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쇼생크 탈출>과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 Nietzsche) ②

 

2. 도덕 없이는 살 수 없다? 

   니체는 도덕의 존재를 당연시하는 인류의 ‘상식’을 의심한다. 니체는 도덕이 인간의 선천적 본성도 아니며 보편적 기질도 아님을 밝혀낸다.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는 도덕의 역사적 가변성을 입증하고, 한 시대의 도덕이 다른 시대의 패륜이 될 수도 있음을, 도덕의 가치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변모해왔음을 보여준다. 야스퍼스는 <니체와 기독교>에서 왜 인간이 ‘도덕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 변모했는가를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계몽의 과정을 통해 ‘신의 죽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그동안의 문명화 과정을 통해 인간 스스로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외부적 존재’ 없이는 살 수 없도록 길들어져 왔다는 것이다. 이미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신의 그림자’에 철저히 길들어져 있기에, 인간은 ‘신과 닮은 존재’가 보좌해주는 세계의 안전판 없이는 끊임없이 불안을 느끼는 존재로 변모해왔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신을 대체하는 또 하나의 절대성, 즉 ‘도덕’이라는 ‘신의 대용품’이 필요했던 셈이다. 

   앤디 듀프레인이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동안 레드(모건 프리먼)는 가석방 심사를 받고 있었다. 가석방 심사위원은 레드에게 질문한다. “20년을 복역했지요? 사회에 복귀할 준비가 됐다고 생각합니까?” 레드는 사뭇 긴장된 표정으로 자신이 교화됐음을 주장한다. “네. 저는 준비됐습니다. 감옥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 전 변했습니다. 더 이상 위험한 존재가 아닙니다. 맹세할 수 있습니다.” 레드의 표정은 절박하기 이를 데 없지만 심사위원은 레드의 서류에 ‘부적격(rejected)’ 판정 도장을 찍는다. 그는 젊은 시절 범죄를 저지르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후 20년 동안이나 별 탈 없이 복역했지만 사회는 그를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레드를 비롯한 쇼생크의 죄수들은 자신의 삶이 ‘적절하다/부적절하다’는 판정을 가석방 심사위원으로부터 인증받아야 할 처지다. 그들은 수많은 변수들을 고려하여 이 죄수가 감옥 밖으로 나가서 ‘위험하지 않은 인물’로 살 수 있는지를 ‘계산’한다. ‘교화된다는 것’은 바로 ‘예측 가능한 인간’이 되는 것이며 ‘계산 불가능한 의외성’을 최대한 제거하는 행위다.  

   레드는 이 영화의 내레이터이자 쇼생크 감옥의 터줏대감으로서 신출귀몰한 물자공급원의 역할을 맡고 있다. “담배, 마리화나, 애들 졸업 축하주도 구할 수 있죠. 뭐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인간 백화점이죠. 듀프레인이 와서 영화배우 사진을 구할 수 있냐고 물었을 때도 문제없다고 했지요. 듀프레인은 아내와 정부를 죽인 죄로 1947년 쇼생크 감옥으로 왔습니다. 전직 은행 부지점장이었죠.” 듀프레인이 쇼생크에 입성하던 날, 죄수들은 새내기 죄수들을 향해 내기를 한다. ‘신참 죄수들 중에서 누가 먼저 울음을 터뜨릴까’에 내기를 거는 것이다. 감옥에서는 현금보다도 소중한 담배를 저마다 내기의 판돈으로 걸며 키득거리는 고참 죄수들. “처음에 듀프레인은 제게 강한 인상을 주지 못했습니다.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았죠. 그게 제 첫인상이었습니다.” 레드는 아무도 담배를 걸지 않은 ‘꺽다리 귀공자’ 앤디 듀프레인에게 담배를 무려 10개비나 건다. 

   이제 감옥에서의 첫날밤이 시작된다. “죄수들은 저녁 점호를 위해 감방으로 돌아가라.” 악명 높은 쇼생크 감옥의 소장 노튼은 죄수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일장 연설을 시작한다. “너희는 중죄를 저질렀다. 그 때문에 나에게 맡겨진 것이다. 첫번째 규칙. 욕설금지! 내 감옥에서는 신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는 없다. 그 외의 규칙들은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질문 있나?” 듣고 있던 신참 죄수 중 한 명에게서 질문이 터져 나온다. “밥은 언제 먹나요?” 너무나도 ‘초딩스러운’ 질문에 관객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스치려는 순간, 소장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지고 간수는 전의를 불태우며 신참에게로 다가간다. “먹으라고 할 때 먹고, 싸라고 할 때 싸면 된다. 알았나? 이 더러운 자식!” 단지 밥은 언제 먹느냐는 질문을 했다는 이유로, 죄수는 흠씬 두들겨 맞고 고통에 몸부림친다. 신참들의 얼굴은 어두워진다. 이제야 감옥에 온 것이 실감 났다는 듯, 고통받는 동료의 모습에 자신의 미래를 투사한다. 저렇게 되지는 말아야지, 죽은 듯이 살아야지, 무사히 살아 나가기만을 빌어야지……. 폭력은 이렇게 인간을 길들인다. 좀더 비굴하게, 좀더 나약하게, 좀더 온순한 존재로 만드는 것. 그것이 ‘교화’의 진정한 목적이다. 소장은 이 ‘교화’의 대리인으로서 마치 자신이 신의 사도인 양 죄수들을 협박한다. “난 두 가지를 믿는다. 원칙과 성경. 너희도 그렇게 될 것이다. 믿음을 가져라. 너희는 내 손에 달렸다. 쇼생크에 온 걸 환영한다.” 소장이 손에 쥔 성경은 마치 이 감옥에서 너희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신의 뜻’이라는 양 신성한 위엄(?)을 과시한다. 

   레드의 내레이션이 쓸쓸하게 이어진다. “감옥에서의 첫날밤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태어날 때처럼 발가벗겨지고 살충제에 범벅이 된 채 돌아다녀야 하죠. 감방에 집어넣어지고 철문이 탕하고 닫히면 그제야 실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은 망가졌다는 것을요. 대부분의 신참들은 첫날밤에 거의 미칠 지경이 됩니다. 항상 몇몇은 정신없이 흐느껴 울죠. 매번 일어나는 일입니다. 단지 문제는 누가 먼저 우느냐 입니다. 이것만큼 재미있는 내기는 없죠. 저는 앤디 듀프레인에게 걸었습니다.” 이어서 감옥 안의 불이 꺼지고 신참들의 잠 못 드는 밤이 시작된다. 레드의 친구 헤이우드는 장난기가 발동해 자신이 담배를 건 신참(간수에게 폭행당한 바로 그 신참)에게서 눈물을 뽑아내려고 작정을 했다.
    “신참. 잔뜩 겁에 질려서 뭐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고 후회하는 거야? 어이, 뚱보. 내가 말이야. 자넬 소개시켜 줄게. 자넬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 남자를 좋아한다고. 특히 백인 뚱보를 말이야.” 간수에게 폭행당한 충격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이 나약한 신참은 겁에 질려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여긴 제가 있을 곳이 아니에요. 집에 보내줘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여기서 꺼내주세요…….” 간수는 소란스러운 감옥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신참을 ‘처리’한다. 아까보다 한층 더 난폭해진 간수의 린치 앞에서 신참 죄수는 울다 지쳐 두들겨 맞고, 두들겨 맞다 지쳐 숨소리도 들리지 않게 된다. 퍽, 쿵, 퍽, 쿵. 한 명의 죄수를 때리는 소리는 마치 쇼생크 감옥의 죄수 전체를 집단폭행하는 소리처럼 엄청난 울림으로 감옥의 밤을 뒤흔든다. 레드가 담배를 10개비나 걸었던 앤디는 정작 숨소리도 들리지 않게 조용하다. 감옥의 첫날밤은 그렇게 끔찍한 풍경 속으로 사라져간다.

