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의 테러리스트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양들의 테러리스트>를 다시 읽었다. <올림픽의 몸값>으로 나온 두 권의 책을 하나로 묶었다. 소감은 여전히 재밌다. 동시에 올해 열린 예정인 도쿄올림픽이 떠올라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때는 1964년. 전후 일본의 부흥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개최한 아시아 최초 올림픽이 동경에서 열린다. 테러리스트의 전갈이 오면서 경찰은 총 긴장상태. 도대체 어떤 자식이야? 쫓고 쫓기는 심리 추격적인 불꽃을 튀기 시작한다. 


일본은 올림픽을 계기로 선진국 대열에 올랐다. 그 여세를 몰아 70, 80년대 격동의 성장을 겪은 후 90년대 절정에 이르게 된다. 모든 게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던 시대였다. 동경의 땅을 팔면 미국을 몇 개나 살 수 있다고 떵떵 거렸다. 


버블은 꺼지고 민낯이 드러나자 자신감은 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옛 영화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경기는 더욱 나빠지고. 사람들이 조급해지자 극우파가 득세했다. 아베는 위대한 일본을 되찾자며 수상을 두 번씩이나 하게 되고. 


<양들의 테러리스트>는 좋았던 일본에 대한 향수가 짙게 배어있다. 경찰이든 테러리스트는 다들 열정에 휩싸여 찐하게 삶을 살았다. 히데오는 알게 모르게 그런 감정을 자극한다. 모두가 하나같이 개인주의자가 되어 개인의 안일에 젖어 불의를 외면할 때 돈키호테처럼 정의를 부르짖는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귀하고도 귀한 존재가 되었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으신 분들이라면 같은 작가가 쓴 <남쪽으로 튀어>도 함께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쟁사회에는 당신에게 두가지 선택만을 강요한다. 

하나는 그냥 패배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이기고자 한다면 변화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떠한 대책도 욕망을 거스르지는 못한다


제로-섬은 누군가의 이익이 다른 이에게는 피해가 되어 영(O)이 되는 상태를 말한다. 레스터 써로 교수가 <제로-섬 사회>라는 책에서 나온 말이다. 로또를 예로 들어보자. 복권은 주최 측의 비용을 제외하고 다수의 패배자들로부터 돈을 모아 소수의 승리자에게 몰아준다. 곧 당첨된 사람의 행복은 수많은 이들의 피땀눈물로 이로어진 것이다. 주식도 마찬가지다. 레스터는 성장이 멈춘 사회에서 어떤 정책을 펼칠 때 나타나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문제뿐만 아니라 계층적 고려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자(2020년 2월 22일 토요일) 한국일보에서 제로-섬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한국의 부동산 시장을 빗대어 본 것이다. 박원갑 국민은행 부동산 전문수석위원은 광풍의 진원지인 30대에 주목했다. 곧 상대적으로 젊은 층이 무리해서라도 집을, 구체적으로 서울의 아파트먼트를 사고 있다. 동시에 어느새 노년층에 접어든 베이비부머들도 집을 줄이거나 외곽으로 빠지지 않고 고스란히 고수하려고 한다. 요컨대, 서울의 아파트먼트는 젊은 세대든 늙은이든 모든 경제연령층이 선호하는 투자 상품이 되었다. 


전문위원은 아파트먼트가 이렇게 인기가 있는 이유를 세 가지로 들었다. 첫째, 비교적 간단한 가치저장수단이다. 곧 표준화 규격화되어 있어 환금성이 좋다. 둘째, 편의를 극대화한 공간이다.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그만이다. 셋째, 복합공간화되고 있다. 단지를 형성함으로써 폐쇄적 커뮤니티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은 역설적으로 독이 되기도 한다. 제로-섬 이론에 따르면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한탄을 하고 있다. 소수자들만의 카타고리를 만들어 진입장벽을 높게 쌓아 아예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한다. 아무리 현 정부가 아파트먼트 값 때려잡기에 나서도 소용이 없는 이유다. 어떠한 대책도 욕망을 거스르지 못한다.


개인적으로는 제로-섬을 넘어 아파트먼트가 과연 인간다운 주거인가에 큰 의문을 갖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살고는 있지만 땅을 밟지 못하고 공중에 붕 떠서 하루의 많은 시간을 보내는게 신체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아파트먼트에서 나고 자란 세대에게는 꼰대 같은 소리일지는 모르겠지만 주택에서도 살아본 경험에 따르면 아무리 불편해도 그쪽이 훨씬 나았다. 


정작 큰 불만은 아파트먼트의 가격이 합당한 가치를 갖고 있는가이다. 현재 서울 일부 지역의 집값은 환상재에 가깝다. 사람들의 욕망이 투사된 허영재라는 말이다. 누군가는 그런 상품에 눈독을 들이겠지만. 흥미로운 건 양극화될수록 틈새는 더욱 커진다는 사실. 곧 아파트먼트와 허름한 집 양갈레로 나뉘다 보니 교통이나 입지가 불편한 지역에 의외로 좋은 주택들이 꽤 있다. 이런 집들은 규모의 경제를 누리지 못하니 당연히 시간이 지날수록 감가상각이 발생하고 유지비도 꽤 들지만 오히려 이런 약점들 때문에 주변 자연환경은 더욱 좋다. 가격도 적당하고. 


