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⑦

 

7. 모든 참고문헌을 찢어버린 인간의 고독 (2)

   
 

나는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정신의학 외에는 다른 목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전격적으로 계시처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내과 교수에게 그 결정을 알렸을 때 그의 얼굴에서 실망과 놀라움의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내 옛날의 상처, 즉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서 소외되는 느낌이 아프게 되살아났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유를 한층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이런 동떨어진 세계에 흥미를 느끼리라고는 그 누구도, 아니 나 자신까지도 상상하지 못했다. 친구들은 놀라고 의아해하며 나를 바보로 여겼다. 내가 내과의사로서 출세할 기회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정신의학 같은 하찮은 것과 바꿔버리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회는 누구나 당연히 잡으려고 하며 나에게도 무척 유혹적이었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2, 210~11쪽.

 
   

   그 무렵 의학계에서 정신의학은 철저히 버려진 황무지였다. 병원 원장이 환자들과 함께 같은 건물에 ‘갇혀(?)’ 있어야만 했으며, 정신병원은 나환자 수용소처럼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격리되어 있었다. 의사들도 일반인들처럼 정신의학을 기피했다. 정신병에 드리워진 절망적이고 치명적인 그림자가 정신의학에도 드리워져 있었다. 

   융은 내과의사로서 탄탄대로가 보장되어 있던 상황에서 ‘암흑의 땅’이었던 정신의학으로 발길을 돌렸다. 스스로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이 결정이 갑자기 내려진 계기는, 한 정신의학 교과서 때문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당시 ‘정신의학의 주관성과 불확실성’이 정신질환 자체가 ‘인격의 질병’으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융은 ‘인격의 질병’이라는 언뜻 평범해 보이는 말에서 자신의 두 가지 거대한 관심이 맹렬하게 하나의 흐름으로 합쳐지는, 가눌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그는 그동안 사방팔방 헤맸지만 찾지 못했던, ‘생물학적 사실과 정신적 사실에 관한 공동 경험의 장’이 형성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융은 정신의학이 ‘자연’과 ‘정신’의 충돌이 ‘실제 사건’이 되는 결정적인 분야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겉으로는 제1의 인격으로 ‘자연과학’을 연구하던 자신의 일상적 자아, 그리고 제1의 인격으로 완전히 통합되지 못한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격렬한 탐구열(제2의 인격)을 통합할 수 있는 학문적 장이 바로 정신의학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때까지 융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는 것조차 부끄러워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고, 가난한 부모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의사의 길을 선택했다. 융은 자신의 제2의 인격이 관심을 갖는 ‘무의식’의 영역이 매우 ‘비실용적’인 분야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며, 제1의 인격의 활동 영역, 즉 내과의사로서의 길에 만족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정신의학이 ‘인격의 질병’을 다룬다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이 문장에서 융이 ‘계시’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오랫동안 홀로 고민해왔던 문제가 아주 작은 계기에도 엄청난 폭발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인격’이라는 인문학적 시선과 ‘질병’이라는 자연과학의 시선이 융에게 있어서는 제2의 인격과 제1의 인격을 표상하는 대리물로 체험되었던 것이 아닐까. 즉 그는 자기 인격의 분열을 오랫동안 감지하고 있었고 그 분열의 원인을 무의식에서 찾았기 때문에 미세한 자극에도 곧바로 폭발해버릴, 욕망의 임계점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융의 자서전을 휘감는 분위기는 바로 이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자아로 분열되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 아마 융과 내쉬의 결정적인 차이도 이 부근에서 발원할 것이다. 내쉬의 분열이 무의식과 의식의 단절로 인해 심화된 것이라면 융의 분열은 자신의 분열을 ‘정상성’의 일부로 인정했다. 융은 무의식의 잠재성을 최대한 의식의 활동으로 끌어올리려 했으며, 의식의 시선으로 무의식의 활동을 최대한 가까이서 관찰하려 하는 태도가 정신의학의 시선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아까지도 나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일찍부터 받아들인 융의 경우는 오히려 자기 내부의 분열을 즐겼다. 그가 자신의 인생을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로 규정한 까닭도 무의식의 자기실현 과정을 ‘의식’의 프리즘으로 생생히 복원해내는 것을 필생의 과제로 삼은 까닭이었다. 내쉬가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와 ‘필요 없는 정보’로 두뇌  활동을 철저히 구별하면서 의식의 ‘체’에 걸러지지 않은 잔여물을 관찰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했다면, 융은 ‘체’를 치는 행위 자체가 의식의 활동임을, 우리는 매 순간 의식의 검열로 무의식의 활동을 철저히 감시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융은 의식의 ‘체’에서 떨어진 고운 밀가루뿐 아니라 체를 빠져나가지 못한, 즉 의식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자신의 버려진 무의식을 ‘꿈’에서 찾으려 했다. 그리하여 그것이 ‘나만의 비정상성’이 아니라 ‘인류의 집단 무의식’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으로까지 스스로의 이론을 밀어붙였다. 

   내쉬에게 정신분열이 무의식으로부터 도피하려 했던 천재의 자기파멸적 결과였다면, 융은 자신의 분열조차 ‘정상성’의 징후로 판독하면서 그 분열의 힘을 오히려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긍정적 성과물로 이해하려 노력했다. 즉 융은 무의식의 ‘어두운 부분’까지도, 무의식에 ‘가장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까지도, 자신의 일부로 기꺼이 인정함으로써 무의식의 각종 공격으로부터 일종의 심리적 항체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런 생각은 환자들을 돌보면서 더욱 정교하게 이론화되었다. 그에게 환자들은 ‘정상인과 뭔가 다른 비정상인’이 아니라 정상인의 비정상성과 비정상인의 정상성을 역설적으로 확인케 해주는 ‘우리 안의 타자’였다.
    정상인이 자신의 비정상성을 최대한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게 방어하는 것에 비해 ‘비정상인’으로 분류되는 정신질환자들은 오히려 비정상 가운데 내재한 정상성을 보여주는 거울이었던 것이다. 융은 환자들의 각종 증상을 인류의 ‘정상성’의 발현 결과로 보았기 때문에 환자들로부터 항상 ‘인류의 무의식’에 관한 지혜를 배울 수 있었다. 융은 인류의 역사와 신화 연구를 통해 정신 분열의 징후를 ‘집단적 신화’의 차원에서 해석하여 ‘통시적 보편성’을 발견해내려 했고, 현실 속에서는 임상 경험과 사례를 통해 ‘공시적 보편성’을 발견해 가고 있었다.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 등 융의 핵심적인 개념도 이러한 종횡무진의 사례 분석에서 나온 열매였다.
    융은 정신병에서 미지의 섬뜩한 무엇, 새롭고 특이한 무언가를 본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존재의 바탕을 발견했다. 융은 자기 자신을 질병의 ‘판단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질병을 판단하는 순간 그는 의사의 권위를 덧씌워 환자의 질병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융은 환자가 연출하고 있는 무의식의 연극 속에서 그 자신을 한 명의 배우로 참여시키고자 노력했다. 모두가 무의식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거나 무의식의 ‘추악함’과 마주하지 않으려고 할 때, 융은 환자들의 총천연색 ‘망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보았다. 융에게 무의식은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예술작품이었다. 