   다음날 헤이우드는 자신이 내기에 이겼다는 생각에 환호작약하며 다른 죄수들에게 담배를 잔뜩 받아내고 기뻐한다. “뚱보 녀석에게 감사의 키스라도 해야겠어.” 헤이우드는 히죽거리며 내기의 전리품에 흡족해한 후, 자신이 놀려먹은 그 신참 죄수의 안부를 묻는다. “타이렐. 자네 의무실 근무지? 그 뚱보 잘 있나?” 타이렐은 대답한다. “죽었어.” 헤이우드와 함께 시시덕거리던 고참 죄수들은 어안이 벙벙하다. “그 신참이 머리를 심하게 맞은 모양이야. 의사도 없었어. 아침까지 기다려야 했어. 응급처치도 못했다고.” 헤이우드의 표정은 싸늘해지고 모두들 할 말이 없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지금까지 조용하던 앤디가 차분하게 질문을 한다. “그 사람 이름이 뭐였죠?” 모두들 신참의 대담한 질문에 놀란다. 헤이우드는 죄책감 때문인지 더욱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뭐라고?” 앤디는 마치 죽은 신참의 이름을 자기 혼자라도 기억하고 싶다는 듯이,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면 그 사람의 죽음이 조금이라도 덜 무의미해지리라는 듯이, 진지하게 묻는다. “누가 그 사람 이름을 아는가 해서요.” 누군가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한다. “이봐 신참, 네가 무슨 상관이야. 이름이 뭐가 중요해? 이미 죽어버렸는데.”

   감옥 바깥에서는 전도유망한 젊은이였던 앤디, 아직도 자신의 유죄를 인정할 수 없는 앤디는 이제야 쇼생크의 ‘게임의 법칙’을 깨닫기 시작한다. 여기에서는 그 어떤 개개인의 ‘이름’도 소중하지 않다는 것을, 자신은 ‘앤디 듀프레인’이 아니라 죄수번호 ‘37927’로 불리는 ‘관리 대상’에 불과함을. 이제 성공한 은행 부지점장 앤디 듀프레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아내를 사랑했던 기억은 물론 바깥세상에서의 모든 행복은 차라리 깡그리 잊어버리는 것이 낫다는 것을. 감옥 안의 죄수들은 이미 감옥의 도덕에 길들어졌으며 스스로의 욕망을 감옥의 도덕이라는 잣대로 자기 검열한다. 복종하지 않으면 세 가지 길밖에는 없다. 린치, 독방, 아니면 죽음. 죄수가 내면화한 감옥의 도덕은 ‘두려움’이 만들어낸 강제이며 ‘복종의 기술’에 다름 아니다. 즉, 이들에게 도덕의 기초는 ‘선의’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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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9-08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덕이라는 것은 옳고 그르다는 판단보다는 그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암묵적인 룰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니체가 도덕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냥 깨 부셔야 하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쇼생크 탈출에서 어떻게 니체의 도덕에 대한 생각을 읽어낼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바람돌 2009-09-08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도덕이 '게임의 법칙' 같은 건가요?

train 2009-09-09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삶'이라는 거대한 게임의 법칙이겠지요.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당연시되는 사회의 규칙들....

sotkfkd 2009-09-20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덕!
 

 


영화 <쇼생크 탈출>과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 Nietzsche) ①

 

1. 형벌은 인간을 길들일 수 있는가

 

   영화 <몬테 크리스토>(2002)에는 죽어야만 나갈 수 있다는 악명 높은 독방이 등장한다. 오랜 감방생활에 지친 주인공 에드먼드 단테(제임스 카비젤)는 이렇게 항변한다. “제 방에는 72519개의 돌이 있어요. 전 그걸 세 번이나 세어봤다고요!" 10년이 넘도록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었던 젊은이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늙은 죄수 아베 파리아(리처드 해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그 돌들에 각각의 이름은 지어줘 봤나?" 인간을 교화(?)시키기 위해 만들었다는 감방에서 죄수들은 ‘자기 계몽’이 아니라 하염없이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를, 어떻게 하면 이 저주받은 공간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야수를 가두기 위해 고안된 동물원에서 동물들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아주 작은 감시의 틈새를 놓치지 않고 탈출하곤 한다. 생명체를 가두어 길들이고 형벌로 단죄하는 모든 권력에 의문을 제기한 철학자, 그가 니체였다. 

   우리는 자유를 빼앗긴 인간의 한계상황을 다룬 수많은 영화들을 보았다. <빠삐용>에서 <쇼생크 탈출>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의 탈출이 이미 예견되어 있는 영화에서 관객들이 본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갇힌 사람의 죄보다 훨씬 무서운 ‘가두는 자들’의 공포를 본 것이 아닐까. 야수처럼 사나운 죄수가 우아한 에티켓을 갖춘 교양인으로 변모하는 영화가 관객의 시선을 끈 적은 거의 없었다. 형벌은 결코 죄인을 길들일 수 없다는 것, 맹수를 조련하듯 인간을 교화하는 어떤 권력도 인간의 의지를 막을 수 없다는 것. 우리를 매혹시킨 탈주범들의 이야기는 늘, 아무리 반복해도 지겹지 않은 이 자유의 피비린 중독성을 이야기해왔다. 도덕의 이름으로, 법률의 이름으로 인간을 가두는 권력의 잔혹성에 대해서라면, 우리의 니체가 가장 할 말이 많지 않을까.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이나, ‘회한’이라 불리는 저 정신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고유한 도구를 형벌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스스로 현실과 심리를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 진정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것은 바로 범죄자나 수형자 사이에서는 대단히 드문 일이며, 감옥이나 교도소는 이런 집게벌레 종족이 번식하지 좋은 온상이 아니다. (……) 형벌이란 사람들을 무감각하게 단련하며 냉혹하게 만든다. 형벌은 사람을 집중하게 만든다. 형벌은 소외감을 격화시킨다. 형벌은 저항력을 강화한다.  


- 니체, 김정현 역, <도덕의 계보>, 책세상, 2002, 427쪽.

