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굿 윌 헌팅>과 수전 손택 - ②

 

2. ‘천재’로 호명되는 순간 ‘죄수’로 호명되다


   영화의 첫 장면. MIT 대학 교실은 대학원생들로 가득하다. 램보 교수(스텔란 스카스가드)는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수학 수훈상 수상자답게 호기롭고 당당하다. 그는 수업을 마치며 학생들에게 과제를 낸다. “본관 복도 칠판에 푸리에 이론을 적어뒀으니, 누구든 학기 말까지 풀어주기 바란다. 그걸 푼 사람은 내 수제자로서 명예와 부를 얻게 될 것이며 그 성과가 기록되고 영예로운 MIT 테크지에 이름이 오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시큰둥하다. 아무리 부와 명예가 좋다지만 워낙 어려운 문제라 자신이 풀어낼 리가 없다는 얼굴들이다. 수업이 끝난 후. 청소부 윌(맷 데이먼)은 칠판에 적힌 문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윌은 언제나처럼 청소기로 복도를 청소하다가 칠판 위에다 뭔가를 끼적인다.

   램보는 토요일 MIT 대학 동창회에서 친구들을 만나던 중 학생의 전갈을 받는다. 문제를 푼 사람이 나타났다고. 궁금해서 월요일까지 참을 수가 없다고. 램보는 교실 앞으로 가서 정답을 확인하지만, 문제를 푼 영광의 주인공은 색출하지 못한다. 월요일, 램보 교수의 강의실에는 때아닌 인파가 몰린다. 묘령의 수학 천재가 과연 누구인지 궁금해 모여든 것이다. 역시 그는 나타나지 않는다. 램보는 또 하나의 과제를 낸다. 자신과 동료들이 2년 넘게 걸려 간신히 푼 수학의 난제를. 그는 문제를 풀어놓고 나타나지 않는 학생의 행위를 교수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이해한다. “모두에게 공표하겠다. 학생의 도전에 우리 교수진은 열정적으로 화답할 것이다.”
   이런 소동을 알 리 없는 청소부 윌은 또 언제나처럼 무심하게 청소를 하다가 마법에 이끌리듯, 대수롭지 않게 그 문제를 풀어낸다. 드디어 램보 교수가 칠판 앞에 서 있는 윌을 발견한다. 웬 청소부가 장난으로 낙서를 하는 줄로 오해한 램보는 도망치는 윌을 뒤쫓으며 소리를 버럭 지른다. “학생들 칠판에 낙서를 하면 어떡하나? 거기 서지 못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다. 수학계의 거물 램보 교수도 2년이나 걸려 간신히 푼 문제를 몇 분 만에 푼 바로 그 주인공이, MIT 학생이 아니라 고등학교를 중퇴한 청소부 청년이라는 것을. 램보 교수는 우여곡절 끝에 윌의 행방을 찾아낸다.  

   이 와중에 윌은 유치원 때 자기를 괴롭혔던 아이를 우연히 만나 시비를 걸고 패싸움을 벌이다가 투옥되고 만다. 알고 보니 갓 스물한 살 청년 윌 헌팅의 전과는 화려하다. 법정에서 윌은 마치 오랫동안 변호사 생활을 해온 듯 능숙하게 자신에 대한 변론을 하고 있다. 판사는 윌의 화려한 수사학과 능청맞은 태도에 치를 떨다가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윌에게 말한다.

    “지금까지 10분 간 자네 이야기를 들으며 자네 전과 기록을 훑어보고 있었는데 놀랍더군. 93년 6월, 폭행죄 입건. 93년 9월 또 폭행죄. 92년 2월에는 차량 절도죄. 게다가 그땐 자기변호를 해서 1798년 마차 소유권을 인용해 기각시켰더군. 95년 1월에는 경관 사칭죄. 상해, 절도, 체포불응죄. 모두 패소판정을 받아냈어. 물론 피고가 몇 번이나 입양됐다 파양됐고 그 중 세 번은 학대로 인한 강제 파양이란 거 아네. (이 순간 여유 만만했던 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하지만 경찰을 친 건 용납할 수 없어. 따라서 기소 기각 신청은 기각한다. 보석금은 5만 달러로 책정한다.”

   램보 교수는 윌이 판결을 받는 장면을 조용히 지켜보며 착잡한 표정을 짓는다. 윌은 램보 교수에게 ‘천재’로 호명되는 순간 법정에서 ‘죄수’로 호명되는 아이러니에 빠진 것이다.

