에서

 
   

   타임 리프를 하기 전까지, 마코토에게 시간은 단지 ‘지켜야 할 시간’과 ‘지키지 않아도 되는 시간’으로 나뉘었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시간(학교를 중심으로 구획되는 기계적 시간표)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그녀가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는 자유 시간). 그녀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란 뭔가 독특한 외부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뿐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시간의 충돌을 경험하면서, 그녀의 시간과는 다른 이질적인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마코토는 조금씩 깨닫는다. ‘나의 시간’이란 무중력 상태의 물체처럼 외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심코 저지른 나의 행동이 시간의 흐름은 물론 타인의 인생까지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을. 나의 시간은 너의 시간과 그 · 그녀의 시간, 그들의 시간과 끊임없이 덧붙여지고 이어져 ‘우리들의 시간’이라는 거대한 시간의 패치워크를 만들어가고 있었음을.

   유희의 시간에서 책임의 시간으로 이동한 마코토. 그녀가 저지른 시간(?)에 책임을 지기 위해 그녀는 좀더 ‘근본적인 시작’으로 돌아가는 타임 리프를 실현한다. 고스케와 카호(고스케를 짝사랑하는 여학생)의 인연을 맺어주기 위해 그 두 사람이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조작하는 마코토. 고스케는 자신에게 부딪혀 넘어진 소녀를 일으켜주며 그녀와 첫번째 스킨십(?)을 경험하고 그녀를 부축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 수줍은 눈길이 오고 간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도록 만드는 데 성공한 마코토는 신이 나서 중얼거린다. “마음이 다 뿌듯하네. 이 행복감을 뭐라 하면 좋을까.” 그때 마코토의 팔에 새겨진 숫자가 문득 눈에 띈다. 10으로 보이기도 하고 01로 보이기도 하는 이 숫자. 전에는 09라고 새겨져 있었는데. 혹시 타임 리프가 가능한 횟수를 뜻하는 걸까. 

   자신과 부딪혀 발목을 삔 소녀를 아버지가 운영하는 병원으로 데려가려는 고스케. 고스케는 마코토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소녀를 바래다주려 한다. 고스케의 문자메시지를 받고 나서야 자전거 브레이크가 고장 나 죽을 뻔했다는 사실이 기억난 마코토. 그녀는 정신없이 달려가 고스케를 말리러 가지만 이미 자전거는 사라진 뒤다. “어떡하지? 시간을 되돌릴까? 하지만 아직 확실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잖아.” 마코토는 다급한 마음으로 달려가 기찻길 근처에서 고스케를 찾아 헤매지만 헛수고다. 미친 듯이 고스케를 찾던 중 치아키의 전화를 받은 마코토. “고스케는 집에 있다던데, 너 오늘 야구 안 할 거야?” 마코토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치아키의 전화를 반가워한다. 그래, 고스케는 죽지 않은 거야.


   치아키는 전화기 저편에서 묻는다. “마코토.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 너 혹시……타임 리프 하는 거 아냐? 너…… 타임 리프 하지?” 마코토는 ‘타임 리프’라는 은밀한 단어가 그녀와 이모 이외의 다른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치아키가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 아, 이 방법밖에 없다. 마코토는 다시 한 번 타임 리프를 한다. 허를 찌르는 치아키의 질문을 듣기 직전의 순간으로. 마코토는 뭔가 중요한 질문을 하기 위해 뜸을 들이는 치아키의 입을 막으려고, 동생 이야기로 얼렁뚱땅 화제를 돌린다. 팔에 적힌 숫자는 ‘0’으로 바뀐다. 마코토는 그제야 깨닫는다. “역시 이 숫자는 남은 타임 리프 횟수였어. 시시콜콜한 일에 마지막 타임 리프를 날렸구나. 뭐, 아무렴 어때. 고스케도 무사하고.”
   그런데 그 순간. 고스케가 마코토의 자전거를 타고 소녀를 등 뒤에 태운 채 지나간다. 마코토가 고장 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죽을 뻔 했던, 아니 한 번 죽었던, 바로 그 기찻길 쪽으로. “마코토. 자전거 좀더 쓸게.” 마코토는 미친 듯이 달려가 고스케를 부르다가 내리막길에서 미끄러져 넘어지고 고스케와 소녀는 그 기찻길에서 사고를 당한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마코토는 고스케를 향해 절규한다. 멈춰, 멈춰, 멈추라고!