 
   

    요컨대 형벌은 인간을 길들이기 위해 고안된 것이지만, 인간을 효과적으로(?) 길들일 수도 없으며,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덜 위험하게 보이도록 연기할 수는 있지만, 자신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스스로의 야수성을 완전히 길들일 수는 없다. 도덕은, 법률은, 감옥은,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거대한 동물원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 니체의 관점이다. 영화 <쇼생크 탈출>은 이렇듯 ‘갇힌 자’보다 더욱 악랄한 ‘가둔 자’들의 부당한 권력과 그 내면의 나약함을 흥미롭게 해부한 바 있다. 이 영화는 보고 또 보아도 볼 때마다 새롭게 읽히는 풍부한 사유의 보물 창고다. 아마도 그 이유는 <쇼생크 탈출>이 ‘선과 악’의 이분법에 갇히지 않는, 인간 본성의 다채로운 모호성을 화두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쏜살같이 주인공의 ‘단죄’를 향해 질주하는 ‘법’의 광기를 냉정하게 보도한다. 검사는 단지 ‘무죄를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팀 로빈스)의 유죄를 확정한다. 

   검사: 피고는 아내가 살해되던 날 아내와 다퉜습니다. 심하게 다퉜죠.
   앤디: 들통 나서 잘 됐다며 숨기려고도 안 했어요. 아내가 이혼하자고 하더군요.
   검사: 그래서 뭐라고 했습니까?
   앤디: 그럴 수 없다고 했죠.
   (……)  

    검사 : 싸운 후 아내는 어떻게 했나요?     

   앤디 : 짐을 꾸렸어요. 그 애인이랑 살려고 말이죠. 애인은 스포츠 센터 골프강사였죠.  
   검사 : 아내를 미행했습니까?
    앤디 : 먼저 몇 군데 술집에 들렀습니다. 그 남자 집으로 갔더니 없더군요. 차를 한 켠에 세우고 기다렸죠.
    검사 : 무슨 의도로요?
    앤디 : 모르겠어요……. 혼란스러웠고 술에 취해 있었죠. 그냥 겁만 주려고 했어요…….
    검사 : 두 사람이 돌아오자 따라가 살해한 거군요.
    앤디 : 아뇨. 술이 깨고 있었고, 마저 깨려고 집으로 차를 돌렸어요. 도중에 강에다 총을 버렸고요. 분명히 말씀드렸던 대로요.
    검사 : 다음날 그 집 파출부는 총에 맞은 두 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기막힌 우연의 일치 아닙니까? 단지 제 생각입니까? 살인이 있기 전에 총을 버렸다? 편리한 착상이군요. 사실입니다. 경찰이 3일 동안 강을 조사했지만, 나온 건 아무것도 없었죠. 그래서 피고인의 총과 피살자의 총 자국을 대조할 수 없었죠. 그것 또한 대단히 편리한 논리 아닌가요? 안 그런가요? (……) 현장에서는 피고지문이 묻은 술병과 탄알 타이어 자국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의 팔에 안긴 젊은 두 남녀가 죽었습니다.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 죄가 크다고 해서 죽음을 선고할 수 있습니까?    (……) 이건 우발적인 범행이 아닙니다. 간통이 죽을죄는 아닙니다. 이것은 훨씬 더 잔인하고 냉혈적인 복수입니다. 한사람 앞에 4발씩 쏘았습니다. 6발을 쏜 게 아니라 8발을 쏘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총을 다 쏘고 난후 다시 장전하여 그들을 쏘았다는 겁니다. 남은 총알을 사랑하는 사람의 오른쪽 머리에요. 저는 피고 듀프레인에게 냉혹하고 잔인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본 법정에 부여된 권한으로 각각의 희생자에 대해 한 번의 종신형씩 두 번의 종신형을 선고합니다.  

   이쯤에서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물음표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정말 앤디 듀프레인은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그녀와 정부를 살해했을까. 무죄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피고를 ‘죄인’으로 확정할 수 있을까.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한 인간에 대한 두 번의 종신형으로 저 사회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본 법정에 부여된 권한’이라는 것이 과연 정당한 권력인가. 한 인간을 두 번의 종신형에 처할 수 있는 권력의 막강함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인간은 인간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어디서 부여받은 것인가. 그들이 도덕이라 주장하는 것, 그들이 올바른 행위라 규정하는 판단의 근거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도덕은 과연 인간을 더 나은 삶, 더 행복한 삶으로 이끄는가.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는 모든 규율에 ‘도덕’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도덕은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는 권력이 아닌가. 

   
 

그들은 존엄함과 덕에 대해 많은 말을 한다. 그들이 무엇인가를 하려할 때 그러지 말라고 제동을 거는 것, 그것을 두고 그들은 덕이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태엽이 감긴 단조로운 시계와 같은 자들도 있다. 그들은 똑딱거린다. 이 똑딱임이 덕이라 불리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다. (……) 아, “덕”이란 말이 얼마나 가증스럽게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가! 그들이 “나는 정의롭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듣노라면, 그것은 언제나 “나는 앙갚음을 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 니체, 정동호 역,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002,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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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atjsdud29 2009-09-07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영화네요. 쇼생크 탈출 재미있게 봤던 영화인데ㅋ 니체는 이 영화를 어떻게 읽어갈지 기대됩니다.

true lies 2009-09-07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형벌은 인간을 냉혹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말, 소름끼치는 진실이네요...

깜신 2009-09-07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느낌의 글 잘 읽고 갑니다. ^^

sotkfkd 2009-09-20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⑩

   

 10. 하찮은 흔적에서 빛나는 상징을 읽어내는 자, 그는 승리할지니……

   
 

캠벨: 우리의 진정한 입문의례는, “산타클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힌두의 구루의 가르침 속에 있습니다. 산타클로스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이어주는 은유이지요. 관계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체험이 가능하지요. 그러나 산타클로스는 없습니다. 산타클로스는 관계를 인식하는 길로 아이들을 인도하는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질적으로, 그리고 속성상,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 없이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 것, 인생이 원래는 이런 것이 아니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모이어스: 조르바는 인생에 대하여, “말썽? 인생이라는 게 어차피 말썽 아닌가”하고 있습니다.  

 -조셉 캠벨, 이윤기 역, <신화의 힘>, 이끌리오, 2002, 132~133쪽.

 
   

   돌아올 기차표가 없는 머나먼 길을 떠나온 센에게, 용으로 변신한 하쿠는 자신의 등을 내어준다. 하쿠의 듬직한 등 위에 올라 하늘로 날아오르는 센. 그녀는 창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하쿠의 등허리 위로 펼쳐진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며 강력한 기시감을 느낀다. 인간의 언어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이 황홀한 느낌, 이토록 행복한 느낌을, 어디선가 느껴본 적이 있는 것만 같다. 밤하늘은 거대한 강처럼 느껴지고 나를 등에 태운 하쿠의 이 체온은 내가 분명 느껴본 적이 있는 따스함이다. 아, 그래, 그거였어……. 센은 마음속 깊숙이 둥지를 튼 하쿠의 기억을 드디어 발견해내고 눈물이 그렁해져 고백한다. “하쿠, 엄마한테 들은 얘기야. 기억은 흐리지만. 내가 어렸을 때 강물에 빠졌는데, 그 터에 아파트가 들어섰대. 문득 생각이 났어……. 그 강의 이름이 코하쿠였어……. 네 본명은 코하쿠야…….” 그 순간 하쿠의 몸을 둘러싼 수백만 개의 용의 비늘이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처럼 화르르 흩어지며 하쿠는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하쿠를 겹겹이 옭아매던 가혹한 운명의 사슬이 이제야 벗겨진 것이다. 손을 맞잡고 볼을 비비는 두 사람의 얼굴 위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흩어진다. 