   알튀세는 누군가를 이름 붙여 호명하는 것 자체가 권력을 생산하는 효과를 지닌다고 지적했다. 경찰이 행인에게 “어이, 이봐!”라고 불러 세우는 순간, 행인은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180도 몸을 돌려 경찰을 바라본다. 1초도 안 되는 이 짧은 순간, 행인을 불러 세워 직무를 수행하는 경찰의 권력은 성공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찰은 아무나 불러 세울 수 있는 자신의 권력을 발동시킨 것이고,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대답한 시민은 그 권력의 효과를 인정한 셈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전 손택은 ‘암 환자’라고 호명되는 순간, ‘에이즈 환자’라고 호명되는 순간, 그 사람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옭아매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그물을 예리하게 감지했다.
   수전 손택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폐병으로 잃었다. 사랑하는 친구를 에이즈로 잃고, 자신은 유방암과 자궁암으로 고통받았다. 수전 손택은 정작 질병의 치료만큼이나 고통스러운 것은, 때로 질병 자체보다 환자를 더 괴롭히는 것은, 환자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의 갑론을박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질병에 대한 각종 환상과 왜곡된 이미지, 질병과 환자를 둘러싼 제3자들의 열띤 논쟁들이 오히려 질병을 타자화시키고 환자를 소외시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천재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천재도, 크게 보면 이 사회에서 ‘환자’처럼 낙인찍히는 효과가 있다. 천재로 호명되는 순간 사람들은 그의 ‘재능’과 ‘IQ’, 그의 ‘이용 가치’에만 관심을 쏟을 뿐 그의 진심에는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램보 교수는 윌 헌팅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를 ‘천재’로 호명하지만 윌 헌팅이라는 인간 자체에게는 커다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물론 램보 교수는 윌의 인생에 있어 구원의 메신저 같은 사람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윌은 어쩌면 평생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자폐적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는 윌의 재능이 중요할 뿐 윌이 빠져 있는 고통은 윌의 천재성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불과하다. 그는 윌의 고통이 자가증식한 나머지 윌의 정체성 자체를 구성하는 세포가 되어 있음을 감지하지 못한다. 치유되어야 할 바이러스, 제거되어야 할 병균으로서의 고통. 램보 교수는 천재소년 윌 헌팅을 발견하는 순간, 범죄자 윌 헌팅의 골치 아픈 인생과 맞닥뜨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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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소녀 2009-08-11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맷 데이먼 완전 파릇파릇할 때네요. +_+

맨손체조 2009-08-11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영화도 멋지지만, 엘리엇 스미스의 노래도 참 좋죠? 시네필 다이어리에서도 음악이 흘러나왔으면 좋겠네요. 그럼 곱절의 감동이 밀려오겠죠.

sotkfkd 2009-09-13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척이나 좋아하는 영화, 아마 열 번은 봤을까?
잘 읽었습니다.
 

 


영화 <굿 윌 헌팅>과 수전 손택(Susan Sontag) - ①

 

1. 편집되는 고통, 유통되는 슬픔 <1>

   
  고통 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다.

사진은 대상화한다. 사진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변형시켜버린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중에서.
 
   

   현대인에게는 눈물의 에티켓이 있다. 이토록 쿨한 세계에서는 아무 데서나 주책없이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를 보거나 드라마를 보면서 운다. 사방이 꽉 막힌 스크린 앞에서, 혹은 아무도 우는 내 모습을 보지 않는 텅 빈 방 안의 TV를 보면서. 화면 안에서는 저토록 넘쳐나는 눈물이 현실 속에서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현대인은 미디어의 화면을 핑계로, 구실로, 울고 웃고 떠드는 데 익숙하다. 그런데 현실을 가장 리얼하게 재현한다고 믿어왔던 ‘사진’을 보면서도 울 수 있을까.
   사진에는 무엇보다 ‘소리’가 없다. 소리에는 감정을 증폭시키는 특유의 힘이 있다. 우리는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을 통해 비치는 화면을 보며 울지만 정작 거기서 ‘사운드’가 빠진다면 화면 속 인물에게 감정이입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포토저널리즘이 극대화된 현대의 사진문화 속에서 대부분 세련되게 다듬어진, ‘연출된 사진 이미지’에 익숙해진 우리는 사진이 막상 지나치게 리얼한(?) 이미지를 담고 있을 때 고개를 돌린다. 너무 끔찍하거나, 너무 ‘날 것’이거나, 그 고통이 내게 전염될까 봐, 혹은 사진으로 전시된 고통이 너무 생생해 구역질이 난다는 이유로.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대해 가하는 복수다”라는 도발적인 선언으로 유명한 평론가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을 머나먼 나라에서나 일어나는 구경거리로 만드는 각종 사진들, 그리고 그 사진들을 유통시키는 저널리즘을 비판했다. 수전 손택은 신문이나 TV를 통해 매일 보는 재난 사진이야말로 현대인이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게 만드는 가장 일상적인 매체임을 지적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스펙터클하게 전시하는 사진 이미지를 보며 고통에 공감함으로써 함께 아파하기보다는 ‘전시된 고통’의 이미지에 마취되어, 고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끝내는 고통을 타자화시킨다는 것이다.

   
  실제의 공포를 근접 촬영한 이미지를 쳐다볼 때에는 충격과 더불어 수치감이 존재한다. 아마 극한의 상태에서 발생한 현실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를 쳐다볼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사람은 그런 고통을 격감시키려 뭔가를 할 수 있었던 사람(즉, 그런 사진이 촬영됐던 군사 병원의 외과 의사)이나 그런 고통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었던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의도했든 안 했든, 나머지 우리는 관음증 환자이다.
어떤 경우가 됐든 간에, 이런 섬뜩함은 우리를 구경꾼이나 겁쟁이로 만들어버린다. 그 자체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사람들로.”

-수전 손택, 이재원 역, <타인의 고통>, 이후, 2004, 67~68쪽. 
 