   
 

어떤 환자는 제수이트에게 박해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다른 환자는 유대인이 자기를 독살하려 한다고 믿고 있으며, 제3의 환자는 경관이 자기를 뒤쫓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사람들은 환상의 내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낳고 이를테면 그냥 일반적으로 ‘피해망상’이라는 식으로 말해버렸다. (……) 프로이트가 1909년 취리히로 나를 방문했을 때 나는 바베트의 사례를 그에게 제시했다. 나중에 그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이토록 추한 여성과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함께 지내는 일을 참아낼 수가 있었단 말이오?” 나는 좀 멍해져서 프로이트를 바라보았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생각은 결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그런 아름다운 망상을 가지고 그토록 재미있는 일들을 이야기해주었으므로, 나는 그녀를 어떤 의미에서는 친구 같은 노파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녀의 괴기한 헛소리의 혼돈 속에서도 인간적인 모습이 나타났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2, 242~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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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ERAIN 2009-09-30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무의식이 가장 아름다운 예술작품이었다니, 죽은 융과 한 번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집니다.^^ 나의 무의식도 그에게 아름다운 망상의 패턴으로 느껴질까요? ㅋㅋ
 

 


영화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⑥

 

6. 모든 참고문헌을 찢어버린 인간의 고독 (1)

   
 

사회적 비교에 의해 우리는 다른 사람을 헐뜯고, 그들의 성공을 방해하며,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보다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진정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자기 방어를 위해 취한 행동은 대부분 원래 의도와는 반대로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 (……) 사회적 비교 기준을 낮춤으로써 자신을 방어하려는 행동은 앞으로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상호작용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 앨렌 랭어, 이모영 역, <예술가가 되려면>, 학지사, 2008, 244~5쪽. 

 
   

    존 내쉬의 MIT 재직 시절, 칠판에는 이런 낙서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오늘은 존 내쉬를 미워하는 날!” 존 내쉬는 학생들에게 일부러 어려운 문제를 출제하고 ‘나 몰라라’한다는 소문에 휩싸였고, ‘좋은 스승’으로서의 자격을 의심받았다. 그의 수업은 바람직한 교육이라기보다는 도박성 짙은 게임에 가까웠다고 한다. 내쉬는 스티븐슨과 이이젠하워의 대통령 선거전을 놓고 학생들과 ‘내기’를 했는데 결국 선거에서 누가 승리해도 자신이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을 고안하여 학생들을 골탕먹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정하고 친절한 교사만이 좋은 스승은 아니었다. 괴짜 스승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학생들이 많아 수강생 수는 날로 줄어들었지만 내쉬의 존재 자체가 학생들에게 빛나는 영감을 선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MIT 신입생 시절 존에게 수학을 배웠던 하버드 대학교수 배리 마주르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가 들려준 수학 이야기는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런 얘기를 듣고 있을 때면 시간이 영원히 멈춘 듯 느껴졌지요.” 

   
 

해결되지 않은 고전적인 문제를 출제하는 것도 내쉬가 즐겨 사용한 수법이었다. 로버트 오만은 이렇게 회상했다. “학생들에게 π가 무리수임을 증명하라는 문제가 출제되었어요. 그건 결국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라는 것과 같았습니다. 나중에 학과장에서 질책을 당한 내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어려운 문제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게 문제인 것 같다. 어쩌면, 그 문제가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지 않다면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실비아 네이사, <뷰티풀 마인드>, 승산, 2002, 255쪽. 

 
   

    ‘풀 수 있는 것’과 ‘풀 수 없는 것’을 나누는 사고의 경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다면, 평범한 사람들도 미해결 난제에 도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교사로서의 자질’을 의심받을 때마다 존이 내세운 변명은 그런 논리였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내쉬 자신을 향한 메시지였다. 그는 ‘난제’가 발견될 때마다 도서관으로 달려가 참고문헌부터 뒤지는 보통 연구자들과는 달랐다. 그는 어떤 위대한 참고문헌보다 자신의 두뇌를 믿었다. 그는 모두가 포기했다는 소문이 파다한 난제와 만날 때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그 문제에 매달리는 뚝심으로 유명했다. 그는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놀라운 사람’임에는 분명했다.
    내쉬는 스스로의 업적을 유치하게 자랑하는 것을 좋아했고, 주변 사람들을 대놓고 깔보곤 했지만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사람들은 그의 괴팍한 성격을 눈감아주었다. 그의 동료 도널드 스펜서는 내쉬가 신변 잡담을 전혀 하지 않는 것, 어떤 순간에도 칭얼거리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스스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내쉬는 어떤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연구 테마는 누가 정해준 주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남이 주제를 정해준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불가능합니다. 그는 더없이 독창적이었어요.”