   “치히로! 고마워! 내 진짜 이름은 니기하야미 코하쿠누시야.” 센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온몸으로 웃음 짓는다. “니기하야미 코하쿠누시! 신의 이름처럼 멋져!” 하쿠는 자신도 센의 진짜 이름 치히로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낸다. “나도 생각났어. 네가 내 안에 빠진 신발을 주우려고 했었지?” 거대한 아파트가 들어서자 강의 신이었던 ‘하쿠’는 인간 세계에서 퇴출당해야 했고, 하쿠는 자신의 이름도 존재도 잊은 채 마녀의 부하가 되어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하쿠는 문명이 삼켜버린 자연이었고, 도시가 짓밟은 생명의 입김이었다. 치히로도 기억나기 시작한다. 그녀가 강물에 빠져 죽을 뻔 했을 때, 하쿠는 그녀를 집어삼키지 않고 얕은 곳으로 옮겨 살려주었다는 것을. “맞아, 네가 나를 얕은 곳으로 옮겨줬지.” 내가 누구인지 몰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었던 하쿠가, 연약한 소녀 센의 목숨을 건 투쟁으로,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운명을 되찾게 된다.  

   이제 봉인은 풀렸다. 두 사람의 운명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던 운명의 봉인은 센-치히로, 그리고 하쿠의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는’ 운명의 전투로 풀린 것이다. 너를 찾아 떠나는 머나먼 길이 곧 나를 찾는 유일한 열쇠였다. 너를 찾지 못했다면, 너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나는 나의 존재 또한 잃어버렸을 것이다. 센의 영웅적인 면모는 그녀가 헤라클레스처럼 대단한 힘을 가지거나 아테나처럼 출중한 지혜를 가져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개인적인 욕망을 잊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고통과 임무를 피하지 않았다. 마치 ‘자아’라는 정해진 실체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며, 주어진 모든 상황에 자신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내 것을 지켜야 한다’는 애착을 어느새 끊어버린 그녀에게는 이미 두려울 것이 없었다. 센은 강력하고 적극적이며 투사적인 영웅의 전형이 아니라 지극히 내향적이고 수동적으로 보이는 사람의 내면에 숨겨진 엄청난 폭발력, 에너지를 끊임없이 자기 안에 가두어 놓는 내성적 캐릭터 속에 잠재된 정화와 재생, 치유와 배려의 에너지를 보여준다. 심드렁하고 무표정하며 몰개성적으로 보였던 치히로의 얼굴이 어느새 총명하고 매력적인 센의 이미지로 바뀌게 되는 것도, 그녀가 지닌 내면의 폭발력이 ‘육화’된 결과가 아닐까.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버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말하자면 익명의 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 무대의상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배우는 이전의 그 자신이듯이. 


 -조셉 캠벨, 이윤기 역, <세계의 영웅신화>, 대원사, 1996, 234쪽.

 
   

   하쿠와 센은 부푼 가슴을 안고 유바바 온천으로 돌아온다. 유바바는 도끼눈을 뜨고 벼르고 있는 중이다. “아기는 데려왔겠지?” 유바바는 늘 아기방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기만 하던 수퍼베이비가 어느새 씩씩하게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다. “혼자 서다니? 언제부터?” 하쿠는 아기를 무사히 데려왔으니 센을 인간 세계로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간단하게는 안돼. 세상엔 룰이 있는 법!” 유바바는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지만 수퍼베이비가 엄마를 제지한다. “엄마! 치사한 짓 그만해! 난 무지무지 재미있었어!” 유바바는 자신에게 저항하는 아들의 모습을 처음 보는지라 당혹스럽다. “규칙은 규칙인데……. 안 그러면 저주가 안 풀려!” 수퍼베이비는 단호한 표정으로 엄마를 협박한다. “센을 울리면 엄마를 싫어할 거야!” 유바바는 휘청거린다. “그런 심한 말을!” 그러나 센은 이제 유바바를 겁내지 않는다. 수퍼베이비 ‘보’의 ‘연줄’에 호소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임무를 끝까지 수행하겠다는 표정으로 오히려 아기를 달랜다. “괜찮을 거야. 걱정 마.” 

   유바바는 센의 계약서를 돌려주며 미리 소집해 놓은 수많은 돼지들을 가리킨다. “이 안에서 네 부모를 찾아! 기회는 딱 한 번! 맞히면 너희는 자유야!” 센은 아무리 봐도 똑같이 생긴 돼지들을 유심히 바라보며 엄마, 아빠를 찾아본다. “여기에는…… 엄마, 아빠가 없는 걸요?” 유바바는 흠칫 놀란다. “없어? 그게 대답이냐?” 센은 다시 한 번 결연하게 대답한다. “네!” 유바바는 하는 수 없이 인정한다. “딩동댕! 정답! 성공이야! 정답이야!” 센은 이제 누구의 조언 없이도 주어진 미션을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모두들 고마워요.” 유바바 온천 식구들이 모두 모여 센의 해방을 뛸 듯이 기뻐해준다.
    마녀 유바바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굴러가던 군대식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유바바 온천에는 전에 없이 신명나고 활기찬 축제 분위기가 감돈다. 머쓱해진 유바바는 센에게 새침하게 말한다. “네가 이겼어! 빨리 가버려!” 센은 아무런 원망도 남아 있지 않은 얼굴로 오히려 유바바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다. “고맙습니다. 신세 많이 졌어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센의 깊이와 넓이 앞에 유바바의 얼굴에도 어느새 사악한 기운이 사라졌다. 신화적 내러티브의 궁극에서는 결국 ‘적들’의 존재조차 사라지거나 무의미해진다. 적들이야말로 장애물과 싸우는 주인공의 내공 지수를 높이는 최고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원수는 우리의 운명을 조각하는 가장 예리한 칼날이다.

   “모두들 안녕! 고마워요!” 어느새 정든 유바바 온천 사람들과 작별한 센은 하쿠와 함께 엄마, 아빠를 찾으러 간다. 어느덧 하쿠와 헤어질 시간. “난 더 이상 못 가. 온 길로만 쭉 따라가면 돼. 터널을 나갈 때까지 뒤를 돌아보면 안돼.” 하쿠는 센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말한다. “난 유바바의 제자를 그만 둘 거야. 진짜 이름도 되찾았으니까. 나도 원래 세계로 돌아갈 거야.” 둘은 이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자마자 헤어져야 하는 아픔을 견뎌야 한다. “또 만날 수 있지?” “그럼!” “꼭이야!” “뒤돌아보지 말고 얼른 가!” 센은 하쿠와 헤어질 순간이 되자 그토록 탈출하고 싶었던 이곳이 벌써부터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꼭 저 세상으로 돌아가야 할까. 이제야 이곳에 익숙해졌는데, 이제야 내 영혼의 짝을 만났는데. 하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라는 메시지를 거절하면, 오르페우스처럼 간신히 구한 아내 에우리디케를 잃게 될 것이고, 소돔을 탈출하던 롯의 아내처럼 소금 기둥이 될지도 모른다. 영웅의 ‘귀환’, 그 마지막 관문은 ‘내가 겪은 이 모든 모험의 희로애락’에 미련을 갖지 않는 것이며,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왔다면 그 뗏목을 불살라버리는 용기다. 
 