   

   수전 손택이 비판한 것은 ‘사진’이라는 미디어로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기 쉽게’ 편집하고 수정하여 ‘유통’시키는 현대인의 잔혹성이다. 그녀의 사진론은 ‘미디어’를 통해 매개되는 현실 속에서 과연 ‘진짜 고통’과 마주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래, 영화도 미디어일 뿐이다. 영화는 두 시간 만에 끝나버린다. 그런데 영화의 러닝타임은 두 시간 안팎이지만,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상영되기 시작된다.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끊임없이 새로운 물음표를 던지는 영화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평생 동안 ‘1인분의 삶’밖에 살 수 없는 인간이 ‘타인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아주 제한적이지만 여전히 소중한 메시지의 통로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내게 <굿 윌 헌팅>은 ‘천재 소년의 성장 스토리’라기보다 ‘타인의 고통에 눈뜨는 소년의 내밀한 고백’으로 다가왔다. 자기 고통에 골몰하느라 이 세상 그 누구의 고통에도 무관심하던 한 소년이 비로소 타인의 고통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몇 번이나 입양되고 파양되었으며, 알코올 중독에 빠진 양아버지의 매일 밤 계속되는 린치에 학대당하던 소년. 자신의 고통을 반복하여 곱씹으며 매일매일 영화처럼 ‘리와인드’하던 소년. 그 고통에 중독되어 한 번도 타인을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이 없던 한 소년이, 그래서 세상 모든 일이 ‘사진 속의 아련한 풍경’처럼 멀게만 느껴졌던 소년이, 진정한 소울메이트를 만나 ‘액자 속에 갇혀 있던 세상’을 비로소 날 것으로 만나는 이야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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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08-10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수전 손택과 '본' 씨리즈의 맷 데이먼이 만났다. 또 어떤 격렬한 스파크가 일어날지 무척 기대 됩니다.

프라푸치노 2009-08-10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 윌 헌팅~ 케이블에서 해줄 때마다 매번 새로운 느낌으로 다시 보는 영화예요. 맷 데이먼의 풋풋한 모습과 밴 에플랙의 반항기 어린 모습도 다시 보는 재미~ㅋㅋ

벌꿀농장 2009-08-11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수전 손택, 너무 좋아하는 분. 여울님만의 생각과 수전 손택이 만났을 때, 또 어떤 재미있는 글이 나올지 궁금하네요. ^^

sotkfkd 2009-09-13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집되는 고통, 유통되는 슬픔! 참 맘이 아프네요.
 

 


영화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 마지막회

 

10. 무한미디어 사회의 구별짓기하다


   몸은 살아 있는 문화의 블랙박스다. 몸은 한 개인이 흡수해온 모든 문화적 기호의 집결체다. 이제 현대인은 상대방의 피부 상태를 보고 ‘나이’를 짐작하기보다는 그의 ‘계급’을 짐작한다. 차이의 생산을 통해 차별화되는 신체 이미지들. 눈길 한 번으로 상대방의 계급을 휘리릭 ‘스캐닝’하는 경이로운 독심술이 가능해졌다. 명품 화장품, 명품 의류, 고급 피트니스 클럽 회원권 등의 소비상품은 상층문화의 ‘다름’을 구별짓기하는 기호들인 것이다. ‘나태한’ 몸은 게으름과 가난의 상징이며, ‘바람직한 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문화적 패스포트가 되었다.

   몸에 의해 해석되는 인간으로 전락하는 현대인들. 몸이라는 취향과 계급의 전시장을 화려하게 디스플레이하지 못하면 금세 ‘루저’ 취급을 받는다. 아니, 누가 특별히 그렇게 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루저’로 단죄한다. 김애란의 소설 「성탄특선」은 단지 크리스마스 데이트 때 입고 나갈 옷이 없다는 이유로 남친에게 연락도 없이 시골집에 내려가버린 20대 여성의 심리를 묘사한다.

   
  학비를 모은 뒤 남은 돈으로 멋을 부려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블라우스를 사고 나면 그에 어울리는 치마가 없고, 치마를 사고 나면 신발이 없었다. 여자의 옷차림은 스카프를 둘러맨 오리처럼 어정쩡한 구석이 있었다. 여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한동안 새로 산 치마 한 벌에도 기분이 좋아, 온종일 혼자만의 자신감에 휩싸여 캠퍼스를 날아다니곤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여자는 알게 되었다. 세련됨이란 한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오랜 소비 경험과 안목, 소품의 자연스러운 조화에서 나온다는 것을. 옷을 ‘잘’ 입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잘’ 입기 위해 감각만큼 필요한 것은 생활의 여유라는 것을. 스물한 살 여자는 남자에게 예뻐 보이고 싶었다. 그것은 허영심이기 전에 소박한 순정이었다. 그리하여 크리스마스 날, 남자가 여자의 옷맵시를 한 번도 비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입을 옷이 변변찮단 이유로 도망쳐버린 것이었다. 그날 혼자 소주를 마셨던 남자는 여자가 잠적한 까닭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다.

- 김애란, 「성탄특선」, <침이 고인다>, 문학과지성사, 2007, 91~92쪽.
 
   

   세련된 옷맵시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남친에게 예뻐 보이고 싶은 소박한 본능조차 충족시킬 수 없다는 절망. 친구의 결혼식을 앞두고 옷장 앞에서 좌절해본 모든 여성들은, ‘잘 빠진’ 짝퉁 가방 앞에서 몇 번이나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여본 적 있는 여성들은, 소설 속 이 여자의 말 못할 아픔을 이해할 것이다.

