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주인이 돌아올 때를 알지 못하니 깨어 있으라”
고통에 지쳐버린 사람들은, 혹은 작은 고통에도 쉽게 절망하는 사람들은, 가능한 한 고통을 빨리 없애고자 한다. 고통을 제거해야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인간의 오랜 믿음을, 니체는 거부한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 그는 이미 충분히 존재하는 고통을 더 높은 강도로, 더 힘겨운 것으로 부풀린다. 주어진 위험을 오히려 극대화하는 자, 이미 넘쳐나는 고통을 천 배로 부풀리는 자, 그리하여 불행을 기꺼이 짊어진 채 불행을 샅샅이 해부하고 마침내 불행을 영혼의 창조에 이용하는 용기를 지닌 자, 그가 바로 초인이다. 불행을 피하는 데 급급한 인간들이 추구하는 안락함, 그것은 니체가 보기에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인생의 ‘종말’이다. 현재의 불행은 단지 미래의 고통에 대비하기 위한 예방주사가 아니라, 영혼의 힘을 길러주는 창조적 긴장이다. 고통을 거부하는 자들이 도망쳐 가는 가장 흔한 도피처, 그곳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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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형제들이여, 내가 꾸며낸 이 신은 다른 신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사람들이 만들어낸 작품에 불과하고 망상에 불과했다. (……) 아무 것도 더 이상 바라지 못하는 저 가련하고 무지한 피로감. 이 피로감이 온갖 신을 꾸며내고 저편의 또 다른 세계를 꾸며낸 것이다.
- 니체, 정동호 역,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000,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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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가 아닌 저 세계를 강조하며 이 세계의 고통을 합리화하는 사람들, ‘다음 세상에는 천국이 펼쳐질 테니, 지금의 고통을 묵묵히 인내하라’고 외치는 사람들, 너희가 고통스러운 것은 너희의 죄 때문이라고 외치는 사람들. 예를 들어 성경의 등 뒤에 숨어 현재의 속물적인 삶을 합리화하는 사람들. 평일에는 바지런히 타인의 삶 위에 군림하다가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 ‘회개’함으로써 그 모든 만행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쇼생크 탈출>의 우두머리 노튼 소장은 그런 인물의 전형이었다. 그는 죄수들의 방을 불시 검열하다가 앤디의 방에 성경이 있는 것을 보고 무척이나 흐뭇해한다.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있는지 묻는 노튼 소장에게 앤디는 대답한다. “주인이 돌아올 때를 알지 못하니 깨어 있으라.” 언제나 ‘그날’이 온 듯이 사는 앤디, 언제나 ‘그날’이 바로 지금인 듯이 사는 앤디에게는 이 문장이 더없이 잘 어울린다. 노튼 소장은 자신이 좋아하는 문장을 말하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나는 이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그는 마치 이 세상의 빛이 자기 자신인 양 거들먹거린다. 자신을 잘만 따르면 마치 저 세상의 천국으로 입장하는 암표를 발급받을 수 있다는 듯. 현실의 삶으로 빛을 만들지 못하는 노튼은 성경의 빛에 의탁하여 도무지 빛나지 않는 자신의 삶을 빛내보려 한다. 사실 노튼의 속셈은 불시 검열을 핑계로 앤디의 의중을 떠보려는 것이었다. 신출귀몰한 세무 능력을 지닌, 과거의 은행 부지점장 앤디의 ‘이용가치’를 고민하는 노튼 소장. 그는 앤디의 방에 있던 성경을 무심코 가져가려 하다가 앤디에게 돌려준다. “이걸 뺏어서는 안 되지. 이 안에 구원이 있으니까.” 카메라는 앤디의 손때가 묻은 오래된 성경을 의미심장하게 비춰주고, 앤디의 눈빛은 이날따라 달빛을 비춘 칼날처럼 시리게 빛난다. 성경 안에 있는 구원, 그것은 노튼 소장에게는 ‘말씀의 빛’이었겠지만, 앤디에게는 ‘말씀 이상의 무엇’이었고, 이 비밀은 영화의 후반부에 밝혀진다.
자신의 재산을 부풀리는 데 앤디를 이용하기로 결심한 노튼 소장은 앤디를 쇼생크 감옥 도서관의 조수로 배치한다. 앤디의 잡무를 덜어주고 좀더 ‘손쉽게’ 앤디를 곁에 두고자 하는 속셈이었다. 도무지 ‘할 일’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쇼생크 감옥 도서관의 일인 사서이자 관장은 30여 년 동안 ‘죄수들의 독서’를 담당했던 터줏대감 브룩스였다. 브룩스는 30여 년 동안 혼자서 해도 충분했던 이 일에 ‘조수’를 붙여준 노튼 소장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
도서관 업무보다도 밀려드는 간수들의 ‘재정 상담’에 바빠진 앤디는 비로소 노튼 소장의 의중을 눈치채기 시작한다. 소장보다 더 잽싸게 앤디의 능력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발 빠른 간수들이었다. 자녀교육 신탁예금을 계획하려는 간수에게 앤디는 묻는다. “아들을 보내고 싶은 대학이 어딥니까? 하버드입니까, 아니면 예일입니까?” 간수들은 앤디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왔지만 감옥의 간수 월급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대학을 금방이라도 보내줄 것만 같은 앤디의 듬직함에 환호작약한다. 이제 간수들은 물론 소장조차도 앤디를 무시하지 못한다.