   “치히로! 뭐 하는 거니? 어서 와.” 엄마, 아빠의 부름으로 센(신화적 자아)은 어느새 치히로(일상적 자아)로 돌아온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 아빠는 철없고 나약하기만 하던 센이 자신들을 구원해준 ‘여신 포스’를 장착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어서 집으로 가자고 야단법석이다. 하쿠의 말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걷던 치히로는 터널을 다 통과하고 나서야 터널 저편의 세계, 자신을 삼켰다가 다시 토해낸 저 어두운 심연의 세계를 바라본다. 어떤 언어로도 정리할 수 없는 치히로의 마음을 아름다운 주제가가 대신해주는 듯하다.  

   
 

슬픔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 너머에서 분명히 당신과 만날 수 있어. (……) 살아  있는 신비함. 죽어가는 신비함. 꽃도 바람도 도시도 모두 같아. (……) 산산조각으로 깨져 버린 거울 위에도 새로운 풍경이 비춰져 (……) 바다의 저편에서는 이제 찾을 수 없어. 빛나는 것은 언제나 여기에, 내 안에서 찾을 수 있었으니까.

 
   

   저 아련한 노랫말처럼, 우리가 가장 원했던 것은 우리 안에 있다. 천복을 따르는 것은 자기 내부의 소명을 ‘발견’하는 것이지 외부 세계의 ‘정복’이나 외계 생명체의 ‘구원’이 아니다. 조셉 캠벨은 영웅의 마지막 임무는 하계에서 얻은 깨달음을 ‘원래의 세상’ 속에서 ‘재통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센이 된 치히로, 하쿠를 품어 안은 센을 통해 우리 가슴에 스며들어온 신화를 살아내는 것, 그것이 우리의 새로운 미션이 아닐까.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화적 상상력은 현실을 거부하는 가상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중요성을 박탈하여 현실에서 멀어지는 대체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현실을 더욱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능동적인 판타지다. 그가 느낀 문명에 대한 절망, 인간에 대한 비애가 아무리 깊고 어두울지라도 그가 허무주의나 패배주의에 결코 길을 내주지 않는 이유도 이 능동적 판타지에 기반한, 지극히 명랑하고 낙천적인 신화적 상상력에 있다. 그는 인간과 자연, 주체와 타자, 죽음과 삶 사이에 놓인 거대한 장벽의 틈새를 포착해낼 힘이 아직 우리 문명사회에 가녀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아티스트다. 그가 창조한 인물들로 인해 우리는 신화로 들어가는, 아직 닫히지 않은 입구가 조금은 남아 있음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직 완전히 밀폐되지는 않은, 그 가느다란 신화의 입구에서 흘러나오는 실오라기 같은 생명의 햇살을, 미야자키 하야오는 거대한 예술의 마그마로 폭발시킨다.
   우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물들이 아직 완전히 ‘통합’하지 못한, 신화와 현실 사이에 놓인 거대한 간극을 메우는 저마다의 ‘비법’을 탐색해야 하지 않을까. 그 ‘비법’은 물론 하루아침에 전수될 수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도 없다. 하지만 먼저 간 어진 친구들의 발자국을 따라 우리는 그 비법의 조각난 흔적들을 탐험해볼 수는 있다.

   캠벨은 이 비법을, 신화가 풀어내는 무의식의 비밀을 통해 발견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세계 각지에 흩어진 신화적 상징과 서사를 수집하고 연구하며 신화에 숨겨진 삶의 비의를 추출했다. 캠벨은 속삭인다. 모든 곳에서 상징을 보라. 죽음을 딛고야 일어서는 삶의 비애를 긍정하라.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이미 주어진 삶의 고통을 부정하지 말라. 타자를 죽이고 그 시체를 먹어야만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 그것이 삶임을 인정하라고.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기쁘게 참여하는 희열, 그것이 신화 속 영웅의 가장 아름다운 본성이라고. 비논리적이라고, 비과학적이라고, 난센스라고 비웃지 말고, 신화를 통해 인류의 잊힌 기억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라고.
    괴물을 죽인답시고, 미신을 타파한답시고, 우리 안에 은거하던 소중한 신들까지 죽이지는 말라고. 운명의 미로에서 좌충우돌하며 삶의 신비를 하나씩 걸음마 하며 배웠던 영웅들의 숨 가쁜 호흡을 들어보라고. 신화의 첫번째 기능은, 지금 여기 바로 우리가 존재하는 이곳을 성소(聖所)로 만드는 것이라고. ‘덧없는’ 신화의 ‘명징한’ 물질성을 눈치 챈 사람은, 어디서나 신의 광휘를 보고, 어디서나 신의 축복을 읽어낸다. 우리가 가장 원하는 꿈, 누구에게도 말해보지 못한 수줍은 꿈을, 밤새워 공들여 또박또박 종이 위에 적어보자. 그것이 바로 우리 안의 신화다.  

   
 

어떤 것도, 신(神)조차 우리의 자아보다 더 크지는 않다.
 (……) 한 푼도 없는 나나 당신도 이 땅의 알짜를 구입할 수 있다.
 (……) 어떤 미약한 물건도 우주의 수레바퀴의 중심이 될 수 있다.
 (……) 나는 만물에서 신을 보고 듣지만 조금도 신을 이해하진 못한다.
 (……) 나는 거리에 떨어진 신의 편지들을 본다. 그 하나하나에 신의 서명이 있다.
 나는 그 자리에 놓아둔다. 어디로 가든
 또 다른 편지가 틀림없이 영원토록 올 것을 아는 까닭에. 

- 월트 휘트먼의 詩, <풀잎>(185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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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우북 2009-09-04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학의 흥미진진한 묘미, 또 그런 인문학을 공부하는 분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멋진 글이네요. 주말을 여는 감동적인 글에 힘을 얻고 갑니다 :)

깃털하나 2009-09-04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센과 하쿠가 부둥켜 안고 우는 장면, 정말 어여뻤지요....마지막 월트 휘트먼의 시가 오랫동안 마음에 여운을 남기네요.

쾌몽 2009-09-04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 편의 애니메이션에 이렇게 방대한 의미가 담길 수가 있군요. 잘 읽었습니다.

sotkfkd 2009-09-20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조차 우리의 자아보다 크지 않다.

you & I 2009-11-04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거리에 떨어진 신의 편지들을 곳곳에서 보다니, 게다가 어차피 또 올 것이니 집었다가 도로 내려놓다니, 캬~ 멋지구리 합니다그려 ㅋㅋ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⑨

   

 9. ‘너’를 찾으러 떠난 길 끝에서, ‘나’를 만나다

   
  방랑하는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다. 새로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성취도 생각하지 말고, 하여간 그와 비슷한 것은 절대 생각하지 마라. 그냥 이런 생각만 하라.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 해야 행복할까? (……) 룰렛 공은 결코 ‘아, 여기 내려앉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기 내려앉아야 사람들이 나를 더 좋아할 거야’하고 생각하진 않는다. (……)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을 치워버려야 희열이 온다.
- 조셉 캠벨,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99~100쪽.

