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색, 계〉와 롤랑 바르트 ⑤

 

3. 세번째 풍크툼 :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Nobody loves me) <1>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굳게 믿었던 여자의 첫사랑. 그것만큼 위험하고도 순수한 열정이 있을까. 영화 <파니 핑크>의 원제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Keiner liebt mich)”이다. 파니 핑크는 “서른 넘은 여자가 남자를 만날 확률은 원자폭탄을 맞는 것보다 어렵다”는 독설을 어쩔 수 없이 믿게 되어버린 쓸쓸한 스물아홉 싱글이다. 그녀는 연애는 해봤지만 사랑에는 결국 실패했다는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사랑을 꿈꾸지만 ‘친밀해진다는 것’에 대한 공포를 떨쳐내지 못한다. “당신이 실망할까 겁나요. 섹스에 있어서 난 좀 바보예요. 시간이 필요해요. 머리가 방해하거든요. 자꾸 이상한 생각을 하게 돼요. 냉장고에 남아 있는 우유의 유통기한이나, 연말정산에서 세금을 얼마나 돌려받을지, 아니면 발 냄새가 나진 않을지. 내 모습이 지금 어떻게 보일까 신경 쓰죠. 내가 너무 무겁지 않나 신경 써야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단 얘긴 아녜요. 오히려 그 반대죠.”

   그녀는 사랑을 나눌 때조차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원망한다. 관객은 그녀에게 무슨 특별한 결격사유가 있는 것일까, 요모조모 관찰해보지만 오히려 그녀는 지나치게 멀쩡하다. 그녀가 영화 초입에 툭 내뱉는 대사가 사랑에 빠지지 못하는 그녀의 유일한 아킬레스건이 아닐까. “나 자신도 날 사랑하는 건 힘들 것 같아요.” 그녀는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진짜 문제를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피해망상으로 은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웃집 남자인 심령술사 오르페오는 그녀에게 손금을 봐주겠다며 장난스럽게 접근한다. 운명의 남자를 점쳐준다 호들갑을 떨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진정한 솔메이트가 된다. 가난과 질병, 고독과 차별로 황폐해진 오르페오의 영혼은 너무도 티 없이 건강하다. 그는 과거에 붙들리지 않고 미래에 주눅들지 않는 영혼이다. 죽어가는 오르페오의 사랑보다 깊은 우정은 아프지 않은데도 늘 아프다고 믿는 파니 핑크의 가녀린 영혼을 따스하게 감싸준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생일이 될 거라 믿었던 서른살 파니 핑크의 생일, 오르페오가 립싱크한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 <아니,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Non, Je Ne Regrette Rien)>는 그녀의 그늘진 영혼을 밝히는 영원한 빛이 되어준다.
   하지만 우리의 막 부인, 아니 왕 치아즈에게는 <파니 핑크>의 오르페오처럼, 사랑이 떠나가도 사랑보다 더 짙은 우정을 선물해주는, 그리하여 사랑의 ‘대상’이 없이도 사랑 그 자체를 저절로 알게 해주는 다정한 멘토가 없다. 사는 내내 빈방에 갇혀 있는 듯 쓸쓸해 보였던 왕 치아즈는 ‘누군가를 사랑한다’거나 ‘누군가 날 사랑한다’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 여자는, 심하게 둔하다. 이 선생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인(sign)을 여러 번 보내지만 자신의 임무에 충실해야 하는 그녀는, 그리고 아무도 사랑해본 일이 없는 그녀는 좀처럼 자신의 감정에 확신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이 여자는 더욱 위험하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그 어떤 사랑도 진정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그 모든 관계를 향한 열망이 ‘한 남자’에게로 투사될 위험 말이다. 그녀 곁에는 오직 그녀를 살인공작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조직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미 이 선생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그녀에게는 희미한, 시작되기도 전에 끝나버린 첫사랑 광위민의 뒤늦은 고백도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통조림이다. 뒤늦게 사랑을 느낀 광위민은 그녀에게 키스하지만 그녀는 그의 몸을 조용히 밀어내며 말한다. “왜 3년 전에 그렇게 하지 않았어?”
   광위민은 이제야 그녀를 도우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그들을 좌지우지하는 조직은 너무 완고하다. 광위민은 항일 조직의 브레인 격인 우 선생에게 왕 치아즈를 그만 작전에서 빼야 한다고 경고한다. “그녀는 정식 훈련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장기간의 압박은 버텨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 선생은 그녀의 이용 가치만을 생각한다. “왕 치아즈가 정말 잘해줬어. 이 기회를 잘 살려야 해.” 우 선생은 왕 치아즈를 칭찬하기까지 한다. “왕치아즈의 강점은 자신이 첩보원이란 의식을 지우고 막 부인이란 배역과 혼연일체가 되었다는 거네.” 우선생은 알지 못한다. 이제 첩보원 왕 치아즈는 사라져가고 사랑에 빠진 막 부인만이 남았다는 것을. 그녀는 배역과 혼연일체가 된 나머지 현실로 돌아오는 출구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어엿한 운동가로 성장한 광위민은 그녀를 구하고 싶다. “지금 그녀가 얼마나 위험한지알고 계십니까? 그녀는 이미 할 일을 다 했습니다. 이젠 우리가 행동할 차례란 말입니다.” 그러나 우 선생은 광위민보다 더 처절하게, 이 선생을 효과적으로 암살하여 조직의 더 ‘커다란 그림’을 완성해야 할 의무를 강조한다. “놈은 내 아내와 내 두 자식들을 죽였지만 난 놈과 식탁 하나를 두고 식사까지 했다. 이게 바로첩보원이다! 나보다 더 놈을 죽이고 싶은 사람은 없어. 놈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 난 놈을 조금 더 살려줄 수 있는 것이다!”
   모두가 저마다의 절실함을 주장할 때, 승자는 더 큰 권력을 가진 자일 수밖에 없다. 우 선생은 개인적 복수심과 조직의 안녕이라는 커다란 대의에 자신의 삶을 종속시킨 사람이기에 조직원의 ‘하찮은 사랑놀음’ 따위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그녀를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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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객 2009-07-21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치명적 사랑, 치명적 글 쓰기. 늘 들어와 열독하고 있습니다. '색, 계', 그리고 다음에 인용될 영화와 그 안에서 읽어낼 철학 텍스트도 궁금합니다. 응원합니다.