   내쉬가 문제를 발견하는 수단은 바로 ‘적들’을 통해서였다. 그에게는 자신의 천재성에 도전하는 모든 사람들이 적이었으므로 주로 ‘친밀한 적’은 그의 동료들이었다. 프린스턴에서 공부하고 MIT에서 재직하던 동안 만났던 수많은 천재 소년들, 랜드 코퍼레이션에서 일하는 동안 만났던 수많은 동료들은 각각 그들의 고향에서는 유일무이한 천재들이었다. 적의 존재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받았던 존 내쉬는 자신을 자극하는 동료를 만날 때마다 더욱 ‘업그레이드’되는 스타일이었다. 수없이 동료들과 불화하고 유치찬란한 말싸움과 도를 넘는 경쟁으로 말썽을 일으킨 내쉬. 그러나 바로 그 떠들썩한 경쟁과 쓸데없는 말다툼이야말로 존 내쉬의 ‘자가 학습 장치’였다.
    “자네가 그토록 우수하다면, 다양체 매장 문제를 직접 풀어보지 그래?”라는 동료 앰브로스의 비난 섞인 야유와 농담은 내쉬의 승부 근성을 자극했다. 내쉬 못지않게 경쟁심이 강했던 동료 앰브로스와의 유치한 ‘내기’ 덕분에, 리만이 제기한 이래 풀리지 않고 있던 악명 높은 문제를, 누구도 20대의 풋내기 수학 강사가 풀 것이라는 예상치 못했던 문제를, 내쉬는 풀어버리기도 했다.

   해답의 발견보다 문제의 발견이 중요한 순간들이 있다. 제도 교육은 학생들에게 ‘주어진 문제를 풀라’고 가르치지 ‘네가 중요하다고 믿는 문제를 내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역사의 물꼬를 비틀어 역사의 물길 자체를 바꾼 사람들의 공통점, 그것은 바로 ‘문제 자체를 창조하는 능력’이었다. 주어진 문제를 빠른 시간 안에 풀어내는 ‘영재들’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일견 매우 단순해 보이는 문제를 가지고 사유의 극한까지 스스로를 몰아쳐가는 천재들의 공통점은 문제의 가치를 뒤바꿔버리거나(중요하지 않았던 문제를 중요하게 만들기), 아니면 문제 자체를 창조해낸다는 것이다. 또한 문제를 발견하는 능력은 한 개인의 인생을 쥐락펴락하는 결정적 사안이기도 하다.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바칠 화두를 발견하는 순간이야말로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존 내쉬에게 노벨상을 안겨주었던 논문은 그가 겨우 스물두 살 때 작성한 27페이지짜리 짧은 박사논문이었다. 처음에 내쉬 균형(nash equilibrium)의 아이디어는 너무 단순해서 학자들의 눈에 전혀 흥미로워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너무 협소한 테마라 광범위한 분야에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이 이론의 가치는 너무 명백해서 내쉬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내쉬 균형의 엄청난 영향을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날 전략적 게임과 관련된 내쉬 균형 개념은 사회과학뿐 아니라 생물학에서조차 기본적인 패러다임이 되었다. <뉴 팔그레이브>는 내쉬 이론의 가치를 이렇게 묘사한다. “내쉬 균형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는 주제를 논하는 아주 강력하고 우아한 방법이다. 뉴턴의 천체 역학이 고대인들의 원시적이고 임시적인 방법들을 일거에 대체했던 것에 비견된다.”
    내쉬 이론의 진정한 가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것은 그가 30년 이상의 정신분열을 앓고 난 이후, 1990년대가 되어서였다. 내쉬의 노벨상 수상은 한 개인의 ‘인간승리’라기보다는 사회 전체의 ‘기다림’의 승리이기도 했다. 내쉬가 일했던 랜드 코퍼레이션의 경영  관리자였던 존 윌리엄스는 이 ‘기다림의 미학’을 알고 있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수학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한한 자유’임을 알고 있었고 그 무한한 자유를 위해 필요한 24시간 건물 개방권과 칠판과 커피를 수학자들에게 ‘무한 리필’로 제공함으로써 ‘자유’를 ‘물질화’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윌리엄스는 당시 미국 최고의 수학자였던 폰 노이만에게 거액의 수임료를 제시하면서 이런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우리가 조직 차원에서 부탁드리고자 하는 것은, 귀하의 많은 생각 가운데 그저 면도를 하시며 흘려보내는 것들만 건네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하시다가 혹시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으시면 그것을 우리에게 넘겨주시면 됩니다.”

  

   
 

윌리엄스는 수학자들에게 시간의 자유를 주었고, 다음에는 커피와 칠판을 제공했다. 그런 것이 없으면, 아무런 가치 있는 것도 생산해내지 못할 거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 그는 한발 더 나아갔다. 그는 오전 여덟시에서 오후 다섯 시까지만이 아니라 24시간 랜드 건물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수학자들에게 개인 사무실 건물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수학자들에게 개인사무실을 제공했다. 복도에는 여러 곳에 커피대를 마련해 24시간 관리인을 붙여 놓았다. 왜 수학자들에게 그토록 자유를 주어야 하는지 의아해하는 엔지니어와 미 공군 장성을 이해시킨 것도 그였다. 


 - 실비아 네이사, <뷰티풀 마인드>, 204~205쪽. 

 
   

   인생 전체를 배팅할 만한 문제를 발견하는 천재 자신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의 문제풀이를 채근하지 않고 어떤 압력도 가하지 않으며 다만 무조건 ‘기다리는’ 주변의 노력 또한 중요하다. 빨리빨리 연구 결과를 내놓으라고 재촉하는 분위기 속에서는 결코 ‘향기 나는 아이디어의 전쟁’이 탄생할 수 없다. 이 문제가 정말 중요한지 그렇지 않은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문제가 어쩌면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연구결과가 ‘실용화’될 수 있다는 보장도 전혀 없다. 영원히 정답이 나오지 않을지라도, 혹시 도중에 그 문제를 풀던 사람이 죽더라도, 그 문제에 도전하는 일 자체가 소중한 일이라는 것. 그것을 깨달은 ‘친구들’이 있을 때 천재의 ‘면벽 수행’도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존 내쉬는 그런 희귀한 행운을 거머쥔 몇 안 되는 천재였다. 인류의 미래를 바꾼 획기적인 발명들은 대부분 ‘위대한 사람들의 비관적인 예측’을 벗어나는, 아이디어 제출시한도 마감시한도 없는 ‘기다림’의 역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인간은 달에 가지 못할 것이다.
 - 리 디 포레스트 박사, 진공관 발명자(1957)
  