써로 교수의 말처럼 패배자가 되기는 싫으니 변화를 선택하려고 한다. 좋은 쪽으로. 오늘 집을 보러 간다. 대상은 주택이나 빌라다. 부동산 중개사에 연락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만 살필 생각이다. 이번만큼은 제발 아파트먼트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기사 출처: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2002201486735758?NClass=HB01


사진 출처: https://alchetron.com/Lester-Thurow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모든 책임은 정부가 져야 


서양에서는 웬만큼 친해진 사이라고 해도 말해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이 있다. 정치와 종교가 그것이다. 이 둘은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집단적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든 충돌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오늘은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매우 조심스럽게.


그동안 우리나라는 이 문제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웠다. 우선 정치는 역설적으로 전쟁으로 인해 갈등이 완화되어 왔다. 완전히 다른 정치이념을 지닌 두 체제가 한 나라에 세워짐으로써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이 활개 치기 어려웠다. 곧 북한에서 반공주의가 남한에서는 사회주의가 자리 잡을 수 없었다. 물론 중간 중간 꿈틀거리기는 했지만 곧바로 철저하게 짓밟혔다. 


종교는 또 다른 이유로 평화로웠다. 한국에서 종교는 제대로 권력을 잡아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정권의 조력자에 불과했다. 유럽처럼 교황이 최고자리에 올라 황제를 위협하는 현상은 없었다. 다시 말해 종교는 정권에 협력함으로써 그 위세를 이어왔다(주관적인 의견임을 밝힙니다). 그러나 이러한 억지 협정은 언제든 금이 갈 우려가 있다. 종교간 분쟁이 그것이다. 구체적으로 같은 종교 내에서 다툼이 벌어진다. 기독교에서의 이단논쟁이나 불교에서의 종파분쟁이 그것이다. 


신종 코로나가 기세를 꺾는 듯 하더니 무더기 확진자가 나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하룻밤 사이에 50여 명 이상의 양성반응자가 나온 것이다. 감염자는 특정 종교 신도였다. 그는 검사를 무시하고 예배는 물론이고 다중이용시설을 활개 치며 다녔다. 그 결과 대구경북지역이 거대한 발원지가 되고 말았다. 우선 가장 큰 책임은 개인이다. 그렇다고 그가 속한 종교단체를 옹호할 수는 없다. 집단발원이 가능한 여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더욱 큰 문제는 새로운 종교간 분쟁으로 번질 우려가 크다. 하필 평소에도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눈엣가시였기에 먹잇감으로는 충분하다. 


그러나 특정 종교단체나 신도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쓸 수는 없다. 경로추적을 해봐야하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제공자를 차단했어야 옳았다. 다소 공격적이더라도 초기에 중국인 입국을 한시적으로라도 제한했어야 맞았다는 말이다. 이미 지역사회 전파가 시작된 지금은 감염추적 자체가 어려워졌다. 개인의 부주의나 종교 간에 서로 손가락질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우한봉쇄처럼 대구경북지역이 폐쇄될지도 모르는 상황 아닌가? 정부는 잘 대처하고 있다는 자화자찬을 할 때가 아니다. 영남지방뿐 아니라 강원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 저는 무교이며 어떠한 종교에도 악감정이 없습니다. 다만 종교 활동이 사회법규와 부딪칠 때 우선순위는 언제나 규범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오해 없이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위아래 폴더 폰의 두가지 모델


내 휴대전화는 투지다. 일명 슬라이딩 폰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해당 통신사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확인해보니 2003년에 가입했다. 쓰던 전화기가 물이 차서 동네 근처 대리점에서 싸고 편한 걸 추천받아 산 기억이 난다. 아직껏 이 전화를 쓰고 있다. 물론 우여곡절이 많았다. 몇 번이나 고장이 나고 물에 잠겨 못 쓸 지경에 이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결국 작년에 수명을 다했다. 수리점에 갔더니 부품이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바꿔야지 생각하고 혹시 하는 생각에 중고 휴대폰 온라인 매장을 뒤졌는데 놀랍게도 같은 기종이 있었다. 그래도 번호는 바꿔야겠지라고 아쉬운 마음으로 매장을 찾았다. 그곳에서도 번호는 바꿔야 한단다. 서운했다. 분신과도 같았는데. 그런데 이게 웬일. 연결을 해보니 정상 작동. 곧 019를 교체하지 않아도 된다는. 