   <순수의 시대>는 자신들의 순수를 지키기 위해 언제나 타자의 침입을 경계하는 귀족공동체의 승리를, 메이‘들’의 승리를 보여준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도착적 폭력으로 공동체의 순수를 엄호한다. 메이가 누리는 화려한 귀족풍의 의상과 웅장한 인테리어는 ‘우리’의 범주에서 그 어떤 일탈도 수용하지 않겠다는, 타자에 대한 위협과 협박의 제스처다. 엘렌의 환영만찬을 집단 보이콧했던 그들이 엘렌을 추방하기 위한 환송만찬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것도 그들만의 순수를 사수하는 방식이다. 메이가 자아내는 티 없이 고운 순수의 이면에는 언제 ‘자기 것’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신경증적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
   뉴랜드는 아내가 죽어야 자신이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 시간이 흘러 뉴랜드가 57살이 되고 메이가 죽었을 때 뉴랜드는 아들의 권유로 프랑스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여전히 파리에서 혼자 살고 있는 엘렌의 소식을 들었을 때 뉴랜드의 마음은 또다시 흔들린다. 이제 그와 엘렌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아들이 어머니의 유언을 전해준다. “어머니는 걱정할 게 없다고 하셨어요. 왜냐하면 어머니의 부탁으로 아버지는 원하는 모든 걸 포기했다고 하셨거든요.” 뉴랜드는 아들의 사탕발림에 넘어간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해준다는 게 매우 큰 안도감을 가져다주었고 그의 희생을 아내가 이해했다는 데 크게 감동했다.” 

   뉴랜드는 아내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드리워놓은 감성의 그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뉴랜드는 엘렌의 집 앞에서 그녀의 집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올라가는 것보다 여기 있는 편이 더 현실 같군.” 이것은 가장 뉴랜드다운 방식이다. 환상 속에서 가장 행복한 인간, 뉴랜드는 환상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현실의 기쁨을 희생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인간이므로. 메이는 죽어서까지 그를 ‘메이의 커뮤니티’로 묶어둔다. 그가 메이의 이해에 감동받았다는 것, 그것은 그가 뉴욕 사교계의 아비투스를 드디어 완벽히 ‘자기화’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토록 숨 막혀 하던 ‘메이의 아비투스’를 마침내 자신의 내면의 세포로 ‘장기이식’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아닐까.  

   부르디외의 탁월함은 ‘주관적인 감정’까지 ‘아비투스’의 영역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감정도 제도적인 차원에서 일종의 능력이며, 감정이 자아 정체성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엘렌이 고상한 귀족의 으리으리한 저택을 보며 ‘우중충하다’고 느끼는 감정 자체가 메이에게는 ‘불경’한 감정이며 뉴랜드에게는 ‘충격적’인 감정이다. 개인의 흥분이나 동정심, 말할 수 없는 무의식까지도 감정의 사회학적 정의에 포함되기 때문에 이데올로기 분석이 놓치는 개개인의 ‘말할 수 없는 욕망’, ‘표현되지 않는 욕망’까지 상징적 권력의 동력으로 다룰 수 있게 된다.
   부르디외는 상징적 권력이란 세계를 만드는 권력이라 말한다. 즉, 남자/여자 높은/낮은 힘센/연약한 등등, 강자와 약자를 가루는 모든 대립항이 사회에 대한 인식을 결정하고 세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적 권력은 집단적 ‘호명’을 통해 공고화된다. 알파걸, 엄친딸/엄친아, 강부자, 고소영 등 기득권을 상징하는 각종 별명은 그렇지 못한 자들에 대한 배제와 차별의 권력으로 기능한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 88만원세대(88만원 받는 신입사원), 장미족(장기간 미취업족), 사오정(45세 정년퇴직), 삼팔선(38세에 은퇴), 토폐인(토익 공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 공시족(공무원시험 준비족), 취집(취업 대신 시집가기), 대오족(대학5학년생, 졸업을 미루는 학생)……. 이 모든 약자의 호명 또한 강자와 약자를 가르는 사회의 상징적 권력을 공고화한다. 이러한 구별짓기의 문화권력은 민주주의 사회가 지속될수록 견고해진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시너지효과를 일으킬 때, 누구나 개인의 노력을 통해 부르주아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퍼질 때, 허리가 휘어지게 대출을 받아서라도 아파트를 사놓으면 집값이 두 배 세 배로 뛸 것이라는 환상이 ‘대중화’될 때, ‘구별짓기’의 문화적 파장은 더욱 사회 깊숙이 내면화된다.

   우리는 아비투스의 그물망이 조종하는 대로 투표한다. 우리는 모든 선거가 자유로운 유권자의 선택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과정은 전혀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아비투스의 그물들이 우리의 신체를, 의식을, 무의식까지도 쥐고 흔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노동자 계층이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기현상이 일어나는 것조차도 그들의 문화적 선택이 지배계급의 논리에 따라 ‘규격화’된 현상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계급 착시’가 아닐까.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이론은 바로 인간의 육체를 통해 전달되는 권력 효과를 증명하는 개념이다. 단지 보수여당을 지지하고 투표하는 결과적 행위만이 아니라 뉴타운 공약 여부에 따라 후보를 판단하는 유권자의 취향 자체가, 뉴스에 대한 일상적 무관심이, ‘정치는 나와 상관없다’며 투표일에 휴가를 떠나는 무관심 자체가, 민주주의에 대한 습관적 냉소라는 아비투스를 구성하는 일상의 습속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가 속한 계급의 이익에 맞추어 개인의 선택을 내린다. 그 과정은 대부분 무의식적이거나 자각하기 어렵지만, 우리는 적군과 아군의 대립을 단지 보수 대 진보식의 커다란 구분이 아니라 아주 촘촘한 문화적 일상적 구별짓기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강남식과 강북식의 이분법도 있고 외제차와 국산차의 이분법도 있으며 연예인과 일반인이라는 식의 기상천외한 이분법도 있으며 얼짱과 얼꽝식의 당혹스러운 구분도 있고 나이트클럽에서 ‘물관리’하고 홍대 앞 클럽에서 출입자의 ‘액면가’로 입장권 배부 여부를 가리는 풍속까지 포함되어 있다. ‘걔는 나랑 친해’, ‘쟤는 나랑 안 친해’식의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구별짓기를 비롯하여 일상의 아주 미세한 선택 하나하나가 상징적 권력을 창조하기도 해체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중요한 것은 단지 보수정당이나 진보정당이냐를 결정하는 투표 행위가 아니라 일상의 닫힌 선분을 만드는 모든 사소한 억압들과의 투쟁이라는 것을, 부르디외는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름다운 ‘계급 배반’이 아닐까. 비정규직 노동자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아름다운 강남좌파, 노동자계급에게 음악과 회화와 그 모든 예술의 감동을 무료로 공급해주는 최고의 아티스트들, ‘구조조정’과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미명 아래 세계를 20대 80의 사회로 만든 신자유주의와 정면 승부하는 대통령을……. 우리는 오늘도 이 모든 ‘창조적 계급 배반의 상상 속 리스트’를 채워보며 부르디외가 투쟁했던 현대사회의 ‘새로운 앙시앙 레짐’을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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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llowcup 2009-08-07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홋. 재미나게 읽었던 부르디외 편이 끝났네요.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주제도 너무 기대돼요! 화이팅!