인간이 원자력을 이용하게 될 가능성은 없다.
 - 로버트 밀리컨,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1923)
 

 컴퓨터는 전 세계를 통틀어 다섯 대 정도 팔릴 것이다.
 - 토머스 왓슨, IBM 설립자(1943)
 

 개인이 가정에 컴퓨터를 놓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 케네스 올센, 디지털 이큅먼트사 설립자 겸 회장(1977)
 

 비행기는 재미있는 장난감이지만 군사적 가치는 전혀 없다.
 - 페르디낭 포쉬 장군, 프랑스 군사 전문가, 제 1차 세계대전 사령관(1911)
 

 6개월 후 텔레비전은 시장에서 사라질 것이다. 사람들은 곧 매일 밤 합판으로 만든 상자를 들여다보는 것에 싫증날 것이다.                   - 대릴 F. 자눅, 20세기 폭스사 회장(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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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green 2009-09-28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위대한 사람들의 빗나간 예언들 시리즈, 정말 의외의 발언들로 가득하네요 ㅋㅋ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당시에는 얼마나 불가능한 것들 투성이였는지.

맨손체조 2009-09-28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제는 한물 간 록큰롤 스타일이군!!!" 비틀즈가 오디션에서 탈락한 후 음반기획자들에게 들었던 말들 중 하나^^*
 

 


영화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⑤

 

5. 아곤 : 천재들은 ‘좋은 전쟁’ 속에서 태어난다 (2)

   
 

프로이트와 결별하게 된 후 나의 모든 친구나 친지들은 나를 떠나갔다. 사람들은 나의 책을 쓰레기라고 대놓고 말했다. 나는 신비주의자로 간주되었고, 이것으로 사태는 끝장을 보게 되었다. (……) 그러나 나는 고독해질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소위 친구들의 반응에 대해서도 어떤 환상을 가지지 않았다. (……) 나는 여기에 모든 것이 걸려 있다는 것과 나의 확신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희생’ 장이 나 자신의 희생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310쪽.

 
   

    융은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1900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처음 만났다. 그는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 당시에는 그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 저 멀리 제쳐두었다고. 스물다섯에 프로이트의 이론을 검증하기에는 자신의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다고. 그는 단지 머릿속으로 이해하는 책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검증할 수 있는 이론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1903년 그는 다시 한 번 <꿈의 해석>에 도전한다. 그제야 그 책이 자신의 생각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발견한다. 

   3년 동안 이미 그는 프로이트와 ‘논쟁을 벌일 수 있는’ 차원까지 비상하고 있었다. 그는 환자가 어떤 자극어에 대해서는 연상되는 단어를 전혀 떠올리지 못하거나 반응 시간이 무척 길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그러한 연상 장애는 자극어가 정신적 상처나 갈등을 건드릴 때마다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이런 상황에 적극적으로 적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억압의 원인’에 있어 20대의 융과 50대 후반의 프로이트 생각은 달랐다.

   
 

그는 억압의 원인을 성적 외상(Trauma)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나로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나의 치료 과정에서는 신경증의 많은 사례에서 성욕의 문제는 다만 부차적인 역할을 할 뿐이고 다른 요인들이 주요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사회적응, 비극적인 삶의 정황으로 인한 억압, 체면 차리기 등의 문제들이었다. 나중에 나는 그러한 사례들을 프로이트에게 제시했으나, 그는 성욕 외의 다른 요인들은 원인으로 여기려 하지 않았다. 그 점이 나로서는 자못 불만스러웠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276~7쪽.

 
   

     ‘성(性)’에 대한 시각 차이 이전에 프로이트와 융의 우정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장벽이 있었다. 융이 프로이트 이론에 한창 매력을 느낄 무렵 융은 대학에서 승진하기 위한 논문 완성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프로이트는 학자들의 세계에서 ‘달갑지 않은’ 인물이었기에 프로이트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학문적 명성을 얻는 데 확실히 불리한 일이었다. 학술회의에서 프로이트 이론은 ‘복도’에서만 낮은 목소리로 거론될 뿐 전체 회의에서는 한 번도 논의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융의 실험은 프로이트의 이론과 분명히 일치하고 있었다. 융은 자신에게 ‘악마의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고 고백한다. 내 실험 결과를 발표하면서 꼭 프로이트의 언급을 할 필요는 없잖아! ‘아무튼’ 나는 프로이트를 알기 훨씬 전부터 나만의 실험을 해왔는걸. 그런데 그 순간, 융은 ‘제2의 인격’의 목소리를 듣는다. 네가 그렇게 프로이트에게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것처럼 행세한다면, 그건 일종의 사기다! 인생이라는 건축물을 거짓 지반 위에 세울 수는 없다. 그때부터 융은 공공연히 프로이트 편에 서서 그를 위해 싸웠다.  

   그러나 진정한 갈등은 프로이트와 융 사이에서 일어났다. 프로이트와 융은 열띤 토론을 나누며 열정적으로 ‘아곤의 공동체’를 이루었지만, ‘성욕’이라는 문제 앞에만 서면 융은 프로이트의 허둥대는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성에 관해 말할 때 프로이트의 어조는 갑자기 빨라지고 초조해지며 평상시의 신중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잃어버렸다. 융과 프로이트의 우정에 결정적으로 금이 가게 한 충격적인 발언은 프로이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고 한다.    

   
 

지금도 나는 프로이트가 다음과 같이 말하던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친애하는 융, 성 이론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나에게 약속하십시오. 그것은 가장 본질적인 것입니다. 보시오, 우리는 성 이론을 가지고 하나의 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보루(堡壘) 같은 것 말입니다.” 그는 열정에 넘쳐서 말했는데, 그 말투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아,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겠다고 아버지에게 약속해다오!”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81쪽.