파니핑크 2009-07-22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니핑크와 색계 모두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울림이 있었던 영화입니다. 작가님을 통해 들으니 더 반갑고 좋으네요~~

파니핑크 2009-07-22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파니핑크도 봐야겠어요. 봐야하는 영화 목록이 계속 늘어나네요.

astromilk 2009-07-22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본 두 영화를 다시 보고 싶게 하는 글이네요.

바이런 2009-07-22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재밌어요T_T 사랑할 대상이 없어도 사랑을 깨닫게 해주었던 오르페오. 그랬던거군요, 그래서 <파니핑크>도 그렇게 뭉클했던거군요. 새록새록 기억이 나네요^^

sotkfkd 2009-09-12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새로운 경험입니다.
 

 


영화 〈색, 계〉와 롤랑 바르트 ④

 

3. 두번째 풍크툼 : 나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영화사에서 가장 의심 많고 이기적인 캐릭터 중 하나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주인공 멜빈(잭 니콜슨)을 떠올린다. 결벽증과 강박증을 함께 앓고 있지만 그보다 훨씬 심각한 자기예찬증(?)을 앓고 있는 멜빈은 ‘타인의 삶’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는다. 자기 욕망 외에는 철저히 타인에게 무관심한 그는 늘 같은 식당 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음식을 오직 자신이 휴대하는 포크와 숟가락으로만 먹는다. 늘 앉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으면 그를 윽박질러 잔인하게 쫓아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이 만든 동굴 속 세상에서 군림하던 외톨이 황제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자 휘청거린다. 