mint 2009-08-07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좋은 영화평론은, 그 영화를 실제로 보고 싶게 만드는 글이라고 생각해요. '순수의 시대'는 매우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인데, 오랜만에 다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더운 여름, 좋은 글 쓰시느라 고생많으셨습니다. 다음 글도 즐겁게 기다리겠습니다~ ^^

애플주스 2009-08-07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 삶의 모든 과정이 보이지 않는 아비투스의 그물로 친친 감겨 있는 듯한 슬픈 환상...아, 떠나고 싶다!!^^

milkyway 2009-08-08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블라우스를 사고 나면 치마가 없고 치마를 사고 나면 신발이 없고...ㅜㅜ...완전공감입니다. 그래서 지름신의 악순환이 계속되지요.^^ 조금은 특별한 외출을 준비할 때마다 옷장과의 전쟁이 시작되는...

하나비 2009-08-08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얼마전 나름 좋은 카메라를 사고도, 다른 사람의 카메라를 본 순간, 주눅이 들었어요^^* 타인의 것에 대한 비교우위를 통해서 내 것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제 모습을 보며, 참 꿀꿀해요. 여하튼 다음엔 더 재미난 글을 부탁드려요. 여울님.

맨손체조 2009-08-08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딱 삼팔선에 걸려 있어요, 이제 어떻게 될까요. 으랏차차!

월요일이싫어 2009-08-10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음 영화는 또 뭘까요? +_= 이번에는 내가 본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

sotkfkd 2009-09-13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계에 존재하는 아비투스, 사실 글에서 느껴지는 문장 그 자체로서의 뛰어남에 존경을 표하다가도 작가가 드러내는 '메이' 적인, '뉴렌드'적인 언행에 주춤 뒤로 물러서야 할 때의 슬픔이란 얼마나 큰 지!
타자로 존재하던 이들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타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영화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⑨

 

9. 그들 각자의 순수 (3) : 뉴랜드, 현실의 쾌락보다 환상의 쾌락이 달콤하다


   메이의 순수가 ‘결점을 용납하지 않는 결벽증’에 가깝고, 엘렌의 순수가 ‘진심을 숨길 수 없는 정직함’에 가깝다면, 뉴랜드의 순수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정결함’에 가깝다. 뉴랜드는 다른 귀족에 비해 세속적 욕망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편이지만, 그만큼 세상물정에 둔감하며 현실감각이 없다. 엄청난 독서광이며 뛰어난 예술적 감식안을 지닌 뉴랜드는 책과 그림이라는 네모난 프레임의 내부에서는 한없이 자유롭고 낭만적이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세상이 책보다 흥미진진하고 그림보다 아름다울 거라는 환상이 존재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취향에 딱 맞는 그림처럼 아름답지 않았고, 현실은 그가 좋아하는 책처럼 논리적이지 않았다.

   현실 속에서 그는 언제나 자신의 결정을 뒤로 미루며 스스로의 의견을 직접 내놓기를 꺼린다. 엘렌의 이혼을 만류할 때도 그는 다만 ‘가문의 생각’이 이러저러하다고 멋들어진 설교를 늘어놓았다. 엘렌은 물었다. “그들의 생각 말구요. 당신 생각은 어떠냐고요. 당신도 이혼이 나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순간 뉴랜드는 당황한다. 언제나 논리 정연한 ‘정답’을 준비해놓은 듯한 그의 두뇌 속 매뉴얼에는 ‘나만의 생각’을 거리낌 없이 말한다는 항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결정적 순간에도 그는 늘 결정을 ‘외부’의 힘에 맡겨버린다. 그는 신혼여행 직후에 엘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바다를 바라보는 엘렌의 아련한 뒷모습을 발견한다. 그가 큰소리로 그녀를 불렀다면 충분히 들릴 만한 위치에서도 그는 그녀를 부르지 않는다. 어느 때보다도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긴다. “그는 자신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기로 했다. 배가 등대를 지나기 전에 그녀가 뒤돌아보면 그녀에게 가겠다고 말이다.” 

   엘렌은 독서와 예술로 감각의 세계를 확장한 뉴랜드에게 그 환상이 현실로 바뀔 수도 있음을 증명한 모험의 안내자였다. 한편 메이는 ‘모험’이라는 단어를 두뇌 속 사전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사람처럼 행동한다. 메이는 자신에게 맞는 취향의 수질관리를 하느라 주변의 모든 환경을 자신의 빛깔로 정화시킨다. 그녀는 자신의 결벽증적 순수를 유지하기 위해 남편에게도 ‘지나친 자유’를 꿈꾸는 것조차 금지한다. 남편이 읽는 책의 검열까지 서슴지 않는 것이다.