 
   

   융은 ‘보루’나 ‘교리’ 같은 단어에서 프로이트의 격렬한 불안을 읽어낸다. 교리란 ‘토론’을 거부하는 절대적인 진리를 원하는 사람들, 인간의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갖가지 의심을 단번에 짓밟아버리고 싶은 사람들이 내세우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격렬한 토론과 의심과 비판과 질문으로 우정을 쌓아올리고 있었던 두 사람의 ‘아곤(agon)’에 직격탄을 날리는 것이었다. ‘성 이론’이라는 하나의 절대적인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되고자 한 권력의 충동이었기 때문이다.

   항상 비종교성을 강조해온 프로이트가 ‘교리’를 내세운다는 것은 융에게 있어 충격적인 일탈이었다. 프로이트가 잃어버린 ‘질투하는 신’ 대신에 ‘성적 리비도(libido)’가 또 하나의 ‘숨은 신’으로 대체된 느낌이었다. 그 후 프로이트는 자신의 후계자를 융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 걸출한 제자의 든든한 후원을 받아 위대한 아버지로 등극하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 못했다. 한편, 융은 자신이 그 위대한 후계자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하면서 자신의 지적 독립성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융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거역해야 한다는 고통과 싸우면서 아직 자신이 프로이트에 대항할 만한 이론적 근거를 갖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융은 친구이자 선배이자 아버지였던 프로이트와 갈등하고 그를 넘어섬으로써 조금씩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해나가기 시작한다.

   
 

프로이트와 요제프 브로이어는 신경증의 증상들-히스테리, 통증의 어떤 유형들, 비정상적 행동-이 사실상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런 증상들은 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인 정신이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예를 들면, 참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어떤 환자는 침을 삼키려고 할 때마다 경련을 일으킬 수도 있다. 환자는 “그 상황을 삼킬 수 없는” 것이다. 비슷한 심리적 스트레스의 상태에서 두번째 환자는 천식 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는 “공기를 편하게 숨 쉴 수 없는” 것이다. 세번째 환자는 특이한 다리 마비를 경험할 수도 있다. 그는 걸을 수 없다, 즉 “그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것이다. 네번째 환자는 먹을 때 토한다. 어떤 불쾌한 사실을 “소화할 수 없는” 것이다.  


 - 칼 융, 정영목 역, <사람과 상징>, 까치, 1997, 23쪽.

 
   


   우리가 친밀하고 소중했던 누군가와 헤어지는 대부분의 이유는 사실 여기서 비롯된다. 상대방의 어떤 결정적인 부분을 ‘삼킬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신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을 상대방이 건드렸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이 거대한 가시처럼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우리는 상대방과 나와의 ‘차이’를 삼키지 못하고, 그 차이를 천천히 소화시켜 관계의 새로운 차원으로까지 비약하지 못하고, 힘겹게 그 관계를 끝내버리고 만다. 프로이트는 융의 도발적인 문제 제기를 용납할 수 없었다. 아마 융과 프로이트가 이런 부분에서 서로를 ‘삼킬 수’ 있었다면, 인류는 정신분석의 또 다른 신세계가 열리는 역사의 진풍경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면 ‘잘난 척’이라고 생각하는 친구들 때문에 아무와도 진정한 친구가 되기 어려웠던 융. 그는 아무런 임상 경력도 없는 상태에서 온 힘을 다해 환자들을 치료하고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비로소 친구 아닌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 융은 그들의 상처와 환각과 고통을 통해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무의식을 천천히 발굴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환자들과 함께 20세기의 새로운 아곤을, 칼 구스타프 융이 주최하는 아름다운 ‘아테네 학당’을 만들 수 있게 된다.  

           ▲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09~1510.
   젊은 시절 존 내쉬는 자신이 늘 친구들에게 배우고 있음을 의식적으로 자각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견디고 있는 외로움보다 훨씬 더 격심한 외로움을 느꼈다. 그러나 융은 자신이 늘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는 존재임을 좀더 일찍 깨달았다. 그는 자신과 심각한 불화를 일으키는 모든 존재로부터 가르침을 얻었다. 그에게 프로이트 못지않게 소중한 스승은 바로 그의 ‘기이한’ 환자들이었다.

   
 

한번은 (……) 고용인들의 뺨을 때리는 습관이 있는 명문 귀족 부인이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강박신경증에 걸려 어느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습관대로 수석 의사의 뺨을 갈겼다. 그녀의 눈에는 수석 의사도 단지 조금 나은 하인 정도로 보였다. (……) 의사가 좀 당황한 가운데 그녀를 나에게 보냈다. 그녀는 키가 약 180센티미터나 되는 아주 위풍당당한 인물로, 정말이지 누구를 때릴 만도 했다! 그녀가 드디어 나타났고 우리는 무척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내가 그녀에게 좀 불쾌한 내용을 말해야만 하는 순간이 왔다. 그녀가 격분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때리려고 위협했다. 나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당신은 귀부인입니다. 당신이 먼저 때리십시오. 레이디 퍼스트 아닙니까! 하지만 그 다음에는 내가 당신을 때릴 겁니다.” 나는 정말 그대로 할 참이었다. 그녀는 도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가 탄식하듯 말했다. “여태껏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 순간부터 치료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환자에게 필요했던 것은 남성적인 반응이었다. (……) 그녀는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제약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강박신경증에 걸린 것이었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26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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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 2009-09-25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흠, 스스로도 좋은 전쟁을 만들 수 있는 거군요. 전 편 읽으면서 좋은 전쟁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있었다는 것이 부러웠는데...

sotkfkd 2009-09-25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곤!

신오리 2009-09-28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 마음 속의 아테네 학당을 세우는 것이 저마다의 향기로운 전쟁을 위한 포석이 되겠네요. 에효...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
 

 


영화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④

 

4. 아곤 : 천재들은 ‘좋은 전쟁’ 속에서 태어난다 (1)

   
 

흔히 천재들은 외로운 거인으로 나타나지 않고, 특정 도시 특정 분야에서 무리지어 나타난다. 왜 그러한가에 대해 처음으로 이론을 제기한 사람은 로마 철학자 발레이우스이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아르키메데스, 아이스킬로스, 유리피데스, 소포클레스, 아리스토파네스 등을 염두에 두었지만, 뉴턴과 로크, 프로이트, 융, 아들러 등 후대에도 그런 사례는 많다. 창조적 천재들은 젊은이들에게 경쟁심과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고, 자극을 받은 잠재적 천재들은 앞선 천재들의 아이디어를 수정하고 완성하려 든다고 발레이우스는 추측했다. 