   옆집 남자의 애완견이 복도에서 오줌을 눴다며 그 연약한 강아지를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버리기까지 했던 철면피 나르시시스트 멜빈. 그렇게 만인의 노여움을 샀던 멜빈의 한일자로 굳어 있던 입술에서 간신히 터져 나온 사랑 고백은 전 세계 영화 팬들의 마음을 달달하게 녹여주었다. “당신 때문에 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소.(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 오랫동안 입 속에 머금은 채 좀처럼 삼키고 싶지 않은 사탕처럼, 아릿하게 달콤했던 이 고백은 멜빈 인생의 ‘비포 앤 애프터(Before & after)’를 가로지르는 결정적 경계선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살아가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인의 삶’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수없이 넘어진다. 하지만 흉터만 남는 것은 아니다. 그 상처로 인해 우리는 그전까지 보이지 않던 삶의 다채로운 풍경과 맞닥뜨리곤 한다. 우리가 타인의 삶이라는 지뢰를 밟고 넘어져 허우적거릴 때 땅바닥을 더듬거리는 손을 잡아 조용히 일으켜주는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밟아버린 타인의 삶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인생의 경로가 완전히 바뀌기도 한다. 매일매일 부딪히는 타인의 삶이 없다면 우리의 삶 또한 평생 막다른 골목길 안에서만 뱅뱅 도는 기약없는 미로찾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변함없이 안전한 런닝머신 위에만 놓여 있는 삶. 타인의 삶에 묻어 있는 걱정과 손해라는 바이러스가 혹시 나에게 옮을까 두려워 그 어떤 타인도 자신의 울타리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던 멜빈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잭 니콜슨이 아무리 자기중심적이라 해도 <색, 계>의 양조위만큼은 아니었다. 천하의 잭 니콜슨도 <색, 계>의 양조위만큼 경계심이 많지는 않았다. <색, 계>에서는 친일 관리로 등장하는 이 선생(양조위)의 곁에 미인계로 접근했다가 가차 없이 목숨을 잃은 여자들이 있을 정도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와 흔적에 삼엄한 거짓말탐지기를 갖다 댄다. 이 선생이 자신의 까다로운 취향에 꼭 맞는 옷 가게를 소개해준 막 부인에게 고마움을 표하자 막 부인은 “별일 아닌 걸요”라고 예의 바르게 인사한다. 이 선생은 막 부인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꿰뚫을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한다. “이 세상에…… 별거 아닌 일은 없소.”
   항시적 살해위협에 노출된 이 선생에게는 세상 모든 인물과 사건, 사물이 하나하나 더없이 예민한 기호와 상징으로 보인다.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 후 며칠 동안 홀연히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다급해진 막 부인은 묻는다. “난징에 갔다 오셨다면서요?” 그는 겨울산의 암벽처럼 차갑게 대답한다. 언제 우리가 사랑을 나눴냐는 듯이. “귀에 들린다고 다 믿지는 마.” 그는 타인을 믿지 않듯이 그녀도 자신을 믿지 못하도록 자신의 주위에 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드리운다. 그러나 발군의 두뇌와 철두철미한 성격으로 수많은 암살 계획을 낱낱이 밝혀낸 이 선생조차도 ‘그녀의 마음’이라는 난해한 상형문자를 해독하지는 못한다. 그를 사랑하게 될까 봐 두려우면서도 그를 죽여야 한다는 강박 속에 하루하루 가혹한 불면에 시달리는 그녀의 마음을.
   그러나 그는 그녀를 만나면서 처음에는 그녀의 몸을, 나중에는 그녀의 영혼을, 결국에는 그녀의 모든 것을 원하게 된다. 그는 그녀와의 밤만이 아니라 그녀와의 대화를, 그녀와의 남모르는 교감을 원한다. 이제 그에게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가장 큰 고통이다. “당신을 기다리는 일로 나를 고문하는 중이야.” 그는 그녀의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쏘아버린 ‘진심’이라는 뜨거운 화살에 맞아 비틀거린다. 계엄군에게 쫓기는 게릴라처럼 은밀하고 급박하게 이루어지는 섹스만으로는 그녀의 사랑에 화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것일까. 그는 이제 둘만의 비밀을 만들고자 한다. 어떤 시스템도, 어떤 금기도 틈입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진 두 사람만의 ‘비밀’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그는 그녀에게 명함을 주며 누군가를 찾아가보라고 말한다.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라고 속삭이며. 아무도 믿지 않던 이 남자가 오직 이 여자만을 믿고 오직 이 여자만의 일거수일투족에 일희일비하기 시작한다. 그가 믿었던 세계의 투명한 장막이 찢어져버린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시시콜콜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선연한 상처의 틈새로 온전히 교감했다. 그리하여 나와 너 사이에 놓여 있던 삼엄한 경비장치는 스스로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바르트는 텍스트가 명징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환상과 싸웠다. 또한 가면과 내면을 분리시킬 수 있다는 신념과 싸웠으며, 육체와 정신을, 표정과 욕망을 분리시킬 수 있다는 환상과 싸웠다. 마침내 그는 사랑에 빠진 너와 나를 분리시킬 수 있다는 환상을 파괴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타자를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다는 오만과 결별하는 순간, 신기하게도 영원히 닫혀 있을 것만 같았던 타자의 내면, 그 견고한 빗장은 열리기 시작한다. 무진장 어렵지만 의외로 쉬운 일이다. 우리가 짐작하는 그곳에 그가 항상 머물고 있다는 환상, 우리가 의도하는 그곳에 그녀가 얌전히 존재한다는 환상과 작별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내가 아니다. 나는 네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있다.”(바르트의 <신화학>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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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2009-07-20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보는것보다 더 잼있네요 ^^