   그 순간. 타임 리프를 암시하는 화면이 지나간다. 멈춰, 멈춰, 멈추라고! 고스케를 향한 그 피투성이 외침을 ‘무정한 시간’이 들은 걸까. 믿을 수 없는 마법처럼, 시간이 정말 멈춰버렸다. 길 위에 북적이던 사람들, 하늘을 나는 헬리콥터, 달리는 자동차, 창공을 가르던 새떼들, 그 모두가 멈추고 오직 마코토만이 움직인다. 정지된 세계의 화면 위로 치아키가 불현듯 나타난다. “마코토, 역시 너였구나.” “치아키……. 네가 어떻게 여길……. 고스케는?” “아직 집에 있겠지.” 치아키는 마코토의 고장 난 자전거를 보여준다. 마코토의 자전거를 가져옴으로써 고스케가 그 자전거를 아예 탈 수 없도록 만든 것이 바로 치아키라니. “지금 이거……. 네가 한 거야? 너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
   치아키는 마코토를 조용히 응시하며 말한다. “내가 미래에서 왔다면 웃을 거야?(……) 내가 사는 시대에는 자유롭게 시간을 오갈 수 있는 장치가 있어. 바로 이거야. 몸에다 충전해서 쓰면 돼. 나도 이걸로 이 시대로 온 거고. 그런데 멍청하게도 어딘가에 흘려버렸어. 초조했었지. 여기저기 헤매다 겨우 찾았어. 과학 실험실에서. 이미 누가 써버렸지만. 하지만 다행이야. 이걸 쓴 게 바보라서. 나쁜 일에 쓰일까 봐 한숨도 못 잤어.” 이제야 모든 것이 설명된다. 어느 날 갑자기 마모토에게 생긴 타임 리프 능력과 그 모든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치아키는 정지된 시간 속에 얼어붙은 거대한 도시 속을 천천히 걸어 이모가 일하고 있는 박물관 쪽으로 걸어간다. 마코토는 치아키에게 그 먼 미래에서 왜 지금 여기로 날아왔냐고 질문한다. “꼭 보고 싶은 그림이 있었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어디에 있어도, 어떤 위험한 일이 생겨도, 보고 싶던 그림이었어.” 치아키가 다가간 그림에는 “보존을 위해 전시를 보류합니다”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이모가 복원하고 있는 바로 그 그림이다. “내가 사는 시대에서는 이 그림이 사라져버렸거든. 이 시대 이전에는 어디 있었는지 모르고. 확실히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건 이 시대, 이 장소, 지금 이때뿐이었어.” “그냥 보기만 해도 돼?” “보는 것만으로도 난 만족해. 평생 잊지 않을 생각이었지. 하지만 이젠 다 부질없지만.” 유리 저편에 그림이 걸려 있던 자리를 덧없이 만지작거리던 치아키의 손가락이 유리 위로 힘없이 미끄러진다.
    “뭐? 네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내 시대로 못 돌아간다고. 고스케가 타려던 네 자전거를 빼오느라 나한테 충전돼 있던 타임 리프 횟수를 다 썼거든.” 마코토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따지듯 묻는다. “왜 써버렸어! 꼭 쓸 일이 있었잖아!” 치아키는 쓸쓸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게 꼭 쓸 일이었어. 지금의 넌 모르겠지만 고스케랑 그 여자애. 한 번 그 건널목에서 죽었다고. 누군가가 자기 탓이라며 울고불고 난리인데……. 이것밖에 방법이 없었어. 돌아갔어야 했는데. 어느새 여름이 되어버렸어. 너희랑 함께 있는 게 너무 즐겁다 보니.”

  치아키: 강물이 흐르는 걸 처음 봤어. 자전거도 처음 타 봤고. 하늘이 이렇게 넓은 줄 처음 알았어. 무엇보다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도 처음 봤어.
   마코토: 저기, 치아키. 혹시 그 그림과 네 시대가 관련이 있는 거야? 가르쳐 줘.
   치아키: 난 이 시대가 좋아. 야구도 있고.
   마코토: 뭐, 야구가 없어? (……) 그 그림말이야. 곧 볼 수 있어. 지금 복원 중이거든. 같이 보러 오자. 고스케랑 셋이서. 이제 여름방학이잖아. 치아키, 치아키?
   치아키: 미안, 무리야. 나, 내일부터 없을 거야
   마코토: 어, 어째서?
   치아키: 과거 사람에게 타임 리프의 존재를 들키면 안 되거든 난 그 규칙을 어겼어. 그러니까 이제 우린 만날 수 없어.