 - 실비아 네이사, <뷰티풀 마인드>, 승산, 2002, 170쪽. 

 
   

   영화 <뷰티풀 마인드>는 존 내쉬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좀더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하기 위해 추리적인 기법을 쓴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 찰스(폴 베타니), 그에게 비밀 임무를 맡기는 강력한 감시자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 윌리엄 파처(에드 헤리스), 찰스의 귀여운 조카로 타인에게 애정을 품을 줄 모르는 내쉬가 유일하게 사랑을 쏟은 소녀 마시(비비안 카돈). 이 모두가 그의 정신분열 증상 속에서 만들어진 환상 속의 존재로 밝혀지는 극적 구성을 택한 것이다.


   아내를 제외하고 존 내쉬의 일상을 지배하는 중요한 인물들은 모두 ‘환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충격적인 설정은 <뷰티풀 마인드>의 핵심적인 서사 전략이다. 게다가 환상 속의 인물들이 펼치는 연기가 어찌나 리얼한지, 이미 이 환상속의 인물들에게 ‘정이 들어버린’ 관객들은 환상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도 절실한 그들의 목소리와 표정에 압도당하게 된다.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기에 그들은 더욱 닿을 수 없는 애절한 욕망의 대상이 된다.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기엔 그들은 너무 강력하고(파처), 더없이 다정하며(찰스), 지나치게 사랑스럽다(마시). 영화 속에서 존 내쉬가 가장 끊어내기 힘들었던 환상은 베스트 프렌드인 찰스의 환상이었다. 그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환각을 인정하고 난 이후에도 그에게 필요한 것은 냉철한 의사보다는 그리운 친구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의 천재성을 질투하지 않고 그의 안부를 진심으로 걱정해 준 친구는 찰스뿐이었다.

   영화 속에서 존 내쉬는 찰스를 제외하고는 거의 친구가 없는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실제로 그의 아이디어 생산에 도움을 주었던 크고 작은 계기들을 만들어준 것은 그의 친구들이었다. 게일은 아무런 대가 없이 내쉬의 대리인 노릇을 하며 그의 이론이 훌륭하다고 거듭 칭찬해 주었고, 내쉬가 거의 짝사랑에 가깝게 좋아했던 로이드 셰이플리는 애정에 굶주려 있던 내쉬의 모든 스토커 행동과 짓궂은 장난질까지 받아주었다. 존 내쉬는 따돌림이나 거절을 천재의 대가로 생각하면서도 언제나 외로운 자신의 영혼을 쓰다듬어줄 친구를 필요로 했다.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그가 모두의 철저한 따돌림을 받은 오갈 데 없는 외톨이만은 아니었다. 그가 내밀던 애정의 안테나와 친구들이 송신하는 우정의 주파수가 맞지 않았던 것뿐이다.

   친구라고 해서 꼭 생일축하 카드와 선물을 주고 어려운 시기에 도움을 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친구는 그렇게 반드시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주고받는 존재만은 아니며 단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더없는 영감을 선물하는 친구가 있다.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불현듯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친구. 그리하여 그 어떤 우정의 부채 관계도 성립되지 않는, 어쩌면 수십 년이 지나 다시 만났을 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는, 그런 친구. 한 번도 얼굴을 맞대지 않았으나 매일 만나는 친구보다 오히려 더 가깝게 느껴지는 멋진 펜팔이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것은 프린스턴이 내쉬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천재들의 요람’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아인슈타인이나 폰 노이만 같은 걸출한 스타 교수들이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서로의 발전을 독려해주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때까지 서로를 경쟁의 극한에 몰아넣는 토론이야말로, 매일 벌어지던 천재들의 무시무시한 끝장 토론이야말로, 화약 냄새가 나지 않는 향기로운 전쟁이었다. 

   
 

그리스 사회는 지나친 천재의 출현이 경쟁 자체를 방해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도편추방(ostracism)’이라고 하는 제도를 두었다. 그러나 우리는 도편추방을 사회의 조절 장치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도편추방은 자극의 수단이고 천재에 대한 보호의 수단이라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이것은 일인의 지배를 혐오하며 그것이 지닌 위험을 경계하는 제도이지만, 천재를 죽이는 제도가 아니라 오히려 천재를 보호하고 더 자극하기 위해서 제2의 천재를 만들어내는 수단이다. 다시 말해 이 제도의 핵심은 천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천재를 여럿으로 만드는 것에 있다. (……) 그리스인들은 여러 진리가 공존하고 경쟁하기를 바랐다. 경쟁이 없는 진리는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 고병권,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소명, 2001, 147~148쪽. 

 
   

   이 ‘포연 없는 전쟁’의 핵심은 바로 ‘유일한 진리의 소유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무시무시한 경쟁을 불러일으켜 다양한 진리들이 싸우도록 한 것이다. 적대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경쟁, 서로 더 나은 존재로 만들기 위한 경쟁, 보편적 진리가 아니라 여러 개의 진리가 아름답게 공존하도록 하기 위한 경쟁. 이것이 ‘아곤(agon)’이라고 부르는 그리스의 독특한 정치 문화였다. 그것은 서로를 내밀한 우상으로 섬기기에 절대적인 우상이 탄생할 수 없는 지적 환경이며, 어떤 우상도 탄생하자마자 파괴되므로 ‘우상의 중앙집권’이 불가능한 정치체제다. 