고등어 2009-07-20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벌써 4회가 휙 지나갔네요. 주말을 기다리느라 넘 힘들었답니다..ㅋ 한 주 동안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책든손귀하다지만 2009-07-20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글이 올라오기 전에 <색, 계>안에서 세번째 풍크툼은 뭔지 맞춰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네요.ㅋ

2009-07-20 2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otkfkd 2009-09-12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네가 생각하는 내가 아니다.나는 네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있다.
오 마이 갓!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도 아닌 것을, 나는 내가 생각하지도 않았던 곳에 있던 것을!
잘 읽었습니다.
롤랑 바르트도 다시 읽어야 되겠네요. 그런데 '카메라와 루시다', 절판! 한 번 언뜻 하는 방법으로 읽었는데. 헌책방을 두루 뒤져야 되겠네요.
 

 


영화 〈색, 계〉와 롤랑 바르트 ③

 

3. 첫번째 풍크툼(punctum) : 낭만적 나르시시즘의 세계가 파열되다


   이 선생의 의심 많은 성격 때문에 두 사람의 밀회는 더없이 스릴 넘치는 두뇌 게임처럼 급박하게 진행된다. 막 부인이 이 선생을 옷가게로 유인하여 두 사람이 첫번째 밀회를 갖게 되는 날. 그녀가 자신의 사이즈에 맞게 고친 옷을 갈아입고 커튼을 살짝 밀며 이 선생 앞에 나타나는 순간. 관객들은 짧고 덧없는 한숨을 쉰다. “고치니까 너무 붙네요. 숨이 막힐 지경이예요.” 그녀가 딱 달라붙는 옷에 숨 막혀 하는 동안, 관객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숨이 막힌다. 장 지아즈가 아닌 막부인의 매력에 사로잡힌 관객의 시선은 정확히 이 선생의 것이기도 하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마치 금방이라도 어둡고 깊은 밀실로 그녀를 유인할 듯이 탐욕스럽고 색정적이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으려 하자, 그는 명령하듯 쏘아붙인다. “그냥 입고 가시오!” 막 부인과 함께 마작을 하며 친분을 쌓던 상류층 부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자마자, 이 선생의 노골적이고 격정적인 눈빛이 그녀의 몸 위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이 위태로운 연극이 끝난 후 돌아와 쉴 수 있는 백스테이지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광위민이 이끄는 암살단이 성공적인 조직이었다면, 그녀가 무대 뒤편으로 돌아와 ‘장 치아즈’가 되어 쉬는 동안 그녀는 신뢰와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했을 것이다. 어느 순간 조직원들은, 그녀를 동지가 아닌 이방인으로 취급하며 그녀에게서 멀어진다. 그녀가 ‘적과의 동침’을 해야 할 임무를 맡았기에 그녀의 연극은 연극으로만 비춰지지 않는 걸까. 처음부터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걸어야 했다. 이 선생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그녀는 불안해한다. 그에게서 또 한 번 전화가 온다면, 그녀는 그의 불륜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녀는 ‘첫 경험’조차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녀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질문한다. “어떻게 하는지 알아? 남녀간의…… 그거…….” 그런데 친구들, 아니 조직원들의 표정이 이상하다. 그들은 이미 ‘합의’가 된 상태인 것 같다. “경험자는 량룬셩 뿐이야.” “창녀하고?” 그녀는 암살대상과 섹스를 나누기 위해 자신의 순결을 턱없이 엉뚱한 남자에게 넘겨주고 만다. 이제 그녀는 이 선생을 유혹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이 철부지 암살단들 사이에서는 미묘한 공기가 감돌기 시작한다. 분명히 여섯 사람 모두 동의한 임무 수행을 위해 그녀는 몸을 던졌는데, 그녀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이 왠지 불편하게 서걱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짓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즈음 이선생의 부인에게서 전화가 온다. 