   “무슨 책을 읽어요?”
   “일본에 관한 책이야.”
   “왜 그런 걸 읽지요?”
   “모르겠어. 그냥…… 다른 나라니까.”
   “당신이 시를 읽어줄 때가 좋았는데.”

   메이의 마음속에서는 머나먼 나라, 가볼 수도 없는 나라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고 불쾌한 일이다. 메이가 그리는 귀족가문의 서재 풍경은 남편이 낭만적인 시를 읽어주고 아내는 우아하게 수를 놓는 것이다. 뉴랜드는 마음속에서만 독백한다. “그는 자신이 이미 죽은 거라고 생각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말이다. 아내가 죽으면 그는 자유를 얻을 것이다.” 그는 아내라는 선명한 현실과 싸워 자유를 쟁취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아내가 자신의 모험과 자유를 방해하는 ‘상상 속의 간수’라고 생각함으로써 모든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시킨다.
   그에게는 현실의 쾌락보다 환상의 쾌락이 달콤하다. 현실의 쾌락은 위험한 기회비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결정적인 순간 늘 중요한 선택을 여성들에게 미룬다. 그는 마치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아내를 원망하지만 결국 그의 아비투스가 모든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가슴속에는 엘렌과 함께 여행을 떠날 별장의 ‘열쇠’가 들어있지만 그것은 결국 그의 외투를 탈출하지 못할 것이며 엘렌에게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여전히 현실보다 상상이 매혹적이기 때문에.  

   냉정하게 말하면, 엘렌을 잡지 못한 뉴랜드의 무력함은 그의 축적된 과거와 잠재된 미래가 만들어낸 아비투스의 협상 결과다. 그가 여행 한 번 못 떠나게 발목을 잡는 아내를 증오하면서도 아내를 떠나지 못하는 것 또한 그의 육체에 뿌리깊이 각인된 아비투스의 결과인 것이다. 그는 상상속의 공간, 환상의 이미지가 현실의 잡다한 유해물질로 오염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속한 계급의 아비투스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아처의 우유부단함은 신중한 성격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아처는 그가 자라온 환경이 만들어낸 (메이로 상징되는)‘집단의 아비투스’로부터 한 개인이 자유로워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증명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아처는 앨렌이 나타나자 밋밋한 메이에게 싫증을 느끼고 메이를 가짜 순결, 오싹한 제도의 산물이라고 부르며 거부감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아비투스로 설명할 수 없는, 해결되지 않는 잉여가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았고, 그것이 그만의 특이성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는 엘렌과 메이, 두 세계의 사이에 끼어 흔들리는 과정에서 자신이 결코 ‘메이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예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뉴욕 사교계 인사들과 아처의 다른 점은 그에게는 문화적 유체이탈의 관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교계의 관행을 끊임없이 객관화시켜 그 문화의 허구성을 비판한다. 언제나 그 비판은 그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는 엘렌의 ‘환송 만찬회’에서 역시 다른 여인들과 달리 장갑을 끼지 않은 엘렌의 맨손을 바라보면서 간절하게 마지막 소원을 빌어본다. ‘이 손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어디든 따라가겠어’라고. 그러나 곧 자신이 화려한 만찬을 가장한 사교계의 거미줄 같은 감시망에 포획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밴 더 루이든 부인은 주인의 왼쪽에 앉음으로써 이 만찬이 ‘외국손님’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냈다. 올렌스카 부인이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 작별선물보다 더 교묘하게 강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아직 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수단을 써서 그와 불륜 상대자를 성공적으로 갈라놓았다. (……) 그것이 ‘피를 흘리지 않고’ 목숨을 빼앗는 옛 뉴욕의 방식이었다. 질병보다 추문을 더 두려워하고, 용기보다 체면을 중히 여기고, 소동을 일으킨 사람들의 행동을 제외하면 ‘소동’보다 더 교양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방식이었다.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자, 아처는 자신이 무장한 군대 한가운데 있는 죄수같이 느껴졌다. (……) 직접적인 행동보다 암시와 비유에서, 성급한 말보다 침묵에서 더 많은 것이 전해져 오는 죽음과 같은 느낌이 가족 납골당의 문처럼 그를 서서히 죄어왔다.

-이디스 워튼, 송은주 역, 『순수의 시대』, 민음사, 2008, 410~412쪽. 
 
   

   그들이 연인이라는 사실이 이미 만천하에 유포되었다는 사실을 엘렌과 아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십수 년만에 돌아온 엘렌의 환영 만찬회 때는 노골적으로 집단 보이콧을 했던 바로 그 인사들이었다. 이제 엘렌이 추방당할 때가 되니 얼씨구나 하고 환송 만찬회를 열어주며 ‘외국인’의 추방을 기뻐하는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엘렌을 몰아내기 위해 이 파티를 주최한 것은 뉴욕 사교계의 공식 마스코트 메이였다. 메이는 자신이 임신했다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엘렌을 좌절시켰고, 메이가 잽싸게 준비한 엘렌의 환송 만찬회는 엘렌 추방작전의 화룡점정이었다. 엘렌은 몇 주 후 자신의 거짓말을 현실로 만듦으로써(그녀는 몇 주 후 임신에 성공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여행을 떠나겠다는 뉴랜드마저 단념시킨다. 이제야 이 무서운 ‘소문의 공동체’의 힘을 깨달아버린 그는 고귀한 가문이라는 가족 납골당에 산 채로 매장당한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그는 자신의 낭만적 환상을 엘렌에게 투사하는 것에 만족하고 엘렌과 함께 진짜 세상에 나아가 전투를 벌일 용기는 없다. 환상의 쾌락에는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지만 현실의 쾌락너머에는 엄청난 기회비용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늘 책을 읽는 그의 모습은 ‘이 세상 저 너머의 세계’조차 책으로만 경험하는 그의 나약함을 보여준다. 엘렌은 그가 마주친 유일한 실재이며 텍스트로 분석할 수 없는 야생의 실체였던 것이다. 그는 환상 속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그녀를 사랑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살아 숨 쉬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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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비 2009-08-06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마음으로는 엘렌을 동경하지만, 행동은 메이 같아요^^* 저도 가끔 같이 사는 사람이 읽는 책과 만나는 친구 등등을 검열한다니까요.