신화는, 다함없는 우주의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 놀라운 것은 심원한 창조적 중심을 촉발하고 고무하는 특징적인 영험이 아이들 놀이방의 하찮은 동화에도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 조셉 캠벨, 이윤기 역, <세계의 영웅신화>, 대원사, 1996, 10쪽.
 
   

   센이 원웨이 티켓을 들고 떠난 후, 사경을 헤매던 하쿠는 비로소 깨어난다. “하쿠, 정신이 든거냐?” 하쿠는 일어나자마자 센을 찾는다. “어둠 속에서 치히로가 여러 번 절 불렀고 목소릴 따라가다가 깨어보니 여기였어요.” 가마 할아범은 놀란다. “그 애의 진짜 이름이 치히로라구?” 하쿠의 꿈속에서 간절하게 하쿠를 부르던 치히로의 목소리는 곧 미궁을 헤매던 하쿠에게 ‘아리아드네의 실’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센이 제니바를 찾아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는 전언을 들은 하쿠는, 이 모든 저주의 근원인 유바바를 찾아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결심한다.

   한편 유바바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온천 경영을 위한 손익분기점을 계산하느라 주판알만 튕기고 있다. “이 정도 금으로 어떻게 적자를 때워? 멍청한 센이 횡재를 날려버렸어.” 하쿠는 돈에 걸신들린 유바바의 모습을 보며 센을 옹호한다. “센 덕분에 목숨을 건진 걸요.” 유바바는 화가 잔뜩 나 있다. “감히 온천을 이 꼴로 만들고 도망을 가? 센은 부모까지 버리고 갔어! 센의 부모를 베이컨이든 햄이든 만들어버려!” 놀란 하쿠는 유바바를 제지한다. 센을 구하기 위해 유바바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하쿠. “기다려요! 소중한 걸 잃고도 아직 모르겠습니까?” 이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 챈 유바바는, 돈 계산하느라 안중에도 없던 수퍼베이비를 애타게 찾기 시작한다. 걷지도 못하던 아기가 실종된 것을 발견하자 유바바는 대경실색한다. 화려한 장난감과 과도한 장신구로 치장된, 수퍼베이비의 밀폐된 방은 텅 빈 폐허가 되어 있었다. 

   “우리 아기를 어디에 숨겼어?” 하쿠는 침착하게 대답한다. “제니바의 집에요.” 유바바는 드디어 이성을 잃고 폭발한다. “제니바?! 못된 마녀 계집이 날 이겼다고 생각하는 거냐?” 유바바는 완벽한 악행의 주모자처럼 보였으나, 그녀의 결점은 의외로 많았다. 자발적으로 센을 따라간 수퍼베이비로 인해, 유바바는 센의 부모를 함부로 베이컨으로 만들지 못하게 된다. 물샐 틈 없는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유바바에게도 이토록 치명적인 틈새가 있다. 타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무소불위의 주재자처럼 보이던 유바바도 결국은 더 큰 운명의 그림 가운데 한 조각일 뿐이었다. 유바바는 하쿠에게 질문한다. “네 계획이 뭐냐?” 하쿠는 아기를 두고 협상을 하는 수밖에 없다. “아기를 데리고 올 테니 센과 부모님을 인간세계에 보내줘요.” 유바바는 분노한다. 그러나 이 분노는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기에 더 이상 유바바의 카리스마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 넌 어떻게 되는 거지? 나한테 찢겨 죽어도 좋다는 말이냐?” 센은 하쿠를 위해 목숨을 걸고, 하쿠는 센을 위해 목숨을 건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어느새 ‘나의 일’과 ‘남의 일’의 구분이 없어져버린다.

   한편, 센은 수퍼베이비와 가오나시를 대동하고 제니바가 살고 있는 낡은 오두막집에 무사히 도착한다.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던 수퍼베이비는 어느새 센의 도움도 거부하고 뒤뚱뒤뚱 혼자 걸으며 제니바의 집을 향해 행진한다. 다행히도 제니바는 센 일행을 반갑게 맞아준다. 뚱보 생쥐가 된 수퍼 베이비는 처음으로 구경하는 바깥세상이 재미있는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니바의 물레질을 도우며 혼자 신났다. 근심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센은 제니바에게 용서를 빈다. “하쿠가 훔친 걸 돌려 드리려고 왔어요. 하쿠를 대신해서 사과 할게요.” 제니바는 저주가 걸린 도장을 지니고도 아무렇지 않은 센이 신기하다. “이거 갖고도 아무렇지 않았어? 엥? 주문이 사라졌잖아!” “도장에 있던 이상한 벌레를 모르고 밟아버렸어요.” “그건 동생이 하쿠를 조종하기 위해 용의 뱃속에 몰래 넣은 벌레야. 잘했어.”  자신도 모르게 엄청난 미션을 수행해낸 센은 얼굴 없는 요괴 가오나시와 생쥐가 된 수퍼베이비도 원래대로 돌려달라고 부탁한다. 제니바는 웃으며 말한다. “저런, 마법은 벌써 풀려버렸단다.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 생쥐-아기는 엄마 유바바에게 돌아갈 생각은 꿈에도 없다는 듯 신나게 물레질만 하다가 야금야금 과자를 씹어 먹는다.  

   유바바는 제니바를 싫어하지만 제니바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린 합쳐야 제 몫을 내는데 안 맞아서 문제야. 고약한 성질 알잖아! 쌍둥이 마녀라는 운명부터가 문제지만!” 그리고 하쿠와 센을 돕고는 싶지만 자신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돕고 싶지만 나도 어쩔 수 없어. 이 세계의 규칙이니까. 네 부모와 남자 친구인 용도 네 스스로 보살펴.” 센도 스스로 보살피고 싶지만 도대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절박하게 묻는다. “힌트라도 줄 순 없나요? 하쿠랑 전 오래전에 만난 듯해요.” 제니바는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그렇다면 얘기가 빨라지지. 일어나지 않은 일은 잊혀질 수도 없는 법. 생각이 안 날 뿐이지.” 센은 결국 자신의 마음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 해답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제니바는 가오나시와 생쥐, 센과 함께 열심히 물레질을 하여 무언가를 만든다. “너희들이 도와줄 테냐? 조금만 더 힘내. 그래, 넌 정말 잘하는구나.” 제니바는 흔히 생각하는 마법사와 달리 자신의 ‘노동’만으로 삶을 꾸려가는 듯하다. “마법으로 만든 건 다 소용없어.” 아무리 대단한 마법이라도 마법이 풀리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공들여 손으로 직접 만든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너무 늦었으니 자고 가라는 제니바의 말에, 센은 한 시도 쉴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 “전 돌아가야 돼요. 안 그럼 하쿠가 죽어요. 아빠, 엄마도 잡아먹힐 거구요.” 제니바는 생쥐와 가오나시의 도움으로 함께 만든 머리띠를 주며 말한다. “부적! 네 친구들이 뽑은 실이야.” 센이 떠나려는 순간, 뜻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온다. 다시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온 하쿠. “하쿠! 하쿠! 천만다행이야. 상처는 이제 괜찮아? 정말 다행이야.” 제니바는 하쿠를 용서해주며 센을 부탁한다. “네가 한 짓은 이제 탓하지 않으마. 그 대신 센을 잘 지켜라.” 센은 예기치 않은 모험의 세계에 빠져 고초를 겪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멋진 마녀 제니바의 사랑 또한 그 아름다운 우연 중 하나다. 제니바는 갈 곳 잃은 가오나시를 곁에 두기로 한다. “넌 남아서 내 일을 거들어 다오.” 어느새 유순해진 가오나시는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할머니! 고마워요, 갈게요. 제 본명은 치히로예요.” “치히로, 좋은 이름이야. 네 이름을 소중히 해야 한다.” 