내일 상하이로 떠난다고. 청천벽력이다. 이제 이 선생을 유혹하여 곧 암살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모두들 사색이 된다. 다급한 목소리로, 내일 공항으로 배웅을 나가겠다는 ‘막 부인’의 애원도 소 없다. 그들은 이 엄청난 연극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기엔, 너무도 철없는 풋내기 배우 지망생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짜 ‘풍크툼’은 이것이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강하지 못했기에 치명적인 실수를 범한다. 이 선생의 측근, 조덕희가 그들의 음모를 눈치채버린 것이다. 그들은 조덕희가 원하는 ‘막 부인의 목숨 값’을 흥정하는 데 실패한다. 어떤 돌발 상황에도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어도 모자랄 판에, 그들은 명백한 불청객의 등장에 대응할 수 있는 최소한의 매뉴얼조차 없다. 그들은 창졸간에, 정말 얼떨결에, 조덕희를 살해하고 만다. 이 모든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유리문 밖에서 목격하고 있던 막 부인, 아니 장 치아즈는 돌이킬 수 없는 상흔을 입고 만다. 그녀는 표현할 수 없는 공포와 고통에 제대로 울부짖지도 못한 채 휘청거리며 사라져버린다. 아무도 그녀를 잡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위급한 상황에서 서로의 동선을 체크할 만할 비상 대책은 물론, 이탈하는 동지를 붙잡을 최소한의 용기나 우정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첫번째 풍크툼은 이렇게 잔혹하게 그녀의 삶에 예리한 메스를 긋는다. 그녀가 한때 믿었던 신념과 조직, 우정과 열정은 모두 찰나의 헛것이었음을 그제야 깨닫는다. 그러나 그녀는 한동안 이 맹렬한 고통의 진원지조차 알지 못했다. 조직의 실패가, 그녀의 실수가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뼈아픈 상실감에 어떤 이름도 붙이지 못한다. 롤랑 바르트라면 이것이 바로 풍크툼이라 말하지 않을까. 그녀의 첫번째 풍크툼, 그것은 그녀와 그 친구들의 찬란한 나르시시즘이 철저히 찢겨나가며 생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매끈한 나르시시즘적 정열에 사로잡혀 날것의 세상이 자아내는 울퉁불퉁한 진면목을 꿰뚫어 보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이 상처에 대해 어떤 커뮤니케이션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풍크툼의 특징은 ‘소통불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쉽게 소통될 수 있는 아픔이라면 그것은 관습화된 상징, 즉 스투디움이니까. 바르트는 필생의 역작 <카메라 루시다>에서 이렇게 속삭인다. “내가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진정으로 나를 아프게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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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chito 2009-07-17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첫 영화부터 심상치 않네요~ 정말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doingnow12 2009-07-18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다보니 색,계의 장면 하나하나들이 두근거리며 떠오르네요..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dlatjsdud29 2009-07-21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색계를 그냥 재미있는 영화로만 봤었는데, 철학적으로 읽는 것은 더 매력있는 것 같아요

sotkfkd 2009-09-12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진정으로 나를 아프게 하지 못한다.'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아마 충분히 어떤 사물이나 인간이 '스투디움'의 성격을 띠기에 가능한 것이겠지요.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을 외우고, 그 이름을 가진 사물 혹은 인물에게 내가 주체가 되는 임무를 떠다 맡기고, 채찍질하고, 옭어 매고......
 