예인 2009-08-06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비투스에 충실한 보수적인 메이,아비투스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엘렌,아비투스를 벗어나고 싶지만 현실 속에 안주하는 뉴랜드, 이 세명의 캐릭터를 아비투스를 중심으로 비교한 영화읽기가 흥미진진하군요. 인물 중심의 캐릭터의 묘사가 뛰어납니다. 철학과 문학을 아우르는 지식과 감수성 때문일까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건필하세요.~~

시트러스 2009-08-07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랑했지만 결국 함께 할 수 없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가네요. 보통 이별의 원인을 성격차이로 얼버무리지만ㅜㅜ...우린 그때 서로의 탄탄한 아비투스의 장벽을 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후덜덜....^^

인디안밥 2009-08-07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환상의 쾌락이 더 강렬하다는 말에 공감해요. 연애를 하고 있긴 하지만, 때로는 상대를 사랑하는 건지 사랑에 빠진 나 자신을 내려다보며, 사랑에 충분히 취해 있다는 안도감 자체를 사랑하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워요. 그럴 때면 현실 속의 상대보다 잠들기 전 상상하는 누군가가 더 애틋하게 다가오거든요.

sotkfkd 2009-09-1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에서 시작하여 열한 번째 줄, '엘렌'은 '메이'의 오기가 아닌가요?

메이의 생이 참 안쓰러워요. 그렇담 그렇게 바라보는 나는? 이라는 질문은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는 현실.

잘 읽었습니다.
 

 


영화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⑧

 

8. 그들 각자의 순수 (2) : 플라밍고를 닮은, 엘렌의 순수


   부르디외는 개인의 아비투스를 형성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교육이라고 말한다. 부르디외의 눈에 비친 제도 교육은 사회의 불평등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합법적인 장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통해 육화된 문화적 불평등이 평생 지배/피지배의 권력구도를 재생산한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사회의 국가기관에 배치된 인력 분포를 보면, 최고의 엘리트 양성기관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국가기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 중 90% 이상이 상층 부르주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편 프랑스에서 노동자계급의 가정에서 자라난 학생들은 고등학교에 진입할 때 90% 이상 실업계로 진로를 결정하며, 이들 중 대부분이 고등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또다시 노동자 계급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1)
   머나먼 프랑스의 이야기가 마치 우리 이야기인 듯, 슬프도록 익숙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이 갖는 문화적 재생산의 역할은 유럽이나 아시아나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교육열로만 따지면 명실 공히 세계 1위를 다투는 한국. 한국에서는 교육을 통해 힘겹게 축적한 상징자본이 그만큼의 문화적 지배를 재생산하지 못한다는 박탈감 때문에 오히려 더욱 경쟁이 격화되는 경향이 있다. ‘학력 인플레이션’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학력조차 ‘천국으로 가는 티켓’이 될 수 없다는 집단적 패배감 또한 ‘구별짓기’의 격화에 따른 문화적 효과라 할 수 있다. ‘학파라치’까지 만들어 사교육 열풍을 막는다는 정부의 야심찬 프로젝트는 엄연히 존재하는 구조적 갈등을 전시행정으로 은폐하는 고육지책일 수밖에 없다.

   엘렌은 뉴욕 상류층의 문화적 환경에서 볼 때 가장 ‘저급한 교육’을 받은 여성이었다. 그녀에 대한 험담을 시작할 때 늘 ‘불쌍한 엘렌’이라고 운을 떼는 밍고트 가의 사람들이 보기에, 엘렌이 받은 교육은 비체계적이고 비윤리적이며 비논리적이다. 엘렌의 부모는 방랑벽이 심했고 유럽의 이곳저곳을 떠돌다 죽었다. 엘렌이 받은 교육은 제도 교육과는 거리가 먼 데생이나 피아노 5중주 같은 예술가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한 것이었다. 엘렌은 앵글로색슨 계 미국인이 저급한 문화로 멸시하는 플라밍고를 멋들어지게 추고 나폴리 연가를 시원하게 부르는 등 이국풍(outlandish) 예능에 소질이 다분한 보헤미안 소녀였다. 상상력을 억압하는 뉴욕 백인 사회에서 그녀가 받은 이질적인 교육은 그 자체로 기존 사회에 위협적이었다. 그들은 매혹적인 엘렌의 이국 취향으로 인해 그동안 쌓아왔던 균질한 ‘취향의 커뮤니티’가 ‘잡스럽고 이질적인 외국취향’으로 물들까 두려워한 것이다.   