   아무리 대단한 마녀도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 운명의 여신 모이라(Moira) 앞에서는 제우스도 어쩔 수 없었듯이. 센은 깨닫는다. 내 스스로 나의 운명을 기억해내야 한다는 것을. 가장 중요한 임무는 오직 혼자서 해내야 한다는 것을. 제니바는 운명의 봉인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주지는 않지만, 그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려준다. 그곳이 바로 센의 마음속이다. 그 마음의 후미진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어 운명의 봉인을 푸는 열쇠를 찾아내야 하는 사람은 센 자신이다. 아무도 그 임무를 대신해줄 수 없다. 영웅의 마지막 미션은 가장 어려운 만남, 즉 자기 자신과의 투명한 만남이다. 그리고 센과 하쿠는 예감한다. 너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곧 나를 찾는 길이었음을. 너를 구하러 떠난 여행이 곧 나를 구원하는 길이었음을. 너 없이는 나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외따로 동떨어진 ‘나’로서가 아니라 ‘너’로서 이해될 때, 비로소 우리를 옭아맨 운명의 상처와 대면할 수 있다는 것을.

   
  융은 이른바 미확인비행물체(UFO)에 관한 현대의 신화가 ‘무너’가 인류의 환상적 기대를 이야기해주고 있다고 썼다. 사람들은 외부 세계로부터 방문자가 와주기를 고대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구원이 그로부터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주 시대의 개막은 우리에게 외계(외부우주)로의 여행이 우리를 다시 내부 우주로 전환시킨다는 사실을 되새겨주었다. 하나님의 나라(천국)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신들이 ‘저 바깥’에서 활동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천국)는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의 마음에 불러낸다. 아버지의 나라(천국)는 여기 있다. 우리는 세계를 바라보고 그 광휘를 목도한다.
 - 조셉 캠벨,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240~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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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모 2009-09-03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UFO를 향한 판타지가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었군요~! 누군가 우릴 구해줄 거라는 환상...구원은 이 세상 바깥에 있다는 상상...

비로그인 2009-09-04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자신과의 투명한 만남.... 운명의 상처와 대면한다...

sotkfkd 2009-09-20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love hurts 2009-11-04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이들 놀이방의 하찮은 동화 속에 숨은 비밀 암호 찾기~ 흐...말처럼 쉽지가 않죠.ㅠㅠ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⑧

   

 8. 원웨이 티켓(one-way ticket)
: 당신은 돌아올 수 없다. 그래도 떠나겠는가? 

   
 

 나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로 가는 길,
 나를 지나면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길,
 나를 지나면 길 잃은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길.
  

- 단테, <지옥편> 중에서

 

 

   
   원웨이 티켓(편도승차권)이라는 말에는 ‘피할 길을 주지 않는 확실한 방법’이라는 뜻이 있다. '원웨이 티켓'의 지배적인 뉘앙스는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떠나야 하는 절박함’이다. 이 단어가 전해주는 피할 수 없는 절박한 느낌과 함께 떠오르는 것은 영웅의 비장미이기도 하다. 영웅의 영웅다움이 완성되는 순간, 그 순간은 그의 능력이 출중해서도 아니고 그의 명예가 하늘을 찔러서도 아니다.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야만 그의 여정이 완성될 때, 뒤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는 결연함,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죽음의 길을 떠나는 초연함. 그것은 언제나 영웅 서사의 비극적 숭고미를 장식하는 화룡점정의 모티브였다. 오물신이 되어버린 강의 신을 ‘정화’시켜 그의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의 이름을 잊어 존재의 의미조차 상실한 하쿠(용)의 운명을 바꾸기까지 한, 10살 소녀 센. 그녀의 신화적 통과의례의 클라이막스도 바로 이 ‘원웨이 티켓’의 운명에 가로놓여 있다. 

   하쿠는 일단 진정이 되었지만 좀처럼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다. 가마 할아범은 “마법의 상처는 방심해선 안돼.”라고 귀띔해준다. 잠든 하쿠를 바라보며 할아범은 하쿠의 과거를 회상한다. 베일에 가려졌던 신비의 소년 하쿠의 과거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쿠도 센처럼 불쑥 나타나선 마법사가 되고 싶댔어. 난 반대했어. 마녀의 제자가 되어봤자 별수 없다고 말이야. 하지만 소용이 없었어. 돌아갈 곳이 없다며 유바바의 제자가 되어버렸어.” 하쿠는 길 잃은 영웅의 위기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다. 비범한 능력과 선한 심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나침반을 찾지 못해 존재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는 하쿠. “하쿠는 그러던 중 점점 창백해지고 눈매가 사나워졌어.” 센은 다급하다. 하쿠가 훔쳤다는 이 도장만 돌려주면 하쿠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이거 돌려주고 올게요. 사과하고 하쿠를 살려달라고 할래요. 제니바가 있는 곳을 가르쳐줘요.”

    가마 할아범은 불면 날아갈 것 같았던 센의 엄청난 저돌성에 또 한 번 놀란다. 그곳은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고, 제니바는 무서운 마녀라고, 그곳과의 왕복 교통이 끊긴 지가 오래라고 설명해준다. 그래도 하쿠를 구해야 한다는 센의 흔들림 없는 눈빛에 가마 할아범은 할 수 없이 주섬주섬 기차표를 찾는다. “가는 건 갈 수 있다만 돌아오는 길이 없….” 이때 린이 들어와 유바바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유바바가 길길이 날뛰면서 널 찾아. 그 통 큰 손님은 알고 보니 요괴였어. 유바바는 네가 그를 끌어들였대. 벌써 세 명이나 집어 삼켜버렸어.” 

   사람이든 물건이든 닥치는 대로 탐욕스레 폭식하던 가오나시는 마침내 거대한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때 가마 할아범은 드디어 제니바의 집 쪽으로 가는 열차표를 찾았다고 전해준다. “40년 전에 쓰고 남은 거야. 늪의 바닥이란 역이야. 여섯 번째 역이야. 예전엔 돌아오는 기차도 있었지만 지금은 가는 기차만 있어. 그래도 가겠느냐?”