머리말이 길었다. 이래봬도 난 얼리 어댑터다. 전자제품을 포함하여 새 물건이 나오면 요모조모 살펴보길 좋아한다. 그럼에도 휴대전화를 스마트폰으로 바꾸지 않는 이유는? 딱히 불편함이 없어서다. 휴대용 태블릿을 들고 다니니까 인터넷 접속에 대한 불만이 없고 카톡도 하지 않으니 상관이 없다. 정 급하면 노트북도 있고. 내게 전화란 통화와 문자만 잘되면 그만이다. 통신료도 싸고. 


그러나 최근 들어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 그동안 내가 스마트 전화기를 외면한 이유는 기능 때문이 아니다. 디자인이 문제였다. 막대형을 벗어나지 못하는 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단 넣고 다닐 수가 없다. 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을 때는 코트 안에 두거나 바지 뒷주머니에 꽂을 수밖에 없는데 이게 진짜 불편하다. 게다가 점점 더 커진다. 참고로 지금 내가 쓰고 있는 폰은 손안에 딱 들어는 사이즈이기 때문에 지니고 다니기 편안하다.


폴더 폰 출시는 이런 고정관념을 깨는 일대 사건이다. 처음에 좌우로 접히는 폰이 나왔을 때만해도 여전히 벽돌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위아래로 접히는 전화기를 보자마자 이건 진정한 폴더 폰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일단 기존 휴대전화의 디자인을 깼다는 점이 돋보이고 무엇보다 접었을 때 콤팩트함이 살아 있다. 얼핏 보면 여성용 파운데이션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물론 문제도 많다. 좌우폴더와 달리 고리가 있어 내구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배터리 부족, 화면 주름, 긁힘 현상,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격이 사악하다. 즐겨보는 뉴욕 타임스 과학 칼럼니스트 브라이언 챈도 같은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폴더 폰을 차세대 휴대폰이라고 보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더 넓은 크기, 대용량, 얇은 사이즈를 지향하는 휴대폰 역사를 빗겨나간 변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브라이언은 위아래 폴더 폰이 치명적인 매력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바로 휴대성이다. 곧 쓰지 않을 때는 접어서 편리하게 갖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는 펼쳐서 사용할 수 있다. 마치 휴대용 초미니 노트북처럼. 나도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래서 설레면서도 두렵다. 20년 가까이 내 곁을 지켜온 슬라이딩 폰과 이별하게 될까봐. 


폴더폰 관련 브라이언 챈의 기사 : iht.newspaperdirect.com/epaper/viewer.aspx


사진 출처: 아이티 조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보닐라 아 라 비스타'  감자 칩. 도대체 어떻게 발견한 걸까? 나는 보면서도 몰랐는데. 

찾아낸 관객이나 숨기듯 배치한 봉준호 감독이나 모두 대단하다. 


독일 애들이 소시지만 먹는 게 아니구나


미국 영화를 보다 길거리 건물에 걸린 골드 스타 광고를 보고 환호했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이었는데.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4개나 타면서 후폭풍이 거세다. 비단 한국만 그런 게 아니다. 미국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에서도 난리라고 한다.


재미있는 건 과거 우리나라에서 보던 현상이 비슷하게 재현되고 있다. 예를 들면 영화에 나온 특정 상품이나 삽입된 음악 등을 콕 집어내 해당 국가에서 환호한다. 일단 우스우면서도 서글픈 가족 들 간의 싸움에 나온 노래는 이태리 가수 잔니 모란디가 부른 In ginocchio da te(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였다. 잔니는 자신의 노래가 실린 영화가 오스카상을 받았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꼈다고 인터뷰까지 했다. 제시카 징글로 불리는 '독도는 우리 땅'의 개사도 세계적인 사랑을 받으며 수많은 패러디를 낳고 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예상 가능한 반응이다. 짜파구리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러나 부자 가족 집에 놓인 20만 원짜리 쓰레기통이나 스페인 산 감자 칩을 발견하고 주문이 폭발하는 건 뜻밖이다. 더 나아가 별 의미 없이 내뱉은 '독일 애들이 소시지만 먹는 게 아니구나'라는 대사에 독일 극장 관객들이 대폭소를 터뜨리고 대만 카스테라 에피소드에 대만 내 관련 가게들의 매출이 덩달아 늘어나다니. 최근엔 영화에 삽입된 피자 박스 접기 달인 동영상의 주인공을 찾아내 온라인에서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이 모든 현상이 단순히 아카데미 덕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내 생각에는 두 가지 이유가 대표적이다. 하나는 한국의 위상이 그만큼 올라간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인터넷으로 하나 된 세상에 언어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어서다. 아이러니컬하다. 우리는 헬 조선이라고 부르는데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한국을 부러워하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도 그런 때가 있었다. 이른바 선진국의 모든 것들이 좋아 보였다. 자주 갈 수 없으니 아니 특별한 소수만 제외하고 한국 탈출 자체가 힘들었으니 동경의 염원은 더욱 강했다. 여하튼 기생충이 큰일을 했다. 


사진 출처: 와이티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