쇼생크의 죄수들은 앤디의 폭발적인 인기를 실감하며 그를 우러러보기 시작한다. “간수가 죄수한테 별 아양을 다 떨더군.” “앤디가 간수들을 아주 가지고 놀았구먼?” 앤디는 털끝만큼도 우쭐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며 냉정하게 말한다. “난 안 그랬어. 그저 재정 자문을 해 주는 죄수일 뿐이야. 귀여운 강아지지.” 죄수들은 세탁소의 고된 잡무에서 벗어난 앤디를 부러워하며 말한다. “귀여운 강아지니까 세탁소에서도 빼준 건가?” 앤디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한다. “그 이상이지, 도서실을 확장할거야.”
그는 언제나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자신의 사용법’을 찾아낸다. 그저 조용히 자신의 세계에 침잠해 있는 것처럼 보였던 앤디의 두 눈에는 언제부턴가 은밀한 광채가 돌기 시작했다. 주 의회에 편지를 보내 도서 기금을 요구하겠다는 앤디의 황당한 제안에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찰 뿐이다. 죄수에게 책이 무슨 소용이냐, 그저 당구대나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죄수들. 단지 앤디가 힘겨운 육체노동에서 벗어난 것을 부러워하던 죄수들은 앤디의 마음속에서 이제 구체적인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한 저 내밀한 ‘꿈의 지도’를 짐작도 하지 못한다.
사실 이 영화에서 앤디가 결국 탈옥에 성공하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탈옥시키는 데 성공한다는 것이다. 감옥의 훈육에 길들여지거나, 감옥에서조차도 견디지 못하고 죽거나 다치거나 미치는 수밖에 없었던 죄수들에게, 앤디는 이 움쭉달싹할 수 없는 광대한 원룸, 그 어디에도 간수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것만 같은 치밀한 감시체계 안에서도, 우리의 욕망이 꿈틀거릴 수 있는 ‘CCTV의 사각지대’가 있음을 증명한다. 아니, 그는 무엇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곳에서도 무언가를 ‘있도록’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임을 증명한다.
그는 잃어버린 영토를 찾는 정복자나 탐험가가 아니라 ‘지도에도 없는 영토’를 만들어 내놓고 마치 그곳이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한다. 그로 인해 ‘리더스 다이제스트’와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빼고는 별로 자랑할 것이 없던 쇼생크 감옥 도서관은 총천연색 문화의 향기가 넘실대는 멋진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레드의 내레이션은 계속된다.
“앤디는 자신이 말 한대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노튼 소장이 말했듯이 답장이 없었습니다. 쇼생크의 간수의 절반은 듀프레인의 손을 거쳤습니다. 일 년이 지나자 소장을 포함해 모든 간수들이 그를 찾아 왔습니다. 체육대회를 핑계로 다른 지역 간수들도 모여들 정도였지요. 그들은 모두 한 해의 세금 공제를 위한 명세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은 잘나가는 사업이었습니다. 세금 징수기에는 너무 바빠 조수가 필요했죠. 저는 기쁘게도 한 달간은 목공소 일을 쉴 수 있었습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를 알지 못하니 깨어 있으라”라는 성경 구절을 좋아한다는 앤디.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오늘,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오늘이 바로 생애 최고의 그날인 듯 살아간다. 노튼 소장도 이 구절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가 늘상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주인이 돌아올 날에 대한 노예의 공포 때문이다. 앤디는 단지 주인이 돌아올 때를 알지 못해서 잠도 들지 못하고 간신히 깨어 있는 노예가 아니었다. 그는 주인이 돌아올 때를 스스로 결정하고 준비하는, 이미 주인의 머리 위에서 주인의 행동 패턴을 읽어내는 자, 주인과 노예의 이분법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인간이었다.
자신의 진짜 삶이 모범이 될 수 없기에 성경의 권위를 참칭해야 존속되는 노튼의 권위. 앤디는 몇 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답장이 없는 주 의회를 향해, 소장이 여섯 번 바뀌는 동안 단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은 쇼생크 도서관에 도서기금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한다. 몇 년 동안 일주일도 거르지 않고, 답장 한 번 오지 않는 곳에 편지를 보내는 앤디. 초인의 재능 중 가장 모방하기 어려운 것은 어떤 ‘반복’에도 ‘권태’를 느낄 줄 모르는, 지칠 줄 모르는 ‘놀이’의 열정이다. 초인은 똑같은 주사위를 천만 번 던지더라도 매번 다른 표정으로, 매번 다른 마음가짐으로 게임에 임할 것이다.
똑같은 성경을 어떻게 다르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의 기로가 펼쳐진다. 노튼은 성경을 무기로 성경 뒤에 숨어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는 데 집중하고, 앤디는 성경의 말씀과 함께 성경을 ‘물질’로 이용한다. 앤디에게 성경은 또 하나의 리타 헤이워드였고, 자신의 진짜 자아를 잠시(10여 년 동안!) 은폐하기 위한 영혼의 베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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