 


영화 〈색, 계〉와 롤랑 바르트 ②

 

2. 탐색전: 무대 위의 연극 vs 무대 뒤편의 침묵


섹스 자체가 삶의 욕망과 분노와 슬픔, 그 모든 것의 알레고리인 영화는 수없이 많았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감각의 제국>, <그녀에게> 등등 수많은 영화에서 섹스는 단지 몸과 몸의 얽힘이 아니라 삶과 삶의 뒤얽힘이었고 인간의 근원적 소통불가능성의 뼈아픈 확인이었다. 그러나 <색, 계>에서 그들의 섹스의 이미지가 유독 슬프고 힘겹게 느껴지는 까닭은 아마도 장 지아즈, 즉 막 부인(탕웨이)의 캐릭터 탓인 것 같다. 그녀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여주인공 마리아 슈나이더처럼 발랄하고 앙큼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쾌활한 캐릭터가 아니다. 또한 <감각의 제국>의 여주인공 마츠다 에이코처럼 나른하게 몽환적이면서도 의외로 강인한 캐릭터도 아니다. 장 지아즈는 <그녀에게>의 투우사 리디아처럼 팜므파탈적인 매력을 뿜어내지도, 아름다운 무용수 알리샤처럼 생기발랄하고 투명한 캐릭터도 아니다. 그런데 <색, 계>의 탕웨이는 그 모든 기념비적인 캐릭터들보다도 확실하게 관객을 ‘압도적인 슬픔’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왜 그럴까.





그녀는 이 모든 여인들보다 너무 느리고, 너무 조심스럽고, 너무 예민하다. 그녀는 한 가지 행동을 결정하기 위해서 너무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 신중하다 못해 조금은 답답한 여인이다. 그래서 그녀는 누구와도 함부로 사랑에 빠지지 못한다. 그녀를 연극의 세계로 이끌었던 광위민에게 잠깐 호감을 느꼈지만, 열혈남아 광위민은 아직 여인보다 신념을 사랑하는 순수 청년이었다. <색, 계>가 2시간 40분 동안 관객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지루한 것인지 긴장감 넘치는 것인지 자꾸만 헷갈리게 만드는 이유는, 남녀주인공 모두가 돌다리도 수백 번 두들겨보고 끝내는 건너지도 않을 것 같은 극도로 예민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 만난 순간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면서도 한사코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항시적으로 암살 위험에 처해 있는 매국노(이 선생 : 양조위)와 그를 암살하기 위해 그의 불륜녀라는 배역을 맡은 여자가 만났다.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경계심 많은 남자와 세상에서 가장 예민한 여자가 만난 셈이다. 극장에서 혼자 영화를 핑계 삼아 흐느끼는 여자와 영화를 보고 싶어도 어두운 곳이 무섭고 싫어 영화관에 갈 수 없는 남자가 만났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서로의 임무를 수행하는 그들의 침대에서는, 그들의 내면에서는, 어떤 감정의 해일이 몰아치게 될까.

*

1942년 상하이. 막 부인(탕웨이)은 한껏 긴장된 몸짓으로 전화를 건다. 일상적인 대화를 가장한 암호임이 분명한 대화를 주고받은 그녀는 까페에 앉아 과거를 회상한다. 4년 전, 그녀는 홍콩의 대학생이었다. 2차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영국으로 떠나버린 아버지를 기다리는 왕 치아즈. 그녀의 본명이다. 그녀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버지는 재혼했다는 소식만을 달랑 보내오고, 그녀는 아버지에게 심심한 축하 편지를 쓴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심상하게 축하 편지를 쓰지만, 그녀는 어두운 영화관에서 마치 슬픈 영화 탓인 양, 숨죽여 흐느낀다. 그녀는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철저하게 고독하다.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마저 재혼한 후, 그녀의 고독을 어루만져준 것은 연극이었다.
 그녀는 항일 급진파 청년 광위민의 권유로 연극반에 가입한다. 입센의 <인형의 집>은 ‘부르주아 연극’이라 몰아붙이고 항일운동의 기치를 높이 들어 올리는 연극으로 나태한 홍콩의 인민들을 각성시켜야 한다고 부르짖는 이 청년에게, 왕 치아즈는 순수한 매력을 느낀다. 그녀는 자신이 여주인공으로 데뷔한 연극에서, 지금까지는 느껴보지 못했던 강렬한 희열을 느낀다. 무대 위에서, 그녀는 더 이상 나약하고 내성적인 소녀가 아닌 자신을 발견한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며 환호하는 그 열광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혀, 왕 치아즈는 ‘연극하는 자아’를 향한 나르시시즘적 사랑에 빠지게 된다.
 광위민은 급진파 항일단체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친일파 핵심인물인 이(易) 선생(양조위)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광위민의 친구들과 왕 치아즈는 그 계획에 합류한다. 광위민은 말한다. “이번엔 연극이 아니야.” 그러나 이 말은 반어적으로 들린다. 이 선생을 암살하기 위해 그들은 신분을 위장하여 이 선생의 주변으로 침투해야 한다. 이제 그들은 더욱 판돈이 커진 또 하나의 거대한 연극적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여배우 탕웨이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녀는 현실이 아니라 연극 안에서 오히려 편안해 보인다. 탕웨이는 장 치아즈이기보다 맥 부인일 때 오히려 생기발랄하고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녀는 차라리 조작된 연극 속에서 암살 대상과 유일하게 친밀한 인간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연극 밖에서는 한없이 외롭고 불안한 존재로 전락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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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런 2009-07-17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짧아요-_ㅜ 얼른 3회가 보고싶다는~~