   그토록 찾고 싶었던 ‘나의 시간’을 위해 시간의 주사위놀이를 살짝 했을 뿐인데, 되찾으려는 나의 시간 때문에 타인의 시간을 빼앗아버렸다. 그저 나의 즐거움을 위해 벌였던 시간놀이가 누군가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이 되어버리다니. 게다가 이제 치아키를 다시 볼 수 없다니. 치아키가 이별을 선언하는 그 순간. 그녀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시간의 탑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공포가,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시간의 세포가 파열되는 끔찍한 고통이, 나를 꿰뚫고 지나간다. 그 순간 치아키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이 마코토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재구성되기 시작한다. 가슴 설레고 행복했던 그 모든 시간들, 그 속엔 늘 치아키가 있었으며 두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그 시간, 그 고백의 시간을 스스로 삭제해버리려는 마코토의 타임 리프 소동은 뼈아픈 후회의 시간이 되어버렸다.
   마코토는 잃어버린지도 모른 채 잃어버린 시간의 존재를 이제야 깨닫는다. 치아키와 함께 했던 그 모든 기억은 마코토의 어리석은 현재를 내려치는 죽비가 되어 그녀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기억들. 무의식에서 잠자고 있던 기억의 파편들은 ‘끝나는 순간에야 발견한 첫사랑’이라는 별자리의 이름에 걸맞게 서글픈 성좌를 그리며 그녀의 기억을 완전히 다시 재구성한다. 치아키와 함께 했던 그 모든 소중한 추억들은 비자발적인 기억의 세포를 구성한다.
   시간을 벌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철저히 시간을 잃어버린 마코토. 그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상실은 바로 그 ‘고백의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타임 리프를 통해 시간을 ‘창조’하던 마코토, 제멋대로 타인의 시간을 ‘지휘’하던 마코토는 정작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은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 절망한다. 이 순간만큼 긴 시간이 있을까.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바로 너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는데, 그 순간 너를 잃어버려야 하는 이 고통스런 순간만큼 기나긴 시간이 또 있을까.  

   
 

비자발적인 기억이 주는 계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짧으며 “잠드는 순간에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광경 앞에서 이따금 체험하는 것과 비슷한 불안정에서 오는 현기증”같은 타격을 우리에게 주지 않고는 지속될 수 없다.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은 우리에게 순수과거,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과거를 건네준다. (……) 비자발적인 기억은 우리에게 영원성을 준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그 영원성을 잠시라도 더 지탱할 힘도, 영원성의 본질을 발견할 방법도 갖지 못하게끔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비자발적인 기억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오히려 영원의 순간적인 이미지이다. 


 - 들뢰즈, 서동욱 · 이충민 옮김,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2004, 102~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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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finder 2009-10-19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돌아가야 했는데. 어느새 여름이 되어버렸어. 너희랑 함께 있는 게 너무 즐거워서... 치아키의 이 대사 정말 슬펐지요...

sotkfkd 2009-10-19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원의 순간적인 이미지 형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비자발적인 기억.
'사유' 우리들의 교묘한 고육지책? 가까스로라도 살아내려는......

love hurts 2009-10-20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들의 시간'이라는 거대한 시간의 패치워크. 흠... 그렇게 오늘 하루도 한땀한땀 초대형 패치워크가 만들어지고 있네요. 똑딱똑딱...

맨손체조 2009-10-20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살다보면 '고백'할 타이밍을 언제나 놓쳐요. 그럴때 '타임 리프'는 유용할까요??

둥이 2009-10-20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백할 타이밍을 놓쳤던 그 순간도 기억으로 놔두는건 어떨지...

to make friends 2009-10-23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백할 타이밍. 이것이 거의 모든 인간관계를 결정하는 관건이죠, 크... 친구 사이에도, 부모자식사이에도, 조직사회에서조차도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고백해야 하는 순간이 있는데, 그 순간은 어찌나 휘리릭~~ 지나가버리는지. 정말 매일 어김없이, 원치않는 타임리프를하며 살아갑니다.

doingnow 2009-11-06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코토가 흐느껴 울던 모습이 그 목소리가아직도 가슴에서 울려요 너무너무 슬펐어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질 들뢰즈  ⑧

   

8. 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 (1)

   
 

