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간의 단위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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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주로 나갈 때 가져가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우주도 우리를 변하게 할 수 없습니다.
- 조셉 캠벨, 이윤기 역, <신화의 힘>, 이끌리오, 2002, 3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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쏜살같이 달리는 시간의 뒷덜미를 슬쩍 낚아채어, ‘헤이, 그만 좀 달리고 웬만하면 쉬어 가지 그래?’라고 속삭일 것 같은 소녀. 등교시간의 압박과 알람시계의 난리법석만 없다면,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과 도란도란 수다를 떨고, 눈길을 끄는 모든 장소마다 기꺼이 멈춰 요리조리 두리번거릴 것만 같은, 지구를 몇 바퀴 돌고도 남을 오지랖을 펄럭이는 명랑 소녀 마코토.
‘차라리 지각을 하는 게 낫겠다!’라는 친구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어김없이 달콤한 늦잠을 자고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누르며 빛의 속도로 자전거 페달을 밟아대는 소녀.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시간을 달린다’라는 표현보다는 ‘시간을 깜빡 잊고 띄엄띄엄 건너뛰는 소녀’, 걸핏하면 시간을 망각하기에 그 어떤 시간의 광풍에도 휘둘리지 않는 소녀의 이야기다.
영화가 시작되는 즈음 마코토가 시간의 흐름에 짓눌리지 않는 이유는 그녀가 시간의 ‘교환가치’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소녀 마코토는 ‘타임 리프’라는 엄청난 능력을 갖게 되고 나서도 그 능력을 좀처럼 ‘유용한’ 곳에 쓰지 않는다. 약삭빠른 어른들이라면 주식투자나 로또 당첨이나 경매나 도박 같은 ‘환금성 높은’ 일에 타임 리프 능력을 썼을지도 모른다. 이런 엄청난 초능력이 생긴다면 아마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뭔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타임 리프 능력이 생긴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설문조사는 ‘당신이 투명인간이 된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설문조사와 비슷한 결과를 낳지 않을까. ‘한정된 시간’과 ‘한정된 육체’야 말로 인간 스스로 느끼는 자신의 명백한 한계이니까. 천하의 보들레르도 ‘시간의 인식’ 앞에서는 맥을 못 추었다. 황홀한 망상에 빠짐으로써 시, 분, 초로 환원되는 기계적 시간의 압박에서 벗어났던 보들레르. 그는 ‘시간’을 떠올리는 순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몽상에 물들어 향기와 빛으로 가득했던 자신의 방이 ‘악몽의 방’으로 바뀌어버리는 환상을 체험한다. 기계적 시간, 진보적 시간, 직선적 시간이야말로 시인의 소중한 뮤즈를 앗아가는 ‘폭군의 무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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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렇군! 시간이 다시 나타났다. 시간은 이제 폭군으로 등장했다. 이 무서운 늙은이, 시간과 함께 추억, 회한, 공포, 고통, 악몽, 분노, 신경증 등 모든 시간의 악마적 행렬이 돌아온 것이다.
(…) 한 초 한 초가 시계추에서 솟아나면서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나는 삶이다. 견디기 힘든, 요지부동의 삶!
(…) 그렇다! 시간이 지배한다. 시간이 그의 난폭한 독재권을 다시 찾은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마치 황소를 부리듯 그의 두 개의 바늘로 나를 채찍질하며 ‘자, 바보야 소리를 질러! 노예놈아, 땀을 흘려! 저주받은 자야, 살아라!’하고 나를 재촉한다.
- 보들레르, 윤영애 역, <파리의 우울>, 민음사, 1995, 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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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리퍼(time leaper)와 투명인간은 ‘주체의 책임’을 삭제함으로써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신의 전지전능함을 떠올리게 한다. 타임 리프나 투명인간 되기는 신의 권능을 훔치는 일처럼 짜릿하면서도 은밀한 쾌감들을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엄청난 모범생도 아닌, 언뜻 보면 그저 평범한 소녀인 마코토는 이 눈부신 초능력을 다소 엉뚱한 곳에 사용한다. 노래방 시간을 연장하거나 동생이 푸딩을 꿀꺽 집어삼키기 이전으로 돌아가기 같은, ‘정말 시답잖은, 하등 중요하지 않은’ 일에 말이다.
그러나 이 대단한 능력을 이토록 하찮은 일에 써먹는 소녀의 천진함이야말로 이 소녀에게 ‘타임 리프’라는 위대한 능력이 주어질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는 요소가 아닐까. 그녀는 이토록 사소한 일에서 무한한 희열을 느낄 줄 아는 무구한 영혼을 지닌 소녀다. 그녀는 시간을 쥐락펴락하여 시간을 지배하고, 시간에 쫓기는 인간을 지배할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상천외한 능력을 엉뚱한 일에 사용함으로써 ‘심각한 미션’을 ‘우스꽝스러운 놀이’로 역전시킨다.
그녀에게 타임 리프는 시간을 권력으로 사용하는 ‘지배의 기술’이 아니라 시간을 찰흙처럼 주무르고 구부려 저글링을 하는 듯한 ‘놀이의 기술’이다. 이 모든 좌충우돌 속에서 그녀는 디지털시계처럼 순서대로 어김없이 정확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뒤집어 ‘권태의 시간’을 ‘사랑의 시간’으로 탈바꿈시키는 기적의 연출자가 된다.
이제 치명적인 사이렌의 노래를 듣지 않기 위해 귀를 틀어막아버린 소심남 오디세우스가 아니라, 지상의 모든 소리에 귀 기울이느라 언제나 좌충우돌 사고를 치는, 너무도 불안하지만 지극히 사랑스러운 한 소녀의 신개념 오디세이가 시작된다. 그녀는 바뀌어버린 시간의 의미 때문에 수동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하면 시간도 변할 수 있다’는 기적을 요리하는, 경이로운 ‘시간의 탈주자’가 된다. 이 멋진 시간 여행의 동반자는 바로 질 들뢰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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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최종 목적으로서, 탈영토화 된 리토르넬로를 생산하고 그것을 우주 안에 풀어놓는 것, 그것은 새로운 체계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우주적 힘을 향해 배치를 개방하라. 하나의 배치에서 다른 배치로, 소리의 배치에서 음향화 하는 기계로. 음악가의 어린이-되기에서 어린이의 우주적으로-되기.
―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이진경 · 권혜원 외 역, <천의 고원> 2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자료실, 2000, 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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