사과쨈 2009-07-19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지막부분의 현실이 아니라 연극안에서 오히려 편안해 보인다는 귀절에 공감이 많이 갑니다. 아이쿠!!영화가 다시 보고 싶어지네요...

동네노는형들 2009-07-20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이미 영화 다시 보고 왔습니다..ㅋ

sotkfkd 2009-09-12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떠올리면서 다시 한 번 찬찬히 이 영화를 볼 참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영화 〈색, 계〉와 롤랑 바르트 ①

 

Ⅰ. 바르트: 풍크툼, 세계와 나는 ‘상처의 틈새’로만 만난다

1.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깨닫는다. 그토록 완고하게 닫혀 있던 이 세계가, 단 한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휘청,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깨닫는다. 바닷물에 잉크를 떨어뜨린 듯, 아무리 애를 써도 꿈쩍하지 않던 세상이, 단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만으로도 완전히 헝클어져버릴 수 있다는 것을. 김광석의 〈기대어 앉은 오후에는〉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 아름다운 노래는 “그대로 인해 흔들리는 세상”이라는 치명적인 가사로, 안 그래도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들의 멍든 가슴을 다시 한 번 살뜰하게 할퀴어 주었다.

<기대어 앉은 오후에는>
작사 유준열 노래 김광석
창유리 새로 스미는 햇살이 빛바랜 사진 위를 스칠 때
오래된 예감처럼 일렁이는 마당에 키 작은 나무들
빗물이 되어 다가온 시간이 굽이쳐 나의 곁을 떠나면
빗물에 꽃씨 하나 흘러가듯 마음에 서린 설움도 떠나
지친 회색 그늘에 기대어 앉은 오후에는 파도처럼 노래를 불렀지만 가슴은 비어
그대로 인해 흔들리는 세상 유리처럼 굳어 잠겨 있는 시간보다 진한 아픔을 느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는 그저 평화롭다 못해 권태로웠던 세상이, 우리가 돌이킬 수 없는 영혼의 상처를 입었을 때야, 비로소 조금씩 그 투명한 속살을 보여준다. 절대로 나을 것 같지 않은 상처, 그렇게 지독한 상처의 틈새로만 간신히 보이는 세계의 투명한 아름다움. 그것을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풍크툼’이라고 불렀다. 명쾌하게 분석될 것만 같은 세계가 어느 순간 전혀 해독할 수 없는 상형문자로 바뀌어 버릴 때.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풍크툼’과 만나는 순간이다. 풍크툼(punctum, 점点)은 라틴어로 뾰족한 물체로 인해 받은 상처, 흔적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사진의 풍크툼은 평온했던 나의 의식을 찌르는,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극을 주는 우연하고 돌발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풍크툼의 특징은 물론 예리한 ‘아픔’이지만, 풍크툼의 더욱 중요한 특징은 그 상처가 이해할 수 없고 분석할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예비하거나 대처할 수도 없고, 정리해서 요약할 수도 없다는 데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이 세계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표정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음을 느낀다. 그토록 이해되지 않았던 세상이, 누군가의 참혹한 죽음으로 인해, 비로소 투명하게 만져지는 느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의 고통을 명징하게 ‘표현’할 수 없다. 그 고통에 딱 어울리는 이름을 붙여줄 수도 없다. 사진 읽기를 통해 세계의 울퉁불퉁한 상처를 맹렬하게 더듬었던 롤랑 바르트. 그는 사진의 이미지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했다. 스투디움과 풍크툼. 스투디움(studium)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일반화된 상징이라면, 풍크툼은 좀처럼 해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아픔을 낳는 상징이다. 스투디움이 소통 가능한 획일적인 상징이라면 풍크툼은 소통 불가능한, 그리하여 더욱 소중한 비밀을 간직한 상징이다.