   내쉬의 프린스턴 재학시절 학과장이었던 솔로몬 레프셰츠는 수업도 학점도 다 쓸데없으며 오직 창조적 아이디어를 내는 것만이 학생의 임무임을 강조하는 ‘아곤의 지휘자’였다. 그가 요구하던 단 한 가지 요구사항은 바로 ‘차를 마시러 가는 것’이었다. 그의 요구에 따르면, 학생들은 매일 오후 반드시 차를 마시러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 최고의 수학자들을 어디서 만나겠는가. 그리고 당신들만 좋다면 ‘향기나는 거실’에 언제든 들러도 좋다. 거긴 고등학문연구소라는 곳인데, 아인슈타인이나 괴델이나 폰 노이만을 먼발치서라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학생들에게 어떤 강압적 요구도 하지 않고 오직 ‘차를 마시러 가라’는 요구만을 했던 학과장의 아이디어는 존 내쉬 같은 고독한 천재에게 둘도 없는 교육 방식이었던 셈이다. 저 하늘의 별을 지상에 내려놓고 관찰하는 행운. 저 별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확인하는 행위만으로도 우리 안의 뮤즈는 고양되지 않을까.
    존 내쉬보다 한 해 먼저 프린스턴에 들어온 유제니오 캘러비는 ‘독서의 해악’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내쉬와 자신은 독서장애였다고. 내쉬는 간접적인 지식을 너무 많이 배우게 되면 자기 안의 창조성이 질식할 거라는 생각 때문에 ‘수동적이고 게으른’ 독서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내쉬의 지식 생산방식은 주로 교수와 동료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난처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는 두레방의 대화를 통해 ‘미해결 난제’가 무엇인지를 면밀히 기록해 두었고 내쉬의 최고의 아이디어들은 반쯤 배우다 만 것, 심지어는 잘못 배운 것에서 시작해서 그것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한다. 

   한편, 칼 융에게 있어 ‘아곤의 공동체’는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친구이자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는 바로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와 아들러, 니체와 융. 이 네 명의 천재들은 서로에게 의식적, 무의식적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멀리서도 서로의 아이디어가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를 해독하고 경쟁하며 독려하는 최고의 친구들이었다. 융은 ‘프로이트와 함께한다면 당신의 미래가 위태로울 것’이라는 일부 교수들의 경고장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이 진리라면 나는 그와 함께 할 것입니다.” 융이 발표한 논문이 동료들의 조롱을 받았을 때, 프로이트만은 그 논문의 가치를 알아보고 융을 초대하여 그들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들은 오후 1시에 만나 장장 열세 시간 동안이나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융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를 서른두 살이 되어서야 만난 것이다. 융이 가장 동경하는 대상이면서 그가 가장 처절하게 극복해야 했던 존재, 그가 바로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 당시의 내 경험으로는 그 어떤 사람도 프로이트에 견줄 수 없었다. 그의 태도에는 진부함이 전혀 없었다. 내가 보니 그는 무척 총명하고 예리하며 어느 면에서나 괄목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모호한, 알 수 없는 구석이 여전히 남아 있는 느낌이긴 했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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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09-24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 하늘의 별을 지상에 내려놓고 관찰하는 행운'이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있겠지요?

dlatjsdud29 2009-09-24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전쟁이어야 할 텐데요. 요즘, 토론들은 자기얘기만 하고 남을 깎아내리는 데 있으니... ㅎㅎ

sotkfkd 2009-09-24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트로이메라이 2009-09-25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강호의 고수들 속에서 성장하는 천재들의 아름다운 경쟁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향기나는 전쟁의 행운이 깃들기를.

훈남 2009-09-26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솔로몬 레프셰츠 맘에 드네요ㅋㅋ
 

 


영화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③

 

3. 사람들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나’를 오해한다

   
 

 나는 ‘침묵의 탑’에 버려져 썩어가는데, 프로메테우스를 공격한 독수리들이 나의 내장을 파먹는 듯하다.
 - 존 내쉬, 1967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곤 한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로부터 오해받는다는 것은 극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 그런 일이 오랫동안 매일 반복하여 일어난다면 아무리 건강한 영혼을 지닌 자라도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천재의 경우 주변 사람들의 오해는 거의 상습적으로 일어날 때가 많다. 존 내쉬의 경우 사람들의 오해는 더욱 지속적이고 파괴적으로 진행되었다. 존 내쉬 스스로가 그 오해를 가속화한 측면도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상습적으로 무시하곤 했으며 누군가 질문을 하면 인상을 찌푸리며 ‘너 정말 그것도 몰라?’라는 식으로 반응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노년의 존 내쉬는 그토록 오만방자했던 젊은 시절을 후회하기도 했다. 자신의 천재성은 그런 오만함을 덮어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천재의 재능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그런 오만쯤은 슬쩍 눈감아주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교성이 뛰어났던 여동생 마사조차도 ‘오빠와 놀기’를 극도로 꺼려한 것을 보면 존을 ‘오해의 청정구역’에 격리시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주변 사람들의 일상적인 오해보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스스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천재 스스로 세계의 작동 원리를 오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트라우마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잊을 수 없는 공포의 체험으로 각인되기도 한다. 존 내쉬에게 있어 이러한 원형적인 공포의 체험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정신분열 증세가 ‘냉전 시대의 사회적 희생물’이기도 했다는 점은 어린 시절 겪었던 전쟁의 공포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는 유년기부터 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었으며 청년 시절에도 징병을 피하기 위해 무던히 애쓴 흔적이 보인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 해군기지를 공격했을 때 조니(존 내쉬)는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며칠 후 조니와 마사는 아버지에게서 22구경 소총 사용법을 배웠다. (……) 잿빛 구름 아래 낮게 엎드린 마을을 가리키며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본은 이곳 웨스트버지니아의 마을을 점령할 때까지 공격을 계속할 것이다. 이곳이 비록 외지고 산에 둘러싸여 있지만, 막강한 미국의 전력을 무력화하는 유일한 방법은 석탄 열차를 폭파하는 것뿐이기 때문이었다. (……) 정말이지 총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열차를 폭파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을 테니까.
 그들은 이 도시를 산산조각 내고, 남자들을 죄다 잡아가고, 양민을 학살할 것이다. 너희들 같은 학생도 죽일지 모른다. 너희가 이 총을 쏠 수 있다면, 잡으려고 달려드는 사람을 물리치고 멀리 달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군이 구해주러 올 때까지 숨어 있으면 된다. 후일 내쉬가 도처에서 외계 침략자의 비밀스러운 흔적을 발견하고 오직 자기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을 때, 그는 불안에 떨고 진땀을 흘리며 몇 날 며칠이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12월 오후의 이날만큼은 소총을 만지작거리며 흥분했고 행복해했다.  