인류 역사에서 우연히 10세기 또는 20세기를 들어낸다 해도 우리가 인간 본성을 인식하는 감각적 방식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손실이 있다면 그것은 그 세기에 탄생하는 것을 봤던, 그러나 더는 볼 수 없는 예술 작품들의 손실이리라.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만든 작품에 의해서만 변화하고, 그 작품을 통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 작은 나무를 낳은 목각상처럼 작품들만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실제로 무엇인가가 일어났음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레비 스트로스, 고봉만 · 유재화 옮김, <보다 듣다 읽다>, 이매진, 2005

 
   

   마코토는 이모가 일하고 있는 박물관에서 불현듯 눈길을 잡아당기는 그림 한 점을 발견한다. “아! 이 그림……. 이모가 계속 복원하고 있던 거잖아.” 시간의 칼날로 여기 저기 긁히고 마모된 옛 그림을 복원하는 이모의 손길. 그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잃어버린 시간을 기약 없이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쓸쓸한 뒷모습을 닮았다. 아직 형태와 명암이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희미한 그림은 아스라이 멀어지는 연인의 뒷모습처럼 애잔한 정조를 뿜어낸다. 이모는 소식이 끊인 애인을 기다리는 사람의 표정으로 말한다.
    “한참 보고 있다 보면 왠지 마음이 편해져. 작가도 모르고 미술사적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도 아직은 몰라. 하지만 이 그림을 복원하면서 알아낸 게 하나 있어. 몇 백 년 전 큰 전쟁 속에서 그려진 그림이란 거. 세상이 뒤집힐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천방지축 마코토의 표정도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영문도 모르는 아련한 그리움에 물든 마코토의 골똘한 표정. 마코토는 전쟁의 포화와 시간의 침식을 견디고 간신히 살아남은 이 그림을 보며 그녀 자신이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아직 찾을 생각도 못하고 있는 시간의 그림자를 만나고 있다. 
 

   이윽고 마코토는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 그리고 자신으로 인해 시간을 잃어버릴 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타임 리프를 하기 전에는 잘 들리지 않았던,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잃어버린 시간의 속삭임을. 이모를 만난 다음 날 자원봉사부 학생들이라며 여자 후배들이 마코토를 불러세운다. “마코토 선배! 저희 자원봉사부인데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요즘 고스케 선배랑 늘 같이 계시던데요?” 마코토는 당황한다. 고스케랑 친한 것이 이 친구들과 무슨 관계가 있지? 그러고 보니 후배들의 무리 중에 유난히 한 소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다. “선배님들 사귀는 거 맞죠? 사귀시죠? 사귀는 거 맞죠?” 마코토는 어리둥절하고, 한 소녀의 얼굴은 더더욱 붉게 물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언제부터 이 친구들은 나와 고스케를 감시하고(?) 있었던 걸까.