    이것은 신화 속 영웅에게만 해당되는 순간이 아니다. 인생에서 가장 힘겨운 선택을 해야 할 때 우리 안의 잠재된 힘이 자신도 모르게 솟아오르는 순간, 인생에서 치밀하게 계획되지 않았던 거대한 우연에 봉착하는 순간,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던 두려움과 만나는 순간. 그때가 우리의 영혼이 변신의 문턱을 넘는 순간이다. 
   
 

“우리 안의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는 삶이 가장 힘겹게 느껴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 삶의 고통과 잔인함에 대한 부정은 결국 삶에 대한 부정이다. 그 모든 것에 ‘예’라고 말할 수 있게 된 후에 우리는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조셉 캠벨, <신화와 인생>, 27쪽

 
   
   센에게도 그 순간이 찾아왔다. 그녀는 굳이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어려운 길을 택한다. 그 길을 가면 엄청난 영광이나 성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친구 하나를 구할 수 있을 뿐이다. 보장할 수 없는 이익이 전혀 없는데도, 다치거나 죽거나 돌아오지 못할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는 떠나기로 한다. 떠나기 전 마지막 해야할 일, 그것은 괴물이 된 가오나시를 만나는 것이다. 

   거대한 이빨을 가진 집채만한 괴물로 변해버린 가오나시는 센을 내놓으라며 난동을 부린다. “어딨어? 센을 내놔!” 유바바는 모든 것을 센의 탓으로 돌린다. “왜 이렇게 꾸물거렸어? 손해가 막심하잖아. 기분 좋게 만들어서 금을 짜내.” 욕심쟁이 유바바는 잡아먹힌 사람들의 생사는 안중에도 없고 가오나시에게서 금을 더 뜯어낼 궁리만 한다. 이때 생쥐로 변한 수퍼 베이비가 엄마를 알아보며 눈을 깜빡거리자 유바바는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심술궂게 투덜거린다. “그 더러운 생쥐는 뭐야?” 센은 천하의 유바바가 설마 자기 아들을 못 알아볼까 의심한다. “모르시겠어요?” 유바바는 손사레를 친다. “알 턱이 있나! 징그러워!” 자신의 몸뚱이 하나 건사하지 못했던 여린 소녀 치히로는 어느새 ‘적의 아들’까지 건사해야 할 판이다. 아무도 돌보지 못했던 그녀가 누군가를 돌보고 살리고 치유하는 존재가 된다. 가오나시를 방 안에 가둔 유바바는 센을 혼자 들여보내 독대시킨다. 

   가오나시의 풍채와 비교하면 백분의 일도 안 될 것 같은 센은 주눅들지 않고 조용히 묻는다. “말해 봐. 넌 어디서 왔어? 난 가야할 데가 있어.” 가오나시는 무조건 센이 좋다고, 센을 갖고 싶다고 중얼거릴 뿐이다. “네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 너한텐 내가 원하는 게 없어. 집은 어디야? 아빠, 엄마는 있지?” 커다란 가오나시는 어울리지 않는 투정을 부린다. “싫어, 싫어! 난 외로워!” “집을 모르는 거야?” “센을 갖고 싶어” 가오나시의 욕구는 지극히 단순하다. “갖고 싶다. 갖고 싶다. 센, 갖고 싶다. 먹고 싶다. 먹고 싶다. 센, 먹고 싶다.” 센은 하쿠를 먹이고 남은 경단을 떠올린다. “나를 먹을 거면 먼저 이걸 먹어. 부모님께 드릴 건데 너 줄게.” 사랑하지 않는 대상에게도, 자신을 괴롭히는 대상에게까지도, 센은 부모님을 살릴 수 있는 경단을 준다. 경단을 먹은 순간 가오나시의 입에서는 그동안 게걸스레 먹어치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온다.

    모두가 기피하는 더러움을 껴안고 그 존재로부터 더러움을 토해내게 하는, ‘구토와 정화’의 모티브는 어느새 센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그리고 이 구토와 정화야말로 ‘800만 신들이 모여 목욕을 하는 유바바 온천’ 본연의 소명에 가장 어울리는 행위가 아닐까. 가오나시와 오물신으로 대변되는 과잉과 폭식, 더러움과 그로테스크함은 단지 그들 개인의 ‘오명’이 아니라 인간이 저버린 자연의 은유이면서 동시에 토해내야 할 만큼 폭식하고 소비하고 낭비해온 자본주의사회의 인간 자신의 은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가오나시는 다시 ‘슬림한’ 옛 모습을 찾고 소리 없이 센을 따르는 조용한 오타쿠적 면모(?)를 되찾게 되었다. 센은 비로소 마음 편하게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부모님을 구할 수 있는 경단은 없어졌고, 센은 삶을 위해 죽음의 영토를 통과하는 영웅의 마지막 문턱을 넘어야 한다. 작은 생쥐가 되어버린 수퍼베이비와 얼굴 없는 귀신 가오나시를 여행의 동반자로 삼아. 

   에로스의 사랑과 아프로디테의 허락을 얻기 위해 페르세포네가 살고 있는 하데스로 떠나는 프시케처럼,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살려내기 위해 하데스로 내려간 오르페우스처럼,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죽음 저편의 세계로 센은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난다. 그곳으로 떠나가는 기차표는 오직 원웨이 티켓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돌아오는 길이 없을 것을 겁내지 않는다. 하쿠를 친친 동여매고 있는 가혹한 운명의 사슬을 풀어주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 그 공포가 그녀를 사로잡은 나머지 그녀는 괴물이 된 가오나시도, 자신을 협박하는 유바바도, 돌아올 길이 없는 원웨이 티켓도 두렵지 않다. 자신을 괴롭힌 수퍼베이비와 자신을 스토킹한 가오나시까지 여행의 동반자로 삼은 센의 따스함,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자가 자신도 모르게 실현하는 우정이다. 그녀의 적들은 어느새 그녀의 친구가 된다. 그리스 신화의 스틱스 강처럼 되돌릴 수 없는 운명의 짐을 짊어지고, 저기 길 떠나는 소녀의 처연한 뒷모습은 시리도록 아름답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 조셉 캠벨, 이윤기 역, <세계의 영웅신화>, 1996, 대원사,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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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09-02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센의 처연한 뒷모습만 시리도록 아름다운 게 아니라, 여울님의 글도 그래요. 마지막 문장과 이미지를 보며, 울, 컥,,,,,

도란도란 2009-09-02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센과 치히로 내용에 집중해서 읽고 있었는데, 이제는 조셉 캠벨의 책이 읽고 싶어집니다. "우리안의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는 삶이 가장 힘겹게 느껴질 때 찾아온다."

doingnow12 2009-09-10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마할아범한테 줄 수 있는 목욕패(?)가 저한테도 몇개있음 얼마나 좋을까요?ㅋㅋ 영화를 보면서 저도 저렇게 속시원하게 씻었으면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나요..ㅋㅋ멋진글 잘 읽었습니당

sotkfkd 2009-09-13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센이 곧 영웅! 센에게는 추호도 영웅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그래서 곧 영웅! 잘 읽엇습니다.
조셉 켐밸을 다시 공부하고 싶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