견고하게만 보이던 이 세계의 피부가 찢어질 때, 우리가 그 속살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가장 평등한(?) 경험은 바로 연애가 아닐까. 중국의 작가 장아이링은 소설 『색, 계』에서 이런 문장을 남겼다. 남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위장으로 통해 있고, 여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자의 음도(陰道, 질)를 통해 나 있다고. 남자는 먹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해주는 여자를 만나면 쉽게 마음을 빼앗긴다는 말이니, 남자 쪽의 사정은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런데 정말 여성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길은 너무도 비좁고 은밀한 그곳, 성기를 통해야 하는 걸까. 소설 『색, 계』의 주인공 장 지아즈는 사랑에 빠지기 전에는 그따위 말을 믿지 않았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저명한 학자였기 때문에, 그런 대단한 학자가 여자의 심리에 대해 그토록 저속한 비유를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한 번도 제대로 연애를 하거나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었던 장 지아즈는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이 죽음으로 몰아넣어야 할 대상과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4년에 걸쳐 공들여 쌓아온 탑이 무너질지도 모르는데, 이 일로 인해 그녀와 조직원들 모두가 죽음의 위험에 빠질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위태로운 사랑에 빠져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그와의 잠자리는 분명히 철저한 ‘연극’에 불과했다. 그녀의 두뇌는 완벽히 임무에 충실했다. 그런데 그 남자는 그녀의 두뇌가 아니라 그녀의 성기를 통해 몰래 잠입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비상구를 결코 찾지 못했다. 〈와호장룡〉과 〈브로크백 마운틴〉의 감독 리안은 영화 〈색, 계〉를 통해 21세기 영화사에서 가장 슬픈 섹스 장면을 연출해냈다.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울 것 같은 한 남자와 세상에서 가장 상처받기 쉬울 것 같은 한 여자가 만났다. 도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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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9-07-16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제가 가장 좋아하는 김광석의 노래가 인용되고 있어서 초반부터 기대가 됩니다...1절이 끝나고 나오는 기타 간주가 생각나네요.(몇가지 버전이 있긴 하지만..)

비로그인 2009-07-16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위장을 통해 나 있고, 여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음도를 통해 나 있다"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다음 회가 무지 기대되네요. 화이팅!

바이런 2009-07-16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넘 흥미로운 분석이네요. 저도 <색,계>를 봤지만.. 양조위와 사랑에 빠져버리는 여자를(조직(?)을 배신하면서까지;)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는데..롤랑바르트의 개념들도 배우고.. 좋습니다, 이글. 앞으로도 기대할게요~

책든손귀하다지만 2009-07-16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
=연애
=상처
=세상을 보는 눈

인가요? ㅋ

doingnow12 2009-07-18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생각을 가진 누구의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되네요^^
앞으로도 많이많이 기대할게요(>_<)꺄아 ♥

someday 2009-07-20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문학 잡지에서 영화 관련 글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런 기회에 작가를 더 자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반갑네요.

목나무 2009-07-23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여울님.. 지인의 추천으로 이 블로그를 알게 되었습니다.
섬뜩하지만 재미난 글 잘 보고 다음 글로 고고씽 합니다. ^^

sotkfkd 2009-09-12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광석의 노래로 시작하여 롤랑 바르트를 거쳐 색계를 이야기하시는 내용이 참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잘 읽었습니다. 색다른 방법의 영화 읽기. 오늘 다 읽어 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