   그녀의 문화적 취향뿐 아니라 사람을 사귀는 취향 또한 사교계의 암묵적 규약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엘렌은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지닌 벼락부자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던 스트러더 부인과 사귀는가 하면, 소문난 바람둥이 보퍼트를 거리낌 없이 만난다. 그러면서도 ‘어떤 규칙을 위반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엘렌은 소외된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반사회적’ 행동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엘렌 또한 공동체의 시선으로부터 지나치게 자유로운 ‘순수한’ 영혼이다. 관습에 순종하며 이질적인 문화를 배척하는 메이의 순수(purity)와는 달리, 엘렌의 순수는 자신의 욕망과 감정에 솔직하며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 순수함(honesty)이다. 

   엘렌은 밴 더 루이든 가의 웅장한 저택에 대해 거리낌 없이 “우중충하다(gloomy)"고 평가한다. 뉴랜드는 그녀의 솔직함에 충격을 받는다. 모두가 장엄하다고 격찬하는 밴 더 루이든 가의 저택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엘렌은 흔히 영화에 나오는 팜므파탈처럼 열정적이고 관능적인 매혹을 지녔지만, 그들처럼 ‘도덕’과 ‘관습’마저 깡그리 무시하는 캐릭터는 아니다. 그녀는 애초에 자신의 신체를 집단의 아비투스에 가두는 모든 권력과 싸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엘렌은 타인에게 고통을 주면서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토록 원하던 이혼이었지만 메이와 아처의 가문을 위해 이혼을 포기했으며, 뉴랜드가 애절한 사랑고백을 했지만 메이를 생각하며 그에 대한 마음을 접는다.  

   그녀는 자신의 거주지와 친구들까지 간섭하는 귀족들의 노골적인 금족령을 견디지 못하고 보스턴으로 피란(?)을 간다. 그러나 사실 그녀의 도피는 뉴랜드와 메이의 결혼생활을 가까이서 봐야 하는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함이었다. 마치 비즈니스상의 이유인 듯 가장하며 그녀를 급작스레 방문한 뉴랜드. 하녀도 없이 혼자 여행을 하는 그녀의 행동을 그 순간에도 ‘비관습적’이라고 콕 집어 지적해주는 모범생 뉴랜드 앞에서 그녀는 말한다. 또 하나의 ‘비관습적’인 행동을 했다고. 거액을 제시하며 자신과 만나줄 것을 부탁하는 남편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뉴랜드는 질투와 분노에 휩싸여 소리친다. “당신은 나에게 난생 처음으로 진짜 삶을 엿보게 해주었으면서, 동시에 가짜 삶을 계속 살라고 강요했어요. 누군들 이런 고통을 견딜 수 있겠어요?”
   엘렌은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그러나 절대로 나약해보이지 않는 담담한 말투로 말한다. “난, 견디고 있어요(I'm enduring it).” 뉴랜드는 그녀의 압도적인 차분함에 말문이 막힌다. 그녀는 가식과 허세로 가득한 뉴욕의 본질을 속속들이 꿰뚫어버린 듯한 눈빛으로, 그녀의 전존재를 모두 드러내는 듯한 투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노골적으로 그녀를 거부한 미국을 그녀가 떠나지 않은 이유가 여기서 밝혀진다. 다만 멀리서라도 뉴랜드의 행복을 지켜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뉴랜드가 안전하게 양가의 관심과 보호 속에 살아가는 것을 다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따스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녀의 슬픈 미소 뒤로 내레이션이 흐른다. “그는 극장이나 피로연에서 그녀와 다시 마주치게 될 것이다. 서로 옆자리에 앉게 될 수도 있고 둘만의 시간을 다시 갖게 될 기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안 보고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그를 사랑할수록 그에게서 멀리 도망치는 것이 그녀의 순수다. 아주 가끔이라도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아주 먼발치서라도 그의 미소를 보기 위해 그녀는 자신을 홀대하는 뉴욕에 남는다.
   함께 있지 않지만 어디서든 함께 있고, 멀리 있지만 언제나 가까이 있고, 그를 포기해야만 지킬 수 있는 사랑. 엘렌의 역설적인 사랑법은 열정과 욕망을 동경하지만 도덕과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그녀의 정결함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엘렌의 순수는 가문이나 혈통이 가르친 것이 아니라 파란만장했던 그녀의 삶에서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결코 ‘학습되지 않은’ 순수였다. 복잡하게 이해관계를 따지는 사교계 사람들과는 달리, 엘렌의 원칙은 처음부터 단순했다. 그 모든 위험과 비방을 감수하고 왜 그토록 이혼을 원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녀는 티없이 해맑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자유를 얻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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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부르디외의 책 『재생산』(장 클로드 파세롱·피에르 부르디외, 이상호 역, 동문선, 2000)을 참고할 수 있다. 교육을 통한 문화지배의 재생산을 한국적인 맥락에서 분석한 책으로는 <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홍성민 지음, 살림, 2004)가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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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 2009-08-05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렌의 캐릭터는 귀족적 아비투스로부터의 자유로운 여성이군요.
부르디외에 관한 책을 소개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비 2009-08-05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엘렌 같은 살아있는 예술 체험 교육이라니, 저도 한번 그런 전인 교육 받아봤으면~~^^*

블레이드러너 2009-08-05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플라멩고를 닮은 엘렌'. 오~오~오~ 작년 겨울 스페인에서 보았던 플라멩고. 훨훨 날아 갈듯한 자유로운 손짓 발짓 몸짓.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해체되는 듯 한. 아, 저는 엘렌같은 여자라면 완전 땡큐죠^^* ㅋㅋㅋㅋ

sotkfkd 2009-09-13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육! 그 노골적인 자본의 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