 - 실비아 네이사, 신현용 ·이종인·승영조 역, <뷰티풀 마인드>, 승산, 2002, 60~61쪽.

 
   

   ‘오직 나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환상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존 내쉬가 겪게 될 ‘빅 브라더’ 윌리엄 파처(에드 해리스)의 환상은 냉전체제가 학습시킨 이데올로기 교육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어린 시절과 깊은 연관성을 보인다. 보통 사람들은 넘볼 수 없는 뭔가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일을 하고 있다는 환상, 그런 어려운 일은 나만 할 수 있다는 긍지는 존 내쉬의 성정에 어울리는 환상이었다. 우주전쟁이 일어났을 때 지구를 지켜내야 한다는 소년들의 환상처럼 부풀어 오르는 ‘냉전 시대의 영웅’을 향한 불타는 의지는 언제나 혼자였던 존 내쉬에게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아무나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최고의 인간이라는 신념을 유지하고 싶어 했던 존 내쉬의 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한 존 내쉬의 환경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당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나만의 미션, 나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그에게 주변 사람들의 끊임없는 오해를 잠재울 만한 초인적인 힘을 지니게 했을지도 모른다. 항상 최고의 인간에게 ‘인정받기’를 원했던 존 내쉬의 천성도 중요한 변수다. 영화 속에서 ‘빅 브라더’ 윌리엄 파처는 그의 천재적 재능이 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것이라는 신념을 ‘완성’시키는 인물이다. 그의 인정을 받아 소련의 암호 해독 프로젝트에 투입된다는 것은 존 내쉬에게 자신의 지식을 ‘이 사회를 지키는 데’ 사용할 수 있다는 긍지를 심어준 것이다. 

   한편, 어린 시절 융 또한 자신이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운명이라는 것을 예감했던 사건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융이 특히 괴로워했던 사건은 자신이 오랜만에 공들여 쓴 작문이 너무 훌륭한 나머지 선생님이 도저히 자신이 쓴 것이라고 믿어주지 않았던 일이었다. “아주 잘 썼기 때문에 나는 융의 작문에 최고 점수를 주어야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작문은 거짓이다. 너는 이것을 어디서 베꼈느냐? 진실을 자백해라!” 융은 자신이 쓴 것이라고 항변하지만 선생님은 절대 믿어주지 않았다. “네가 이것을 어디서 베꼈는지 내가 알게 된다면 너는 학교에서 쫓겨날 거야!” 이 일로 인해 융은 깊은 상처를 받고 선생님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게 된다. 하지만 존 내쉬와는 달리 사람들의 눈에 띄기를 원치 않았던 융은 자기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모색하게 된다.
    그는 이 일뿐 아니라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오히려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을 깨닫게 된다. 아, 선생도 너와 마찬가지로 의심 많은 사람이구나.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는 사실에 부딪히면 분노하고 흥분하면서 ‘그건 사실이 아니야’라고 믿고 싶어 하는 존재구나. 그는 이때부터 제1의 인격(일상의 인격)과 제2의 인격(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나만의 세계)을 분리하여 사물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제1의 인격이 ‘인간의 유한성과 세속’에 발 딛고 있다면 제2의 인격은 ‘우주의 무한성과 존재의 신비’에 발 딛고 있었다. 그는 ‘제1의 인격’만으로는 친구를 가지기 어려웠지만 ‘제2의 인격’을 위한 친구로서 ‘죽은 사상가’들을 초대했다. 책 속에 파묻혀 살았던 열여섯 살에서 열아홉 살 사이,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샘솟는 영감이 철학자들의 생각과 역사적인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기독교적 스콜라철학은 나의 흥미를 끌지 못했고, 성 토마스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주지주의는 나에게 사막보다 더 생명력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 나에게는 그들이 코끼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소문으로는 알고 있지만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 헤겔은 난해하고 거만한 문체로 나를 겁먹게 해서 나는 노골적인 불신감으로 그를 대했다. 그는 마치 언어구조 속에 갇혀 그 감옥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몸짓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나의 탐구가 가져다준 큰 소득은 쇼펜하우어였다. 그는 눈에 보이도록 여실히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고통, 그리고 혼란과 고난과 악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다. (……) 비로소 세계가 어쩐지 가장 좋은 것만을 기초로 세워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철학자가 나왔다. 그는 가장 선하고 지혜로운 창조의 섭리나 피조물의 조화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인류 역사의 고통스러운 과정과 자연의 잔인성에는 일종의 결함, 즉 세계를 창조하려는 창조 의지의 맹목성이 그 밑바닥에 깔렸다고 솔직하게 토로했다. 


 - 칼 구스타프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132~134쪽. 

 
   

   융은 자신의 고통에서 시작된 복수의 방향타를 돌려 어느새 타자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한 포석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는 병들어 죽어가는 물고기, 옴에 걸린 여우,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은 새, 개미에 둘러싸여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지렁이, 서로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곤충들처럼 인간 또한 그렇게 서로의 불완전함에 의지하고 영향 받으며 서로를 공격하는 것이 ‘자연스러움’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꺼리는 이유가 바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일에 관해 조용히 발언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학교 과목에는 전혀 들어 있지 않았던 칸트나 쇼펜하우어, 고생물학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친구들에게는 엄청난 ‘잘난 척’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가 영혼의 친구를 찾으려 발버둥칠수록 그는 더욱더 오해받고 고립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평범해 보이려 애를 써도 어디서나 튈 수밖에 없었던 융은 자신의 고민을 ‘아예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서글픈 결론에 이른다. 그는 제1의 인격과 제2의 인격을 끊임없이 통합하려 하지만, 제1의 인격에서 좌절당한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제2의 인격으로 침잠해가는 것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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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s 2009-09-23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저도 살다가 저런 엄청난 오해 한 번 받아봤으면 좋겠네요 ㅋㅋ >.<

sotkfkd 2009-09-23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2의 인격으로 침잠해 가는 것. 때로 고통을 초월한 환희!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