   수줍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소녀가 드디어 고스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마치 고스케의 마음의 문을 두드려도 되느냐는 허락(?)을 마코토에게 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제가 중학생 때였어요. 저희 할머니가 계신 양로원에 쿠라노세 고등학교 자원봉사부가 왔었는데 할머니는 그 중 한 학생이 아주 맘에 드셔서 그 사람 얘기를 많이 해주셨죠. 참 착하고 멋진 남학생이라면서, 몇 번이고 칭찬을 해주셨는데. 계속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머니에게서 듣다 보니……. 본 적도 없는 그 사람이 점점 좋아졌어요.” 마코토는 영문도 모른 채 어느새 이 이름 모를 여학생의 사랑 이야기에 푹 빠져 감탄한다. “와, 정말 예쁜 이야기네.” 여학생은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와서야 알았어요. 그 사람 이름이 츠다 고스케라는 걸.” “이야,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구나!” 
   고스케는 그 여학생의 수줍은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고, 혹시 마코토와 사귀는 거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도 ‘아니’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새 보니 고스케와 마코토가 매일 단둘이 있는 장면들이 목격되는데, 정말 둘이 사귀는 거 아니냐는, 수다쟁이 소녀들의 속사포 같은 항의가 빗발친다. “분명히 고스케 선배는 마코토 선배랑 사귀는 거 아니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요즘 하는 걸 봐요. 앞뒤가 안 맞잖아요. 딱 부러지게 설명해 보세요.” 마코토는 마치 이 모든 어색한 상황이 자신의 탓이라도 되는 듯이 무한한 사명감으로 불타는 표정이 된다. “자, 잠깐 있어봐.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았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마코토는 마치 정의의 사도라도 된 양 비장한 각오로 타임 리프에 임한다. 이번에는 ‘나만의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한 소녀와 내 친구 고스케를 위한 것이니까, 좀더 멋진 타임 리프의 대의명분이라도 생긴 듯이. 마코토는 또 자신의 몸을 무작정 내던져 타임 리프를 시도한다. 그런데 우리의 마코토는 역시 그 어처구니없는 부주의함 때문에 시간에 대한 무개념을 스스로 폭로하고 만다. “고스케! 너 양로원에서 얘네 할머니를 많이 도와드렸다며? 짜식, 대단한걸!” 그녀가 기억하는 시간 속에는 존재하지만 타인이 기억하는 시간 속에서는 이미 삭제되어버린 시간 속에서 그녀는 순식간에 길을 잃어버린다. 마코토에게 ‘고백한 시간’을 깡그리 말소 당한(!) 이 소녀는 충격으로 비틀거린다. “선배가 우리 할머니를 어떻게 아세요?” “아, 그게……. 볼링장에서 만났는데…….” “우리 할머니는 거동을 전혀 못하세요!” 
    마코토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또 한 번 타임 리프를 시도하지만 이번에는 고스케에게 엉뚱한 실언을 해서 ‘그들의 시간’에 잘못 개입하는 화를 자초하고 만다. 몇 번이나 타임 리프를 헛되이 써버리고 고스케와 그 소녀 사이를 더욱 어색하게 만들어버린 마코토는 다시 한 번 타임 리프를 이용해 상황을 ‘전면 수정’하고자 마음먹는다. “아, 진짜! 더 근본적인 부분부터 시작해야겠어.” 그녀는 더 깊게 몸을 던져, 더 위험한 타임 리프를 시도한다. 아, 그런데 이번엔 너무 많이 앞으로 돌아와버렸다. 다시 그 전날 아침으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마코토는 이제 시간의 무분별한 유희를 넘어 시간의 윤리적 책임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인간은 시간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을까. 마코토가 돌아가려는 그 시간은 정말 ‘일이 잘못되기 시작한’ 바로 그 근원적인 시작일까. 마코토는 아직 시간이라는 ‘상수’와 주체라는 ‘변수’ 사이에 어떤 일관성 있는 ‘계산 가능한 함수 관계’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아닐까. 마코토가 돌아가려고 하는 그 시간으로 정확히 타임 리프에 성공하면, 정말 ‘배배꼬인 이 모든 욕망의 사슬’을 가지런히 정돈할 수 있을까. 인간의 무한한 지성을 활용하면 정말 인간은 자신들의 손아귀에 시간을 움켜쥘 수 있는 것일까. 
 

   
 

베르그송은 지성이 (마치 영사기가 돌아가기 시작할 때 이미 영화의 결말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미래를 현재 속에 말아 넣음으로써 시간과 자유를 부인했다고 비난했다. (……) 과학자들은 체험된 시간을 측정할 수 있으며, 그렇게 측정된 시간의 간격을 비교하여 변화의 법칙을 도출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틀렸다. 자신의 생을 부채처럼 펼쳐서 한눈에 다 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오류인 것처럼.
 실제 우리의 생은 시간에 있어서 매우 상이하게 펼쳐진다. 베르그송은 이를 <창조적 진화> 도입부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내가 만일 설탕물 한 잔을 준비하고 싶다면 어쨌거나 설탕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소한 사실의 중요성은 실로 엄청나다.” 내가 줄곧 기다려야 하는 그 시간은 수학적으로 측정 가능한 간격과는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간격은 측정이 이루어지기에 앞서 이미 완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내가 살아내야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체험하는 시간은 ‘나의 마음 졸임’과 합치한다.” 그 기다림이야말로 체험된 시간의 본질을 이루고 나의 자유를 보장한다. 기다림이 없다면 미래는 기지(旣知)의 것처럼 펼쳐질 수 있고 우리는 결정론에 갇히고 만다. 과학은 법칙을 발견하고 미래를 예측하고자 하지만, 인간의 경험은 시간 속에서 사건들이 불확정적으로 연쇄되어 가는 것이다.  


 - 스티븐 컨, 박성관 역,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휴머니스트, 2004, 257~2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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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hurts 2009-10-16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가 체험하는 시간은 '나의 마음 졸임'과 합치한다, 그러니까 나의 마음 졸임이 나의 시간을 결정하는 거군요!^^

sotkfkd 2009-10-17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어려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